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홀로 계승자-423화 (423/726)

#423화

헬리오폴리스 성역 가장 깊은 장소.

태양 빛이 은은하게 비추는 주신의 성역.

-화르륵.

성역 중앙에서 금색의 불길이 타오르더니, 헬리오폴리스 성운의 주신, 라가 나타났다.

그리고.

-화르륵.

라의 옆에서 녹색의 불길이 타올랐고 그 속에서 오시리스가 걸어 나왔다.

라는 순혈 의장인 Ⅰ, 오시리스는 순혈 의회의 멤버인 Ⅹ.

둘은 순혈 의회가 끝나고 되돌아온 것이었다.

“하아…….”

라가 지친 안색으로 자리에 앉자.

“위험했습니다. 태양신이시여.”

그녀의 오른쪽에 자리한 오시리스가 걱정과 불안감을 내비치며 말했다.

“자칫 잘못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뻔했습니다.”

“……위험을 감수할 가치는 있었지.”

라가 오시리스의 걱정 어린 말에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그리고 어차피 벌어졌을 일이었다.”

이내 곧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으며 말을 이었다.

순혈자들 중에서도 선택을 받는 극소수, 순혈 의회의 멤버들.

라는 그런 이들의 수장인 순혈 의회 의장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의장이라 해도, 순혈자들의 행동을 강제하거나 명령할 수는 없었다.

순혈 의회를 개최하고 관리하는 역할만 할 뿐, 나머지는 다른 순혈 의회 멤버들과 다르지 않았으니까.

안건이 생기면 찬반 투표를 하거나, 의견을 제시하기만 할 뿐, 의회를 주도할 순 없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순혈자들은 의장인 1, 라를 좋게 보는 이들이 없었다.

오히려 협조적이지 않고 개인적인 이득만 생각하는 이들은 약과였다.

진짜 문제는 옥황상제와 같은 이들.

호시탐탐 라의 자리를 노리는 이들이 골칫거리였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

혹은 새가 떠나는 것이지 산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라는 타락할 대로 타락해 버린 산, 순혈 의회를 버리고 은거할 생각도 했었다.

이 욕망과 추악함에 오염될 대로 오염된 장소에 계속 있으면, 자신도 물들어 버릴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라는 당장 의장직을 때려치우고 싶어도 그러지 않았다.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는 안 봐도 뻔했으니까.

그것이 라가 의장직을 버리고 싶어도 버리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문제는 라가 의장직을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처지가 위태롭다는 것.

오늘 있었던 순혈 의회만 해도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은밀하게 대비를 갖추고 있지만…… 더는 위험합니다. 태양신이시여.”

오시리스가 조금 전, 순혈 의회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걱정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악의 종주가 직접 나타나 라를 압박하던 상황.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아찔한 상황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서 다 엎고 라와 함께 순혈 의회를 나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미리 대비를 잘 갖춘 덕분에, 위기를 기회로 만들지 않았느냐?”

라는 여기서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오시리스의 말대로 위태위태한 상황인 것은 사실이었다.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얇은 줄 위에 서서 줄타기를 하는 듯한 아슬아슬함이 계속되었으니까.

자칫 한 발자국이라도 잘못 딛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저희를 도와주시기로 하셨으니, 저 역시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런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는 라가 떨어지지 않도록 뒤에서 지지해주는 이가 있었다.

조금 전, 순혈 의회 당시.

-서둘러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지, 그러니 당장 그년을 잡아.

자비의 대신에게 광기 어린 집착을 보이며 라를 독촉해오는 옥황상제.

라는 그런 옥황상제에게 자비의 대신이 지닌 비밀을 폭로해 버렸다.

라가 어째서 자비의 대신이 지닌 비밀을 알게 되었는가?

-혹시 모르니 알고 계십시오.

옥황상제의 의심대로, 당사자가 직접 라에게 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옥황상제가 계속 당신에게 재촉을 가한다면, 역으로 그를 압박할 수 있는 수단이 될 것입니다.

그로 인해 옥황상제가 공공의 이익이 아닌,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려 한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항시 보현과 소통하며 대비책을 준비해 두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라가 보살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일부러 헬리오폴리스 주신의 성역에 발을 들이며 외부에 모습을 보였던 자비의 대신.

그런 그녀와 라가 단둘이 만나 했었던 이야기의 주된 목표는 크게 두 가지였다.

