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화
아스터 제국.
에스라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신전이 자리한 곳.
그 대신전 내부, 고위 사제들 중 허락을 받은 이들만이 드나들 수 있는 장소.
그 장소에 신에게 선택받은 신관들과 대주교들이 모였다.
가장 중요한 일을 논하는 장소이니만큼, 항상 엄중하고 진지한 분위기가 흐르는 장소였다.
그러나.
“…….”
“…….”
그곳에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심각한 표정을 내비친 채, 침묵하고 있었다.
마치, 국가의 존속을 위협하는 재앙이라도 마주한 듯한 분위기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스터 제국에서 가장 드높은 권력을 지닌 대사제들과 신관들이 모인 이유.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아스터 제국을 위협하는 ‘마신’ 때문이었으니까.
침묵이 흐르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제2 성기사 단장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붉은 사제복을 입은 남자.
참회의 여신 하메라의 신관, 베드라가 입을 열었다.
그가 언급한 제2 성기사 단장은 얼마 전, ‘마신’을 토벌하기 위해 출발한 선발대의 대장이었다.
하나의 영지를 제물로 삼아 벌인 작전.
무려 신들까지 적극적으로 협력해 보였던 작전이었다.
마신을 작은 영지로 끌어들인 뒤, 참회와 회개의 심판을 날린다.
만약 마신이 살아남았을 경우, 토벌대가 부상을 입은 마신을 처치한다.
이것이 마신을 토벌하기 위해 아스터 제국이 벌인 작전이었다.
신관들, 대주교들 모두가 성공하리라 믿었다.
무려 참회의 여신과 회개의 여신.
대신급 성좌 둘이 힘을 합쳐 내리치는 권능을 사용했으니까.
하나의 국가조차도 멸절시켜버리는 권능에 맞으면 제아무리 마신이라 해도 소멸하리라 생각했다.
물론, 기적적으로 마신이 살아남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때를 대비해 제2 성기사 단장, 소드 마스터인 파로크에게 ‘성검’을 하사해 토벌대로 보냈다.
크나큰 부상을 입은 마신을 성기사단장이 성검으로 처치한다.
아주 완벽한 작전이었다.
모두가 성공하리라 생각했다.
실패할 것이라고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실패? 토벌대가 전멸했다고?
희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이들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전달되었다.
마신은 참회와 회개의 심판을 정면으로 깨부순 것으로도 모자라, 토벌대까지 전멸시켜 버렸다.
아니, 전멸은 아니고 단 한 명이 살아남았다.
바로 토벌대를 이끌었던 제2 성기사 단장 파로크.
그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였다.
다만 세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 번째는 그가 자력으로 살아남은 것이 아닌, 마신이 일부러 살려 주었기에 살아남았다는 것.
두 번째는 겨우 목숨을 건진 그가 거의 죽기 직전이라는 것.
그리고 세 번째.
“마신이…… 그 악독한 존재가 새긴 저주를 해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회의 신관, 베드라의 말에 대주교 중 하나가 입을 열어 대답했다.
부러진 성검을 쥔 채, 아스터 제국 수도로 날아온 파로크.
처참하게 박살 난 갑옷으로 인해 드러난 그의 가슴.
그곳에 불로 지져 쓴 듯한 문자가 적혀 있었다.
-개새끼 아스터, 그리고 개새끼의 개새끼들인 하메라, 로메라…….
마신이 보낸 메시지, 아니 신성모독.
-네놈들을 모두 멸절시킬 것이다.
마신의 끊임없는 악의와 적의가 가득한 신성모독이자 메시지.
“신성모독의 흔적이라도 지우려 노력하고 있지만, 쉽지 않습니다.”
겨우 살아남은 제2 성기사 단장은 아스터 교단에 있어서 중요한 인재.
그를 살리기 위해 고위 사제들이 번갈아 가며 신성 치료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신이 직접 살갗을 태우며 쓴 신성모독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끊어질 듯 말 듯, 위태로운 파로크의 목숨을 겨우 이어 놓으며 신성모독을 없애기 위해 노력 중인 상황.
“제길……!”
-쿵!
처참하고도 답답한 상황에 베드라가 단상을 내리치며 침음을 흘렸다.
그때.
-덜컥!
대회의실의 문이 벌컥 열리고는.
-저벅.
이 자리에 있는 대주교와 신관들과는 다른 복장을 한 이들이 들어섰다.
