#484화
“시간을 끌어야 합니다.”
처용이 생각을 이으며 말을 이었다.
이미 문제는 발생한 상황.
잘잘못과 원인을 따지기 전에, 작금의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처용은 작금의 상황에서 활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생각했다.
지금 있는 장소의 특징.
활용할 수 있는 전력.
당장 가용 가능한 수단.
적들의 전력과 수, 그들이 각각 가진 특기들이 무엇인지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고려하고 모든 가능성을 판단한다.
그리고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낼 방법을 모색한다.
하지만, 떠올린 방법을 실행하기 전에 한 가지 확인할 문제가 있었다.
“방법을 논하기 전에-.”
-스르릉.
처용이 역천의 절을 뽑아 들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누구를 따를 것인가?”
적대감과 경고가 일렁이는 목소리가 향한 대상은 다름 아닌 어린 드래곤들이었다.
작금의 상황은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 봐도 무방했다.
자칫 판단을 잘못하여 실수가 생긴다면, 최악의 결과가 벌어진다.
가장 최악의 경우를 논하자면 유르티나, 혹은 루비아의 죽음이었다.
헤츨링 또한 살려야 했다.
유르티나에게 있어서 목숨만큼이나 중요한 존재였으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 ‘배신’이 일어나는 상황만큼은 미리 방지해야 했다.
드래곤 로드의 직계인 비크라가 배신자일 가능성은 현저히 적었다.
그러나 나머지 둘은 레드 드래곤과 그린 드래곤.
특히 그린 드래곤의 장로가 배신자로 밝혀진 상황, 두 어린 드래곤이 확실한 아군인지 확인해야만 했다.
“용언에 맹세컨대, 나는 바하무트 님을 따른다.”
-우우웅.
비크라가 처용이 하고자 하는 말을 눈치채고는 옅게 드래곤 포스를 내뿜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드래곤들이 맹세하는 서약의 일종인 용언의 맹세.
간단하게 말하자면, 신들의 서약인 신명의 맹세와 비슷했다.
비크라는 용언의 맹세로 자신의 정직함과 진실됨을 입증했다.
동시에, 두 드래곤을 응시하며 그녀들이 장로의 스파이가 아니기만을 바랐다.
만약, 장로의 명을 따르는 스파이라면, 용언의 맹세를 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비크라의 불안한 마음이 기우였다는 듯.
“나 역시 용언에 맹세한다.”
“나도 용언에 맹세한다.”
두 어린 드래곤, 마티네아와 가네리아가 용언의 맹세를 하며 배신자가 아님을 입증했다.
“나는 이 아이들이 태어날 때부터 봐 왔었다. 이 아이들만큼은 믿는다.”
유르티나 어린 드래곤들을 눈짓하며, 그들을 믿는다고 말했다.
추가로.
“그리고 이 아이들은 데이베른 장로를 따르기엔 너무 어리다. 그자가 보호의 징표를 이용하려고 한 건 즉흥적인 판단일 것이다.”
데이베른은 갓 헤츨링을 벗어난 어린 드래곤들을 스파이로 삼을 기회가 없었다.
또 그는 어린 드래곤들을 깔보는 성향이 있었다.
유르티나는 그런 그가 어린 드래곤들을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은 현저히 적다고 판단했다.
“좋다. 너희를 믿지.”
처용은 용언의 맹세를 확인하고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믿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은 위험한 상황이다. 틈을 봐서 도망치는 방법도 있다.”
어린 드래곤들을 향해, 정말로 같이 싸울 것인지 그들의 의지를 물었다.
지금부터 신과 맞서 싸워야 했다.
아직 어린 드래곤들인 그들의 입장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무시하지 마라.”
“우리는 드래곤이다.”
비크라를 포함한 어린 드래곤들이 싸울 의지를 내비쳤다.
“패기가 마음에 들어.”
처용은 비크라와 어린 드래곤들이 보이는 용기에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너희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지금부터-.”
진지한 목소리로 어린 드래곤들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나 혼자라면 힘들었겠지만.”
“우리 셋이 힘을 합하면 충분하다.”
