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홀로 계승자-418화 (418/726)

#418화

가장 중요한 목적 중 하나였던 루비아의 합류.

그 일이 잠시 보류되었지만, 처용은 개의치 않았다.

당장, 루비아만을 신경 쓰기가 힘들 정도로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그리고 어차피 처용이 계속 설득하지 않아도, 곧 루비아는 합류할 것이다.

“루비아, 나 좀 도와줘.”

바로 그녀의 유일한 친우라고 할 수 있는 사람.

아나샤가 루비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녀는 루비아에게 처용의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등의 말을 하지 않았다.

루비아의 복잡한 사정을 알기도 했고 또 아나샤는 타인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 대상이 친구라면 더더욱.

하지만 새로 세워진 국가에서, 여왕인 아나샤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고양이 손이라고 빌리고 싶을 정도.

그런 와중에 루비아가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고 이곳에 있는 상황이었다.

루비아는 마탑을 상징하는 여덟 명의 대마법사 중 하나.

무려 7서클의 마법사이기에 그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인겔 마법 단장 혼자 감당하기에는 이 국가의 일이 너무 많아.”

로스톤 왕국에는 아나샤에게 협력하는 6서클의 마법사가 있긴 했었다.

그러나 6서클과 7서클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

루비아의 도움이 있다면, 많은 일들이 수월하게 풀릴 것은 당연했다.

“도움이 필요해.”

아나샤가 루비아를 향해 한 번 더 도와달라고 말했다.

루비아는 아직 처용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

반면에 아나샤는 처용에게 협력을 약속하고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

그런 아나샤를 루비아가 도와줄까 싶었지만.

“도와줄게.”

루비아는 친구의 부탁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수락했다.

긍정 어린 루비아의 말에 아나샤의 표정이 밝아졌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많은 상황에서 7서클의 대마법사가 도와주게 되었으니까.

아나샤는 기쁨을 표함과 동시에, 처용을 눈짓했다.

처용은 아나샤가 순간적으로 보낸 눈짓을 보고 작금의 상황을 이해했다.

이번 기회에 루비아를 설득해 보겠다는 의미였다.

따로 명하지 않았는데도, 아나샤가 착착 일을 진행하는 모습에 처용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나샤, 멀리 떨어져 있는 영지의 주민들을 게이트웨이를 이용해 수도 근처로 이동시켜라.”

처용은 아나샤에게 새로운 지령을 내렸다.

넓게 퍼져 있는 영지와 마을들의 주민들을 수도 근처로 옮기라는 명령.

“피해를 최소화하실 목적이군요.”

아나샤는 처용이 왜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이해했다는 듯 말했다.

마신에게 점령된 로스톤 왕국.

아스터 제국이 이를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분명, 군대를 끌어모아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국경 외곽 지역에서 생활하는 시민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볼 것이다.

아나샤는 처용의 명령이, 그 피해를 최소화할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할 필요가 있으니까.”

처용은 아나샤의 말에 긍정하면서도 다른 부분을 생각했다.

아직, ‘혹시’ 하는 정도의 가정이었지만, 대비할 필요는 있었다.

“수도와 가까운 각 영지들을 거점으로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겠습니다.”

아나샤가 처용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받았다.

“저와 동생들이 직접 방어선 구축에 나설 겁니다.”

그녀가 언급한 ‘동생들’은 다름 아닌 살아남은 로스톤 왕족들이었다.

아나샤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왕족들을 처형하지는 않았다.

제1 왕자와 같은, ‘최악’인 이들만 처리하고 남은 이들은 귀족들과 같은 처분을 내린 상황이었다.

“강철의 힘을 이용하면, 방어선을 더 빠르게 구축할 수 있겠죠.”

“으음, 이 녀석이 너를 도와줄 거다.”

처용이 아나샤의 말을 듣고는 옆에 있는 연아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나?”

연아가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묻자.

“그럼, 여기서 죽치고 앉아 놀기만 할 생각이야?”

처용이 핀잔하듯 말했다.

동시에.

‘아나샤를 지켜, 내가 없는 동안은 네가 적임이니까.’

연아에게 왜 그녀를 지목했는지 전음으로 이야기했다.

지구에서 넘어간 마인들이 이 세계에 있다는 것이 거의 확실해진 상황.

그렇다면 아스터 교단 역시 지금쯤 마신인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렸을 가능성이 컸다.

에스라 성운은 순혈자들, 즉 판데모니움과 협력 관계였다.

그들의 세력인 아스터 교단과 마인들 역시 서로 간에 동맹 관계일 테니까.

분명, 그들은 처용을 무력으로 잡아낼 수는 없다고 판단할 것이다.

지금껏 처참하게 당해 왔으니, 섣불리 공격을 감행하지는 못 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면 놈들이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까?

그럴 리가 없었다.

직접 노릴 수 없다면, 주변을 노릴 것이 분명했다.

아스터 교단은 그럴 수단 또한 가지고 있었다.

