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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계승자-465화 (465/726)

#465화

에스라 대륙의 북부, 멸망한 룬테라 왕국.

카란디아가 룬테라 왕국의 정화를 막 시작하고 에블린이 그런 그녀를 돕기 시작했다.

-만약, 무슨 일이 있다면, 즉시 나에게 말해라.

아라한 왕국에 이변이 생긴 것을 감지한 처용이 막 자리를 비웠을 무렵.

“별일 없었으면 좋겠어요.”

에블린이 동쪽의 하늘, 처용이 날아간 방향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지금 그녀가 바라보는 동쪽 방향 너머에는.

-……쩌적. 쿠구.

불길한 소음과 함께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모습이 보였으니까.

대충 멀리서 보기만 해도,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용님은 강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타가 에블린의 걱정 어린 말에 믿음이 서린 목소리로 답했다.

동쪽 하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처용이 직접 해결하려 출발한 상황.

아타는 처용이 직접 움직인 이상, 동쪽의 이변은 곧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그야 처용은 거대 성운이 벌이는 음모와 함정을 단신으로 부숴 버릴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아타는 처용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태룡사에 거주하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자부하는 이였다.

그녀는 태룡전에 거주하는 세 명의 대신을 제외하고, 처용과 가장 오래 지냈었으니까.

우두머리 신수의 자격을 가진 처용의 세력에 든 첫 번째 가신.

아타에게 있어서 그 사실은 자부심이자 긍지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곧 해결하고 돌아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일에 집중하죠.”

“네.”

에블린이 아타의 말에 답했고 카란디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안개가 조금씩 짙어지는데…….”

아타가 주변을 둘러보며 경계심 서린 목소리를 내었다.

검은 대지 위로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안개가 조금 더 짙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으니까.

“용님과 함께 처음 왔을 때도, 안개가 깔려 있었어요.”

카란디아가 아타의 말에 대답하듯 말했다.

에스라 대륙의 북쪽, 룬테라 왕국은 서늘한 산간 지역.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숲 안개가 자주 끼는 지형이었다.

이곳에서 자란 카란디아는 왕국 내에 은은하게 펼쳐져 있는 안개를 자주 봤었다.

하지만.

“그 안개에 ‘핏빛’이 섞여 있는 게 정상입니까?”

주변에 깔린 안개를 노려보던 아타가 카란디아에게 물었다.

멀쩡한 안개 사이에 은밀하게 숨어있는, 요사스러운 느낌이 전해지는 붉은빛.

처용이 사라지고 난 후부터, 아타가 계속 신경 쓰고 있던 부분이었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지만.

‘불길하다.’

아타는 하얀 안개 속에 숨어있는 핏빛 안개를 볼 때마다, 무언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겉으로는 느껴지는 게 없어도, 신수로써 가진 감각에 서늘한 기분이 전해졌다.

심지어.

-스르륵.

이제는 은밀하게 숨어있는 정도가 아니라, 점점 핏빛의 안개가 모습을 드러내며 접근하고 있었다.

-스륵.

핏빛의 안개 중 일부가 앞으로 흘러나와 카란디아에게 향하던 순간.

-푸화아아!

카란디아에게서 검은 안개가 솟구쳐 나오더니.

“당장 꺼져라!”

-휘이이! 사각!

네이션이 칼날에 검은 바람을 휘감고는 핏빛 안개를 향해 휘둘렀다.

-파아아……!

카란디아에게 접근해 오던 핏빛의 안개가 검은 바람에 갈려 나가며 사라졌다.

“적이다!”

-스릉.

핏빛의 안개를 몰아낸 네이션이 단호한 목소리로 주변을 경계하며 소리쳤다.

“적?”

“…….”

네이션의 말에 에블린이 놀란 목소리를 내었고 아타가 주변을 둘러보며 경계했다.

“핏빛 안개…… 설마?”

카란디아는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불안한 눈빛으로 읊조렸다.

그녀와 연결되어있는 불사의 기사 네이션.

그런 그가 지금껏 분투하며 마주쳤던 많은 적들.

카란디아에게 공유되는 네이션의 기억 중, 핏빛 안개와 관련된 적이 한 명 있었다.

심지어, 강자인 네이션이 필사적으로 도망쳐야만 했던 적.

“제길……!”

주변을 경계하던 네이션이 긴장감 어린 침음을 흘렸다.

그때.

-또각.

핏빛이 일렁이는 안개 너머로 높은 구두굽 소리가 들려왔다.

대리석 발판을 밟으며 점점 다가오는 발소리와 안개 너머로 조금씩 드러나는 실루엣.

-스스.

멀리서부터 돋보일 정도로 요사스럽게 빛나고 있는 핏빛의 눈동자.

“흐음, 이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길 잘했네요.”

높지 않은 톤의 고혹적인 여성의 목소리.

-스르륵.

안개가 걷히고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레스의 느낌이 섞여 있는 새하얀 사제복과 길게 흩날리는 새하얀 머리.

카란디아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하얀 여성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백색인 카란디아와 대비되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지잉.