“분명, 급하다는 소식을 보냈거늘, 왜 이제야 오는 것인가?”
참회의 신관, 베드라가 막 들어선 이들을 향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러자.
“저는 이단자들을 잡아들이느라 바빴다고요. 큭큭, 신관 베드라.”
가장 앞에 있는 이, 검붉은 색의 두꺼운 갑옷을 입은 초췌한 몰골의 남자.
그가 퀭한 눈을 치켜뜨고는 킥킥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네가 말한 그 이단자의 정점, ‘마신’이 날뛰고 있는 건 알고 있나? 이단 심판관장.”
베드라가 인상을 옅게 일그러뜨리고는 가장 앞에 있는 초췌한 남자의 직책을 언급하며 말했다.
그러자 퀭한 눈에 초췌한 안색, 그 얼굴에 걸려 있는 비틀린 미소를 지은 남자.
“아아, 오면서 전해 들었지요. 크크.”
아스터 교단의 이단 심판관장, 안테르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마신이라…… 마신을 처치한 이단 심판관…… 크크크. 좋은데?”
안테르가 무언가를 상상하듯, 킥킥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읊조렸다.
베드라는 제대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 느낌에, 일그러졌던 인상을 더욱 구겼다.
그때.
“제2 성기사 단장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 들었습니다. 신관 베드라.”
붉은 태양 문양이 그려진 백색의 갑옷을 입은 성기사가 베드라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성검을 쥐고 마신을 토벌하러 나섰다가 당했소.”
베드라가 앞으로 다가온 성기사를 향해 답하고는.
“마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해 말해 주겠소.”
그간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베드라의 설명이 끝나자.
“제길! 신의 부름만 아니었어도…… 파로크와 함께 갔을 텐데!”
붉은 태양 문양이 그려진 갑옷을 입은 성기사가 분노를 표하며 말했다.
그는 마신에게 당해 사경을 헤매고 있는 제2 성기사 단장 파로크의 친우.
그랬기에 친우를 그리 만든 마신에게 분노를 표했고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제1 성기사 단장의 잘못이 아니오.”
회개의 여신 로메라의 신관, 루메오가 스스로를 탓하는 그를 만류하듯 말했다.
“자신을 탓하지 마십시오. 제2 성기사단장이 못한 일을 그대가 해 줘야 합니다. 아데인.”
베드라 역시 그를 탓할 생각이 없다는 듯,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붉은 태양 문양이 새겨진 성기사 갑옷을 입은 금발의 딱딱한 인상을 지닌 남자.
그는 아스터 교단의 제1 성기사 단장, 아데인이었다.
그리고.
“외신께 하사받은, 사악한 마신을 소멸시킬 수 있는 ‘태양의 힘’이 필요합니다. 아데인.”
베드라가 아데인의 성좌를 언급하며 말을 이었다.
제1 성기사 단장 아데인.
그는 외세에서 온 태양신에게 선택을 받은 태양의 신관이었다.
“사악한 마신을 반드시 태워 버릴 것이오!”
아데인이 분노가 일렁이는 목소리로 강하게 말하고는.
-화르륵.
아지랑이처럼 이글거리는 붉은 색의 신성력을 스멀스멀 내뿜었다.
“침착하십시오. 제1 성기사 단장 혼자서는 무리입니다. 마신은 상당히 강합니다. 그리고…….”
베드라가 분노하는 아데인을 만류하듯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시에, 마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아낸 것들을 설명했다.
그가 그간 무슨 짓들을 저질렀는지.
그를 토벌하기 위해 어떤 작전을 세웠었는지.
그가 어느 정도 무력을 지녔는지 등을 이야기했다.
“참회의 여신께서 직접 강림했음에도…… 마신을 저지하지 못했소.”
베드라의 입에서 대신급 성좌, 참회의 여신 하메라가 직접 강림했음에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말이 흘러나오자.
“큭……!? 그, 그게 사실인가?”
비틀린 미소를 짓고 있던 이단 심판관장, 안테르가 웃는 표정을 기괴하게 뒤틀며 물었다.
“외신들께 선택받은 우리들만이 아니라……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수도 있겠군.”
아데인 역시 표정이 심각해지며 진지한 목소리로 ‘그들’을 언급하며 말했다.
그 외 사람들에게서 다양한 반응이 흘러나올 때.
“설마…….”
