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화
도시 전체를 파괴할 듯 쇄도해 오던 마나 포격.
-쏴아! 파아아……!
그 강렬한 포격이 반으로 깔끔하게 갈라진 채, 위력을 잃고 사그라져 갔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사가각!
포격을 발사한 수도 방위 마도포도.
마도포가 설치된 성벽도.
그 굳건한 성벽 뒤에 자리한 왕궁도.
-촤아! 쩌저적! 쿠구!
처용의 앞을 가로막았던 모든 것들이 반으로 갈라지며 좌·우로 벌어졌다.
거리, 성벽, 왕궁이 반으로 잘린 케이크처럼 깔끔하게 나누어지자.
“…….”
게이트웨이 위에 선 모든 이들이 확 트인 시야를 보며 침묵했다.
처용은 뒤에 있는 이들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고.
“류마, 아스터 교단 사제 놈들만 빠르게 처치해라.”
-저벅.
엉망이 되어 버린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용님.”
-스르륵.
류마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함과 동시에, 다른 뱀파이어들과 함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멍한 표정을 짓던 다른 이들 역시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처용을 뒤따랐다.
마치, 산사태가 휩쓸고 지나간 듯, 처용이 엉망이 되어 버린 길을 걸을 때.
“……시민들이 미리 대피해서 다행입니다.”
처용을 뒤따라 엉망이 되어 버린 거리를 걷는 아냐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수도의 거리가…… 저 멍청한 왕자 때문에……!”
수도 방위 마도포의 포격으로 인해 완전히 망가져 버린 거리.
아나샤가 주변의 거리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읊조리자.
“흐음, 거슬리는군.”
처용이 아나샤의 말에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않아.”
-스르륵.
엉망이 되어 버린 길을 보며 말한 처용이 양손에 토류부를 소환했다.
-스륵. 샤라락.
처용의 손에서 벗어난 토류부가 지면에 스며들며 사라짐과 동시에.
“토류부 – 지반구축(地盤構築).”
-쩌저저적!
주변에 널브러진 바위와 흙더미들이 허공에 뭉쳐 들더니, 일정한 크기의 벽돌들로 변했다.
빠르게 만들어지는 벽돌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처용 근처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비포장도로처럼 거칠고 울퉁불퉁했던 길이.
-촤라라락!
평평한 벽돌들로 깔끔하고 정갈하게 정돈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이들이 다시 한번 멍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 없는 놀람을 표했다.
‘속성 마나 생성과 조종, 결합을 동시에? 이걸 반복적으로 할 수 있다고?’
놀람을 표하는 사람들 중 한 명, 아나샤를 따르는 충신인 벤.
그는 4서클 마법사답게 처용이 속성 마나로 도로를 만드는 행위가 더 놀랍게 느껴졌다.
속성 마나를 끌어모아 정교한 벽돌을 생성하고.
그 벽돌들을 하나하나 조종하여 일정한 간격으로 쌓는다.
벤은 어떤 원리로 처용이 도로를 만드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 원리를 파악했기에, 더 크게 놀람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수준의 마법사들이 처용의 행동을 따라 한다면?
속성 마나를 모아 벽돌을 만들어 내는 마법사 다섯.
만들어진 벽돌을 바람 마법으로 옮기는 마법사 다섯.
일정하게 나열된 벽돌을 다시 한번 정돈하고 지면에 고정시키는 마법사 다섯.
이렇게 열다섯의 마법사들이 힘을 합쳐, 세 가지 역할을 나눠야만 가능했다.
마법사들이 각각 짝을 지어 팀워크를 발휘해야만 할 수 있는 일.
다수의 마법사들이 힘을 합친다 해도 쉽지 않은 일을…… 처용은 혼자서 간단하게 행하고 있었다.
“이야, 속성 마나로 이런 것도 할 수 있네?”
연아는 처용이 벌이는 도로공사(?)를 보고 익숙한 느낌을 받으며 말했다.
속성 마나로 네모와 동그라미 등 여러 그림을 동시에 그리는 수련.
마나로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반복적으로 하는 훈련과 비슷한 느낌이 전해졌다.
“너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처용이 연아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하며 물었다.
지금 연아 정도의 수준이면 마나로 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준은 되었으니까.
그런 처용의 말에.
“못 해, 이렇게 넓은 도로를 빠르게 만드는 건 아타도 못 할걸?”
연아는 부정적인 의견을 표했다.
마나로 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것 정도는 이제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거대한 규모로 마나를 동시에 다루는 건 아직 불가능했다.
처용과 연아가 가볍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정돈된 도로를 걷자, 반으로 갈라진 성벽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때.
“이! 교단의 사제들은 신성력을 퍼부어! 마법사들은 폭격을 시작해!”
반으로 갈라져 기울어진 성벽을 붙잡고 일어난 화려한 옷의 남자.
제1 왕자가 흔들리는 정신을 수습하며 명령을 내리듯 크게 외쳤다.
그러나.
-이, 이길 수 없어.
-성벽이…… 왕궁이 반으로 갈라졌다고!
병사들 중 반 이상이 갈라진 성벽과 왕궁을 보며 패닉에 빠져 있었다.
왕자의 명령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 상황.
“뭣들 하고 있어! 당장 저 버러지 들을 쓸어 버리라니까! 내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참형을 내리겠다!!”
왕자가 명령을 듣지 않으면 즉결 처형하겠다며 소리쳤다.
그 말에 아직 정신을 온전히 차리지 못한 이들이 강제로 성벽 앞에 섰다.