회귀 전, 여러 번 당해 봤으니까.

그런 놈들이 노릴 가능성이 가장 큰 대상은?

다름 아닌 처용에 의해 새로운 여왕으로 임명된 아나샤였다.

때문에.

“이 녀석, 이래 봬도 불사신이니까.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다.”

웬만한 공격에는 거의 타격을 입지 않는, 불가사의한 존재로 거듭난 헌터.

연아가 아나샤의 곁을 지킬 필요가 있었다.

또 지금까지 함께 행동한 것으로 연아의 전투력을 어느 정도 확인했기에 내린 결정이기도 했다.

그런 처용의 결정에.

“그래, 이 불사신이 도와줄게.”

연아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아나샤를 향해 말했다.

“아, 네, 감사합니다.”

불사신이라는 말에 잠시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아나샤가 곧 표정을 지우고는 감사를 전했다.

처용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과 동갑이라 말하는 이 소녀가 천사를 때려눕히는 것만큼은 직접 본 바.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가늠할 수 없지만, 강자란 사실은 분명했다.

그때.

“저, 전하! 급보입니다!”

결계 밖, 2층의 입구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급한 듯 보이는 목소리가 울린 순간.

-탁.

처용이 손가락을 튕기며 결계의 입구를 해제했다.

이내 곧 누군가가 다급한 발걸음으로 2층에 도달했다.

그는 다름 아닌 이 왕국의 마법 단장, 하인겔이었다.

“제, 젠타 왕국에서 마법 통신이 왔습니다.”

하인겔이 빛을 점멸하는 배구공 크기의 구체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원거리 통신구 아티팩트로 마탑에서 각 국가에 제공한 물건이었다.

국가 간, 원활한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통신구.

그리고 통신은 건 국가는 동북쪽에 존재한 젠타라는 이름의 왕국.

로스톤 왕국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왕국이었다.

“주십시오. 제가 받겠습니다.”

아나샤가 하인겔에서 통신구를 받아 단상 앞에 내려놓고는.

-우우웅.

은빛의 마나를 내뿜으며 손을 잠시 얹고 다시 떼었다.

그러자.

-지잉.

환하게 빛나던 구슬 위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치지직. 치직.

마나로 이루어진 누군가의 얼굴 형상이 떠올랐다.

다부진 체격에 붉은 사제복을 입은 구릿빛 피부의 남자.

그는 참회의 여신 하메라의 신관 베드라였다.

-이단국의 여왕인가?

“참회의 신관이시군요?”

적대감이 가득한 베드라의 음성에 아나샤가 딱딱한 목소리로 답했다.

고개를 들고 싸늘한 눈빛으로 대답하는 아나샤의 태도에.

-건방진 년, 어디서 감히 신의 신관을 내려다보는 것이냐!

베드라가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신의 신관은 이 대륙의 왕이라 해도 함부로 내려다볼 수 없었다.

일국의 왕보다 높은 신분을 가진 존재가 바로 신의 신관이었으니까.

그때.

“어이 참회의 신관?”

-드르륵.

처용이 발로 통신구의 방향을 자신 쪽으로 틀어 보이며 말했다.

“신관 따위가. 어딜 신을 똑바로 바라보냐. 이 개새끼야?”

욕설과 비웃음 섞인 처용의 말이 울리자.

-감히 인간 따위가 신의 행세를 하는 것이냐!

베드라가 눈에 핏발을 세우며 분노를 표했다.

그런 베드라의 반응에 처용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반응을 보아하니, 지구의 배신자들이 나에 대해 알려주었나 보군?”

분노하는 베드라의 태도와 말에서, 지구를 벗어난 배신자들의 증거를 찾아내었으니까.

“그 새끼들이 나한테 개기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든?”

미소를 머금은 처용의 목소리가 울리자, 베드라가 이를 갈았다.

그리고.

-당장 네놈 세계로 꺼져라. 그렇지 않으면-.

베드라가 이를 갈며 말함과 동시에 옆으로 살짝 비켜서며 말했다.

그러자 그 뒤의 광경이 드러났다.

-이 더러운 이단자들을 모두 참형시킬 것이다!

단두대에 묶여 있는 어린아이들의 모습.

베드라가 있는 장소는 룬티르 일족의 처형대였다.

인질을 잡고 협박하는 것.

그 모습을 본 카란디아가 헛숨을 삼켰다.

-당장, 네놈들의 세계로 꺼지지 않으면, 잡아들인 이단자들을 모두 태워 죽일 것이다!

베드라가 다시 한번 소리치고는.

-내려라!

오른손을 들어 올린 후 세게 내리며 말했다.

그 순간.

-스르릉! 탁!

단두대 중 하나가 작동되며 한 명의 아이가 머리가 잘린 채 처형되었다.

본보기를 보인 것.

-한 시간에 한 명씩 죽이겠다. 당장-!

협상의 우위를 차지했다고 생각한 베드라가 작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한 순간.

