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3화
“……끝났다. 놈은 죽었다.”
하늘을 바라보며 눈을 감고 있던 처용이 읊조리듯 말했다.
이단 심판관장이자 아레스의 새로운 신관, 안테르는 확실하게 사망했다.
변수를 없애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계산하고 노력한 결과였다.
게다가.
“악신의 신전도 무너졌고.”
아레스의 신전까지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미소를 머금은 처용의 말이 울리자.
“잘 모르겠군.”
쿠루타가 의문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처용이 작은 미소를 흘리고는.
“놈이 도망칠 때, 내가 작별 선물을 줬거든.”
-스르륵.
아공간에서 야구공 크기의 구체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한 손에 딱 잡히는 반투명한 구슬.
속이 비치는 구슬 안에는.
-우우웅.
검은색, 흰색, 녹색, 보라색 등, 여러 색의 작은 구슬들이 서로 붙어 옅게 진동하고 있었다.
“놈이 내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한 모양이더라고. 크크.”
손에 쥔 구체를 들어 보인 처용이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동시에.
‘이런 일을 예상하고 만든 건 아니었지만…… 좋군.’
반투명한 구체 안에 진동하고 있는 기운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읊조렸다.
조금 전, 피의 샘이 거의 말라가는 신관을 구하기 위해 아레스가 사용한 권능.
피의 생환.
처용은 그 권능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회귀 전, 모건이 처용에게 죽기 직전.
-무능한 것! 두 번 기회는 없을 것이다!
아레스는 이 권능을 이용해서 모건을 딱 한 번 살려준 적이 있었으니까.
그 당시 피의 샘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처용은, 모건을 눈앞에서 놓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레스 역시 피의 생환을 이용해, 매번 처용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피의 샘이 대충 어떤 능력을 지닌 권능인지 파악했다.
‘분석은 끝났다.’
피의 샘을 채우고 있던 생명 에너지 분석을 대략 끝낸 상태였으니까.
처용이 계속 아레스를 도발하며 그의 무모한 죽음을 유도한 이유.
피의 샘에 축적된 생명력을 효율적으로 갈취하기 위함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피의 샘에서 퍼져 나오는 생명 에너지를 수집하여 데이터를 모을 수 있었다.
단순히 떨어져 나온 힘의 조각을 주워 모은 것에 불과했지만.
작은 조각이 모이고 모이면, 완성품에 가까워지기 마련.
덕분에 피의 샘을 구성하는 생명력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알아낼 수 있었다.
바로 살아 있는 생명체들의 격렬한 감정이 실린 피.
이것이 피의 샘을 채우는 생명력의 정체였다.
간단하게 말해서, 살아 있는 존재를 잔혹하게 살해하여 얻어낸 피였다.
조금 더 보충하자면, 생명력이 강한 존재를 희생시키면 더 강한 피를 얻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동물보다는 인간.
평범한 인간보다는 단련된 무인.
인간보다 상위 생명체라 할 수 있는 고위 이종족에게서 얻는 피가 더 강한 효과를 발휘했다.
그리고 신격을 얻은 신수 역시 이에 포함되었다.
굳이 이종족과 신수의 피를 예시로 떠올린 이유가 있었다.
‘미약하지만, 드래곤의 피가 있는 것 같다.’
아레스를 계속 죽이면서 뽑아낸 피의 샘, 그 속에 일렁이는 생명력 데이터.
그 속에는 드래곤의 기운이 미약하게 섞여 있었다.
아마도 로스톤 왕궁 지하에 보관된 드래곤 사체.
루나락스의 피로 추정되었다.
추가로.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지상의 신전이었군.’
처용은 은밀하게 아레스의 힘을 흡수하면서 새로이 알아낸 사실이 하나 있었다.
악신 아레스는 피의 샘이 마르지 않는 한 계속 생명력을 공급받는다.
피의 샘이 자리한 곳은 신계 어딘가에 있는 아레스의 신전.
그렇다면, 그가 강신중이었던 육체, 신관인 안테르는 어디서 생명력을 공급받는가?
그 장소는 바로 지상, 에스라 대륙 어딘가에 세워진 아레스의 신전이었다.
안테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생명력 데이터를 분석하고 그 경로를 은밀하게 역추적한 결과 알아낸 사실이었다.
적이 발휘하는 능력이 무엇인지는 분석을 끝났다.
그렇다면, 그다음은?
이제 본격적인 ‘공략법’을 구사할 차례였다.
다행히, 지금 이 자리에서 안테르를 완벽하게 죽여 버릴 수단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처용의 손에 쥐어져 있는 반투명한 구슬이었다.
[재앙옥(災殃玉) / 소모품]
[등급 : 레전더리]
[강력한 살상력을 지닌 에너지가 불안정하게 뭉쳐져 있습니다.]
[신성한 천사의 기운이 재앙의 힘을 구속하고 있습니다.]
[자칫 잘못 다루면 기운이 폭주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구슬의 가장 외곽, 야구공 크기의 반투명한 구체.
이 구체는 최근에 많이 수집한 천사의 날개로 제작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그 내부에 자리한.
