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8화
룬테라 정벌.
아스터 교단이 이단 정벌을 명목으로 내세워 저지른 학살극.
그들이 이런 짓을 저지른 진짜 이유는 질 좋은 실험체 확보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룬테라가 저항은 생각보다 더 거셌다.
“에스라 성운의 신들이 우리들의 왕국에…… 재앙을 떨어뜨렸소.”
호단이 좋지 않은 과거를 떠올리듯, 주먹을 쥐며 말을 이었다.
교착 상태에 빠진 아스터 교단은 신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들이 참회와 회개의 심판을 사용했다.
대신들이 힘을 모아 지상에 떨어뜨리는 재앙이 룬테라 왕국 중앙을 휩쓸었다.
“우리의 성역에서 펼쳐진 결계가 무너지자, 그들이 저주를 퍼트렸소.”
룬테라의 수호 결계가 무너지는 순간, 병균처럼 퍼져 나간 검은 저주.
그 저주에 닿은 이들은 뒤틀린 생명력에 육체를 잠식당하고 이성을 잃게 된다.
전쟁 속에서 겨우 살아남았던 이들과 전사했던 이들 모두.
“이 오염된 땅에…… 우리들의 존재 자체를 속박시키는 저주였소.”
이 땅 위를 배회하는 망자로 만들어 버렸다.
계속 이어진 호단의 말에.
“정황은 알았다. 그렇다면 이건 왜 만든 거냐?”
-탁. 탁. 우우웅.
처용이 검은 결계를 툭툭 치며 물었다.
에스라 성운이 무언가 목적이 있어서, 룬테라에 검은 대지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다면, 앞을 가로막은 이 결계는 뭐란 말인가?
-이 결계는 ‘그들의 계획’을 막기 위한 우리의 마지막 발버둥이었소.
분명, 호단은 이 결계가 에스라 성운이 만든 것이 아닌, 룬테라의 사람들이 만들었다고 말했다.
“도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만든 거냐?”
“이 결계를 만든 이는…… 나의 주인, 프리실라 님이오.”
처용의 물음에 호단이 어두운 표정으로 답하자.
“어, 어머니가…….”
“살아있었다고?”
카란디아와 네이션이 놀란 듯한 반응을 드러냈다.
“룬테라의 왕인가?”
처용이 프리실라라는 이가 누구인지 짐작하며 묻자, 호단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분은 아스터 교단의 신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챈 것 같았소.”
호단이 계속 말을 이었다.
룬테라의 왕이 왜 뒤틀린 생명력을 끌어모아 이 결계를 만들어 냈는가?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이 저주를 만든 에스라 성운의 수작질을 막기 위해서였다.
“놈들이 무슨 수작질을 벌이든, 내가 전부 부숴 버릴 거다.”
사정을 들은 처용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 이 결계를 풀 방법을 말해.”
처용의 물음에 호단이 짧게 고민하는 듯한 반응을 보일 때.
“저, 알 것 같아요.”
-우우웅.
카란디아가 검은 얼룩이 진 왼손을 결계에 대며 입을 열었다.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온 옅은 빛이 왼손을 타고 검은 결계에 닿은 순간.
“……!”
처용이 무언가를 느낀 듯, 왼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룬테라 왕국의 동쪽 부근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결계를 파악하지 못했던 상황.
그러나 카란디아가 결계에 손을 대고 기운을 흘려보낸 순간, 느껴지는 감각이 있었다.
동시에.
-스르륵.
룬테라의 중심을 덮은 결계와 이어져 있는 세 개의 선이 눈에 보였다.
“……알았다.”
처용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읊조렸다.
“문을 여는 열쇠는 총 세 개, 그것도 외부에 있었군.”
결계는 닫혀있는 문과 같았다.
닫힌 문을 힘으로 부수는 방법도 있었지만, 지금은 불가능한 상황.
이 문을 열기 위해서는 열쇠가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열쇠의 위치가 온전히 드러났다.
심지어.
“호단 님…… 그리고 저도 열쇠였군요.”
