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홀로 계승자-482화 (482/726)

#482화

-후우우!

처용과 루비아, 어린 드래곤들을 감싼 은빛이 사라지고.

-스르륵.

점차 새로운 환경이 눈앞에 드러났다.

거대한 덩치의 드래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을 법한, 넓은 반구형의 터널.

터널 사이사이에는 거대한 방으로 보이는 입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남아 봤자 눈초리만 받을 것 같기에, 너희들도 함께 데려왔다.]

실버 드래곤, 유르티나가 비크라를 향해 말하자.

[감사합니다. 고귀한 실버 드래곤이시여.]

비크라가 유르티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갓 헤츨링을 벗어나 독립한 어덜트급 드래곤은 아직 자신들만의 레어가 없었다.

그들은 바하무트가 만든 드래곤들만의 공용 성역 안에서 지냈다.

어덜트급 드래곤들이 웜급에 도달해야만 공용 성역을 벗어나 개인적인 보금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유르티나가 아직 집 없는 어린 드래곤들을 데려온 이유는 처용이 생각한 것과 같았다.

어른들과 함께 있어 봐야, 좋은 시선을 받지 못할 테니까.

루비아 역시 마찬가지의 이유로 함께 데려왔다.

그리고.

[계승자, 이야기로만 들어 봤지, 이렇게 직접 마주하게 될 줄이야.]

유르티나가 자신의 레어로 초대한 마지막 사람, 처용을 바라보며 말했다.

호기심이 일렁이는 유르티나의 맑고 잔잔한 목소리에, 처용이 고개를 들어 실버 드래곤을 바라봤다.

먼지 한 톨 보이지 않는 깔끔한 빛이 일렁이는 은색의 비늘.

다른 에인션트급 드래곤들보다 조금 작은 듯 보이는 유려하고 날씬한 체형.

은빛으로 흩날리며 빛을 내는 속눈썹 아래로 빛나는 황금빛의 눈동자.

‘유르티나 바하무트.’

처용의 눈앞의 실버 드래곤을 마주하며 속으로 읊조렸다.

유르티나는 바하무트의 자녀들 중, 유일한 단 한 명의 실버 드래곤이었다.

드래곤들 사이에서도 골드 드래곤과 동급으로 고귀한 취급을 받는 존재.

그것이 그녀가 골드 드래곤이 아님에도 바하무트의 이름을 부여받은 이유였다.

‘오랜만입니다. 유르티나.’

유르티나에 대해 생각한 처용이 속으로 그녀를 향해 복잡한 감정이 실린 인사말을 건넸다.

회귀 전, 처용과 신수의 계약을 맺었던 에인션트급 드래곤.

그 드래곤이 바로 눈앞에 있는 실버 드래곤, 유르티나였다.

처용은 바하무트의 성역에 발을 들였을 때, 다른 드래곤들 사이에 있는 그녀를 발견했었다.

당연히 그녀를 보자마자 반가움 마음이 일렁였다.

그러나 사정상, 유르티나에게 반가움을 드러낼 수 없었다.

오히려, 강렬하고 파괴적인 모습을 보였다.

때문에, 유르티나가 자신을 경계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적대감 어린 분위기를 만들었는데…… 먼저 다가올 줄은 몰랐군.’

유르티나가 선뜻, 처용에게 먼저 다가왔다.

그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고맙고 반가웠지만.

“저에 대해서 아실 줄은 몰랐군요.”

처용은 복잡한 감정을 갈무리하고 억누르고는 유르티나를 향해 물었다.

그런 처용의 물음에.

[로드께서 내게 말씀해주신 적이 있다.]

유르티나는 바하무트를 언급하며 대답했다.

그리고.

[일단, 모두 따라오너라. 내일까지 여기에 세워 둘 생각은 없으니.]

앞장서 나아가며 말을 이었다.

모두가 유르티나의 뒤를 따라 움직였고 긴 터널의 끝, 통로에 도달했다.

그 통로를 지나자 보다 넓은 반구형의 공동이 나타났다.

백색으로 발광하는 새하얀 보석들이 곳곳에 박힌 동굴의 공동과 같은 모습.

그 중앙에는 푹신한 털로 만들어진 듯 보이는 넓고 거대한 방석이 놓여 있었다.

아마도 드래곤 형태의 유르티나가 휴식을 취하거나 잠을 자기 위한 장소로 보였다.

외곽 벽면에는 다양한 종류의 책이 진열된 책장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 주변에는 목재로 만들어진 의자와 테이블 등의 가구들이 보였다.

마치, 거인이 쓸 법한 도구와 인간이 쓸 법한 도구가 섞여 나열된 이질적인 모습의 공간이었다.

유르티나의 안내를 받은 이들이 공동에 들어선 순간.

-스륵.

중앙에 놓인 거대한 방석, 그 안에서 새하얀 드래곤의 머리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담한 드래곤의 머리에 달린 금빛의 눈동자가 일행들을 향해 호기심과 경계 어린 눈빛을 보였다.