처용의 말에 어린 드래곤들이 자신감을 드러내며 말했다.
“좋아.”
어린 용들의 대답에 처용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루비아.”
이번엔 루비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말해.”
루비아가 진지한 목소리로 답하자.
“드래곤 슬레이어들을 맡기지.”
처용이 루비아가 해줘야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말해 주었다.
루비아는 드래곤의 힘을 지닌 쿼터.
드래곤의 힘을 지니고 있기에 드래곤 슬레이어들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너, 알고 있었구나?”
루비아는 처용는 처용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
“하프와 쿼터는 온전한 드래곤이 아니기에 법칙의 제약에서 일부 벗어난다.”
처용이 루비아를 보며, 왜 그녀가 드래곤 슬레이어들을 맡아야 하는지 이야기했다.
온전한 드래곤은 천적인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사용하는 법칙의 힘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용기사와 루비아는 달랐다.
온전한 드래곤이 아니었기에 그들은 법칙의 제약에서 일부 자유로웠다.
용기사가 세계를 방랑하며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드래곤 슬레이어들과 신들이 용기사와 루비아를 ‘죄인’이라 칭하며 핍박한 진짜 이유였다.
게다가.
“넌 쿼터이니만큼, 법칙의 제약에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아.”
루비아는 하프가 아닌 쿼터.
그 이유 때문인지, 그녀는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가하는 법칙에 완전히 벗어난 존재였다.
지금까지는 영향을 받는 척, 그들을 속여 왔지만.
“이젠 숨기지 마, 놈들을 모조리 없애 버려.”
이제는 그 사실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이들을 지켜, 놈들과 맞서 싸워.”
-우웅. 탁.
처용이 루비아에게 얼마 전 빌려주었던 ‘갤럭시 오브 스태프’를 건네주며 말하자.
“좋아, 알았어.”
-탁.
루비아가 처용이 건넨 스태프를 받고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유르티나 님.”
처용이 마지막으로 호명한 이는 바로 이 레어의 주인.
-화아아!
[내가 무엇을 하면 되느냐?]
유르티나가 본래의 모습, 거대한 실버 드래곤으로 변하며 말했다.
폴리모프 상태에서는 본래의 힘의 절반 정도밖에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 성역, 튼튼하겠죠?”
처용이 전투를 준비하는 유르티나를 보며 묻자.
[레어의 내구도를 말하는 것이라면, 그렇다.]
유르티나가 의문을 드러내며 답했다.
그 말에 처용이 잠시 생각에 잠기고는.
“놈들이 입구에 도달하는 데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유르티나에게 가장 중요한 정보를 물었다.
지금 외부에서 이 공간을 단절시키는 결계를 씌우고 레어에 침입하려는 놈들.
그들이 레어의 내부로 들어서기까지 얼마나 걸릴 것인가?
-쿠구구…….
지금도 미세하게 진동이 울리고 있는 중이었다.
에인션트급 드래곤의 성역이니만큼, 쉽게 뚫리지는 않는 듯 보였지만, 시간문제였다.
[반 시간 정도면…… 침입자들이 나타날 것 같다.]
유르티나가 진지하게 생각하고는 대충 예상되는 시간을 말하자.
“30분…… 저도 그쯤 생각했습니다.”
처용이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적들이 레어 내부로 도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30분.
짧다고 할 수도 있는 시간이었지만.
‘다행히, 여유 시간이 있다.’
처용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30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일어날 전투가 쉬워질 수도, 최악이 될 수도 있었다.
이 황금 같은 시간 활용해서.
“지금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합니다.”
이곳에 쳐들어올 적들에 대한 대비를 든든하게 갖춰야 했다.
“일단, 함정부터 준비하죠. 가장 먼저-.”
처용은 유르티나를 향해 무엇을 준비할지를 차근차근 이야기함과 동시에.
“긴급한 상황이니, 레어 안에 구비된 물품들 좀 사용하겠습니다.”
-우우웅.
곳곳에 진열된 각종 광물들에 강기를 부여하며 말을 이었다.
