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홀로 계승자-429화 (429/726)

#429화

7서클에 닿은, 에스라 대륙의 대마법사 중 하나인 에린.

보통 7서클에 닿은 대마법사는 마탑에서 탑주라는 직위를 받고 세계 각국의 귀인으로 대접받는다.

그런 에린 역시 한때 탑주였었다.

그녀는 놀랍게도 전 제2 마탑주에 자리했었던 인물이었다.

현재, 제2 마탑주는 다름 아닌 루비아.

그녀가 마탑주의 호칭을 받기 전, 제2 마탑주였던 이가 바로 에린이었다.

마탑주에 자리한 대마법사가 멸망한 룬테라의 결계를 지키는 ‘열쇠’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프리실라. 리피아. 나는…… 나는 포기하지 않을 거야.

카란디아에게서 전해져 오는 기억 속 에린은, 누군가에게 비장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에린이 바라보는 시선 안에 담긴 두 여인.

프리실라라 불린 여인은 마치 카란디아가 성장하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와 닮은 하얗고 성숙한 여인이었다.

리피아라 불린 여성 역시 새하얀 분위기를 선보였지만,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평범한 엘프보다도 긴 귀에 새하얀 머리를 지닌 엘프, 하이 엘프였다.

-이 이상 우리 일에 개입하면 너도 위험해져…….

-네가 대마법사라 해도, 신은…… 거스를 수 없으니까.

새하얀 여성과 하이 엘프가 에린을 향해 걱정하듯 말했다.

그런 두 ‘친구’의 걱정 어린 말에.

-나는…… 나는 포기하지 않을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무슨 짓이든 해 보겠어!

에린은 굳은 의지를 드러내며 답했다.

자신의 친구들과 좋아하는 왕국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가 가진 것들을 망설임 없이 버렸다.

그리고 이들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대마법사의 힘을 한껏 발휘하여 전쟁에서 도망치는 시민들을 도왔다.

터전을 지키기 위해 창을 든 시민들과 함께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룬테라를 향해 진격해 오는 적은 너무나도 거대한 세력.

아무리 대마법사인 에린이 돕는다고 해도, 이 사태를 해결할 순 없었다.

게다가.

-이단자가 되다니, 유감이군.

-마탑을 배신한 대가를 치를 때다.

마탑의 다른 대마법사들이, 에린을 직접적으로 노리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결국.

-쿠콰콰!

룬테라에 참회와 회개의 심판이 떨어지며 멸망이 도래했다.

동시에 룬테라 전역에 검은 대지가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아스터 교단의 군대는 마치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즉시 군대를 물려 물러났다.

그리고.

-미안해. 이런 역할을 맡게 해서…….

마찬가지로 이러한 일이 발생할 것을 알고 있는 듯 보였던 룬테라의 왕.

카란디아의 어머니, 자연의 무녀 프리실라가 에린에게 착잡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신의 욕망에 내 아이를 희생시킬 순 없어.

짧게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해 주며 룬테라 중앙을 덮는 결계를 만들어 내었다.

에스라 성운의 신들이 퍼트린, 뒤틀린 생명력을 역으로 이용해 만든 결계.

에스라 성운의 신들이 벌이는 계획을 막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흐음…….”

에린의 기억을 본 처용이 침음을 흘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동시에.

“어머니…….”

죽은 줄로만 알았던 어머니에 대한 단서를 찾은 카란디아가 착잡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때.

“아아…… 결국, 그들을 거스를 수 없게 되는 건가…….”

-스르륵.

정화되어 회색빛으로 변한 에린이 정신을 차린 듯, 하늘을 보며 말했다.

프리실라에게서 모든 이야기를 들은 건 아니었지만, 한 가지 당부받은 중요한 말이 있었다.

-카란디아만큼은…… 이곳에 오지 못하게 해야 해.

바로, 룬테라 왕국에서 겨우 탈출시킨 카란디아가 돌아오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왜 나에겐 미리 알리지 않은 거냐?”

네이션이 에린을 향해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역시 처용처럼 카란디아를 통해 에린의 기억을 전달받은 상황.