후드가 달린 로브를 뒤집어쓴, 지금껏 침묵하고 있던 금발에 벽안을 지닌 여성이 입을 열었다.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이 있소?”
후드 속 흔들리는 벽안의 눈동자를 본 베드라가 그녀에게 물었다.
“신관 제니퍼, 그대가 온 세계와 연관이 된 자라거나?”
베드라의 입에서 후드를 쓴 여성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등에 활을 맨 금발 벽안의 여성.
그녀는 다름 아닌 아르테미스의 신관, 제니퍼였다.
제니퍼가 베드라의 물음에 짧게 침묵하고는.
“그 마신이라는 놈이 어떻게 생겼지?”
베드라를 향해 마신의 생김새를 물었다.
“놈의 수배지요.”
-차라락.
제니퍼의 물음에 베드라가 소매에서 둘둘 말린 양피지를 꺼내 펼쳤다.
단상 위에 말린 양피지가 펼쳐졌고 그곳에 한 남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제니퍼의 시선이 양피지 위로 향한 순간.
“이, 이…… 이런, 씨발……!”
제니퍼가 달달 떠는 목소리로 욕을 내뱉었다.
그림에 불과한데도 살기 어린 눈빛이 전해지는 검은 머리의 동양인.
제니퍼에게 있어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이 미친 괴물 새끼가 왜……!”
위대한 신들의 계획을 망쳐 버린 인간.
단신으로 거대 길드 전체와 전쟁을 벌일 수 있는 존재.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신에게 정면으로 맞서 싸워 신을 때려눕히는 이단자.
“이 괴물 새끼가 왜 여기에 있는 거냐!!”
제니퍼의 입에서 경악이 터져 나왔다.
항상 침착하고 싸늘한 태도를 보이던 외신의 신관 제니퍼.
그런 그녀가 마신의 초상화를 보고 잔뜩 흥분하며 크게 경악하는 모습을 보이자.
“……마신에 대해 알고 있다면 말해 주시오. 당장.”
베드라가 진지한 눈빛으로 제니퍼를 향해 대답을 촉구했다.
비단 베드라뿐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제니퍼에게 시선을 모았다.
제니퍼는 처용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양피지를 경악 어린 눈빛으로 응시하며 침묵해 보였다.
“빨리 말하시오! 이놈의 정체가 무엇인지!”
베드라가 제니퍼의 모습에 답답함을 느끼며 언성을 높였다.
“어떻게 하면 이 사악한 마신을 죽일 수 있는지! 빨리 말하란-!”
계속되는 베드라의 독촉이 이어지자.
“못 죽여.”
침묵하던 제니퍼가 베드라의 말을 자르며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베드라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못 죽인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루메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제니퍼에게 물었다.
비단 두 신관만이 아닌, 다른 이들도 제니퍼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의문을 표했다.
그러자.
“못 죽인다고! 우리가 이 새끼 죽여 버리려고 갖은 수단을 다 써 봤단 말이야!”
-쾅!
제니퍼가 단상을 거세게 치며 소리쳤다.
동시에.
“이놈은 단순히 신만이 아니라 성운 전체와 전쟁을 벌이는 놈이야! 이 새끼가 지구에서-!”
마신, 처용이 지구에서 벌였던 일들을 하나하나 늘어놓기 시작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처용을 죽이기 위해 했었던 수단들을 위주로 이야기했다.
물론.
“그 결과는 처참했고…….”
그 결과는 처참한 실패로 다가왔다.
처용을 잡기 위해 함정을 팠던, 이자나기 성운.
거대한 세력을 자랑했던 그들의 성지가 쑥대밭으로 변했다.
옥황상제의 신관과 태양신 아마테라스가 판 함정.
이번만큼은 성공한다고 확신했던 천교의 함정 역시, 처용은 힘으로 무너뜨려 버렸다.
그로 인해 천교라는 거대 성운이 와르르 무너졌고 다른 세계로 도피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종국엔 지구에 깊게 뿌리내린 마인들이 세력까지 완전히 뽑혀 나갔다.
굵직한 사건을 몇 개만 골라봐도, 처용이 벌인 짓들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 정신 나간 괴물 새끼가 왜 하필이면 이곳에……!”
짧지 않은 이야기를 마친 제니퍼가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읊조렸다.
제니퍼의 장황한 말에.
“……도대체 그자의 정체가 무엇이오.”