멀리서부터 돋보였던 핏빛의 눈동자와 짙은 핏빛의 속눈썹.

이질적이면서도 요사스러운 분위기를 보이는 여성이었다.

“……성녀 라사벨.”

-스릉!

네이션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여성을 보며 긴장감과 적의를 섞어 말했다.

“성녀요?”

“아스터 교단의 성녀다.”

에블린의 물음에 네이션이 답하고는.

“어떻게 성지 밖으로 나온 거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아스터 교단의 성녀를 보며 의문을 토했다.

과거, 룬테라 왕국이 멸망하고 네이션이 아스터 교단에 쫓기던 시절.

교단에 붙잡힌 룬티르 일족의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아스터 제국 수도에 잠입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제 발로 여기까지 들어올 줄은 몰랐군요.

눈앞의 괴물을 마주쳤었다.

혼자서는 절대로 이길 수 없었던 상대.

잠깐 싸워보며 상대의 역량과 능력을 파악한 네이션은.

-제길!

겨우 확보했던 아스터 제국의 지하 비밀 통로를 제 손으로 부수며 도주했었다.

그 후 여러 정보수집을 통해 그녀가 아스터 제국의 성녀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동시에, 그녀는 어떠한 사정에 의해 아스터 제국 수도.

에스라 성운의 기운이 강한 성지 밖을 나갈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었다.

네이션을 압도했던 그녀가, 수도 밖을 빠져나갔던 네이션을 더 추적하지 못했던 이유였다.

그러나, 성지 밖을 나갈 수 없었던 아스터 교단의 성녀가 룬테라 왕국 수도에 나타난 상황.

“위대한 빛과 지혜의 선택을 받고 태어난 성녀, 라사벨이 명합니다.”

아스터 교단의 성녀, 라사벨이 고혹적인 목소리를 내고는.

“위대하신 신들을 위해, 그대들의 육체와 혼을 스스로 헌납-.”

네이션과 그 뒤에 있는 카란디아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때.

-화륵. 화륵. 화르륵.

라사벨을 중심으로 여섯 개의 불꽃이 포위하듯 피어나더니.

“염화멸옥(炎火滅獄).”

-푸화아아!!

뜨거운 불길이 일렁이는 불기둥이 솟구치며, 라사벨을 태워 버렸다.

-파사사……!

불기둥에 갇힌 라사벨이 잿더미가 되며 사그라지는 광경이 펼쳐졌다.

“용님께서 말씀하시길, 개소리는 들어주는 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화르륵.

라사벨을 태워 버린 아타가 손아귀에 피어오른 화염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아타는 처용에게서 자연부의 힘을 받은 존재.

그녀는 처용이 발휘하는 자연부의 술법을 엇비슷하게 흉내 내는 방식으로 재현할 수 있었다.

아스터 교단의 성녀, 라사벨이 나타난 순간.

아니, 그 이전부터 은밀하게 기세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언제든 적이 나타나면 공격할 수 있도록 준비한 셈이었다.

그 준비가 확실히 먹힌 상황.

적이 확실해진 라사벨은 화염에 휩싸였고 잿더미가 되며 사라졌다.

하지만.

‘안개가 사라지지 않는다.’

아타는 적을 처치했음에도 사라지지 않는 안개를 보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지금껏 처용의 전투를 지켜보고 그를 도우며 많은 가르침을 받았었다.

처용의 앞을 가로막았던 적 중에는, 기괴한 능력을 보였던 이들도 있었다.

가령 ‘불사’라던가.

때문에, 아타는 아직도 타오르는 불기둥을 응시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그때.

“호오, 자연의 일족보다 더 강한 생명력이 느껴지는군요?”

-또각.

불기둥이 솟구친 장소 근처에서 구두굽 소리가 들리더니, 멀쩡한 모습의 라사벨이 나타났다.

문제는.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이들 중 가장 뛰어난 감각을 지닌 아타조차도, 라사벨이 언제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는지 몰랐다는 것.

게다가.

-화르륵. 파아아……!

화염이 걷어진 불길 속에서 흩날리는 잿더미가 눈에 보였다.

분명, 아타의 공격은 적에게 적중했다.

강렬한 화염 속에서 불타 버리고 남아 흩날리는 잿더미가 그 증거.

‘분신인가?’

-탁!

아타는 라사벨의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 은밀히 왼손에 뭉쳐 두었던 마나를 풀며 손가락을 튕겼다.

-피이! 피이잉!

다시 모습을 드러낸 라사벨의 주변으로 서늘하게 빛나는 빙 속성 마나의 구체가 나타났고.

“절대영도.”

-파아! 쩌저저적!

빙 속성 마나가 터지며 순식간에 라사벨을 얼음 조각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쩌적! 쿠구구!

완전히 얼어버린 라사벨이 갈라지더니, 깨진 조각상처럼 무너져 내렸다.

이번 공격으로 완전히 처치한 듯 보였지만.

“그대가 말한 용님은 마신을 말하는 것인가요?”

-또각.