카란디아가 이곳에 오면 에스라 성운의 신들이 벌이는 계획이 실행된다?

그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카란디아가 여기에 오는 걸 막았을 것이다.

“프리실라는 카란디아를 탈출시키고 나서야 그들의 계획을 알아챈 듯 보였으니까.”

에린이 네이션의 말에 답했다.

처참한 전쟁 끝에 결국, 아스터 제국의 군대를 막아내지 못한 룬테라.

그들은 최후의 항전을 준비함과 동시에,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카란디아를 탈출시켰다.

그녀를 데리고 룬테라를 탈출한 자가 바로 네이션이었다.

-이 아이를 지켜 줘…… 부탁이야.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던 네이션을 향해 프리실라가 한 말.

그녀는 자신과 네이션을 묶어 주는 불사의 계약을 카란디아에게 넘기며 네이션에게 부탁하듯 말했다.

마지막 부탁이라며 말하는 프리실라의 부탁을, 네이션은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제길.”

좋지 않은 과거를 떠올린 네이션이 인상을 찌푸리며 읊조렸다.

그리고.

“룬테라의 일만 있을 줄 알았는데…… 루비아와 용기사까지 엮여 있다라…… 참나.”

생각을 정리한 처용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저 로스톤 왕국, 아니 이제 아라한 왕국이 된 아나샤의 나라.

그곳과 가깝다는 이점이 있기에 아스터의 개수작을 막기 위한 장소로 룬테라를 선택했다.

그저 카란디아의 부탁을 받아, 룬테라를 정화하는 것을 도우면 끝날 것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했다.

운이 좋다면, 마검을 차지할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룬테라의 사정이 생각보다 간단하지만은 않은 듯 보였다.

“설마 그 리피아라는 하이 엘프, 용기사 루시우스의 연인인가?”

처용이 혹시나 싶은 생각에 에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말에.

“그, 그렇습니다…….”

에린이 처용의 눈치를 보듯,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처용이 카란디아를 통해 에린의 기억을 읽었듯.

그녀 역시 카란디아를 통해 처용이 누구인지 파악했으니까.

“아스터…… 이 개새끼가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거냐?”

에린의 답을 들은 처용이 인상을 찌푸리고는 룬테라 중앙의 결계를 바라보며 읊조렸다.

이 대륙의 최고신을 대놓고 모욕하는 처용의 말에, 다른 이들이 작게 움찔했다.

처용은 그런 그들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고.

“열쇠가 다 모였으니, 이제 결계를 열어.”

에린을 향해 명령하듯 말했다.

그런 처용의 말에 에린이 잠시 고민할 때.

-탁.

카란디아가 작은 손으로 에린의 손을 잡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잠식의 고통을 견디며 각오를 보이는 카란디아의 눈빛을 본 에린은.

“……그래, 알았다.”

-우우웅.

결계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러자.

-스르륵.

-스륵.

호단과 카란디아에게서 작은 빛이 흘러나와 에린에게 향했다.

세 개로 나누어졌던 열쇠가 하나로 모였고.

-파아아!

에린은 다시 하나로 모인 열쇠의 힘을 섞어 결계를 향해 마나를 쏘아 보냈다.

굳게 닫힌 문을 여는 열쇠가 결계에 닿은 순간.

-쩌저저저적!

거대한 검은 결계가 마치, 산이 무너지듯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드러난 광경은, 검게 변색된 듯 보이는 왕궁이었다.

결계의 봉인되었던 왕궁이 모습을 드러내자.

“가지.”

-파직.

처용이 왕궁을 바라보며 말하고는 다리에 번개를 휘감으며 앞장섰다.

네이션과 호단은 잿빛의 안개로 변하며 카란디아에게 스며들었고.

“배리어.”

-우우웅.

에린이 카란디아에게 보호막을 씌워 주며 공중에 띄우고는 그녀와 함게 처용을 따라나섰다.

이내.

-파직.

왕궁 입구에 처용이 발을 들였고.

-탁.