세 개의 열쇠 중 둘은 가까이 있었다.
카란디아의 말에 호단이 고개를 끄덕여 보일 때.
“남은 하나는 저쪽인가?”
처용이 줄곧 동쪽을 응시하며 말했다.
결계와 희미하게 이어져 있는 검은 선.
그 중 둘은 카란디아와 호단, 나머지 하나는 동쪽으로 쭉 이어져 있었다.
“더 지체할 시간 없다. 바로 가지.”
-파지직!
처용이 다리에 번개를 휘감으며 동쪽으로 나아가자.
-스르륵.
호단이 잿빛의 안개로 변하며 카란디아에게 흡수되었고.
-휘리릭!
네이션이 카란디아를 안아 들고 한 줄기 바람으로 변하며 처용의 뒤를 따랐다.
이윽고.
-촤악!
동쪽으로 빠르게 질주해 나가던 처용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 앞에는.
-우우우!
왕국 중앙에 펼쳐진 어두운 결계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직육면체의 결계가 눈에 보였다.
-휘리릭.
“이건…?”
결계를 노려보는 처용의 뒤에 네이션이 나타나며 읊조린 순간.
-스르릉!
처용이 차륜 도끼를 꺼내 들며 강기를 크게 피워 올렸다.
‘천마신공 – 천마강림.’
-쿠구구!
강기가 모여 천마의 의지가 나타났고 처용의 위에 덧씌워졌다.
처용이 차륜 도끼를 두 손으로 굳게 쥐며 오른쪽으로 들어 올리며 허리를 틀자.
-쿠우!
천마의 의지 역시, 강기로 도끼를 형성하여 처용과 같은 자세를 취했다.
강렬하게 피워 오르던 강기가 도끼날에 응축되며 날카롭게 빛난 순간.
‘천마신공 - 만근격!’
-후웅! 콰쾅!!
처용과 천마의 의지가 결계를 향해 동시에 도끼를 휘둘러 후려쳤다.
지면이 울릴 정도로 강렬한 충격이 사방에 퍼져 나갔고.
-쩌적! 쩌저저적!
강렬한 충격을 버티지 못한 직육면체의 검은 결계가 무참히 깨져 나갔다.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신전? 아니 제단인가?”
폐허가 되어 버린 주변과 다르게, 온전한 모습을 유지한 신전이었다.
폐쇄된 건물이 아닌, 여섯 개의 짧고 굵은 기둥이 세워진 개방형 신전, 제단에 가까운 모습을 한 신전이었다.
네모난 형태의 계단이 세 개 정도 이어진 제단 위에는.
“누가 감히!”
녹색의 마법사 로브와 마녀들이 쓸 법한 꼬챙이 모자를 쓴 여성이 분노를 토해 냈다.
“아스터 교단! 이 빌어먹을 놈들이 기어코!”
-위이잉!
다짜고짜 오른손에 마나를 끌어모으며 공격을 하려는 모습.
그때.
“……에린 님?”
카란디아가 제단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가며 녹색 로브의 여성을 향해 말했다.
녹색의 로브를 입은 마법사의 눈이 카란디아에게 닿자.
“카란디아? 안 돼…… 안 돼! 네가 여기 오면-!”
마법사, 에린이라 불린 여성이 낭패감 어린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그녀는 카란디아를 향해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커, 커허…… 으어어……! 잠식이-!”
가슴과 목을 부여잡으며 괴로움을 토로했다.
동시에.
-스르르륵! 스륵!
검은 대지 위에서 검은 진흙이 스멀스멀 흘러나와 에린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결국.
“리, 리피아…… 루시우스…… 프리실라…… 우리 때문에……!”
검은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말을 겨우 내뱉고는.
“꺄아아아-!”
-위이잉! 후두드드득!
붉은 안광을 내뿜으며 괴성을 지르고는 검은 대지에 완전히 잠식되어 버렸다.
무언가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벌어진 상황.
녹색의 분위기를 띠었던 에린이 완전히 검게 물들자.
-캬아아아!
