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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계승자-424화 (424/726)

#424화

“생각해 보니, 조금 이상한데……?”

아나샤와 그녀의 왕국에 새로운 이름을 지어 준 처용이 의문을 느끼며 읊조렸다.

조금 전 아나샤가 했었던 말 중에,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왜 룬테라 왕국은 뒤늦게……?”

아스터 제국은 에스라 성운의 신들에게 허락받지 않은 힘은 모두 이단으로 간주한다.

다만 신하를 자처하고 고개를 숙인 이들에겐 새로운 이름을 하사하고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룬테라 왕국은?

그들이 아스터 교단을 거부했다면 진작 사라졌어야 할 국가였다.

이단이라 낙인찍은 룬테라는 왜 미리 정벌하지 않고 뒤늦게 정벌했는가?

이것이 좀 의문이었다.

그러나 생각을 잇던 처용은 곧.

“……아아.”

의문을 이어간 끝에 깨달을 수 있었다.

“실험체를 구하기 위해, 신하 왕국이었던 룬테라를 희생시켰군?”

비웃음이 섞인 처용의 말이 울리자.

“네…… 룬테라도 아스터 제국의 신하 왕국 중 하나였습니다.”

처용의 예상이 맞다는 듯, 카란디아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아스터 제국에서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 온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본래, 로스톤 왕국과 마찬가지로 아스터 제국의 신하 왕국이었던 룬테라.

아스터 제국은 그런 룬테라에게.

-특별한 능력을 가진 아이들을 매년 천 명씩 헌납해라.

터무니없는 명령을 내렸었다.

매년 특별한 능력을 타고난 아이들을 천 명을 실험체로 헌납하라는 것.

당연히 룬테라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룬테라가 아스터 제국의 요구를 거절한 순간.

-위대하신 신들의 지엄한 뜻을 거부하다니!

룬테라 왕국 전체가 이단이 되었다.

그 이후는, 흔히 알려진 내용대로였다.

“참…… 재밌는 짓거리를 했네?”

처용이 입꼬리를 쓰윽 들어 올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 처용의 미소 속에 악의적인 감정과 살심(殺心)이 추가되며 어두운 기류를 내뿜었다.

“알려줘서 고맙다. 덕분에…… 아주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어.”

카란디아가 알려준 룬테라 왕국의 사정을 듣고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놈들이 치사한 짓거리를 한다면, 그것에 두 배, 아니 열 배로 되돌려 준다.

처용이 배신자들과 적들을 대하는 대표적인 방법 중 하나였다.

“아나샤, 아스터 제국 측에 내 말을 전해.”

생각을 마친 처용이 아나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참회의 신관이 저지른 ‘만행’으로 내 기분이 많이 상했다고.”

“뭐라고 요구할까요?”

아나샤가 처용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묻자.

“만 하루 동안, 아스터 제국의 모든 신관이 머리를 박고 용서를 빌라 전해.”

처용이 짙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당연히.

“놈들이 그 요구를 받아들일 리가-.”

아나샤는 절로 아스터 제국이 받아들일 리가 없는 요구라 생각하며 말했다.

“당연히 없지.”

처용 역시 아스터 제국이 자신의 억지를 받아들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한국의 속담을 언급하는 처용의 말에 아나샤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놈들에게 이 말도 같이 전해. 내게 진심 어린 용서를 빌지 않으면…… 이번엔 백 개라고.”

처용의 이어지는 말이 울리자.

“아하……? 그리 전하겠습니다.”

아나샤는 처용이 방금 말한 속담의 의미와 처용의 말을 이해하며 대답했다.

아스터 제국을 향해 터무니없는 요구를 전달하는 마신.

놈들은 마신의 요구를 거절하는 순간…… 신전 백 개가 사라진다.

그 과정에서 일어날 피해는 덤이었다.

처용의 억지는 아스터 제국이 저지른 횡포를 그들에게 똑같이 되돌려주는 행위였다.

타국에 터무니없는 요구를 강요했던 놈들에게 똑같이 터무니없는 요구를 강요한다.

상대를 괴롭힐 이유와 명분을 강제로 만드는 것이었다.

놈들이 그것을 거절한다?

그렇다면, 아스터 교단 놈들이 했었던 보복처럼 똑같이 보복을 가한다.

더럽고 치사하고 치졸한 방법이었지만.

“놈들을 배려해 줄 이유 따윈 없지.”