공중을 날아온 에린과 보호막에 보호를 받던 카란디아가 바닥에 착지했다.

“이상할 정도로 고요하군.”

왕궁 입구 주변을 둘러본 처용이 읊조리듯 말했다.

보통 왕궁에는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기 마련.

당연히 잠식된 존재들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왕궁 입구까지 오면서도, 잠식된 존재들은 단 한 명도 마주치지 못했다.

마치, 결계 안쪽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저벅.

주변을 잠시 살핀 처용이 앞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굳게 닫힌 왕궁의 입구 문 앞에 섰다.

-탁. 쿠구.

문 앞에 선 처용이 오른손을 뻗으며 가볍게 밀어 보이자.

-끼이이이!

육중한 철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좌·우로 열렸다.

-우웅.

열린 문 안쪽에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가득했다.

“…….”

처용이 통로 안쪽을 노려보며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왕궁에 도달하기 전부터 감각을 끌어올리고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딱히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거슬리는군.”

처용이 지면을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이 일대를 잠식한 뒤틀린 생명력.

지면에 흐르는 검은 기운 때문에, 주변의 기운이 잘 감지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노릇.

-저벅.

통로를 노려보던 처용이 통로 안쪽으로 발을 들였고.

-저벅.

그 뒤를 카란디아가 뒤따랐다.

카란디아의 발이 처용을 따라 통로 안쪽으로 완전히 들어온 순간.

-슈화아아아!

통로 안쪽에 가득했던 짙은 어둠이 크게 솟구치기 시작했다.

마치, 어두운 터널 속으로 질주하는 기차가 된 듯, 점점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듯한 감각이 전해졌다.

“이, 입구가!”

카란디아가 뒤를 향해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바로 뒤에 있었던, 빛이 새어 나오는 왕궁의 입구가 순식간에 멀어져 어둠 속에 삼켜지고 있었으니까.

동시에.

-푸화아아!

짙은 어둠이 처용과 카란디아를 중심으로 휘몰아치며 사방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쏴아아!

해일처럼 높게 솟구친 어둠이 처용과 카란디아를 파도처럼 덮치기 직전.

“어딜.”

-화아아!

처용이 파마의 신력을 내뿜었다.

-쿠구! 쿠구구!

높게 솟구쳐 아래로 떨어지는 어둠이 파마의 신력에 가로막혀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처용은 다가오는 어둠의 파도를 막아낸 순간.

“팔괘명환진.”

-스륵. 스르륵.

여덟 장의 명환부를 소환하여 팔괘의 진법을 그려내었다.

“파마의 빛.”

순식간에 환한 빛을 내뿜는 팔괘의 진법이 만들어졌고.

-파아아!

파마의 신력이 일렁이는 빛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주변을 잠식한 어둠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리에 금이 가는 듯, 무언가가 깨져나가는 소리가 울렸고.

-쩌적! 쩌저저적!

주변을 포위하던 짙은 어둠에 빛나는 균열이 일어나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파창! 창! 화아아악!

어둠이 완전히 깨져 나가며 밝은 빛이 퍼졌고 순간적으로 시야를 가렸다.

이내, 짧은 순간 시야를 가린 빛이 빠르게 지워졌고 새로운 광경이 나타났다.

마치 관중석처럼 좌, 우측에 나열된 계단식 좌석.

가장 중앙의 높은 곳에는 권위가 높은 자가 앉을 법한, 화려한 좌석이 보였다.

그리고 좌석에 앉은 모두가 볼 수 있는 넓고 낮은 원형의 제단이 중앙에 펼쳐져 있었다.

“……!”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새로운 장소를 본 처용의 눈이 커졌다.

어둠이 흩어지고 나타난 장소는 다름 아닌.

“……신법재판소?”

이 우주의 법칙을 좌우할 수 있는 신들의 의회.

신법의 대신만이 지닌 권능, 신법재판소 안이었다.

다만, 본래의 신법재판소와는 조금 다른 점이 보였다.

신법재판소의 내부는 옅은 금빛의 기운이 일렁이는 장소였다.