-위잉! 위이잉!
허공에 마나를 모으고 처용과 카란디아를 향해 쏟아내기 시작했다.
‘천마신공 – 반월(半月)격!’
-우웅! 후우욱!
처용이 쥐고 있던 차륜 도끼에 강기를 부여하며 반 바퀴 크게 휘두르자.
-사가가!
강기의 선이 얇게 퍼지며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마법탄을 일제히 반으로 갈라버렸다.
“대략 7서클 수준의 마법사인가?”
처용이 에린이라 불리는 마법사의 수준을 가늠하며 읊조렸다.
상대는 루비아와 같은 수준인 대마법사였다.
어째서 대마법사, 7서클에 닿은 자가 이 멸망한 왕국에 있는가?
게다가 대마법사에 닿은 정도의 인물이라면, 회귀 전 이름 정도는 들어봤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처용은 회귀 전, 에린이라는 대마법사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녀가 잠식되기 전에 읊조리던 말.
그중에는 루비아의 부친, 용기사 루시우스의 이름이 있었다.
도대체 이곳에 무슨 사정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비밀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혼란과 의문만이 커져 갈 뿐이었다.
처용이 에린의 공격을 막아내며 생각할 때.
-대지의…… 칼날!
검게 잠식되어 버린 에린이 왼손으로 카란디아를 가리키며 읊조렸다.
-우드드! 쿠구구!
그러자 카란디아의 주변 땅이 꿈틀거리더니, 날카로운 가시로 변하며 그녀에게 솟구쳤다.
무차별적으로 쏟아붓던 폭격 사이에 미리 은밀하게 준비한 마법.
마치, 일부러 카란디아를 노린 듯한 모습이었다.
“이것 봐라…….”
-파지직.
처용이 작게 인상을 쓰며 다리에 번개를 휘감고는 나서려는 순간.
-푸화아아! 쿵!
카란디아에게서 잿빛의 안개가 흘러나오더니, 호단이 나타났다.
“허락할 수 없다.”
-콰쾅!
호단이 카란디아의 앞에 서며 지면을 강하게 밟자.
-쿠구구! 파사사……!
카란디아를 향해 솟구쳐 오던 가시들이 가루가 되며 부서졌다.
-캬아아!
잠식된 에린이 호단을 보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괴성을 내질렀다.
“에린…….”
호단이 에린을 향해 복잡한 눈빛을 지어 보이며 읊조리고는.
“내 뒤에 바짝 붙어 있거라.”
카란디아를 보호하듯, 철퇴를 앞으로 세우며 에린을 경계했다.
그때.
-파지직!
다리에 번개를 휘감은 처용이 에린의 뒤에 나타났다.
본래는 카란디아를 지키려 했지만, 호단으로 인해 카란디아가 보호받는 상황.
호단은 룬테라에서 수호자라 불릴 정도로 방어 능력이 탁월한 전사였다.
그의 능력을 잘 알고 있는 처용이기에 그를 믿고 온전히 공세로 전환하기로 한 것.
-캬아! 크아아!
-쿠구구!
에린이 거친 마나를 내뿜으며 괴성을 내질렀다.
동시에.
-화륵! 화르륵! 쿠구!
그녀의 주변 일대가 뜨겁게 들끓더니, 허공에 불똥이 튀었다.
“인페르노인가……!”
-휘이이!
처용을 따라 에린을 공격하려 했던 네이션이 뒤로 물러나며 침음을 흘렸다.
에린이 발동하려는 마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7서클의 대마법사가 선보이는 위력이 강한 대마법 중 하나.
주변 일대를 화염으로 휘감아 대폭발을 일으키는 마법, 인페르노였다.
절대 정면으로 맞아서는 안 되는 마법 중 하나로 잘 알려진 마법이었다.
그러나.
-우우웅!
처용은 에린이 내뿜는 마나를 정면으로 들이받으며 강렬한 강기를 내뿜었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들끓는 불길 속에서 버티는 모습.