[괜찮다. 레사나, 어미의 손님들이다.]

유르티나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하자.

-스르륵. 탁.

푹신한 방석 위에서 머리를 내민 드래곤이 미끄러지듯 떨어지며 바닥에 내려섰다.

은빛의 비늘과 몸에 비해 아담한 목과 팔, 다리.

아직 어리다는 것을 드러내는 듯한, 작은 뿔과 오밀조밀한 얼굴.

마치, 유르티나를 2미터 크기로 줄여 놓은 듯 보이는 모습이었다.

드래곤의 기준으로 볼 때, 굉장히 아담(?)한 크기를 자랑하는 어린 드래곤.

헤츨링급 실버 드래곤이자, 유르티나의 자녀 레사나였다.

[유, 유르티나 님…… 헤츨링이 있으셨습니까?]

비크라가 놀란 듯한 목소리로 유르티나와 어린 헤츨링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두 어린 드래곤, 루비아 역시 놀란 듯한 모습을 보였다.

유르티나는 우주에서 단 하나뿐인 실버 드래곤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실버 드래곤의 헤츨링이 유르티나의 레어에서 나타났다?

게다가.

-어미의 손님들이다.

스스로를 헤츨링의 어미로 지칭하는 유르티나의 말까지.

명실상부 두 번째 실버 드래곤이 탄생한 상황이었다.

모두가 놀라움과 신기함을 드러내는 한편.

“외부인에게 헤츨링을 보여도 괜찮은 겁니까?”

처용은 유르티나를 향해 우려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최강의 신수라 일컫는 드래곤이라지만, 새끼, 즉 헤츨링 때는 약했다.

때문에, 헤츨링들은 어덜트급이 되어 독립하기 전까지, 어미 드래곤의 레어에서 지내는 것이었다.

게다가, 유르티나와 같은 실버 드래곤이 탄생한 상황.

눈앞의 헤츨링은 드래곤 일족 전체에게도 아주 중요한 존재라 볼 수 있었다.

그런 우려가 담긴 처용의 말에.

[최초의 관리자, 그분을 따르는 네가 평범한 외부인일 리가 없지 않느냐?]

유르티나가 진지한 목소리로 답하듯 말했다.

“…….”

그 모습을 본 처용이 유르티나와 헤츨링을 번갈아 보며 침묵했다.

왜 유르티나가 지금 시기에 헤츨링을 보여주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하는 듯 보였다.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비크라가 은빛의 헤츨링을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하자.

[숨기고 있었다. 로드와 장로들만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

유르티나가 비크라의 말에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주에서 두 번째로 실버 드래곤이 탄생한 상황.

드래곤들에게 있어 경사였지만, 그만큼 그 헤츨링이 중요했기에 소수만이 알고 있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유르티나의 말이 울렸을 때.

“……그놈도 알고 있겠군요.”

생각을 마친 처용이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경각심이 일렁이는 낮은 목소리.

그 말에 유르티나가 잠시 침묵하고는.

-화아아!

은빛에 휩싸이며 점점 크기가 작아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주변을 밝히던 은빛이 점점 약해지고는.

-탁.

은빛의 긴 머리와 중앙의 푸른 청색의 브릿지가 인상적인, 온화한 분위기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데이베른 장로가 정말로 동족을 신들에게 팔아넘겼다고 생각하느냐?”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유르티나가 근처에 있는 단상으로 향하며 말했다.

“확신합니다.”

-저벅.

유르티나의 물음에 처용이 확신 어린 목소리로 답하고는 그녀를 따라 걸어 나갔다.

수많은 책이 나열된 책장 앞에 넓게 깔린 붉은 카펫.

그 위에 놓인, 중앙에 작은 벽난로가 있는 단상과 단상을 둘러싼 소파들.

유르티나가 자연스럽게 가장 뒤에 있는 자리에 앉자 처용이 맞은편에 앉았다.

이윽고 루비아가 처용의 왼편, 폴리모프한 어린 드래곤들이 오른쪽에 자리했다.

그리고.

-그르릉.

실버 드래곤의 헤츨링, 레사나가 유르티나의 옆으로 다가오며 몸을 둥글게 말아 앉았다.

어미의 옆으로 다가온 헤츨링의 모습을 본 처용이 복잡한 눈빛을 띠었다.

회귀 전,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드래곤은 신수의 계약을 맺었던 드래곤 유르티나가 아니었다.

-부탁이다. 이 아이만큼은-!

유르티나가 드래곤 슬레이어들에게 죽임을 당하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존재.

바로 그녀의 자녀인 어린 헤츨링, 레사나였다.

처용은 유르티나의 간절한 부탁과 함께 맡겨진 어린 헤츨링을 지키려 노력했었다.

하지만, 비열한 적들은 힘없는 어린 헤츨링을 집요하게도 노렸다.

결국, 드래곤 슬레이어들의 수장, 지젤이 내린 잔혹한 명령에 의해.

-법칙을 거스른 이들에게 어울리는 결말이도다!