처용은 지금껏 놈들이 저질러 온 치졸한 행동을 열 배, 백 배로 되돌려 줄 생각이었다.

지금의 억지는 이른바 시작에 불과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비하면…….

“유예 기간은 삼일 정도 주면 괜찮겠습니까?”

“적당하네.”

아나샤의 물음에 처용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고는.

“그럼 가지.”

가볍게 땅을 박차 뛰어오르며 성벽 밖, 북쪽을 향해 나아갔다.

“꽉 잡거라. 카란디아.”

-스르륵.

카란디아의 뒤에 나타난 네이션이 팔로 의자를 만들어 주듯, 카란디아를 안아 들었다.

-휘이이!

네이션이 다리에 검은 바람을 휘감으며 땅을 박찼고 처용을 따라갔다.

처용과 네이션이 멸망한 룬테라 왕국의 땅으로 향하자.

“출발했나 보네?”

-슈르륵!

허공에 물줄기가 뭉치더니, 연아와 연화가 나타났다.

둘은 왕국 내부에 자리한 아스터 교단의 세력을 정리하던 뱀파이어들을 돕고 오는 길이었다.

이제 왕국 내에는 불손한 세력이 거의 없어진 셈이었다.

“감사합니다. 저희 자력만으로는 절대로 하지 못했을 일입니다.”

아나샤가 큰일을 도와준 둘에게 감사를 전했다.

왕국이 가진 자력만으로 아스터 교단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기란 불가능했다.

하지만, 상당한 무력을 가진 소수 정예들이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 결과, 왕국을 암세포처럼 갉아먹던 아스터 교단의 거의 모든 세력이 적출되었다.

이제 맑아진 내부를 더 단단하게 다지고 외부의 적을 신경 쓰기만 하면 되었다.

“우리 마신께서 도와주라고 했으니까.”

연아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리고.

“내부를 정리한 김에, 국경 근처에 있는 모든 신전들도 정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스륵.

연화가 성벽 위에 서서 전방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야를 집중하는 듯, 눈을 조금 가늘게 뜬 그녀의 동공 속에는.

-…….

-……!

멀리 보이는 산속에서 이곳을 감시하는 이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마침, 나도 저놈들이 거슬리던 참인데.”

연아 역시 멀리서 감시하는 이들을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복아.”

감시자들을 노려보던 연화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복이, 자신의 주력함을 불렀다.

그러자.

-화아!

국경 성벽의 하늘 위, 구름을 헤치고 거대한 거북이가 나타났다.

“저 산이 거슬린다.”

연화가 산속에 모습을 숨긴 이들을 노려보며 입을 연 순간.

-……피이이! 피이!

복이의 등껍질 위에서 물과 바람의 포격이 산 위로 쏟아졌다.

-……쿠구! 쿠구!

난데없이 폭격을 당한 산이 흔들리며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으읍! 푸화아아!

숨을 크게 들이쉰 복이가 포격에 깎여나가는 산을 향해 브레스를 내뿜었다.

-쿠구구! 쿠콰과-!

연속된 포격에 이어 복이의 브레스까지 작렬하자 국경에 가까웠던 산 하나가 완전히 무너졌다.

당연히, 그 산속에서 이곳을 감시하던 이들 중 살아남은 이는 없으리라.

“몇 번 반복하면, 두 번 다시 감시할 생각은 하지도 못하겠지.”

연화가 거의 흔적만 남은 산을 바라보며 읊조리자.

“이야~ 이젠 손짓 한 번으로 산을 옮겨…… 아니 사라지게 만드네?”

연아가 왼손을 펴 이마에 대고 먼 산을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불과 몇 초 만에 산 하나가 무너진 상황.

그 큰일을 벌인 이들이 가벼운 모습을 보이는 광경에, 아나샤를 포함한 다른 이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늘 위에서 폭격을 퍼붓는 거대한 거북이라…… 이젠 더 놀라울 일도 없을 것 같습니다.”

아나샤가 하늘 위에 떠 있는 연화의 함선, 복이를 올려다보며 읊조리자.

“하하, 언니의 함선보다 적어도 열 배 이상은 큰 거대 전함도 있는데?”

연아가 놀람 섞인 아나샤의 말에 미소를 섞으며 말했다.

아나샤가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는 듯, 이상을 찌푸리자.

“저희 세계에 하늘을 나는 전함…… 아니 성이 있습니다.”

연화가 조금 쉽게 풀어 설명해 주었다.

