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9화
아라한 왕궁 정원 앞.
-화아아아!
비크라가 폴리모프를 해제하고 모습을 드러내자, 거대한 덩치의 황금빛 드래곤이 나타났다.
[그럼, 문을 열겠다.]
-스르륵!
비크라가 손을 앞으로 뻗으며 드래곤 포스를 끌어올렸다.
황금빛이 비크라의 앞에 뭉쳤고 점점 나선을 그려가며 덩치를 불리기 시작했다.
비크라가 드래곤들의 성역으로 향하는 문을 만들 때.
“드래곤의 일이 해결될 때쯤이면, 곧 세계 헌터 회의가 열릴 겁니다.”
처용이 왕궁 앞에 나와 있는 커맨더와 헌터들을 향해 말했다.
“그때까지 방어를 부탁합니다.”
“걱정하지 마, 여긴 철통같이 지키고 있을 테니까.”
커맨더가 처용의 말에 자신감 어린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세계 헌터 회의까지 앞으로 3일 정도 남은 상황.
그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지구의 세력이 에스라 대륙에 도달한다.
그렇게 되면 진짜 ‘전쟁’이 시작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구의 세력이 에스라 대륙에 자리를 잡기 전에, 드래곤의 일을 해결해 그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이게 드래곤 슬레이어들을 멸절시킨 이유이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기계 장치의 여신님께 이것 좀 전해 주십시오.”
-탁.
처용이 커맨더에게 둥근 공처럼 생긴 기계 장치를 건네주며 말했다.
이전, 태룡사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게 건네주었던, 처용의 전투 기록이 담긴 기계 장치였다.
“큰 전투가 있었던 만큼, 더 많은 데이터가 담겨 있습니다. 연구에 도움이 될 겁니다.”
처용의 말이 끝난 순간.
-피이이!
하늘 위에 부유하고 있는 함선, 마키나에서 얇은 빛이 지상을 향해 쏘아져 내려왔다.
[마침, 필요했어!]
-탁!
홀로그램 분신으로 지상에 강림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커맨더의 손에 들린 옵저버를 가로채며 말했다.
[이렇게 필요할 때, 딱딱 가져다준다니까! 정말 마음에 들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마치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자.
“저…… 이분은?”
아나샤가 처용과 연아 등을 바라보며 의문을 표하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늘 위의 성에서 쏘아진 빛줄기, 그 안에서 나타난 잿빛의 소녀.
작금의 분위기를 살펴보았을 때, 절대로 평범한 존재가 아니라 생각했다.
의심되는 바로…… 신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었다.
“제가 모시는 성좌, 기계 장치의 여신님입니다.”
커맨더가 아나샤의 물음에 답할 때.
[으음……? 이건 또 신기하네?]
옵저버를 받고 좋아하던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아나샤를 유심히 바라보며 읊조렸다.
“아, 안녕하세요…….”
아나샤가 가까이 다가오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보며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흐음?]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곤란해하는 아나샤를 관찰하며, 뚫어질 듯 응시고는.
[……에실록스. 맞지?]
확신 어린 목소리로 아나샤를 향해 말했다.
그녀의 입에서 아나샤와 계약을 맺은 정령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화아아!
아나샤에게서 은빛의 기운이 짧게 퍼져 나왔다.
[……그래, 수천 년 전에 독립했던 네 녀석을 다시 만나니 나도 감회가 새롭구나.]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은빛의 기운 속에 담긴 의지를 읽었다는 듯, 진지한 목소리로 답하듯 말했다.
[네게 맞는 계약자는 찾았지만, 이 녀석이 네 온전한 힘을 감당하기엔 아직 어리구나.]
“저…… 제 정령하고는?”
아나샤가 제 할 말만 계속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게 깃든 에실록스는 내 조수였던 녀석이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아나샤의 말에 답하듯 말했다.
과거, 호기심 많던 대지의 정령 중 하나가 한 여신에게 배움을 청한 일이 있었다.
여신은 그 정령을 조수로 부리며 다양한 지식을 가르쳐 주었다.
이후, 여신의 조수 노릇을 하던 정령이 독특한 형태로 진화하였고 독립하였다.
대지의 정령을 조수로 부린 여신은 바로 기계 장치의 여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
그리고 여신의 조수 역할을 하며 많은 능력을 습득하고 진화한 대지의 정령.
그 정령이 바로 최초의 강철의 정령이자, 강철의 정령왕, 에실록스였다.
“공교로운 우연이네요.”
처용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향해 말하자.
[너, 전에 내 연구에 도움이 될만한 사람이 있다는 게, 이 녀석이었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처용의 말을 짐작한 듯, 물었다.
“맞습니다.”
처용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말에 답했다.
겉으로는 우연이라는 듯한 분위기를 보였지만.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
이는 처용이 유도한 상황이었다.
아나샤에게 깃든 정령, 강철의 정령왕 에실록스.
처용은 그 정령왕과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었다.
회귀 전, 아나샤, 아니 강철의 여제가 자신의 잠재력을 각성할 수 있었던 이유.
그 이유가 바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의 만남이었다.