[이 안에 있는 모든 걸 사용해도 좋다. 나도 돕지.]
유르티나가 처용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처용은 유르티나의 적극적인 협조에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단 한 명도 죽지 마라.”
진지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단 한 명도 죽지 말라는 읊조리는 듯 내뱉는 명령.
회귀 전, 저항군의 대장이었던 처용이 어려운 전투에 임할 때마다, 간혹 입버릇처럼 내뱉던 말이었다.
진지한 의미가 담긴 처용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얼마나 기다려야 되는 거지?]
아레스가 은빛으로 일렁이는 벽을 바라보며 짜증 어린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기다리는 데 지친 듯, 독촉하는 듯한 목소리에.
[조금 기다리시오.]
조제군이 진지한 목소리로 은빛을 결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그의 앞에는.
-치지지지! 치지직!
검고 불길한 기운이 나선으로 휘몰아치며 은빛의 벽을 갉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검은 기운의 소용돌이 주변에는.
-우우웅. 우웅.
다섯 명의 검은 별이 신력을 흘려보내며 힘을 보태고 있었다.
[이제 곧 성역의 틈이 찢어질 것이오.]
-우웅. 스르륵.
조제군 역시 이에 힘을 보태며 아레스를 향해 말을 이었다.
본래라면, 두 배는 빠른 속도로 실버 드래곤의 성역을 뚫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을 외부에서 눈치채는 일이 없도록 은밀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드래곤 로드가 이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이 일은 실패로 돌아갈 테니까.
게다가.
[은밀하고 섬세하게 입구를 여느니만큼, 놈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가능성도 있지요.]
성역의 입구 찢는 작업을 조심스럽게 진행하느니만큼, 적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다면, 먼저 기습할 기회 또한 얻을 수 있었다.
[이번 기회에 실버 드래곤을 얻어야 할 뿐 아니라, 그 변종도 처리해야 하오.]
[그건 내가 책임지고 이행하겠다.]
조제군의 말에 아레스가 이를 아득바득 갈며 분노를 담아 말했다.
-그 빌어먹을 변종이 실버 드래곤과 함께 있다.
협력자에게서 실버 드래곤의 레어 위치를 전달받음과 동시에, 추가로 받은 정보.
바로 실버 드래곤과 처용이 함께 있다는 정보였다.
[그 건방진 하계종은 내가 직접 죽여 버리겠다.]
아레스를 포함한 악신들은 이번 기회에 실버 드래곤을 확보하고 처용을 처치할 기회로 여겼다.
아무리 처용이 뛰어난 인간이라 해도, 고작 해 봐야 인간.
실버 드래곤의 성역은, 신의 영역이니만큼, 악신들 역시 본신에 가까운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뛰어난 인간이라고 해 봐야, 화신체가 아닌 본신 상태의 신은 이길 수 없다 판단했다.
이윽고.
-파지지직!
은빛의 벽이 검은 기운에 갈려 점차 갈라지기 시작했다.
기회를 잡은 듯, 휘몰아치는 검은 신력의 소용돌이가 회전력에 더 빨라졌고.
-치지직!
마치, 드릴로 터널을 만들어 낸 듯, 은빛의 벽에 거칠게 뚫린 듯한 구멍이 생겨났다.
레어의 입구가 모습을 드러내자.
[나는 입구를 지키지.]
조용히 있던 아폴론이 아레스와 아르테미스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샥! 샤샤샥!
아폴론과 두 명의 검은 별을 제외한 모두가 일제히 성역의 입구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반구형의 터널, 실버 드래곤의 레어 입구가 나타났다.
그 순간.
“우린 손님을 부른 적이 없는데 말이야?”
레어에 침입한 이들에게서 낮고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향하자.
“반갑다. 이 불청객 새끼들아.”
긴 터널의 중앙에 팔짱을 낀 채 미소를 짓고 있는 처용의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그 뒤.
[……!]
거대한 방석이 보이는 터널의 끝 방.
그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만 채, 적대 어린 눈빛을 지어 보이는 실버 드래곤의 모습도 보였다.