본 드래곤으로 변이되어 부활한 유르티나가 제 자식을 죽이는 비극이 벌어졌다.

다시금 떠오른 끔찍한 기억에 처용이 잠시 눈을 감고는.

“……제 확신이 정말 확실하다면.”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를 흘리며 눈을 떴다.

“그 배신자가 무엇을 노릴지도 알 것 같습니다만?”

처용이 말을 이으며 유르티나의 옆에 있는 헤츨링, 레사나를 응시했다.

그러자 유르티나의 표정이 굳어졌고 어린 드래곤들과 루비아가 싸늘한 안색을 보였다.

그들 모두 처용이 한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알아챘다.

유르티나는 옆에서 새근새근 졸고 있는 레사나를 불안한 눈빛으로 잠시 바라보고는.

“……계승자로서의 생각인가?”

처용을 향해 물었다.

“배신자들을 사냥하는 사냥꾼의 감이라 말해 두죠. 놈들이 그럴 짓을 저지를만한 증거도 충분하고.”

처용은 유르티나의 물음에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와 눈을 마주하며 답했다.

“으음…….”

유르티나가 처용의 대답에 불안한 침음을 흘려 보였다.

그때.

“아까부터 궁금했습니다만, 도대체 계승자가 뭔가요?”

루비아가 처용과 유르티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궁금증을 표했다.

계승자가 처용을 지칭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드래곤 로드, 바하무트의 성역에 처음 들어섰을 때.

-나 자신을 계승자라고 소개하는 게 정확할 것 같군요.

처용은 바하무트에게 스스로를 계승자라고 이야기했었다.

그 이후 바하무트가 처용을 부를 때면, 항상 계승자라고 불렀다.

게다가 그에 이어 유르티나까지 처용을 계승자라고 지칭했다.

신격에 닿은 인간.

법칙을 거스른 이단자.

마신이라 불리는 존재.

처용을 지칭하는 말은 많았지만, 계승자라는 말은 오늘 처음 들었다.

하지만, 루비아는 이 계승자라는 말이 진짜 처용을 의미하는 말이라 생각했다.

루비아의 물음에 유르티나가 처용을 바라봤다.

마치, 무언으로 의사를 묻는 듯한 모습.

“상관없습니다.”

처용이 어깨를 으쓱이며 유르티나의 무언에 답하자.

“나 역시 로드에게서 전해 들은 말 외에는 알지 못한다.”

유르티나가 과거, 바하무트에게서 들었던 말들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계승자는 우주를 위해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존재, 이렇게 알고 있다.”

“우주를 위한 선택이요?”

루비아가 의문 어린 목소리로 말하자.

“그래, 이 이상은…… 나도 잘 모르겠구나.”

유르티나가 이 이상은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리고.

“너희들을 이곳에 들인 건, 계승자가 무엇인지 궁금한 이유도 있었으니까.”

처용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유르티나가 처용과 루비아, 어린 드래곤들을 자신의 레어에 초대한 이유는 여럿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바하무트에게서 종종 들었었던 계승자라는 존재.

처용에 대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주의 법칙과 깊은 관련이 있다면, 함부로 말하기 힘들거나 당사자도 모르겠지.”

유르티나가 짐작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드래곤들이 중립의 법칙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처용 역시 계승자에게 대해서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제약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

“태초신 후보.”

유르티나의 말을 듣고 침묵해 보이던 처용이 입을 열었다.

“계승자는 태초신 후보입니다.”

처용이 자신이 알고 있는, 계승자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해주자.

“……뭐?”

“지금, 뭐라고?”

루비아와 어린 드래곤들이 멍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

유르티나 역시 미묘한 표정으로 처용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모두, 자신들이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제 귀를 의심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미처 처용의 말을 다 이해하기도 전에.

“그리고 태초신을 임명할 권한을 가진 자.”

처용의 말이 이어졌다.

계승자는 태초신이 될 자격을 지닌 존재이면서, 차기 태초신을 임명할 권한도 지니고 있다.

“이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처용이 스스로가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주자.

“…….”

“…….”

루비아와 어린 드래곤들이 소리 없이 입만 들썩이며 침묵해 보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차마 뭐라고 입을 열어야 할지 모르겠는 듯한 모습이었다.

“계승자가 우주를 위해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존재라는 것이……?”

처용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던 유르티나가 읊조리듯 말하자.

“누구를 태초신으로 지목할 것인가? 뭐, 이런 의미로 추정됩니다.”

처용이 그 말에 답하듯 대답했다.

“그래서…… 관리자께서 그대와 함께하시는 것인가?”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일단은 그렇죠.”

이어지는 유르티나의 질문에도 처용이 흔쾌히 답하자, 눈을 감으며 잠시 침묵했다.

짧은 생각의 시간을 가진 그녀는.

“그린 드래곤의 수장, 데이베른 장로는 배신자일 가능성이 높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과 알아낸 사실을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동시에.

“계승자인 네게…… 그리고 관리자에게 부탁이 있다.”

왜 처용을 이곳에 불렀는지, 그 이유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 홀로 계승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