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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계승자-427화 (427/726)

#427화

룬테라 왕국의 마지막 왕족, 카란디아.

여리고 새하얀 소녀가 자신의 몸이 잠식되어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정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을 빛으로 포용해 그들을 구원했지만, 그들의 진 고통을 대신 짊어졌다.

그러 카란디아의 모습은 멸망한 왕국을 구원하는 구원자와 같았다.

신비롭고 신성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카란디아의 정화를 돕던 처용의 눈에는 작금의 상황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동시에 방금, 카란디아가 호단을 정화하는 과정을 보며,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다.

작금의 과정이 의미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카란디아가 겪는 이 과정을 통해 종국에는 무슨 일이 발생할지 예상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회귀 전 크타니드의 무구, 마검 카란디아의 탄생이었다.

마검 카란디아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들은 영혼을 빼앗겨 악령이 되고 지배를 받는다.

카란디아의 능력은 포용하는 빛, 저주받은 이들을 정화하고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마검 카란디아는 온갖 악령들을 지배하고 그들의 힘을 다룰 수 있었다.

카란디아는 자신의 빛으로 포용한 이들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예시가 서로 완전히 같다고 볼 순 없었다.

그러나 마검 카란디아를 직접 상대해 본 처용의 입장에서는 둘이 서로 비슷하게 느껴졌다.

기원을 알 수 없는 마검 카란디아.

그리고 룬테라 정화의 의무를 짊어진 새하얀 소녀 카란디아.

영혼을 지배하는 검.

영혼의 힘을 다루는 소녀.

서로 같은 이름.

서로 비슷한 능력.

이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必然).

처용은 카란디아가 벌이는 이 과정이야말로 마검이 완성되는 과정으로 보였다.

굳이 표현하자면.

‘단조와 담금질인가?’

카란디아의 정화 과정이 무구를 만드는 과정 중 일부로 비추어졌다.

단조는 금속을 여러 번 두들겨 무구의 원형을 잡는 과정을 의미했다.

담금질은 완성된 무구 원형의 강도를 올리기 위한 열처리와 냉각 과정이었다.

지금 카란디아가 겪는 시련은, 추후 완벽한 마검으로 탄생하기 위한 과정으로 보였다.

처용은 작금의 상황을 보고 한 가지 더 깨달은 것이 있었다.

‘이 중앙에서 오는 에너지의 근원…….’

바로 왕국의 중앙에서 퍼지는 검은 대지를 만드는 에너지의 근원.

그 근원은 아스터의 작품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근원이 지닌 진짜 역할은 무엇인가?

‘이 아이가 중앙에 도달하는 순간 마검은 완성된다.’

바로, 정화를 끝낸 카란디아를 마검으로 만들기 위한 역할일 가능성이 컸다.

아직까지는 ‘가능성’에 가까웠지만, 처용은 그 가능성에 강한 확신을 가졌다.

처용이 카란디아와 아스터의 진짜 계획을 생각할 때.

“계속…… 계속 가겠습니다.”

카란디아가 고통을 참는 듯, 검은 핏줄이 돋아난 왼팔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

처용은 의지를 보이는 카란디아를 보며 잠시 생각하며 입을 열고는.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전부 정화해 나가는 것인가?”

카란디아를 향해 궁금한 듯 물었다.

검은 대지가 펼쳐진 이곳이 왕국이었던 곳이니만큼, 드넓은 장소였다.

이곳에 퍼진 잠식된 이들을 하나하나 정화해 나간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랐다.

“왕국의 중심에서 성역을 열 수 있다면…… 제가 단번에 정화할 수 있습니다.”

카란디아는 처용의 말을 바로 알아듣고는 구체적인 목적을 이야기했다.

바로 왕국의 중심부에 도달하여 성역을 여는 것.

그 성역의 힘을 이용해 이 땅에 퍼진 검은 대지를 단번에 몰아낼 계획이었다.

가장 빠르면서도 간단하다고 할 수 있는 방법.

그러나.

“너는 어떻게 되는 거냐?”

처용은 카란디아의 계획에 숨겨져 있는 문제점을 단번에 파악하며 물었다.

카란디아가 성역의 힘을 이용해 검은 대지를 단번에 몰아내고 이 땅을 정화한다.

그렇다면 카란디아는 어찌 되는 것인가?

지금 잠식된 이들을 이만큼 포용한 것만으로도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이 왕국에 퍼진 잠식을 단번에 정화한다?

그렇다면, 그 잠식을 자신이 단번에 받아들이겠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성역의 힘을 이용해…… 이 저주를 어느 정도 억누를 수 있습니다.”

카란디아는 처용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채며 말했다.