-우웅. 우우웅.
불길한 진동을 토해내며 조금씩 떨리고 있는 구체들.
그것들은 바로 강한 살상력을 지닌 기운들이 뭉쳐져 만들어진 구슬이었다.
예를 들어 검녹색으로 진동하고 있는 작은 구슬.
그 구슬은 바로 청자고둥의 분해독 일부와 암영부를 섞어 만든 물건이었다.
보라색의 구슬 같은 경우 독운부로 만든 진법에 바질리스크의 독을 압축해 만든 구슬.
노란색과 붉은색이 섞인 구슬은 뇌격부와 화염부를 합쳐 만든 뢰옥탄.
이러한 방식으로 파괴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힘들을 서로 조합하여 만들어낸 구슬들이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반투명한 구체 중앙에 자리한, 다른 구슬보다도 더욱 불길한 진동을 흩뿌리는 작고 검은 구슬.
그것은 다름 아닌, 악의 종주가 가진 권능, 파멸의 권능이 담긴 구슬이었다.
반투명한 구체 안에 가득 밀어 넣은 구슬들은 모두 처용이 하나하나 살심(殺心)을 담아 만든 것들이었다.
그저 살상만을 위한 목적으로 만든 구슬들.
그것들을 천사의 날개로 만든 빛 속성 구체에 가둬 강제로 안정시킨 것이었다.
다만, 아무리 천사의 힘이 담긴 구체라 해도, 이 많은 재앙들을 완벽하게 안정시킬 순 없었다.
자칫 잘못 건드는 순간, 어떤 재앙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매우 불안정한 폭탄이었다.
물론, 처용이 폭탄을 불안정하게 만든 이유 역시 의도한 바였다.
천사의 힘 안에 가둬 잔뜩 꾸겨 넣은 맹독과 저주, 화염, 폭풍 등.
이 재앙의 집합체가 불안정하고 불안정할수록, 그것이 터지면 더 강력한 살상력을 발휘하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학살과 파괴에만 중점을 두고 안전성 따위는 고려하지 않은 폭탄.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재앙옥(災殃玉)이었다.
다만,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재앙옥은 재앙을 일으킬 만한 모든 요소를 천사의 힘으로 억눌러 놓은 것.
즉, 천사의 날개가 무지막지하게 많이 필요했다.
처용은 지금껏 거의 수십에 가까운 천사들의 화신체를 처치하고 상당한 양의 깃털을 수집했었다.
지금까지 모은 깃털을 상당수 사용했음에도 고작 재앙옥 다섯 개를 만드는 데 그쳤다.
그리고 그 다섯 개 중, 이번에 안테르를 처치하는 데 무려 세 개나 사용했다.
안테르가 사라지기 직전, 처용은 그의 복부에 강격을 내지름과 동시에.
-푸욱! 스륵.
손에 쥐고 있던 재앙옥을 그의 몸속에 심어 두었다.
그렇게 안테르는 몸속에 불안정한 폭탄을 세 개나 가진 채로, 피의 샘으로 이동했다.
피의 생환은 먼 거리를 단숨에 이동하는 성좌의 권능.
-우우웅!
그 권능으로 인해 불안정하던 재앙옥이 크게 자극을 받아 더욱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게다가.
-타이머는 10초가 적당하겠군.
처용이 안테르의 몸속에 재앙옥을 처박으며 설치해 놓은 작은 심지.
안테르가 사라지기 직전, 처용은 그 심지에 불을 붙여 놓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정확히 10초 후에 터지도록 만들었다.
결국.
-쩌저적! 파차창!
천사의 힘으로 겨우 억눌려 있던 재앙옥이 터져나갔다.
그 안에 자리한 온갖 저주와 속성, 맹독에 이어 파멸의 권능까지.
강력하고 불안정한 힘이 서로 얽히고 융합되어 유례없는 재앙을 만들어냈다.
재앙옥을 만든 처용조차도 어떤 결과가 발생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적어도 검은 대지에 버금가는 재앙이 발생할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어떤 재앙이 발생할 것인가는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안테르의 확실한 사망과 피의 샘, 아레스의 신전까지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에스라 대륙에 어떤 재앙이 발생하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든, 그것은 처용이 알 바가 아니었다.
어차피, 아레스의 신전이 자리한 곳은 아스터 제국 내부일 터.
그렇다면, 수습이 불가능한 재앙이 일어날수록 처용에게 이득이었다.
앞으로 싸울 적들의 힘을 쫙 빼 줄 테니까.
아스터 교단이 재앙을 겪는 동안, 다른 곳을 공격하여 놈들을 더 흔들거나 차후를 기약할 수 있었다.
“뭐…… 내 선물을 아주 좋아해 주는 것 같긴 하네.”
처용이 손에 든 폭탄을 다시 아공간에 조심히 집어넣고는 먼 북쪽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지금 처용이 바라보는 먼 북쪽의 끝에는.
-……쿠구.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가늠되지 않을 정도로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재앙의 일부가 눈에 보일 정도.
‘하나만 쓸까 했었는데, 세 개를 쓰길 잘했군.’
