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홀로 계승자-425화 (425/726)

#425화

검고 질척이는 대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는 장소.

-철퍽. 철퍽.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대지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검게 변한 나무와 식물들, 무너진 건축물들이 나타났다.

마치, 미사일 폭격이 휩쓸고 지나간 다음, 석유를 들이부은 듯한 광경이었다.

안쪽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점점 전쟁의 여파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쏴아아……!

하늘 위에서 검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흐음.”

이슬비처럼 옅게 내리는 비를 바라본 처용이 작게 침음을 흘렸다.

하늘 위에서 부슬부슬 떨어지는 검은 먹물과도 같은 빗줄기.

겉으로 볼 때는 닿기만 해도, 저주에 걸릴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대지 위에 생명을 뿌려는 것인가?”

처용의 눈에는 검은 빗방울 하나 하에 생명력이 깃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생명력을 머금은 비가 떨어져 내리는 것으로.

-차락. 차락.

검은 대지가 마르지 않도록 생명력을 충전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 비를 만들어 내는 근원은…… 더 안쪽이군.”

처용이 검은 대지의 너머를 바라보며 읊조리듯 말하자.

“전에 내가 혼자 왔을 때는…… 반 이상 나아갈 수 없었소.”

카란디아를 안아 든 네이션이 처용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아갈 수 없었다?”

“계속 가다 보면 알 것이오.”

처용의 물음에 네이션이 답한 순간.

-흐으어…….

-으어…….

검은 대지를 질퍽질퍽 밟으며 무언가가 나타났다.

좀비처럼 신음을 토해내며 흐느적거리는 모습으로 나타난 이들.

-우웅.

갑작스럽게 나타난 기척에 처용이 강기를 옅게 내뿜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창과 검, 방패를 쥐고 있는 듯한 검은 형체의 사람들.

겉으로 봤을 때는 검은 대지에 감염된 다크 헌터와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다크 헌터의 모습은 그림자가 일어선 듯, 칠흑같이 어두운 모습에 붉게 찢어진 눈과 입이 있었다.

반면에 작금 나타난 이들은 검은 피부라기보다는 검은 진흙을 뒤집어쓴 듯한 모습이었다.

이목구비가 없는 다크 헌터와는 다르게 눈·코·입이 드러나 있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꿀렁거리는 검은 진흙과 촉수를 뒤집어쓴 사람에 가까웠다.

그리고 다크 헌터는 재빠르게 움직이며 공격해 왔었지만.

-으어.

-으…….

-철……퍽. 철퍽.

눈앞에서 흐느적거리며 다가오는 놈들은 다크 헌터에 비해 느려도 너무 느렸다.

“잠식된 자들…….”

네이션이 다가오는 이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잠식된 이들이라?”

처용이 네이션의 말에 답한 순간.

-캬아!

-휙!

가까이 다가온 검은 병사, 잠식된 존재가 괴성을 지르며 처용에게 창을 내질렀다.

평범한 병사가 공격하는 듯한, 단순한 찌르기.

처용은 피하지 않았고 이내 날카로운 창날이 처용의 오른쪽 어깨를 타격했다.

그러자.

-탁.

창으로 바위를 찌른 듯,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마나를 두른 것도 아닌, 그저 금강불괴의 특성만으로 막아낸 것.

“화염부 – 소각.”

처용이 화염부 한 장을 소환하여 흩뿌리자.

-화르륵. 화륵.

가까이 다가온 잠식된 병사들이 화염이 휩싸였다.

-철퍽. 철퍽. 철푸덕.

화염부 한 장만을 사용한 위력임에도 잠식된 병사들이 불붙은 허수아비처럼 허무하게 쓰러졌다.

그러나 불꽃이 완전히 전소되고 병사들이 잿더미가 된 순간.

-슈르륵. 슈륵. 철퍽.

검은 진흙들이 서로 뭉쳐 들더니.

-크아.

-으아아.

잿더미로 변했던 병사들의 몸이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흐음.”

