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화
드높게 솟구친 파도가 아래로 떨어지며 모두를 수장시킨 순간.
-콰콰콰……! 꼬르르…….
주변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며, 시야가 암전되었다.
마치, 검은 늪 깊숙이 빠진 것처럼, 옅은 기포 소리만이 울릴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 여긴……?”
아나샤가 확 어두워진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꼬르륵. 꼬륵.
물속이 확실한 듯, 입에서 공기 방울이 뿜어져 위로 올라갔다.
정말로 물속이라면, 숨을 쉴 수 없고 말을 할 수도 없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 입에서는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숨 또한 쉬어졌다.
“이게 도대체?”
아나샤는 작금의 상황이 신기하면서도 또 괴기스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조심스러운 눈길로 보이지 않는 앞을 살피며 긴장할 때.
“안~뇽?”
-스윽.
아냐사의 얼굴 바로 앞, 어둠 속에서 미소를 짓는 연아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 으어……!”
화들짝 놀란 아나샤가 허우적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히히, 놀랐어?”
연아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묻자.
“……네.”
아나샤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는 듯, 가슴에 손을 얹으며 답했다.
“여긴…… 어딥니까?”
침착함을 되찾은 아나샤가 연아에게 물었다.
조금 전 상황을 생각해 보면, 지금 이 공간 자체가 그녀와 연관이 깊다는 판단이 들었으니까.
“우리 집 앞마당,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앞마당 지하? 라고 해야 하나?”
연아가 자신의 말이 맞는지 생각하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답했다.
그리고.
“나중에 자세히 말해줄게, 지금은 우리 애 밥 줄 시간이라서 말이야.”
-슈르르르……!
뒤로 팔을 크게 휘저으며 말을 이었다.
잔잔하던 심해의 물결이 연아의 손짓에 따라 조금 느린 속도로 흐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화아. 화아.
발밑에서 희미하게 보이던 지면, 해저에서 푸른빛과 초록빛이 은은하게 퍼졌다.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보이는 산호와 촉수를 흔들고 있는 말미잘들이었다.
해저에 은은한 불빛이 들어오며 전체적인 시야가 조금 밝아지자.
“이, 이건 뭐야……!?”
“물속?”
“상황을 파악해라! 모두 무사한가!?”
연아에게 강제로 끌려들어 온 암살자들도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모두 작금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당황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구경하듯 본 연아는.
“어디 보자…… 상한 놈은 없는 것 같고 횟감들이 아주 싱싱해 보이네.”
-스륵.
눈에 보랏빛 안광을 일렁이며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미친 괴물이! 우리를 어디로 끌어들인 것이냐!”
연아와 아나샤의 모습을 본 하레크가 인상을 거칠게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겉으로는 분노를 표출하는 듯 보였지만, 눈동자는 불길한 기분을 한껏 느끼고 있다는 듯, 떨리고 있었다.
“여기? 우리 집 앞마당.”
연아가 그런 하레크의 모습을 구경하듯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앞마당에는 집을 지키는 무시무시한 경비견도 있겠지?”
미소가 싹 사라진 연아의 차가운 목소리가 끝난 순간.
-파아! 쿠구구!
육중한 무언가가 움직이는 듯, 둔탁하고 무거운 소음이 심해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쿠구! 쿠궁!
멀리서 거대한 무언가가 점점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마치, 해저에 존재하는 산 하나가 점점 가까이 걸어오는 듯한 모습.
해저에 있는 탓인지 그 크기가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윽고.
-쿠궁!
그 정체불명의 거대한 무언가가 연아와 아나샤의 바로 뒤에서 멈추었다.
대략적인 크기만 짐작해 보아도 100미터는 훌쩍 넘을 듯한 크기.
-우우웅!
연아의 뒤에 선 검은 태산과도 같은 거대한 무언가가 짙은 울음을 토해냈다.
-쏴아! 쏴아아!
그 울림에 의해 굵직한 파동이 물결을 흔들며 넓게 퍼졌다.
이윽고.
-지잉!
연아의 뒤에 선 거대한 태산.
그 중앙 부분에 샛노란 선이 그어지며 빛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쫘아악! 후웅!
균열이 좌우로 쫙 벌어지며 짙은 청색이 섞인 샛노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눈동자의 크기만 따져도 10미터 정도는 훌쩍 넘어가는 크기.