베드라가 진지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제니퍼의 말이 거짓인 것 같지는 않았다.
과장되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껏 마신이 이 세계에서 저지른 일들이 있었으니까.
베드라의 물음에 다른 이들 역시 제니퍼의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으드득.
제니퍼는 처용의 초상화를 보며 이를 갈아 보이고는.
“……신계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었던, 혈선이라 불리는 강력한 성좌의 신관.”
처용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이야기했다.
“역천군주(逆天君主) 한처용. 이게 네놈들이 말하는 마신의 정체다.”
제니퍼의 말이 끝나자.
“…….”
“우리랑 같은 신관이었다니…… 충격이군요.”
베드라가 생각에 잠기며 침묵했고 루메오가 제니퍼의 말을 곱씹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외에도.
-신이 아니라 인간이란 말이오?
-신력을 개화한 이단자라 하지 않았소?
-데미갓…… 그런 게 실제로 존재할 줄이야.
대주교들 역시 제시카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때.
“……감히 신을 흉내 내는 사특한 인간이었다니!”
-쿵!
침묵을 깬 베드라가 낮고 강한 목소리로 단상을 내리치며 입을 열었다.
“신성한 우리의 세계를 침범하려는 그 사악한 이단자를 그냥 둘 수는 없소.”
베드라의 진지한 목소리에 대회의실 내부에 일렁이던 소란이 잠재워졌다.
그리고.
“당장 마신을 죽이기 힘들다면, 그를 막을 방법이라도 말해 주시오.”
마신, 처용에 대해 그나마 잘 알고 있는 제니퍼를 향해 베드라가 의견을 구했다.
“갖은 수단을 다 써야 해. 서쪽에서 일을 도모하고 있는 마인들, 동포들도 모두 불러들이고 또…….”
제니퍼가 침착함을 되찾은 듯,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동시에.
‘달의 여신이시어, 역천군주가 이 세계에 나타났습니다.’
자신의 성좌, 아르테미스를 향해 보고를 올렸다.
그러자.
-안 그래도, 그 이단자 놈 때문에, 에스라 성운에 온 참이다.
아르테미스에게서 즉각 대답이 들려왔고.
-직접 나서지 말고, 간접적으로 도우면서 뒤로 빠져라.
제니퍼에게 지령이 떨어졌다.
적극적으로 아스터 교단을 돕지 말고 간접적으로만 도울 것.
즉, 처용과 정면으로 싸우려 들지 말고 아스터 교단의 세력을 앞으로 내세우라는 뜻이었다.
‘혹시 모르니, 신전의 위치를 옮길 준비도 미리 준비하겠습니다.’
제니퍼가 아르테미스의 명령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로스톤 왕국의 점령과 부패한 왕의 처형, 완전히 무너진 왕궁.
그로 인해 새로운 여왕이 선출되었고 새로운 왕궁이 건설되었다.
파란만장한 하루가 빠르게 지나가고 새로운 아침이 다가왔다.
-히히힝. 히힝.
다수의 마차들이 새로 건축된 왕궁 앞에 멈추었다.
그리고.
-저벅. 저벅.
마차 안에서 화려하고 정갈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내렸다.
해가 뜨기도 전, 이른 아침부터 새로운 왕궁으로 분주한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그들은 모두 로스톤 왕국의 귀족들이었다.
어제 있었던 피의 숙청에서 겨우 살아남은 이들.
불과 하루 만에 왕국 전체가 뒤집히는 엄청난 사건이 지나간 탓인지.
-후.
-크흠.
귀족들은 굳은 표정으로 긴장감을 드러내며 왕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일 이른 아침, 정무 회의를 소집하겠습니다. 오늘은 모두 돌아가십시오.
새로운 여왕으로 선출된 아나샤의 명령이었다.
모두 돌아가고 내일 다시 왕궁으로 입궁하라는 여왕의 명령.
그 덕분에 살아남은 귀족들은 무사히 자택으로 돌아갔다.
물론, 그들 모두가 곧장 자택으로 간 것은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왕국이 뒤집히고 피바람에 휩쓸린 상황.
이러한 상황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귀족들이 따로 모여 회동을 했다.
하지만.
-이 일을 어찌해야…….
-도, 도망가야 하는 것 아니오?
살아남은 이들끼리 대책을 논해 봐야 나오는 답은 없었다.
단체로 도망치는 것이 어떠냐는 말이 나왔지만.