반면에.

-스륵. 스르륵.

처용의 눈앞에 나타난 신법재판소는 금빛이 아닌, 잿빛과 백색의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마치, 신법재판소를 탈색한 듯 보였다.

그리고.

“……저건?”

처용이 신법재판소 중앙, 제단 위를 올려다보며 읊조렸다.

그곳에는.

-우웅. 우우웅.

잿빛과 백색의 기운이 둘러진 물건들이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덩어리와 같은 것들.

다양한 색깔을 옅게 빛내는 농구공만한 보석들.

그리고 가장 중앙에는.

“드래곤의 알…… 여기에 있었을 줄이야.”

로스톤, 아니 아라한 왕국 지하에서 백골 사체로 발견되었었던 드래곤.

루라낙스의 알이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다.

드래곤의 알을 찾은 처용이 신법재판소 중앙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가려는 순간.

-피이이!

신법재판소 중앙 외곽에 빛의 기둥이 솟구치더니.

-화아아!

기둥의 넓이가 점점 넓어지며, 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점점 넓어지던 빛의 기둥이 처용에게 닿았고.

-파지직! 파직!

처용을 침입자로 간주한 듯, 전류를 튀기며 압박을 가함과 동시에 밀어내기 시작했다.

-우우웅! 파직! 파직!

자신을 밀어내려는 빛의 기둥에 처용이 강기를 내뿜으며 저항했다.

그러던 중.

“흐음…….”

-저벅. 탁.

주변을 잠시 관찰하고는 두 걸음 정도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파지직! 파아……!

처용에게 가해지는 압박이 풀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점점 넓어지던 빛의 기둥 밖으로 벗어난 것이었다.

면적을 넓히던 빛의 기둥은 정확히 신법재판소 관중석 외곽까지만 넓어진 상태였다.

처용이 있는 장소는 신법재판소의 중앙 제단으로 향하는 입구 부근.

이 앞으로 더 다가가지 않는 한, 신법재판소의 제제는 없는 듯 보였다.

뒤로 물러난 처용이 신법재판소 주변을 다시금 살필 때.

-화아! 화아아!

신법재판소의 좌석 위로 새하얀 빛의 기둥들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화아악!

그 기둥 속에서 나타난 이들은 다름 아닌 신의 화신체들.

에스라 성운의 신들이었다.

[이 하계종이 기어코 여기에!]

[설마, 그곳까지 부수고 탈출할 줄이야!]

관중석에 나타난 천사들이 신법재판소 입구에 선, 처용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리고.

-화아아!

-파아!

신법재판소 중앙, 재판장이 자리하는 가장 화려한 좌석 근처에서 빛이 떨어져 내렸다.

그곳에서 붉은 머리를 흩날리는 여신과 옅은 청색의 머리를 한 여신의 화신체가 나타났다.

그 둘은 바로 참회의 여신 하메라와, 회개의 여신 로메라.

[네 이놈!]

신법재판소에 나타난 참회의 여신, 하메라가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거친 분노를 드러냈고.

[……!]

로메라 역시 굳은 표정으로 처용을 향해 적대감을 드러냈다.

-우우웅!

당장이라도 처용을 향해 맹공격을 쏟아낼 듯, 사방에서 신력을 뿜어댔다.

-쿠구구!

처용 역시 이에 대비하듯, 신력과 강기를 끌어 올리며 전투를 준비했다.

그때.

-콰아아!

신법재판소 중앙, 재판장이 자리하는 좌석에 빛의 기둥이 떨어져 내리더니.

[저 하계종을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스르륵.

딱딱한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나타났다.

청색과 붉은색의 브릿지가 있는 백색의 긴 머리.

조각품을 깎아 놓은 듯, 각지고 수려한 얼굴.

동공이 없는 빛만이 가득한 눈.

“아스터……!”

-으드득.

처용이 신법재판소 재판장이 자리하는 좌석에 나타난 화신체를 보며 읊조렸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이는 에스라 성운의 주신, 빛과 지혜의 신 아스터였다.

나 홀로 계승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