거대한 눈동자가 안광을 내뿜으며 나타남과 동시에.
-지잉. 지이잉.
그 주변으로, 보다 작은 크기의 눈동자 여섯 개가 눈을 뜨며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산처럼 보이는 무언가의 총 일곱 개에 달하는 눈이 떠지며 안광을 내뿜자.
-스르륵. 우웅!
산의 꼭대기로 보였던 뾰족한 부분, 거대한 뿔에 짙은 청색의 기운이 일렁였다.
그리고.
-쿠구! 쿠구구!
그 주변으로 두껍고 긴 형체가 유연하게 움직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산호와 말미잘이 내뿜는 은은한 청색의 광원이 펼쳐진 짙은 심해 속.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100미터는 훌쩍 넘는 크기의 거대한 형체.
일곱 개의 눈동자와 머리 위에 달린 뿔.
머리 아래에 달린 여덟 개의 두껍고 긴 두족류의 다리.
어두운 심해 환경에 적응한 듯, 검푸른 빛으로 일렁이는 피부.
“소개할게, 우리 집을 지키는 수문장.”
연아가 자신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거대 괴수.
“이름은 데비(Davy)라고 해.”
크라켄을 가리키며 미소를 짓고는 그를 소개하듯 말했다.
S급 몬스터이자 거대 해양 괴수인 크라켄.
크라켄은 본래 포세이돈에게 붙잡혀 노예처럼 부려 먹히던 괴수 중 하나였다.
하지만, 청룡과 윤아를 노리던 포세이돈이 처용에게 패배했다.
그 당시 싸움이 끝나고 만신창이 상태로 쓰러져 있던 거대 괴수들.
-이 아이들 어비스로 돌려보내 주지 않을래?
카투라는 처용에게 거대 괴수들을 본래 살던 터전으로 돌려보내 달라 부탁했었다.
처용은 그런 그녀의 부탁에 거대 괴수들의 신변을 카투라에게 양도했다.
레비아탄과 어비스 웨일은 카투라 덕분에 본래 살던 터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해양 괴수, 크라켄.
녀석은 본래 살던 것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괴수 크라켄이 당신의 무리에 합류하기를 원합니다.
자신을 해방시켜 준 이에게 ‘상위 신수’의 기운이 있음을 느끼고 그 무리에 합류하기를 원했다.
처용은 크라켄이 앞으로의 싸움에 도움이 되겠다고 판단해 이를 수락했다.
그렇게 크라켄은 니모와 같이 태룡사에 합류했다.
다만, 크라켄은 거대 괴수.
녀석을 어디에 수용할지가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생각보다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바로 성지 태룡사의 주변에 흐르는 거대한 강.
그 강은 심해에 가까울 정도로 깊고 광활했다.
카투라는 성지 외곽에 흐르는 강 심부에 크라켄만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크라켄은 새로운 집이 마음에 드는지 그곳에 정착했다.
그렇게 포세이돈에게서 해방된 크라켄은 태룡사의 입구에 자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때? 나와 ‘신수 계약’을 맺은 녀석이야. 귀엽지?”
연아가 크라켄을 가리키며 아나샤를 향해 말하자.
“어…….”
아나샤가 거대한 크라켄을 충격적인 눈빛으로 올려다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크라켄은 단순히 처용의 무리에 합류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니모가 윤아와 신수 계약을 맺어 서로 파트너가 된 것처럼.
크라켄은 연아와 신수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크라켄은 엄연히 따지면 신수가 아닌 해양 괴수, 몬스터였다.
본래라면 신수가 아니기에 신수 계약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는 카투라가 간단하게 해결해 주었다.
니모에게 정수를 베풀어 보다 높은 격으로 승격시켜 준 것처럼.
크라켄 역시 카투라에게 정수를 하사받았다.
그 결과.
[에인션트 크라켄]
[등급 : S급]
[특징 : 높은 격의 정수를 내려받고 원시적인 형태로 회귀한 바다의 괴수.]
[스킬 : 고속 재생, 분열체…….]
크라켄 역시 니모처럼 격이 높아졌다.
하나였던 눈이 여섯 개로 늘어나고 머리의 뿔이 두꺼워지며 더 크게 자라났다.
물렁거리던 표피는 검은 각질이 뒤덮인 듯, 더 두껍고 질기게 변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주에서 최초로 탄생한 크라켄, 최초의 크라켄에 가까운 형태로 변했다.