부활한 병사들을 관찰한 처용은.

-탁!

병사 중 한 명에게 다가가 목덜미를 틀어쥐었다.

-캬아아!

목덜미를 잡힌 병사가 흐느적거리며 발버둥을 칠 때.

‘포확.’

-우우웅.

처용이 최근 새로 얻은 권능을 발동했다.

상대의 힘을 장악하여 흡수하는 권능인 포확.

포식군주 뤼장첸을 잡아먹고 선인의 육체에 추가된 권능이었다.

-푸화아아!

병사의 목덜미를 잡아챈 처용의 손아귀로 검게 질척이는 진흙들이 빨려 들어왔다.

진흙이 모두 처용에게 흡수되자.

-까……까각.

처용에게 붙잡혔던 병사는 검은 뼈만 남은 채, 부들거렸다.

그리고.

-파사삭.

처용이 손을 놓자 바닥에 떨어졌고 검은 가루가 되며 흩어졌다.

[팔괘축기의 괘(卦)에 ‘뒤틀린 생명의 근원 일부’가 저장되었습니다.]

“으음…….”

처용이 병사에게서 빼앗은 정체불명의 힘을 관찰하며 침음을 흘렸다.

그때.

-꾸르륵. 꾸륵.

발밑에 떨어져 내리며 가루처럼 흩어졌던 병사 쪽으로 검은 진흙이 뭉쳐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어어.

처용에게 생명력을 강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생명을 얻어 몸을 일으켰다.

“화염부.”

-화르륵.

처용은 귀찮게 엉겨 붙는 병사들을 다시 태워 버린 후, 강탈한 검은 생명력을 관찰했다.

그리고.

“대충…… 원리는 알겠네.”

깨달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읊조렸다.

지금 발밑에 펼쳐진 검은 대지는 생명력이 가득한, 기름진 땅과 같았다.

그런 검은 대지에 잠식된 이들은 모두 검은 대지에서 생명력을 전달받고 있었다.

죽고, 죽고 계속 죽어도 생명력을 받고 무한하게 되살아난다.

포확으로 생명력의 근원까지 강탈당했음에도, 검은 대지가 다시 생명력을 보급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아마테라스의 진법에 의해 무한히 되살아나는 뤼장첸과 비슷했다.

다만, 여기서 드는 의문이 한 가지 있었다.

뤼장첸의 경우는 태초의 조각이 이식된 에블린이 에너지의 근원이었다.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검은 대지의 근원은 과연 무엇인가?

지금으로써는 그것을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알아낸 사실은.

‘이 에너지의 근원은 ‘중심부’에 있다.’

검은 대지에 흐르는 생명력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처용이 검은 대지의 원리를 파악했을 때.

-샤라락.

검은 대지와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백색의 소녀, 카란디아가 처용 옆에 나타났다.

-탁.

자세를 숙인 카란디아가 손을 뻗은 곳은 다름 아닌.

-으어어.

처용에 의해 불태워져, 다시 몸을 복구하고 있는 잠식된 병사였다.

카란디아의 손이 고개를 들려는 병사의 머리에 닿은 순간.

-화아아!

환한 빛이 잠식된 병사를 휘감았다.

-화아! 화아악!

그 주변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로 빛에 휩싸였다.

-파아아.

빛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병사들 몸에 질척거리며 달라붙어 있던 검은 진흙이 씻겨 내려갔다.

-스르륵. 철퍽. 철퍽.

이내, 검은 진흙이 완전히 벗겨진 병사들이 잿빛으로 변했다.

마치, 하얀 옷에 묻은 검은 물감이 씻겨 내려가고 그 잔재가 남은 듯한 모습.

-으…….

-여……긴?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침음을 내던 병사들의 목소리가 조금 뚜렷해졌다.

“정신이 드시나요?”

카란디아가 모습이 변한 병사들을 바라보며 말하자.

-무녀……님?

-단장님…….