처용이 재앙의 결과를 보고 짙은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읊조렸다.
“우리의 친구가, 동쪽을 제패한 마신이었을 줄이야.”
-스릉.
쿠루타가 처용이 보는 방향을 바라보며 읊조리고는 처용에게 차륜 도끼를 돌려주었다.
마신이 나타나 동부의 왕국을 장악하고 아스터 교단과 에스라 성운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 소문은 에스라 대륙 중앙만이 아닌, 오지.
남부 대륙 쪽에서도 널리 퍼진 상태였다.
처용은 쿠루타가 건넨 차륜 도끼를 다시 받고는.
“아스터 교단이 이종족들과 사람들을 잡아다가 실험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껏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봤는지.
아스터 교단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등을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그래서, 내가 놈들에게 있어 마신이 되어주었지.”
처용의 말이 끝나자.
“동족들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감히 이런 짓을!”
-쿠구구!
쿠루타가 분노를 표출하듯,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소리쳤다.
비단 쿠루타만이 아니라, 옆에 모여든 다른 오크들도 분노한 듯한 분위기를 보였다.
“은인! 지구라는 세계에서 있었던 일이 여기서 다시 일어난 것이오?”
쿠루타를 따르는 하이 오크 중 하나가 처용에게 물었다.
그는 쿠루타와 함께 마인들에게 붙잡혀 있었던 오크 중 하나였다.
때문에, 작금의 상황과 처용의 말을 듣고 이전의 경험을 떠올린 것이었다.
“아스터 교단은 마인들과 손을 잡았고 그들의 실험을 돕고 있다.”
처용은 하이 오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자.
“용서할 수 없다!”
“쿠루타! 저 사악한 놈들에게 화산의 분노를 보여줘야 한다!”
오크들이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친구의 말을 의심하고 싶진 않지만, 정녕 사실인가?”
쿠루타가 진정하려는 듯, 분노를 억누르며 처용에게 사실을 확인했다.
처용은 굳이 장황하게 더 설명하지 않고.
“그동안 수집해 온 증거가 있다.”
-우웅. 삐리릭.
미니 옵저버를 꺼내 작동시키며, 증거를 보여 주었다.
-지이잉.
옵저버가 작동하자, 그 속에 저장된 홀로그램들이 주변에 나타났다.
아스터 교단이 저질러 온 잔혹한 실험의 흔적들.
그 현장에서 벌어진 일들을 기록한 실험 문서들까지.
그간 수집한 증거들이 홀로그램 영상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홀로그램을 본 쿠루타와 오크들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고 있을 때.
-지잉.
마치, 도축이 끝난 듯, 뼈만 남아 걸려 있는 오크를 비롯한 이종족들의 사체가 나타났다.
“……!”
-으득! 쿠구구!
그 광경을 본 쿠루타가 두 주먹을 강하게 쥐며 몸을 떨었다.
침착함을 유지하며 억누르고 억누르던 분노가 점점 넘쳐흐르는 듯한 모습.
결국.
-쿠콰콰콰!
쿠투라에게서 화산이 폭발하듯, 격렬한 열기가 내뿜어지며 분노가 터져 나왔다.
“다…… 다 불태워 버릴 것이다.”
작게 읊조리는 목소리 안에는 뜨거운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아스터 제국으로 쳐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는 신의 가호와 보호를 받는 거대한 제국.
아무리 화산의 오크라 해도, 단신으로 제국 전체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동족들의 잔혹한 죽음을 확인한 이상.
“신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고 해도! 모조리 불태워 버리겠다!”
화산의 오크로서, 전사로서! 이대로 가만있을 순 없었다.
그런 쿠루타의 반응을 본 처용은.
“저 머저리들 뒤에만 신이 있는 건 아니야.”
쿠루타를 향해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기, 너희를 돕는 신이 있잖아.”
아스터 교단과 에스라 성운에 정면으로 반하는 존재.
마신이라 불리는 처용이 자신을 가리키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나의 목적은 아스터 교단과 에스라 성운의 완전한 파멸!”
쿠루타를 향해 오른손 주먹을 내밀며 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화산의 분노를 함께 나누겠는가? 친구.”
동료의 싸움에 함께하겠다.
혹은 나의 싸움에 함께하겠는가?
처용의 입에서 흘러나온 오크의 언어는 이러한 뜻을 담고 있었다.
그 말에 쿠루타의 표정이 분노에서 미소로 바뀌었고.
“불카의 분노를! 친구와 함께 불태우겠다!”
-탁!
처용이 내민 주먹에 자신의 주먹을 내밀어 부딪히며 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쿠루타의 확고한 대답에 처용의 미소가 짙어졌다.
화산의 오크 쿠루타.
처용에게 있어서 대마도사인 루비아 만큼이나 중요한 존재 중 하나였다.
회귀 전, 죽음을 맞이했던 친구와 다시 만나 친구가 되었고 다시 같은 전장에 서게 되었다.
‘같은 비극은 되풀이되지 않으리라!’
처용은 다시 마주한 친구를 보며, 속으로 강하게 다짐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