[이 하계종 새끼……!]
-스르릉.
아레스가 살기 어린 눈빛을 번뜩이며 검을 뽑고 방패를 치켜들었다.
본래 그의 성격대로라면, 바로 달려들었어야 했지만.
[…….]
그저 살기를 피워 올린 채, 잠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내가 신호를 보내면, 놈을 죽여.]
아레스의 머릿속으로 아르테미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어의 입구를 따라 쭉 세워진 기둥들.
아레스 뒤편에 세워진 기둥 뒤에는.
-지이이-!
기척과 모습을 완전히 숨긴 아르테미스가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었다.
화살촉이 가리키는 방향은 터널 중앙에 서 있는 처용이 아니었다.
바로 터널 끝에 보이는 목표물, 실버 드래곤이었다.
-우웅. 스르르륵.
달빛과 어둠이 섞인 신력이 화살촉에 모여들었다.
기척을 숨긴 사냥의 여신이 쏘아 보내는 저격.
지금까지 사냥한 드래곤들 대부분은 이 기습 한 번에 치명상을 면치 못했다.
[지금이다.]
저격 준비를 마친 아르테미스가 아레스에게 신호를 보내자.
[이 하등한 벌레 새끼! 찢어 죽여주마!]
-쐐에에! 샥!
아레스와 그 주변에 있던 세 명의 검은 별, 조제군이 처용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처용의 앞에 쇄도한 아레스가 검을 내지르자.
-푸화악!
처용은 피하지 못하고 아레스의 검에 가슴이 꿰뚫렸다.
-푹! 푸부북!
뒤이어 공격을 가한 검은 별들 역시 검은 신력으로 창과 칼날을 만들어 처용을 공격했다.
[이 빌어먹을 하계종을 처리했다.]
조제군이 미소를 지어 보였고 처용이 당한 듯 보일 때.
-지이익!
활시위를 강하게 틀어쥐며 거세게 당긴 아르테미스가 실버 드래곤을 향해 활을 발사하려 했다.
그 순간.
-피이잉! 피잉!
아르테미스의 귀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리며 얇고 검은 선들이 사방에서 솟구쳤다.
동시에.
“반갑다 이 쌍년아.”
바로 뒤에서 처용의 살기 어린 목소리가 울려왔다.
[뭣-!?]
아르테미스의 입이 열리고 눈동자가 뒤로 돌아가기도 전에.
“암영철사궤(暗影鐵絲櫃).”
-촤아!
처용이 펼쳤던 손아귀를 강하게 쥐고 당기며, 미리 설치해 둔 함정을 발동했다.
-피이이! 피이! 촤라라락!
아르테미스 주변에 솟구친 얇고 날카로운 검은 선들.
미세한 톱날이 세워져 있는 얇은 철사들이 아르테미스를 향해 조여들었고.
-싸가각! 싸각!
얇은 칼날에 고깃덩이가 썰려 나가는 듯한 날카롭고 싸늘한 소음이 울렸다.
-푸화악!
그로 인해 아르테미스의 육체가 조각조각 썰려 나가며 사방에 피를 흩뿌렸다.
그리고.
-탓. 후둑!
썰려 나간 아르테미스의 위로 처용이 나타나며 위로 솟구쳤던 아르테미스의 머리를 잡아챘다.
“아 본신 상태의 성좌라 그런가.”
처용이 손아귀에 잡힌 아르테미스의 머리를 들어 보이고는.
“피 맛이 달달하네. 크흐흐.”
-스르르륵.
포확으로 주변에 흩뿌려진 아르테미스의 시체 조각들을 빨아들이며 잔혹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이게 무슨 일-!?]
아레스와 검은 별들이 경악을 내비쳤다.
그 순간.
“같은 수법에…….”
아레스와 조제군, 검은 별들에게 공격을 당한 처용이 입을 열었다.
“세 번 당하는 병신 새끼.”
처용의 말이 끝난 순간.
-피이! 콰아아아아!!
강렬한 빛이 처용에게서 뿜어져 나왔고 검은 폭풍을 불러일으키며 터져 나갔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