[좋아, 이따가 이 아이를 성지로 데리고 와봐.]
-짝. 화아아!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치자, 홀로그램이 흩어지며 사라졌다.
“괜찮을까?”
커맨더가 처용에게 물었다.
아나샤는 한 나라를 이끄는 여왕이라고 들었다.
게다가 처용을 따르기로 결심한 인물.
아무리 자신이 따르는 성좌의 명이라 하지만, 아나샤를 함부로 막 데려갈 순 없다고 생각했다.
“그…….”
아나샤 역시 당황스러운 침음을 흘리며 처용을 바라봤다.
작금의 상황을 어찌하면 좋을지 묻는 듯한 모습.
“네 ‘성장’에 도움이 될 거다.”
처용은 그런 아나샤의 물음에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 세계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문명과 기술을 경험할 기회이니까.”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나샤가 처용의 말에 답하고는 커맨더를 향해 말했다.
그때.
[시간이 되었다.]
성역의 문을 열던 골드 드래곤, 비크라의 말이 울렸다.
-우웅! 화아아아!
비크라의 앞에 금빛의 물결이 휘몰아치며 만들어진 원형의 게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아! 화아아!
비크라의 옆에 있던 두 명의 소녀.
마티네아와 가네리아가 폴리모프를 해제하며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했다.
세 명의 드래곤이 게이트 앞에 섰고.
-탁.
처용과 루비아 역시 게이트 앞에 섰다.
“혹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면-.”
“카투라 님을 통해서 대신님들께 연락을 보낼게.”
처용이 혹시 모를 비상사태를 이야기하자 연아가 곧장 답했다.
“아, 그리고 윤아도 이곳에 오고 싶어 하던데, 데려와도 상관없지?”
“마음대로 해라.”
이어지는 연아의 말에 처용이 답하고는.
“좋아, 그럼 다녀온다.”
비크라가 연 게이트 속으로 발걸음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스르르륵!
황금빛 게이트가 점점 크기를 키우며 세 명의 드래곤과 루비아, 처용을 집어삼키듯 빨아들였다.
***
처용과 드래곤들, 루비아가 황금빛 게이트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젠장, 두 번 다시 안 올 줄 알았는데…….”
루비아가 황금빛으로 가득 찬 주변을 보며 불안한 듯 읊조렸다.
“네 문제를 계속 외면만 할 수는 없다. 이 기회에 드래곤 로드와 담판을 짓는 것이 좋겠지.”
처용이 그런 루비아의 읊조림에 답하듯 말했다.
루비아는 본래 처용을 따라갈 생각이 없었다.
드래곤들의 성역에 발은 들이는 것이 꺼렸고 그곳에 갈 이유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상황이 바뀌었다.
“용기사는 무사할 거라고 약속했었어, 약속했는데…….”
루비아가 주먹을 쥐며 읊조리듯 말했다.
-용기사 루시우스는 죽었다.
드래곤들을 다시 마주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자신을 위해 희생한 용기사가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야만 했다.
아니, 드래곤 로드와 만나 그에게 따질 생각이었다.
이전에는 그럴 엄두조차 나지 않았지만.
“뒷감당은 네가 한다고 했었지.”
처용과 미륵이 모든 뒷감당을 한다고 해주었기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루비아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래 뒷감당은 걱정하지 마라.”
처용이 작은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그때.
[어, 어…… 이게 무슨?]
가장 앞장서 있던 드래곤, 비크라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흘렸다.
“무슨 일이지?”
처용이 비크라를 향해 무슨 상황인지를 물었다.
동시에.
‘왜 이렇게 통로가 오래 유지되나 싶었는데…… 드래곤 로드가 개입했군.’
주변을 살펴보며 속으로 읊조렸다.
비크라가 만들어낸 게이트에 들어간 순간, 성역의 입구에 도달했어야 했다.
그러나 드래곤들의 성역은 나타나지 않고 휘몰아치는 황금빛만이 계속되는 상황이었다.
아마도, 성역으로 향하는 게이트에 드래곤 로드가 간섭한 듯 보였다.
[나, 나는 성역의 입구를 향해 문을 열었다. 그런데…….]
비크라가 안절부절못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 아무래도…… 로드께서 우리들을 직접 부르시려는 것 같다.]
이어지는 비크라의 말에.
“……!”
루비아가 인상을 확 일그러뜨리고는 싸늘한 안색을 내비쳤다.
조금 전, 드래곤 로드를 향해 따지겠다는 말과 생각은 사라지고, 두려움이 차오르는 듯한 모습.
반면에.
“드래곤 로드가 우리를 바로 만날 생각인가? 잘 되었군.”
처용은 오히려 이 상황이 달갑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어, 언사와 행동을 조심해라 인간, 드래곤 로드시다.]
“존중은 해 줄 거다. 그쪽에서 우리를 존중만 해준다면 말이지.”
우려를 표하는 비크라의 말에 처용이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고.
“이쪽은 드래곤 로드한테 굽신거릴 이유가 없거든.”
처용이 두려움을 표하는 루비아를 눈짓하며 말을 이었다.
그 말에 루비아가 조금 진정이 된 듯, 감정을 바로잡았다.