“신전 열 개다.”

조용히 처형식을 지켜본 처용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명의 아이가 죽을 때마다, 신전 열 개가 무너질 것이다.”

잔혹한 미소를 머금은 처용의 입에서 역으로 협박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젠타 왕국이라고 했나? 내가 거기까지 가는 데 얼마나 걸릴까?”

수정구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살기를 흘려보냈다.

그 말에.

-내려라!

베드라의 선고가 다시 이어졌고 또 한 명의 아이가 더 처형되었다.

그것을 본 처용은.

“신전 스무 개다.”

입가의 미소가 짙어지며 숫자를 읊고는.

“아나샤, 한 명의 아이가 처형될 때마다, 내게 알려라.”

아나샤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그 말이 끝난 순간.

-파지직!

처용이 번개처럼 사라졌다.

“……너는 협박할 상대를 잘못 골랐다. 참회의 신관.”

아나샤가 수정구의 방향을 돌려 베드라를 마주하며 말했다.

처음에 베드라를 향해 했던 존칭조차도 없는 목소리에.

-이 건방진 이단자 년이 감히!

베드라가 두 주먹을 쥐어 보이며 분노를 표했다.

그때.

“아까부터 자꾸 건방, 건방 지랄이야, 이 싸가지 없는 새끼가.”

-스륵.

연아가 아나샤의 옆에 와 앉으며 베드라를 향해 말했다.

“네가 신나게 두들겨 처맞고 도망간 하메라라는 년의 신관이라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연아의 입에서 신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이 흘러나왔다.

-……!!

그런 연아의 말에, 베드라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처용을 처치하기 위해 지상에 강림했었던 그의 성좌, 참회의 여신.

그런 최고신의 굴욕적인 패배를 언급했으니까.

연아가 내뱉은 신성모독에 베드라가 뭐라 말을 잇지 못할 때.

“마음 같아서는 네 면상을 내가 확 갈아버리고 싶거든? 근데 지금부터 10분 정도면 마신이 거기에 도착할 거야.”

연아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10분.

그녀가 생각하는, 방금 사라진 처용이 통신구가 있는 곳까지 도착할 시간이었다.

-감히, 신의 관대한 자비를 거부한 대가를 치를-!

분노에 몸을 떨던 베드라가 손을 들어 올렸다.

지금 처형장에 있는 이들을 모두 처형시키려는 것.

그때.

-시, 신관님! 크, 큰일……!

통신구 너머에서 베드라가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쪽 관문이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게다가 주변의 신전이……!

영 좋지 않은 듯한 내용을 담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리자.

-……이 무슨!

베드라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흘리며 소리쳤다.

그때.

“8분 남았어. 이 씨발 새끼야.”

연아가 통신구를 향해 싸늘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러자.

-다, 당장 멈추라고 지시해라! 이단국의 왕!

베드라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말에.

“내가 감히 그분에게 명령을 내릴 권한이 있다고 보나?”

아나샤가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결국.

-이! 후회할 것이다! 이단국의 왕! 네놈들 모두 위대하신 신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분노와 경고를 머금은 베드라의 말을 마지막으로.

-지잉…….

통신구의 작동이 멈추었다.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버린 셈이었다.

“내가…… 내가 힘이 없어서……!”

카란디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마치, 처용의 발목을 붙잡은 듯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때.

“……아나샤, 아니지. 여왕님?”

-탁.

연화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아나샤를 불렀다.

“네, 네?”

갑작스러운 연화의 부름에 아나샤가 답하자.

“처용이 간 방향 말고 가장 가까운 아스터 교단의 신전이 어디입니까?”

-스스스.

연화가 잔잔한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기운을 내뿜으며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스터 교단의 신전 위치를 묻는 질문에.

“여, 여기서 남서 방향이 제일 가까울 겁니다.”

아나샤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떨며 대답했다.

“……출정하겠습니다.”

-샥!

연화는 아나샤의 대답을 듣자마자, 누군가에게 대답하듯 말하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충무공 님께서 화가 많이 나셨나 보네.”

-탁.

작동이 중지된 통신구를 노려보던 연아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도 몸 좀 풀러 갔다 올까?”

-슈르르르.

연아의 몸이 흩어지는 물줄기처럼 점점 희미하게 사라졌고.

-파앗.

그 자리에서 사라지며 먼저 출발한 연화를 따라갔다.

그리고.

“울지 마라. 카란디아.”

-스르르.

네이션이 카란디아 앞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나타나며 말했다.

그의 손이 카란디아의 머리에 얹어졌고 옅은 기운이 흘러나오자.

“…….”

카란디아가 옆으로 누우며 스르륵 잠들었다.

네이션은 카란디아를 안정시키고는.

“……미약한 힘에 불과하지만, 나도 돕겠다.”

-스륵.

분노를 읊조리며 먼저 간 연화와 연아를 따라나섰다.

나 홀로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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