“……하늘을 나는 성이요?”

아나샤가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철과 바위로 만들어진 성이 하늘을 나는 모습이 잘 상상이 되지 않았으니까.

“뭐…… 나중에 커맨더 아저씨의 마키나를 보면 알게 될 거야.”

아나샤의 반응을 본 연아가 기대 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로스톤, 아니 이제 아라한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생긴 왕국.

처용과 네이션, 카란디아가 아라한을 떠난 지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여기군.”

-샥.

처용이 발걸음을 멈추고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휘리릭. 스륵.

검은 바람이 옅게 몰아치며 카란디아를 안아 든 네이션이 나타났다.

“이곳에…… 다시 돌아왔군.”

네이션이 앞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이 일렁이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검은 대지…… 아니, 조금 다른데?”

처용이 전방을 관찰하며 앞으로 한 발자국 나아가자.

-찰팍.

처용의 발밑에서 질척이는 소리가 울렸다.

앞으로 내뻗은 처용의 오른발과 뒤에 있던 왼발.

그 사이에는 마치 세상을 나누는 경계선처럼, 색이 나누어져 있었다.

왼발이 자리한 장소에는 흙과 잡초가 자라난 평범한 땅.

그러나 앞으로 한 발 내뻗은 오른발이 자리한 장소는 석유가 흩뿌려진 듯, 새까맣고 질척이는 땅이 이어졌다.

겉으로 봐서는, 천교의 성지에 나타났었던 ‘검은 대지’와 아주 흡사했다.

그러나 명확한 차이점이 존재했다.

“으음…… 저주? 아니,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처용이 오른발을 통해 느껴지는 땅의 기운을 감지하며 읊조렸다.

검은 대지는 발을 들이는 생명체의 생명을 무차별적으로 빨아들이고 오염시키는 특성이 있었다.

그 오염이 심해지고 끝에 달한 순간, 영원히 어둠에 빠져 되돌아올 수 없었다.

평범한 인간과 짐승은 괴물이 되고 헌터는 ‘다크 헌터’라는 몬스터가 되어 버린다.

죽음의 대지를 퍼트리고 발을 들인 이들의 생명력을 갉아먹는다.

이것이 검은 대지의 특징이었다.

반면에.

“보기와는 다르게 생명력이 넘치는 땅이군?”

눈앞에 보이는 검고 질척이는 땅은 죽음의 땅이 아니었다.

오히려 생명력이 가득 응축되어 있었다.

질척이는 검은 대지 속에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생명력이 가득했다.

천교에 발생했던 검은 대지가 영양가 하나 없는, 가뭄이 들이친 땅이라고 한다면.

눈앞에 보이는 검은 대지는 거름을 잔뜩 뿌린 생기 넘치는 땅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서로 비슷했지만, 둘의 차이점이 명확했다.

그리고 천교의 검은 대지와 눈앞의 검은 대지가 다르다는 사실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역시…… 회귀 전과는 다르다.’

회귀 전에는, 에스라 대륙 북부에 아무것도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검은 대지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마르고 갈라진 황야만이 넓게 펼쳐진 땅이었다.

그렇다면, 처용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로 인해 생명이 넘치는 검은 대지가 사라졌다는 것.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가능성은.

‘이 땅은 마검 카란디아의 탄생과 관련이 있다. 확실하다!’

검은 대지가 사라진 이유가 바로 카란디아와 관련이 있다는 것.

회귀 전, 크타니드의 주력 무구였던 마검 카란디아가 여기서 만들어졌다는 가설이 성립했다.

두 눈으로 에스라 대륙 북부가 회귀 전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까지 한 상황.

검은 대지를 바라보는 처용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기부터 와 보길 잘한 것 같네.”

처용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읊조렸다.

마검 카란디아의 탄생.

에스라 대륙에 일어났었던 대격변.

적어도 이 두 가지가 룬테라의 멸망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이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에스라 성운이 벌이는 개수작이었다.

그 개수작을 미연에 방지할 타이밍을 잘 잡았다.

게다가.

‘마검을 내 손에 쥘 가능성이 커졌군.’

새로운 힘을 거머쥘 가능성 또한 생겼다.

회귀 전, 재앙으로 맞이했던 강력한 힘을 강탈하고 역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처용은 기대감 어린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가지. 이 안에 무엇이 있는지 직접 확인해보자고.”

멸망한 룬테라 왕국, 생명력 넘치는 검은 대지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 홀로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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