진화가 아닌 퇴화, 원시회귀(元始回歸)를 했다고 볼 수 있었다.
진화의 반대 작용이기에 좋지 않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크라켄의 입장에서는 아니었다.
바다에 사는 모든 생물의 원형은 바로 태초의 신수인 카투라.
거대 괴수가 원시적인 형태로 돌아갔다 함은, 바로 카투라에 가까워졌다는 의미였다.
크라켄이 카투라의 정수를 하사받고 보다 그녀에게 가까워졌다.
그로 인해 격이 높아지고 신수의 자격이 생겼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데비(Davy), 간식 먹을 시간이야.”
연아가 자신과 계약을 맺은 신수를 향해 말했다.
크라켄의 이름인 데비(Davy)는 연아가 어릴 때 봤던 해적 영화의 인물을 떠올리며 붙인 것이었다.
그렇게 새로운 이름과 역할을 부여받은 존재.
-쿠우우-!
데비가 연아의 말에 대답하듯, 무겁게 울리는 진동음을 토해냈고.
-……슈르륵! 슈륵!
자신의 영역에 붙잡혀 온 암살자들, 아니 먹이를 향해 촉수를 뻗었다.
거의 건물 두께와 맞먹는 여덟 개의 두꺼운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곳에 붙어 있는 작은 촉수들이 길이를 늘이며 암살자들에게 쇄도했다.
“이런!”
“모두 피해라!”
눈앞에서 덮쳐 오는 수백 개의 촉수에 암살자들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각각 방어와 회피를 준비하며 즉각 전투에 돌입했지만.
“제길!”
“움직임이-!”
연아에게 끌려 온 이 장소는 바로 깊은 물 속.
숨은 쉬어지고 말을 할 수 있었지만, 진짜 물속에 있는 듯 몸이 무거웠다.
때문에 평소보다 움직임이 확연하게 느려졌고.
-슈르륵! 촤락! 촤악!
순식간에 네 명의 암살자들이 촉수에 붙잡혔다.
몸을 구속한 촉수를 끊어내려 하기도 전에.
-촤-아아악!
암살자들을 성공적으로 구속한 촉수가 그들을 빠르게 끌어당겼다.
“으아악!”
“아악!”
암살자들이 끌려가는 장소는 다름 아닌.
-쩌저적!
날카로운 이빨이 나선을 그리며 원형으로 빼곡하게 돋아난 장소.
바로 크라켄, 데비의 머리 아래에 있는 입이었다.
-콰직. 콰득.
멀리서 무언가가 짓이겨지고 터지는 듯한 소음이 울렸고.
-꼬르르…….
수면 위로 옅은 핏물이 흐르며 위로 올라갔다.
“촉수를 잘라 봐야 다시 자라난다! 본체를 노려라!”
그 모습에 기겁한 암살자들의 리더가 명령을 내리듯 소리쳤다.
일부 암살자들이 다가오는 촉수를 상대할 때.
-위잉!
-위이잉!
그들 중 일부가 단도에 오러를 크게 피워 올리며 크라켄, 데비를 향해 휘둘렀다.
암살자들이 쏘아 보낸 오러 블레이드가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데비에게 향했다.
그러나.
-탕! 타탕!
강렬한 기세로 쏘아져 나간 오러 블레이드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갔다.
연약해 보이는 연체동물의 피부라기엔 너무나도 단단한 듯한 모습.
“이 괴물 녀석이! 당장 참회시켜주마!”
“불태워라!”
참회의 사제들이 손아귀에 화염을 피워 올리며 데비에게 쏘아 보냈다.
신에게 하사받은 화염의 힘이니만큼, 물속에서도 불꽃이 타올랐다.
하지만, 그 불꽃 역시.
-치이이……!
데비의 피부를 조금 그을리게 만들기만 할 뿐, 유효한 타격을 주지 못했다.
결국.
-촤악! 촤라락!
“으아!”
“아, 안 돼!”
세 명의 암살자들이 추가로 촉수에 붙잡혔고 데비의 먹이가 되었다.
데비의 공격에 서른 명이 넘었던 암살자들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때.
“누, 누님! 아니 여왕님! 사, 살려 주십시오!”
-꼬르륵! 꾸륵.
암살자들이 있던 장소에서 누군가가 허우적거리며 뛰쳐나와 소리쳤다.