-악의 종주가 정신이 다른 데 팔린 지금이 순혈 의회를 흔들 기회입니다.

첫 번째는, 태초의 그릇 수색으로 악의 종주가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순혈 의회를 단합하지 못하게 흔드는 것.

덕분에 항상 견제와 압박을 받던 라가 역으로 옥황상제에게 압박을 가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옥황상제를 역으로 압박하려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능구렁이답게 라가 준비한 역공을 잘 받아치기도 했으니까.

라 역시, 겨우 이 정도로 옥황상제의 입지를 크게 줄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옥황상제의 견제가 아니었다.

순혈 의장인 라의 안전 확보. 그것이 최우선이었다.

보살과 미리 말을 맞추고 여러 상황에 대한 대비를 한 덕분에 위기를 무사히 넘어갔다.

아니, 위기를 넘기고 오히려 기회로 만들었다.

“이것으로…… 관리자가 모든 준비를 마칠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었으면…….”

코앞으로 다가왔던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시간을 확보한 상황.

라는 겨우 만들어 낸 이 기회가 물거품이 되지 않기만을 바랐다.

***

젠타 왕국이 마신이라는 재앙을 맞이하고 하루가 지난 시점.

“이상할 정도로…… 놈들이 조용하군요.”

로스톤 왕국 수도 성벽 위에 선 아나샤가 전방을 멀리 보며 읊조렸다.

참회의 신관이 벌인 인질극으로 인해, 처용이 자극을 받고 움직였다.

그 결과 아스터 교단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곧장 보복을 가해 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그러나 아스터 제국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이단이라는 명목 하나만으로도 대대적인 군대를 조직할 법할 놈들인데…….”

아나샤는 너무나도 고요한 작금의 상황에 이질감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당장은 움직이지 못할 거다.”

-탁.

처용이 아나샤의 옆에 서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놈들은 단기간에 수습할 수 없을 정도의 피해를 받았으니까.”

무려, 서른 개 이상의 신전 파괴.

셀 수 없을 정도의 사상자까지.

처용의 말대로 아스터 교단이 입은 피해는 단 하루 만에 해결할 수 없는 상당한 피해였다.

당장 입은 피해조차도 수습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보복을 준비한다?

아무리 거대한 세력을 자랑하는 아스터 교단이라 해도 당장은 무리였다.

“그렇군요. 덕분에 저희도 준비를 해 둘 시간이 생겼습니다.”

아나샤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리고.

“바로 가시는 겁니까?”

처용 옆에 선 카란디아를 보며 말을 이었다.

“놈들이 정신없이 방황할 때, 일을 끝내 두는 게 수월하니까.”

아나샤의 말에 처용 역시 카란디아를 눈짓하며 말했다.

처용이 가장 우선하여 처리하기로 한 것은 바로 룬티르 일족이었으니까.

아스터 교단이 상당한 피해를 입고, 그 뒷수습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서둘러 처리할 생각이었다.

놈들이 룬티르 일족을 희생시켜 무엇을 했는지 직접 확인할 필요도 있었으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연락을 보내라.”

말을 마친 처용이 발걸음을 돌리려는 때.

“저…… 용님.”

아나샤가 처용을 불렀다.

처용이 마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한 바, 이제 그를 마신이라고 부르기가 애매했다.

그랬기에 다른 이들, 뱀파이어와 카란디아가 그를 부르는 호칭을 부르기로 한 것이었다.

“필요한 거라도 있나?”

처용이 아나샤의 부름에 답하자.

“저는…… 로스톤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싶습니다.”

아나샤가 쭉 생각해 왔던 용건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로스톤은 이 왕국의 이름, 이 왕국의 왕족으로 태어난 그녀에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아주 먼 옛날, 왕국이 세워질 때부터 이 땅을 지칭해온 이름.

아나샤는 그런 오랜 전통을 이어온 이름을 버리겠다고 말했다.

“그 이름이 싫은가 보군?”

처용이 아나샤를 향해 물음과 동시에.

‘하긴, 이 이름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었지.’

회귀 전, 아나샤가 로스톤이라는 이름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로스톤이라는 이름은…… 아스터 제국에게 복종하는 대가로 받은 이름이니까요.”

아나샤가 왜 왕국을 지칭하는 이름을 버리려 하는지 이유를 이야기했다.