-마신에게서? 무슨 수로!
-내 눈앞에서 천사들을 찢어발겼어! 그런 마신에게서 도망? 불가능해!
지상에 강림한 마신은 대천사조차도 찢어 죽이는 강력한 존재.
그런 압도적인 존재에게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저희를 당장 벌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죽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일단 왕녀…… 여왕의 말에 따릅시다. 그 뒤에 있는 존재를 생각해서라도…….
밤새 머리를 맞대 나온 결론은 아나샤의 말에 따르는 것이었다.
이 외에는 모두 죽음에 가까운 선택지였기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나, 난 젠타 왕국으로 향할 것이오!
-당신들은 죽으러 가시오! 난 빠져나갈 테니!
이런 와중에도 마신을 피해 도망가겠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입궁을 선택한, 마차에서 내린 귀족들의 발걸음이 새롭게 건설된 왕궁 내부로 향했다.
마신이 단 하루 만에 무너뜨리고 다시 세운 왕궁.
자연환경이 어우러진, 이전보다도 훨씬 아름답게 보이는 왕궁이었지만.
“…….”
“…….”
그곳으로 향하는 귀족들의 발걸음은 사지(死地)로 향하는 병사들처럼, 무겁게 보였다.
이윽고.
-끼이이이!
가장 중앙에 세워진 독특한 형태의 왕궁 대문이 열리고 입궁한 귀족들이 들어섰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버린 듯, 허전한 내부.
그러나 그런 허전한 내부의 중앙에는 디귿 자 형태의 단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단상의 중앙에는.
“……오셨으면 앉으시죠.”
여왕, 아나샤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단상 위로 두 손을 올려 깍지를 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부름을 받은 귀족들이 하나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눈에 띈 물건이 있었다.
아나샤의 앞, 정확히는 디귿 자 단상 중앙에 놓인 네 개의 상자.
농구공 크기 정도의 물건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본 귀족들은 잠시 의문을 표했다가, 곧 안색이 사색으로 변했다.
네 개의 상자, 그 숫자에 저절로 떠오르는 이들.
-멍청한 작자들 같으니라고! 당신들은 죽으러 가시오!
어제 야반도주를 결심한 귀족들의 숫자였다.
귀족들의 머릿속에 상자 안의 내용물이 무엇인지, 상상이 가기 시작했다.
그런 귀족들의 반응을 잠시 살핀 아나샤는.
“……여러분은 현명한 선택을 하셨습니다.”
귀족들을 쭉 둘러보며 말하고는 이내 시선을 중앙의 상자로 옮겼다.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한 자들은…… 안타깝게 되었지만요.”
중앙의 상자를 싸늘하게 노려본 아나샤의 말에 귀족들이 침을 삼켰다.
얌전히 입궁한다는 선택지에 따른 이들은 결과적으로 살아남았으니까.
귀족들에게서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조금씩 차오를 때.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릅니다?”
아나샤가 그런 귀족들의 분위기를 살피고는 찬물을 끼얹었다.
그리고.
-차라락.
그녀의 오른쪽에 쌓인 수백 장의 서류, 그중 가장 위에 있는 서류 한 장을 집었다.
“벵스 백작. 무분별한 고리대금업 사업을 펼치셨습니다? 덕분에 노예로 강등되어 팔려나간 서민들이-.”
아나샤가 서류에 적힌 내용을 쭉 읊자.
“……!”
-달그락. 달각.
좌석에 자리해 있던 귀족 중 하나, 민머리에 콧수염이 돋보이는 남자가 저도 모르게 다리를 떨었다.
그는 아나샤가 언급한 귀족. 벵스 백작이었다.
서류를 읽는 아나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은 모두 그가 벌인 비리들.
즉, 아나샤가 쥐고 읽는 서류는 벵스 백작이 벌인 일들이 나열된 비리 문서였다.
“……!”
그간 저질러 온 비리를 직접 듣는 벵스 백작이 눈을 감은 채 두려움에 떨었다.
동시에 억울한 심정도 들었다.
고리대금을 통해 서민들의 재산을 수탈한다.
대금을 갚지 못한 서민들은 노예로 강등하여 아스터 교단에 넘긴다.
이 명령을 내린 이는 다름 아닌 아스터 교단의 주교, 로스톤 왕국의 재상이었다.