고개를 든 병사들이 카란디아와 네이션을 알아본 듯한 반응을 보였다.

“미안합니다. 더 일찍 찾아왔어야 했는데…… 모두 내 잘못입니다.”

카란디아가 울먹이는 듯, 슬픔이 일렁이는 목소리로 말하자.

-우리의…… 잘못…….

-지키지 못 했……습니다.

병사들이 딱딱 끊어지는 목소리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자신을 탓하는 카란디아에게 그녀의 탓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해방에…… 감사를.

-돕겠습니다…….

작게 미소를 짓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인 병사들이 마지막 말을 전하고는.

-스르르르……!

잿빛의 가루처럼 흩어져 카란디아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화아아. 스르륵.

카란디아에게서 옅게 뿜어져 나온 빛이 잿빛의 안개를 빨아들였다.

“이것이 ‘정화’인가?”

처용이 카란디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빛줄기를 보며 묻자.

“완전한 정화…… 라기보단, 속박된 이들을 제가 거두었다고 할 수 있겠군요.”

카란디아가 복잡한 감정이 일렁이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처용은 카란디아의 말을 이해함과 동시에.

-이곳을…… 사수해야 한다!

-어떻게든 막아라!

그녀에게서 흘러들어오는 여러 감정이 느껴졌다.

이곳을 지켜야 한다는 굳은 의지.

그 의지는 카란디아의 감정이 아닌, 방금 그녀에게 흡수된 병사들의 감정이었다.

아스터 제국에게 침공받는 룬테라 왕국.

그 왕국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끝내 목숨을 잃은 병사들.

카란디아는 신수의 격을 통해 처용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녀가 흡수한 병사들의 감정과 의지는, 그 연결을 통해 전해진 것이었다.

“이 땅에 묶인 백성들의 속박을 풀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군.”

처용이 카란디아의 말이 이해했다는 듯 답했다.

동시에 카란디아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카란디아의 속성은 다름 아닌 ‘빛’이었다.

다만, 흔히 알려진 빛의 특성과는 차이점이 있었다.

빛이란 어둠을 불태우고 정화하는 특성이 강했다.

어둠과는 완전히 상극에 위치한 속성.

그러나.

‘흡수…… 아니 포용(包容)인가?’

카란디아의 빛은 대상을 빛으로 태워 버리는 정화의 특성이 아니었다.

대상을 빛으로 감싸 포용하여 정화하는 것이 그녀가 가진 빛의 특성이었다.

그녀는 병사들을 구속하고 있는 근원의 일부와 그들의 영혼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마지막 남은 룬테라의 왕족이자, 룬티르 일족을 이끌어야 할 카란디아.

카란디아는 저주로 속박된 룬테라의 백성들을 정화하고 그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으……!”

몸을 일으키는 카란디아가 작게 인상을 쓰고는 왼손을 옅게 떨며 침음을 흘렸다.

처용이 그 모습을 잠시 보고는.

“……이런 방식으로 계속 가다간, 네가 망가질 거다.”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처용의 시선이 닿은 곳은 카란디아의 떨리는 왼손.

그녀의 왼손 새끼손가락과 약손가락에 검은 얼룩이 번져 있었다.

카란디아가 지닌 빛의 특성은 정화와 포용.

그 포용의 대상은 잠식된 병사들의 영혼만이 아니었다.

바로 그들을 잠식하던 정체불명의 검은 생명력.

그것 역시 카란디아의 포용에 의해 흡수되었다.

새하얀 도화지 같은 그녀에게서 검은 물감이 떨어진 듯 생겨난 검은 얼룩.

그것은 그녀가 병사들을 속박에서 풀어주고 받은 대가라고 볼 수 있었다.

“자비의 손길.”

-우우웅.

처용이 카란디아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자비의 손길을 사용했다.

새하얀 소녀를 오염시키는 듯 보이는 새까만 얼룩.

보기만 해도 좋지 않아 보였으니까.

그러나.

-스륵. 스륵.