아스터 제국은 에스라 성운의 신들에게 허락받지 않은 힘은 모두 이단으로 간주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룬테라 왕국.

그들이 다루는 자연의 힘이 이단으로 낙인찍힌 이유가 바로 에스라 성운이 신들이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강철의 정령이라는 룬테라 왕국 못지않은 독특한 힘을 지닌 로스톤 왕국.

이들은 이단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먼 선조께서 저희 왕국의 성물을 모두 바치는 것으로 교단의 인정과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스터 교단에 맞서지 않고 그들의 휘하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아스터 교단은 신하를 자처하고 고개를 숙인 이들을 받아들였다.

그와 반대되는 이들은 모두 이단이라는 낙인을 붙이고 정벌해 왔다.

로스톤이라는 이름은, 아스터 제국의 명령을 따르는 속국의 의미가 있었다.

그랬기에.

“저희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십시오.”

아나샤는 왕국이 새로 태어난 만큼, 아스터 제국에게 받은 이름을 완전히 버릴 생각이었다.

기왕 처용을 따르기로 했으니, 처용에게 새로운 이름을 받기로 한 것이었다.

“으음…….”

고민 어린 음성이 처용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장차 왕국의 이름이 될 것이고 아나샤의 것이 될 이름.

대충 지을 순 없었기에, 나름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생각한다고 해서 마땅한 게 바로 떠올려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잠시 고민을 이을 때.

“……반신의 길에 접어든 이들은,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하지.”

무언가가 떠오른 듯, 작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그것을 ‘아라한(阿羅漢)’의 길이라고 부른다.”

“아라한…… 어떤 뜻입니까?”

아나샤가 처용의 말을 듣고 아라한의 의미를 물었다.

“으음, 깨달음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정진하는 것을 의미하겠군.”

처용이 과거 여래에게서 받았던 가르침들을 떠올리며 답했다.

“나 역시 아라한의 길을 걷는 자라고 할 수 있으니까.”

“어떤…… 길입니까?”

아나샤가 처용의 말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라한의 길이란 반신에 접어든 자들이 자신만의 길을 걷는 것.

그렇다면 반신, 데미갓인 처용이 걷는 길은 무엇일까? 그것이 궁금했다.

그런 아나샤의 궁금증에.

“내가 걷는 아라한의 길은 ‘징벌자의 길’이다.”

처용은 흔쾌히 자신이 걷는 길을 알려주었다.

“징벌자…… 그렇군요.”

아나샤가 처용의 말을 듣자마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지금까지 아스터 교단을 향해 처용이 벌인 ‘징벌’이 절로 떠올랐으니까.

지금껏 처용이 보여준 모습과 딱 맞는,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처용의 말을 듣고 생각을 마친 아나샤가 작은 미소를 짓고는.

“아라한…… 아나샤 아라한. 지금부터 저와 이 왕국의 새로운 이름입니다.”

결정했다는 듯,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만의 길과 정의를 찾길 바란다.”

처용이 아나샤의 선언에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때.

-스르륵.

처용에게서 신력이 희미하게 한 줄기 새어 나가더니, 아나샤를 향해 스며들었다.

‘……?’

갑작스러운 상황에 처용이 의문을 느끼고 아나샤를 살폈다.

통찰의 눈으로 보아도 딱히 이상은 없었다.

아나샤에게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우우웅.

처용은 자신의 신력이 조금 상승하는 것이 느껴졌다.

잃어버린 회귀 전의 힘을 되찾는 것과는 달랐다.

정확히 설명할 순 없지만,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이 아닌, 새로운 무언가를 얻은 느낌이었다.

시스템 문구도 없고 그저 희미하게 드는 느낌에 불과했지만.

‘……뭐지?’

분명, 설명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자각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나샤가 허공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긴 처용을 보며 묻자.

“……아니다.”

처용이 생각을 멈추고 아나샤의 말에 답했다.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다고 해도, 당장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신력이 조금 차오른 것이 느꼈지만, 조금 전보다 확 강해진 것은 또 아니었다.

차이가 없다시피 한 정도.

그저 무언가 ‘변화가 있었다’라는 자각에 불과했으니까.

그 변화가 무엇인지,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는 상황.

‘이번 일을 끝내고 스승님께 물어봐야겠군.’

처용은 당장 있을 중요한 일부터 생각하기로 하고 이번 일을 뒤로 미루었다.

나 홀로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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