벵스 백작은 그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의 명령을 거부하면 가문이 통째로 무너지고 가문의 식솔들이 모두 이단으로 몰려 처형당했을 테니까.
그러나 억울하다고 해도, 그로 인해 자신 역시 부를 축적한 것은 사실.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서류를 노려보며 자신의 범죄를 읊는 아나샤에게 할 말은 없었다.
벵스 백작이 고개를 숙이며 심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
“…….”
다른 귀족들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아나샤의 옆에 쌓인 서류들로 향했다.
동시에 그 서류들이 무엇인지 절로 짐작이 되기 시작했다.
이내, 아나샤가 한 장의 서류, 벵스 백작의 비리를 모두 읽었고.
-촤라락.
“레이핀 후작, 노예 거래 및 마약 사업으로…….”
곧장 다른 한 장을 집어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새로운 서류를 쭉 읊던 아나샤는.
“이걸 다 보고 읽었다간, 제 눈과 혀가 먼저 닳아 없어지겠습니다.”
-탕!
읽던 서류를 거칠게 내리치며 강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침묵하던 귀족들이 움찔했다.
그들이 짐작한 대로, 무수히 쌓인 서류의 정체는 귀족들의 비리 문서였다.
“마음 같아서는…….”
-스르르.
아나샤가 은빛의 기류를 스멀스멀 내뿜으며 귀족들을 노려봤다.
싸늘한 살기가 담긴 그 말에, 모두가 아나샤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마치, 심판을 기다리는 듯한 모습.
그때.
“……하지만, 그분의 조언에 따라 여러분들에게 기회를 드리려 합니다.”
-파아아.
아나샤가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기운을 차단하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시에.
-샤락!
오른쪽에 쌓인, 귀족들의 비리 서류가 아닌, 왼쪽에 쌓인 수십 장의 서류를 집어 공중에 흩뿌렸다.
-스르륵.
공중에 휘날리던 서류들이 절로 움직이더니.
-착. 착. 착.
단상에 자리한 귀족들의 앞에 착착 나열되었다.
귀족들이 의문을 드러낼 때.
“그분께서 직접 만드신 계약서입니다.”
아나샤가 귀족들의 의문에 답하듯 말을 이었다.
그 말에 귀족들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아나샤에게 충성한다.
-아나샤를 배신하면 죽는다.
간략해 보이는 계약서에는 단 두 줄의 조항만이 적혀 있었다.
그 아래, 자필 사인을 하는 구간 아래에는 알 수 없는 문양의 문자가 나열되어 있었다.
귀족들은 아나샤가 언급했던 ‘그분이 만든 계약서’라는 말을 다시 떠올렸다.
그들의 눈앞에 다가온 계약서는 마신이라 불리는 존재가 직접 만든 계약서가 분명했다.
단 두 줄에 불과한 조항이었지만, 여기에 사인하고 이를 어기는 순간 죽는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귀족들은 단 두 줄에 불과한 계약서를 이미 확인했음에도, 계약서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섣불리 행동하지 못할 때.
-탁. 샤라락.
귀족들 중 한 명이 만년필을 꺼내 서명란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민머리에 콧수염이 돋보이는 귀족.
그는 가장 먼저 비리 서류에 호명되었었던 벵스 백작이었다.
서명을 하고 이를 어기는 순간 죽음을 맞이하는 마신의 계약서.
하지만, 이 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않으면, 상자에 담긴 이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는 건 뻔했다.
기회를 준다는 아나샤의 말.
벵스 백작은 그 말을 믿고 자신의 이름을 서명한 것이었다.
서명란에 그의 이름이 적힌 순간.
-화르륵.
벵스 백작이 서명한 계약서가 하얀 불길에 휩싸이며 사라졌다.
동시에.
-화르륵! 화륵!
아나샤가 가장 먼저 읽고 내리친 서류와 오른쪽에 쌓인 서류 중 일부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대가 지금껏 저질러 온 일은 이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벵스 백작.”
아나샤가 가장 먼저 읽었던, 불타오르고 있는 벵스 백작의 비리 문서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런 아나샤의 말에 귀족들은 작금의 상황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불타 없어지는 것들은 벵스 백작의 비리 문서들.
벵스 백작이 강제적인 충성 계약서에 사인한 순간, 그의 모든 비리 서류가 불타 없어진 것이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충성을 바치는 대가로 이전의 죄를 사해 주겠다는 의미.