카란디아를 잠식한 검은 얼룩이 자비의 손길에 반항했다.

마치, 카란디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를 거부하는 듯, 검은 점이 크기를 키웠다가 줄이기를 반복했다.

“우윽……!”

그런 힘 싸움에 영향을 받았는지, 카란디아가 고통 어린 침음을 토해냈다.

결국, 처용이 권능을 거두고 카란디아에게서 손을 뗐다.

“판테라움 같은 녀석이군.”

처용이 카란디아의 얼룩을 노려보며 읊조렸다.

지금 카란디아의 모습을 보며 성녀가 떠올랐다.

성녀의 몸을 잠식하고 서서히 죽도록 만들었던 판데모니움의 광물, 판테라움.

카란디아에게 달라붙은 검은 얼룩, 뒤틀린 생명의 근원은 판테라움과 같은 지독함이 있었다.

자비의 손길만으로는 바로 떨어뜨릴 수 없었다.

다만, 효과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고통이 조금 줄어들었어요.”

카란디아가 조금 편안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잠식된 손가락에서부터 퍼져 오던 고통이 누그러졌으니까.

“…….”

처용은 카란디아의 상태를 다시금 살펴보며 잠시 생각하고는.

“……계속 가지.”

앞으로 나아가자 말하며 발걸음을 옮겼고 그 뒤를 카란디아와 네이션이 뒤따랐다.

이후에는 방금과 비슷한 과정이 반복되었다.

-캬아아!

-크아!

앞으로 나아가는 일행들 앞에 검은 대지에 잠식된 병사와 시민들이 몰려들었고.

-화아아!

처용과 네이션이 그들을 무력화시키면, 카란디아가 정화를 시작한다.

순조롭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으흑…….”

카란디아를 잠식하던 검은 얼룩이 왼손의 절반까지 차올랐다.

고통이 심해지는 듯, 인상을 쓰는 빈도가 늘었다.

처용이 중간중간 자비의 손길을 사용해 주고 있었지만.

-스륵. 스르륵.

카란디아를 잠식하는 검은 얼룩을 완전히 정화하는 것은 불가능.

그저 고통을 조금 억눌러 주는 것에 불과했다.

보통이라면, 여기서 잠시 정화를 중단하고 다른 방법을 찾을 법했지만.

“계속…… 가겠습니다.”

“그러지.”

계속 나아가겠다고 의지를 보이는 카란디아의 말에 처용이 답했다.

네이션은 카란디아가 걱정되는 듯한 분위기를 보였지만.

“제가……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완강한 의지를 드러내는 카란디아의 말에 마지못해 돕고 있었다.

처용 역시 그녀의 의지를 존중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동시에.

‘이 과정이…… 아니, 아직 확신할 수 없다.’

카란디아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듯 속으로 읊조렸다.

-쏴아아.

앞으로 계속 나아갈수록,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조금씩 강해졌다.

“자.”

-우웅.

처용이 카란디아를 향해 아공간에서 우의를 꺼내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우의를 받아 뒤집어쓴 카란디아가 처용에게 감사를 전하고는.

“조금 더 가면 관문이 나올 겁니다.”

앞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윽고.

-쏴아! 쏴아아!

검은 강물이 거칠게 흐르는 강.

그 위에 놓인 거대하고 넓은 돌다리.

다리 끝에 세워진 검은 성벽.

카란디아가 말했던 룬테라 왕국의 관문이 나타났다.

그리고.

-…….

관문의 바로 앞, 다리 끝에 상당한 덩치를 지닌 검은 인영이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설마?”

그 모습을 본 카란디아가 목소리를 떨며 읊조렸다.

그 순간.

-지잉.

죽은 듯 보였던 상당한 덩치의 인영이 숙였던 고개를 들며 붉은 안광을 번뜩였다.

동시에.

-쿠구구! 쾅!

오른손에 쥐고 있던 두꺼운 철퇴로 바닥을 내리찍으며 몸을 일으켰다.

나 홀로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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