또다시 멀쩡한 모습의 라사벨이 일행들의 오른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분신?”

아타가 부서져 내린 얼음 조각상과 잿더미, 다시 나타난 라사벨을 번갈아 응시하며 읊조렸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분신.

이것이 적의 능력인 듯 보였다.

-파지직! 파직!

이번에 라사벨 주변에 떠오른 것은 뇌전.

“갈라치는 벼락.”

-쿠르르릉! 쿠릉!

아타가 뭉쳐 두었던 뇌 속성 마나를 터트리자, 라사벨 주변으로 강렬한 벼락 줄기가 튀겼다.

-파사삭! 파삭!

분쇄기에 거침없이 갈려 나가는 폐품처럼 라사벨이 벼락불에 찢어지고 태워지며 터져 나갔다.

“분신이면 얼마든지 만들어 보라죠. 만드는 족족 없애줄 테니.”

다시 라사벨을 처치한 아타가 주변을 경계하며 말했다.

그러자.

“분신이 아닙니다.”

이번엔 일행들의 왼쪽에 라사벨이 나타났다.

“저것들 모두 ‘나’입니다.”

라사벨이 스스로를 가리키듯,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한 순간.

-화르륵! 콰아아!

아타가 나선으로 휘몰아치는 원형의 불길을 만들어내며 라사벨을 불태웠다.

라사벨이 잿더미가 되어 버린 순간.

“과연 마신을 따르는 권속, 도저히 피할 엄두가 나지 않는군요.”

-또각.

이번엔 라사벨이 처음 나타났던 자리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 세계를 위한 제물로 봉사하기에 적합하군요.”

라사벨이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핏빛 같은 눈동자가 반달로 휘며 요사스러운 분위기를 보였다.

“뢰옥탄.”

-파지지직!

아타는 라사벨이 계속 살아나 다른 장소에 나타나는 기현상에 신경을 쓰면서도.

-쿠르릉! 콰릉!

라사벨을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

“일단, 신들의 소유물을 회수하는 것부터-.”

전보다도 빠른 속도로 나타난 라사벨이 손을 뻗으며 말했다.

그녀가 나타난 장소는 다름 아닌 카란디아의 바로 앞.

-스륵.

요사스러운 핏빛으로 물들인 손톱과 시체처럼 싸늘한 백색의 손이 카란디아에게 향할 때.

“꺼져.”

-우드득! 콰지지직!

카란디아의 발밑에서 검은 나무뿌리가 솟구치더니.

-우득! 콰드드득!

라사벨을 휘감아 으스러뜨리고 터트려 버렸다.

카란디아를 보호한 이는 다름 아닌 에블린.

그녀가 소환한 검은 나무뿌리가 라사벨을 처치한 듯 보였으나.

“으음, 그대도 마신의 권속이었나요?”

-또각.

분명, 육체가 터지며 죽음을 맞이했던 라사벨이 일행들의 왼쪽에 다시 나타났다.

마치, 카란디아를 노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은 듯, 그녀와 가까운 거리.

-우득! 콰지직!

다시금 라사벨의 발밑에서 검은 나무뿌리가 솟구치며 그녀를 휘감아 터트렸다.

“신의 소유물부터 되찾기 전에-.”

조금 더 떨어진 장소에 라사벨이 나타난 순간.

“템페스트 블레이드!”

-콰아아!

네이션이 검은 바람을 칼날에 휘감아 라사벨을 향해 쏘아 보냈다.

-콰드드득!

강렬하게 휘몰아치는 검은 바람의 폭풍이 라사벨을 찢어발기며 지나갔다.

그럼에도.

“방해하는 이단자들부터 정리해야겠군요.”

-또각.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다시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절대영도.”

-파아! 쩌저적!

아타는 다시 나타난 라사벨을 향해 빙 속성 마나를 터트려 얼음 조각상으로 만들어 버리고는.

‘용님, 적이 나타났습니다. 능력은 멀쩡한 모습으로 되살아나는 불사, 혹은 분신을 만드는 것 같습니다.’

처용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쉽게 적을 처치할 줄 알았지만, 적은 알 수 없는 능력으로 무한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아타는 작금의 돌발상황이 더 문제가 되기 전에, 처용에게 알리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용님?’

즉각 들려왔어야 할, 처용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용님 들리십니까?’

다시, 신수의 격을 통해 처용에게 메시지를 전달했지만, 들려오는 답이 없었다.

신수의 격, 처용과 연결된 선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처용과 자신을 이어주는 신수의 감각은 그대로였다.

다만, 자신의 목소리가 처용에게 닿지 않는 상황이었다.

“당신의 목소리는 마신에게 닿지 않을 겁니다.”

-또각.

얼어버린 라사벨 옆으로 멀쩡한 모습의 라사벨이 나타나며 말했다.

마치, 아타가 처용을 불렀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분위기.

“제 권능, ‘고립’이 펼쳐졌으니까요.”

-스르르!

라사벨의 목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주변에서 은은하게 피어나던 안개가 확 짙어졌다.

나 홀로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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