귀족들이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순간.
-탁. 샤락. 샤락.
하나둘, 눈앞에 놓인 계약서에 서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화르륵! 화륵!
아나샤의 오른쪽에 놓인 수백 장의 서류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내, 모든 귀족들이 계약서에 서명했고.
-사라락…….
아나샤의 오른쪽에서 불타오르던 비리 서류들이 잿더미처럼 흩날리며 사그라졌다.
모든 비리 서류가 불타 없어진 순간.
“새로운 왕국의 일원이 되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나샤가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귀족들을 향해 말했다.
그 말에, 자신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깨달은 귀족들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어찌 되는 것입니까?”
나이가 좀 많아 보이는 귀족 하나가 아나샤를 향해 궁금한 듯 물었다.
마신에게 점령되고 새롭게 여왕으로 선출된 아나샤가 이끄는 왕국.
그 왕국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귀족의 말에.
“……그분께서도 허락하셨으니, 여러분들에게 ‘진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아나샤가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께서 ‘마신’으로 알고 계신 그분은 지구라는 세계에서 넘어오신 분입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다름 아닌, 처용에 대한 말이었다.
지구라 불리는 에스라와 다른 세계.
괴물과 맞서 싸우는 헌터라 불리는 존재들.
마신이라 불리는 처용의 진짜 정체와 그 뒤를 받쳐주는 거대한 세력.
아나샤는 처용에게 전해 들었던 말들을 귀족들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그분께서 지금까지 벌인 일은, 아스터 교단이 벌이는 ‘종말’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처용이 어째서 에스라 대륙에 나타나 혼란을 일으키는지도 이야기했다.
아나샤의 입에서 거대한 스케일을 담긴 ‘진실’이 모두 흘러나오자.
“…….”
“…….”
귀족들이 입을 벌린 채, 소리 없는 경악을 드러냈다.
그런 귀족들의 반응을 잠시 살핀 아나샤는.
“……이제부터, 이 왕국에 있어서 생산적인 이야기를 좀 해 보죠.”
진짜 중요한 주제들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모인 귀족들은 정치에 있어 중요한 축을 맡은 이들.
본래 있었던 이들 중, 절반 정도가 숙청을 당했기에 이들의 역할이 더 막중했다.
물론, 숙청을 당한 이들은 대부분 맡은 바 역할을 다하지 않고 제 배를 불리던 기생충들.
오히려 기생충들이 사라졌기에, 아나샤는 앞으로의 일이 더 수월해지리라 생각했다.
“우선 아스터 교단과의 모든 관계를 끊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탄압받는 이단자들을…….”
아나샤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아스터 교단과의 관계를 모두 끊고 그들에게 탄압받는 이들을 불러 모을 것.
동시에 왕국 내부에 세워진 아스터 교단의 동상과 신전을 철거할 것을 명했다.
“사제들의 반발이 거셀 것이옵니다.”
“자칫 잘못하면, 내전으로…….”
우려를 표하는 귀족들도 있었지만.
“그 광신도들은 모두 사라졌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뒷정리만 하시면 됩니다.”
아나샤는 걱정 없다는 듯 진지하게 말했다.
이윽고 귀족들이 분담할 업무의 배분이 모두 끝났다.
정무 회의가 모두 끝나자, 귀족들이 조금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퇴궁했다.
그리고.
-저벅.
홀로 남은 아나샤가 왕궁의 2층올 발걸음을 옮겼다.
허가를 받지 않은 이들은 발을 들일 수조차 없는 장소.
-우우웅.
아나샤의 발걸음이 계단 끝에 올랐고 옅게 펼쳐진 투명한 결계를 통과하자.
“왔군.”
처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나샤가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자, 넓은 단상에 자리한 이들이 보였다.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아나샤가 중앙에 앉은 처용을 향해 인사를 올리고는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조금 전, 귀족들과 있었던 정무 회의.
나라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그 회의는 지금부터 논할 이야기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다.
지금부터 논할 주제는 하나의 왕국 정도가 아니라, 이 에스라 대륙 전체의 운명을 논하는 자리였으니까.
그리고.
“단번에 해결하기에는 이 대륙의 복잡한 사정이 너무나도 많아.”
이 에스라 대륙의 운명을 파멸로부터 막아낼 존재.
“아무래도 우선순위를 좀 정할 필요가 있겠어.”
처용이 조금 일그러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