“너 자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처용이 작은 우려를 담은 목소리로 다시 묻자.

“제가 다른 무언가로 변한다 해도…… 해야 합니다.”

카란디아가 진지한 목소리로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듯 말했다.

“……그래, 알았다.”

처용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카란디아의 의지에 답했다.

“속도를 높이지.”

“카란디아 날 잡거라.”

속도를 높이겠다는 처용의 말에 네이션이 카란디아를 안아 들었다.

-파지직!

-샤라락!

처용이 한 줄기 벼락으로 변하며 앞으로 쏘아져 나갔고 그 뒤를 검은 바람으로 변한 네이션이 뒤따랐다.

이윽고.

“음?”

-파직.

처용이 의문을 내뱉으며 발걸음을 멈추었고.

-스르륵.

뒤따라오던 네이션 역시 처용의 옆에 멈춰 섰다.

“이건……?”

네이션의 품에서 내려온 카란디아가 정면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그들이 발걸음을 멈춘 이유.

-우웅! 우우웅!

앞길을 막고 있는 반구형의 거대한 검은 결계 때문이었다.

“왕궁을 지키는 결계는 그날 무너졌을 텐데…… 이게 어째서?”

카란디아가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벽과 같은 결계를 보며 의문을 자아냈다.

넓은 지역 전체를 반구형으로 감싼 검은 장막.

그것은 한때 룬테라 왕국을 보호하던 수호 결계였다.

본래는 새하얗고 투명한 결계였지만, 검은 대지 때문인지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어째서 이 결계가 복구된 거지?”

본래 이 결계는 아스터 교단의 군대와 천사들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런 결계가 시커멓게 변질된 채, 나타났다.

즉, 누군가가 다시 결계를 복구시켰다는 것.

“본래 파괴되었었던 룬테라의 수호 결계를 누군가가 복구시켰다?”

카란디아의 읊조림으로 작금의 상황을 파악한 처용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동시에.

-스르릉. 우우웅!

역천의 절을 꺼내 양손으로 쥐고 강기를 피워올렸다.

‘검성류-.’

-스릉.

처용이 양손으로 쥔 역천의 절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는.

‘봉우리 베기.’

-샤아악!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부드럽게 아래로 내리그었다.

그 결과.

-촤아아!

검은 벽이 세로로 크게 갈라지며 좌·우로 벌어졌다.

결계가 단번에 갈라진 듯 보였지만.

“칫……!”

처용의 인상이 작게 일그러지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침음이 흘러나왔다.

지금 세로로 크게 벌어진 결계 내부에는.

-꿀렁. 꿀렁.

보여야 할 내부의 모습 대신 끝없이 꿀렁거리는 어둠만이 가득했다.

눈앞의 결계는 세워진 벽처럼 막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었다.

검은 대지를 구성하는 뒤틀린 생명력이 서로 뭉치고 얽힌 덩어리에 가까웠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거대한 젤리가 왕국 중심을 뒤덮은 것과 같았다.

물리적으로 부수려면, 이 왕국을 덮은 젤리를 단번에 날려 버릴 수 있는 강력한 위력이 필요했다.

아무리 처용이라고 해도, 왕국 전체를 뒤덮은 결계를 단번에 부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꾸륵. 꾸륵. 슈르르륵!

처용이 갈라낸 결계의 균열이 꿈틀거리더니, 서로 붙으며 원래대로 복구되었다.

단번에 결계를 모조리 부숴 버리지 않는 이상, 이 결계는 무한히 재생한다.

결계에 무한한 힘을 공급하는 것은 바로 검은 대지.

검은 대지의 근원은 왕국 중앙에 있었다.

하지만, 왕국 중앙에 가려면, 앞을 막은 결계를 해제해야 했다.

결계를 해제하려면 왕국 중앙을 가야 한다…….

즉, 발걸음이 가로막힌 상황이었다.

“결계를 장악하는 건 불가능한가요?”

카란디아가 처용에게 궁금한 듯 물었다.

처용은 무려 신이 만들어 낸 결계도 강탈해 보였었으니까.

그러나.

“규모가 너무 크다. 이 결계 전체를 전부 장악하기엔 무리다.”

아무리 처용이 신의 결계를 장악할 수 있다고 해도, 눈앞의 결계는 커도 너무 커서 불가능했다.

인상을 찌푸린 처용이 카란디아의 말에 대답하고는.

‘세상 그 어떤 완벽해 보이는 기술이라 해도…… 공략법은 있다.’

여래의 가르침을 떠올리고 결계를 다시금 관찰하며 속으로 읊조렸다.