이윽고.
-화아아!
주변을 에워싼 황금빛이 확 걷어지자.
-스르륵.
작은 별빛이 반짝이는 새까만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곧장 불러낼 줄이야.’
처용이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며 속으로 읊조렸다.
별빛이 반짝이는 검은 우주와 그 우주를 떠돌아다니며 부유하는 듯한 넓은 바위 제단.
일행들은 그 제단 위에 서 있었고.
-후욱! 화아악!
다양한 색상의 드래곤들이 제단을 둘러싸듯 우주 공간에 부우하며 일행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돌아왔구나, 비크라.]
-우우웅!
제단의 정면, 다른 드래곤들보다도 압도적으로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황금빛 드래곤.
드래곤 로드가 거대한 울림을 토해내며 목소리를 내었다.
[로, 로드시여.]
비크라가 날개를 접고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저, 저희를 직접 소환하실 줄은……!]
[그 이유는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른 비크라의 말에 드래곤 로드가 잔잔한 목소리로 물었다.
[…….]
그 말에 비크라가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침울한 분위기를 드러내며 고개를 숙였다.
[어째서 함부로 지상에 나간 것이냐!]
[로드의 직계라 하여 네 멋대로 행동하다니!]
주변을 둘러싼 몇몇 드래곤들이 비크라를 압박하듯 목소리를 내었다.
그 압박에 비크라가 점점 더 몸을 움츠리고 그와 같이 행동한 두 드래곤 역시 고개를 숙였다.
그때
“몸소 자신의 의무를 실천한 애들인데…….”
-탁.
처용이 비크라의 옆으로 다가오고는.
“칭찬을 해주지 못할망정, 왜 핍박을 주고 지랄이야. 다 큰 어른들이.”
주변의 드래곤들을 쏘아보며 말했다.
[이, 인간……!]
[……!]
비크라를 포함한 어린 드래곤들이 경악을 드러내고는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쿠구구!
-쿠구!
주변을 둘러싼 드래곤들에게서 불편한 기색이 담긴 드래곤 포스가 울려 퍼졌다.
어른들의 기세에 짓눌린 비크라와 두 어린 드래곤이 다시금 움츠러들자.
“어깨 펴, 너희들은 잘못한 게 없어.”
-우웅! 쿠구구구!
처용이 그런 드래곤들의 기세를 밀어내듯 거친 신력을 내뿜으며 말했다.
핏빛의 기류가 일렁이는 황금빛 신력이 드래곤 오러를 크게 밀어내며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이건?]
[신력이라고?]
드래곤들이 처용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신력에 놀람을 드러내고는.
[신격에 닿았다고 하나!]
[감히, 인간 따위가 드래곤의 일에 간섭하는 것이냐!]
-쿠구구!
드래곤 포스를 내뿜으며 적개심을 드러냈다.
“아, 그래서 아스터 그 개새끼가 지상을 개판 낼 때까지 뒷짐 지고 구경만 하고 있으셨어?”
-쿠구구구!
처용은 분노를 드러내는 드래곤들을 향해 비웃음 서린 미소를 지으며 더 짙은 신력을 내뿜었다.
에스라 성운의 주신인 아스터를 향한 욕설이 울리자, 몇몇의 드래곤들이 복잡한 감정을 내비쳤다.
일부는 신을 향해 내뱉는 욕설에 당황스러움을.
일부는 인간이 보이는 건방짐에 분노를 보이는 듯했다.
[이, 이……!]
“…….”
처용의 뒤에 있는 비크라와 어린 드래곤들, 루비아는 일촉즉발의 상황을 보며 불안한 감정을 내비쳤다.
단 한 명에 불과한 인간과 다수의 드래곤이 벌이는 기 싸움.
보통의 인간이라면, 다수의 드래곤이 가해오는 압박을 견딜 리가 없었다.
그러나.
-쿠구구!
처용은 다수의 드래곤들이 가해 오는 압박을 정면으로 받으며 자신감 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니, 드래곤들이 내뿜는 드래곤 포스에 전혀 밀리지 않고 있었다.
터질 듯, 말 듯, 위험한 기싸움이 이어질 때.
[모두 그만하라.]
가장 거대한 황금빛의 드래곤, 드래곤 로드가 목소리를 내었다.
깊고 무게감 있는 드래곤 로드의 말이 울리자, 드래곤들이 기세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네가 마신이라 불리는 인간이구나.]
드래곤 로드가 처용을 유심히 바라보며 묻자.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부르긴 하지만…….”
처용이 드래곤 로드의 눈빛을 똑바로 응시하며 답하듯 입을 열었다.
동시에.
“당신에게는 나 자신을 계승자라고 소개하는 게 정확할 것 같군요.”
-우웅.
황금빛을 내뿜는 태룡전의 열쇠를 꺼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건?]
태룡전의 열쇠를 응시한 드래곤 로드의 눈이 조금 커졌다.
드래곤 로드가 태룡전의 열쇠를 알아본 듯한 반응을 보이자.
-우웅.
처용이 미소를 지으며 태룡전의 열쇠로 게이트를 열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