겉으로 봐서는 화염을 견디고 에린을 공격하려는 무모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처용은 인페르노를 견딜 수 있다 해도, 무모하게 정면으로 맞을 생각 따윈 없었다.
그 마법을 안 맞을 방법이 있는데, 굳이 맞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처용은 강기로 몸을 감싸 호신강기와 금강불괴의 힘을 끌어올림과 동시에.
“인페르노 버스트를 차단한다.”
-피이!
눈에 신력을 모아 집중하며 ‘차단의 눈’을 발동했다.
주시한 대상의 스킬이나 기술을 일시적으로 봉인하는 권능.
그 힘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화염을 휘감았다.
이윽고.
-파아아!
주변에 일렁이던 화염 줄기들이 바람처럼 흩어져 버렸다.
-캬아!?
준비한 대마법이 허무하게 사라져버리자, 에린이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칠 처용이 아니었다.
-슈화아아!
에린의 대마법이 실패한 여파로 흩어지려는 마나.
그 방대한 마나가 처용의 손아귀에 모여들었다.
-화륵! 피이이!
화염 속성의 힘이 순식간에 빛의 힘으로 변했고 처용 주변을 맴돌며 팔괘의 진법을 그려 내었다.
“팔괘명환진 – 광휘의 사슬.”
처용이 강탈한 마나로 빛의 진법을 그려내 기술을 발동하자.
-촤라라! 촤라라락!
환한 빛이 엮여 만들어진 새하얀 사슬이 튀어나와 에린을 휘감았다.
-캬아! 크아아!
사슬에 묶인 에린이 저항하듯 마나를 내뿜으며 몸부림쳤지만.
-쿠구! 쿠우우!
파마의 힘을 머금은 빛의 사슬에 짓눌려 큰 저항을 하지 못했다.
처용이 에린을 끝장내지 않고 굳이 묶은 이유가 있었다.
에린은 이미 검은 대지에 잠식된 존재가 되어 버린 상황.
강렬한 빛을 폭발시켜 가루로 만든다 해도, 되살아날 테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카란디아.”
바로 이들을 정화할 수단을 가진 존재.
카란디아가 그녀를 정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날 잡거라. 카란디아.”
호단이 왼손으로 카란디아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는.
-후욱! 쿵!
앞으로 빠르게 점프하며 순식간에 에린 앞에 도달했다.
카란디아가 지척에 다가오자.
-캬아! 크아! 크아아!
에린이 검은 눈물을 흘리며 더욱 발버둥 쳤다.
마치, 그녀를 잠식한 무언가가 카란디아를 거부하는 듯한 모습.
“늦어서…… 늦어서 정말 죄송해요…… 에린 님.”
카란디아는 그런 에린을 보며 사과의 말을 전하고는.
-탁. 피이이!
그녀의 이마에 왼손을 뻗으며 빛을 내뿜었다.
-파사사……!
이전, 잠식된 병사들과 호단처럼, 에린 역시 검은 진흙이 벗겨지며 잿빛으로 변해갔다.
카란디아의 능력, 빛의 포용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
문제는 그 여파로.
“으윽! 흐으윽……!”
-스르르……!
카란디아를 잠식하던 검은 반점이 더 크게 자라났다.
이제는 팔꿈치 아래로는 새하얀 피부가 보이지 않는 정도.
시커멓게 변해버린 왼팔에는 붉은 핏줄까지 흉측하게 돋아나 있었다.
-슈륵. 슈르륵.
그런 검은 왼팔에서 뻗어 나온 검은 줄기와 검은 핏줄들이 새하얀 그녀를 점점 잠식해 오고 있었다.
카란디아는 고통을 참으려 입을 꾹 닫고 인내했지만.
“흐윽! 윽! 흐읍!”
팔에서부터 전해져오는 강렬한 통증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울지 마라.”
-탁. 우우웅.
처용이 고통을 견디는 카란디아의 머리에 손을 얹고는 자비의 손길을 사용해 주었다.
동시에, 정화되어 가는 에린을 응시하며 흘러들어 오는 그녀의 기억을 읽기 시작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