눈앞의 결계는 너무나도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강력한 기술이라 해도, 강력한 권능이라 해도, 빈틈이 있고 약점이 있는 법이었다.

눈앞의 결계 역시 공략법은 존재했다.

처용이 결계를 자세히 살피며 관찰을 이어나갈 때.

-화악. 피이이!

카란디아의 몸에서 옅은 빛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스르륵.

빛 속에서 네이션이 나타날 때와 비슷하게 잿빛의 안개가 흘러나왔다.

-화아아.

안개가 카란디아 앞에서 뭉치고 흩어지더니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림자만으로도 카란디아를 덮을 정도로 거대하고 우람한 덩치.

두 개의 뿔이 달린 둥근 투구와 그 아래 풍성하게 자라난 수염.

네이션과 같은 붉은 안광을 피워내는 잿빛의 전사.

카란디아의 빛 속에서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호단이었다.

“카란디아…….”

호단이 카란디아에게 오른손을 뻗으며 말을 걸자.

“호단 님.”

카란디아가 작은 미소를 보이며 호단의 손을 작은 두 손으로 잡으며 답했다.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에요.”

정신을 잃고 타락한 기운에 잠식되었던 자신을 정화시킨 소녀.

카란디아가 보이는 호의와 미소에 호단이 작은 미소를 짓고는.

“…….”

이내, 그 미소가 복잡한 감정이 일렁이는 굳은 표정으로 변했다.

그리고.

“네가 우리를 위해 희생할 필요는 없다. 카란디아…….”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을 이었다.

그 말에 카란디아가 고개를 들어 호단과 시선을 마주했다.

작은 소녀가 보이는 각오 어린 눈빛을 마주한 호단은.

“그렇구나…….”

이내,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으며 말했다.

그는 네이션과 같은, 룬테라의 왕족을 지키는 불사의 기사였던 자.

검은 대지에 잠식되었던 그는 카란디아의 포용에 정화되었다.

그로 인해 네이션과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귀속된 상태였다.

네이션과 카란디아가 서로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것처럼, 호단 역시 카란디아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호단은 카란디아에게서 느껴지는 굳센 의지를 인정했다.

동시에 카란디아의 뒤에 서 있던 처용을 마주하고는.

“이 아이를 지켜 주어서 감사하오. 다른 세계에서 온 자여.”

-탁.

오른쪽 주먹으로 왼쪽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감사를 전했다.

이 시대의 기사들이 상대에게 감사를 전할 때 보이는 인사법이었다.

“기억 공유인가?”

처용은 호단의 말에 이전, 카란디아가 했었던 말을 떠올리며 물었다.

-네이션 님을 통해 통해서 모두 보고 있었습니다.

의식을 잃고 잠들어 있었던 카란디아가 깨어나면서 한 말.

그녀는 잠들어 있는 동안, 네이션의 시야를 통해 처용을 지켜봤었다고 말했었다.

자신에게 속한 불사의 기사와 영혼이 연결되어 있기에 지닌 능력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카란디아의 빛 속에 포용된 호단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소.”

호단이 처용의 물음에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호단의 말에 처용이 카란디아를 잠시 바라보며 짧게 생각하고는.

“이 결계를 해제할 방법을…….”

호단을 향해 중요한 질문을 건네려 입을 열었다.

카란디아의 빛에 포용되었던 그가 지금 타이밍에 나타난 이유.

룬테라 왕국을 정화하려는 카란디아의 의지를 다시금 확인한 이유.

그리고.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면…… 그 운명을 이겨내길 바란다. 카란디아.

호단이 카란디아에게 포용되기 직전, 그가 건넸던 말.

즉, 룬테라의 관문을 지키던 그는 이 결계와 더불어 이 왕국에 퍼져 있는 비극에 대해 알고 있었다.

다시금 생각을 정리한 처용은.

“아니, 여기에 숨겨진 비밀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하던 말을 정정하고는 엄지로 자신의 뒤에 있는 결계를 가리키며 호단에게 물었다.

“……이 결계는 ‘그들의 계획’을 막기 위한 마지막 발버둥이라 들었소.”

호단이 처용의 물음에 입을 열자.

“에스라 성운?”

처용이 호단이 언급한 ‘그들’을 짐작하며 말했다.

“그렇소.”

그 말에 긍정한 호단이 말을 이었다.

“이 땅의 중심에 오염을 심어 자연의 근원을 타락시키는 것, 그리고…….”

호단의 입에서 에스라 성운이 이 땅에서 벌인 짓이 무엇인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전부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자신 또한 전해 들은 말에 불과하다는 말을 덧붙였으니까.

하지만 그가 전해 들은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그렇군.”

처용은 작금의 상황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나 홀로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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