촉수를 피해 아나샤에게로 다가오는 이는 바로 전 로스톤 왕국의 왕족.
아나샤의 자비를 저버리고 배신했던 하레크 왕자였다.
“자비를 부탁드립니다. 여왕님……!”
아나샤의 자비에 한 번 배신을 보였던 그가 다시 아나샤를 향해 자비를 구걸했다.
그런 하레크의 뻔뻔한 말과 태도에 아냐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 새끼는 묶어만 두고 가장 마지막에 잡아먹어.”
연아가 차가운 눈빛으로 하레크를 노려보며 읊조렸다.
그러자, 데비가 알았다는 듯, 옅은 울음을 토해 내고는.
-촤라락! 촤락!
하레크의 온몸을 구속했다.
연아의 말대로 하레크를 묶어만 두고 가장 마지막에 처치할 생각이었다.
암살자들의 수가 어느새 절반만이 남았고 열 명 이하로 떨어진 순간.
-샤악!
데비의 먹이가 되지 않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존자 중 하나.
심장 약탈자라 불리는 암살자.
멜리제가 온몸이 구속된 하레크의 뒤에 나타났다.
-우웅! 콰직
붉은 오러가 일렁이는 그녀의 손이 하레크의 등 뒤를 급습했고.
“커허헉!?”
뒤를 기습당한 하레크가 피를 한 움큼 내뿜었다.
몇 초 꺽꺽거리며 고통을 호소하던 하레크가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갑자기 아군을 공격한 심장 약탈자의 태도의 모두가 의문을 표한 순간.
“그레이트 텔레포테이션!”
멜리제가 미리 준비하던 마법의 시동어를 읊었고.
-우웅! 샤샥!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와 여기서 빠져나가는 데 성공할 줄은 꿈에도 몰랐네?”
감쪽같이 사라진 멜리제를 본 연아가 놀랐다는 듯, 눈을 조금 크게 뜨며 읊조렸다.
이대로 암살자 중 하나를 놓쳐버리는 것인가 싶었지만.
“으음…… 저 아줌마를 좀 이용해 볼까? 흐흐.”
연아의 얼굴엔 낭패감 어린 표정은 없었고 오히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슈화악!
조금 전까지 연아와 아나샤, 암살자들이 있었던 절벽 앞에서 빛이 번쩍였고.
“젠장……!”
연아의 함정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멜리제가 인상을 거칠게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6서클 공간 이동 마법으로는 탈출조차도 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공간.
그 공간 속에서 암살자들을 잡아먹는 거대 괴수.
멜리샤는 암살자들이 크라켄에게 잡아먹히는 동안.
-제발. 제발……!
마나를 아끼고 최대한 촉수의 공격을 회피하며 탈출을 준비했다.
탈출할 가능성이 큰 방법은 찾아냈지만, 힘이 조금 부족한 상황.
결국,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콰직!
크라켄의 촉수에 붙들려 있는 하레크를 기습해 그의 심장을 빼앗는 것이었다.
6서클 마법사의 심장과 고위 사제의 심장, 로스톤 왕족의 심장까지.
가진 것들을 모두 소모해 발현한 공간 마법으로, 그 끔찍한 공간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후……!”
멜리제가 짧게 숨을 고르며 식은땀을 훔쳤다.
그리고.
-데비, 식사 시간이야~.
“젠장! 제기랄!”
조금 전 상황이 다시 상기되자, 입에서 거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절대로 죽지 않는 정체불명의 불사신 소녀.
그런 소녀가 사역하는 듯 보이는 압도적인 크기의 괴물.
그저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후-!”
멜리제가 질릴 대로 질려 버린 표정으로 짧고 굵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 당장 여길 벗어나야 해!’
잡념을 몰아낸 그녀가 다리를 움직여 이 장소를 벗어나려 했다.
이미 시간을 너무 많이 지체한 상황.
더 이 장소에 머물러서 좋을 일이 결코 없었다.
두 번 다시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이 근처, 이 이단국에 얼씬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 망할 새끼. 두고 보자.”
자신에게 이런 의뢰를 한 참회의 신관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러나 멜리제가 다리를 앞으로 내밀며 도망치기도 전에.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바로 옆에서 귀신이 속삭이듯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멜리제의 안색이 귀신이라도 본 듯, 하얗게 질리며 짙은 낭패감이 드러났다.
절대로 다시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나 보고 싶었어?”
눈동자를 돌리자,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불사신, 연아의 모습이 보였다.
“이-!”
-탓!
멜리제가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침음을 흘렸다.
겨우 잡은 탈출 기회를 허투루 만들 수는 없었으니까.
-우웅.
그녀는 다리에 마나를 최대한 끌어모아 도망치려고 했다.
타인의 심장을 약탈해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
심장 약탈자라 불리는 그녀가 악명이 높았던 이유는 이 능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작 그 능력만으로 그녀가 에스라 대륙의 암흑가를 휘어잡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 역시 오러 마스터 초입에 든 강자.
당장 쓸 수 있는 심장이 없다 해도, 전력으로 도망칠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그런 멜리제의 발이 차마 떨어지기도 전에.
-슈르르륵. 탁!
물줄기가 휘감긴 연아의 손이 멜리제의 가슴을 밀어쳤다.
“커헉!?”
-콰쾅!
연아의 손에 밀쳐진 멜리제의 등이 크게 휘며 뒤로 날아갔고 절벽에 처박혔다.
하지만.
‘……상처가 얕다?’
멜리제가 빠르게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며 의문을 표했다.
생각보다 부상이 크지 않은 상황.
재빠르게 몸을 일으킨 멜리제가 다시 도망치려 한 순간.
“이거 버리고 가게?”
연아가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려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말에 반사적으로 멜리제가 연아를 응시했고.
“……아니야.”
연아의 오른손 위에 올려진 무언가를 본 멜리제가 두 눈동자를 흔들며 읊조렸다.
동시에.
-탁. 탁.
자신의 가슴 부분을 더듬었다.
지금 연아의 손아귀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뽀그르르. 두근. 두근.
물방울 속에 갇혀 박동을 토해내고 있는 누군가의 심장이었다.
하지만.
“……아니야. 가짜다.”
순간 불길한 생각이 들었던 멜리제가 부정하듯 말을 이었다.
지금 자신의 심장 부근에 손을 대 본 결과.
-두근. 두근.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자.
“이게 뭔지 궁금하지? 내가 친히 알려줄게.”
-스르륵.
연아가 왼손에 물줄기를 모아 꼬챙이를 만들며 말했다.
그 꼬챙이가 오른손 위, 물방울에 갇힌 심장을 폭 찌른 순간.
“으!? 으아악! 크아아아-!”
멜리제가 왼쪽 가슴 부근을 강하게 움켜쥐며 비명을 토해냈다.
눈이 절로 뒤집힐 정도로 강렬하게 전해지는 격통.
심장부터 시작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날카로운 전류가 쫙 훑고 지나간 느낌이었다.
정말로 심장을 찔린 듯한 고통 같았다.
“끄어어! 끄어……! 서, 설마.”
바닥을 기던 멜리제가 연아, 정확히는 그녀 손 위에 들린 심장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그 모습을 본 연아가 씨익 미소를 짓고는.
“불사신인 내가 아줌마한테 저주를 걸었어.”
오른손에 들린 심장을 잘 보이도록 앞으로 내밀며 말을 이었다.
“이 심장이 터지면 어떻게 될 거 같아?”
-슈르륵.
연아가 왼손에 물을 뭉쳐 망치와 비슷한 둔기를 만들고 심장을 향해 겨누며 말하자.
“그, 그만…… 그만!”
멜리제가 덜덜 떨리는 손을 뻗으며 공포 섞인 침음을 흘렸다.
“히히히…….”
연아가 작금의 상황을 즐기듯,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때.
-쿠구구! 쿠구! 쿠구구구!!
지진이 들이닥친 듯, 지면이 거세게 흔들렸다.
“뭐야? 이건 또.”
연아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며 읊조렸다.
동시에.
“……여기가 아니라 세계 전체가?”
눈을 점점 키우며 경악을 드러냈다.
지금 지진이 발생한 듯, 흔들리는 것은 이 주변 지역만이 아니었다.
멀리 보이는 산, 호수, 바다.
심지어 하늘까지.
이 세계 전체가 진동하듯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헌터들 중 최초로 신명(神名)을 얻은 자가 탄생했습니다.]
연아의 눈앞에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한처용?”
시스템 창을 확인한 연아의 입에서 처용의 이름이 자동으로 흘러나왔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