“당장 공격하라 명해!”
“……병사들은 남은 마도포의 포구를 돌려라! 마법사들은-!”
재차 이어지는 왕자의 독촉에 수도 성벽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이가 명령을 내렸다.
처음 처용을 향해 포격을 퍼부었던 거대한 대포.
단 하나밖에 없던 수도 방위 마도포는 반으로 갈라져 망가진 상황.
하지만 성벽 위에는 그것 말도고 병사들이 수성에 사용하는 일반 마도포도 구비되어 있었다.
-우웅! 우우웅!
마도포들이 빛을 발하고 마법사들이 마나를 모아 마법을 준비했다.
“회개의 옥죄.”
“참회의 심판을 내리리라!”
-우웅! 화륵! 화르륵!
성벽 곳곳에 자리한 아스터 교단의 사제들도 신성력을 피워올리며 공격 준비를 시작했다.
그때.
“압제.”
-우우웅! 파아아-!
처용이 붉은 신력, 압제의 힘을 모아 성벽을 향해 넓게 퍼트렸다.
그 결과.
-파아아! 파사삭……!
마법을 준비하던 마법사들의 마나가 모조리 흩어지며 사그라졌다.
신성 마법을 준비하던 사제들의 신성력 역시 흩어졌다.
마도포에 모이던 마나 역시, 바람 빠진 풍선 소리를 내며 마나가 흩어져 사라졌다.
그저 붉은 파동, 압제 한 번을 사용한 것으로 성벽을 방어하는 모든 이들의 공격 수단이 파훼되었다.
“마신……!”
수도 성벽의 지휘관이 전의를 상실한 듯, 읊조렸다.
상대는 단 한 명에 불과했음에도, 그 한 명을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면 마신의 앞을 가로막는 이들은 모조리 잿더미가 되어버릴 터.
지휘관의 머릿속에 ‘항복’이라는 글자가 떠오를 때.
“국가를 위해! 로스톤 왕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란 말이야! 이 무능한 새끼들아!”
왕자가 병사와 마법사들을 향해 희생을 강요하듯 말했다.
그 말에 동조하듯.
“순교하라!”
“신을 위해 헌신해라. 당장!”
아스터 교단의 사제들 역시, 광기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때.
“시끄럽군.”
-샥!
왕자와 지휘관의 앞에 처용이 나타났다.
백 미터는 훌쩍 넘는 거리를 넘어 눈 깜빡할 시간에 나타난 상황.
그 예상할 수 없는 속도에 왕자와 지휘관이 차마 반응을 보이기도 전.
-탁! 으드드득!
처용이 왕자의 목을 잡아채 들어 올렸다.
“커, 커어어……! 나, 날 구해- 라! 다아-장! 커어!”
순식간에 목을 붙잡힌 왕자가 꺽꺽거리는 소리를 내뱉으며 힘겹게 말했다.
-탁!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에, 지휘관이 검 자루에 손을 올렸고 주변의 병사들이 무기를 잡았다.
그 순간.
“모두 공격을 멈추십시오!!”
-쿵! 쿵! 촤아악!
다리 부분만 골렘의 갑주를 휘감은 아나샤가 재빠르게 성벽 앞으로 뛰어오며 소리쳤다.
-휘릭! 쿠궁!
성벽 앞에서 크게 도약한 아나샤가 성벽 위, 처용의 뒤에 착지하고는.
“데인스 장군! 이분에게 적의를 보이면 다 죽습니다!”
수도 성벽의 지휘관, 데인스라 불리는 남자를 향해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 입니다.”
“……!”
아나샤의 부탁 어린 말에 성벽의 지휘관, 데인스가 멈칫했다.
동시에.
-우웅!
붉게 일렁이는 처용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살기를 형상화한 듯한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눈동자.
-드득! 드드득!
처용과 시선을 마주친 데인스가 검 자루를 잡은 손을 마구 떨기 시작했다.
검을 뽑는 순간 죽는다.
이 사실이 확 와닿았다.
주변의 병사들 역시, 데인스와 같은 심정인지, 몸을 떨며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순교하라!”
“마신을 처치해라!”
아스터 교에 대한 광적인 믿음을 지닌 이들.
인간의 목숨보다 신과 교리를 먼저 생각하는 이들.
아스터 교의 사제와 성기사들이 소리치며 처용을 향해 돌진했다.
그 순간.
-샤락! 샥! 사가각!
검게 일렁이는 바람이 성벽 위에 휘몰아쳤고.
-촤아! 촤아아!
사제와 성기사들의 머리와 사지가 잘려 나가떨어졌다.
조금 전, 처용에게 명령을 받고 은밀하게 움직인 뱀파이어들.
그들이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다만.
-촤아! 촤아아!
-크억!
-으아악!
사지가 잘려 나가며 죽어가는 이들은 아스터 교단의 사제와 성기사들 뿐.
다른 병사와 마법사들은 검게 일렁이는 바람이 스쳐 지나갔음에도 죽지 않았다.
데인스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주변을 살필 때.
“가, 가암-히이이!!”
-쩌저저적! 파아!
왕자의 주변으로 철과 바위가 뭉치더니 큰 파동을 뿜어댔다.
목을 붙잡힌 왕자가 처용의 손아귀를 벗어났고.
-철컥! 철컥! 우드드!
6미터 크기의 강철 골렘으로 변했다.
아나샤와 같은 강철의 힘.
그 힘의 정체는 다름 아닌 강철의 정령이 지닌 것이었다.
로스톤 왕국의 왕족들만이 강철의 정령과 계약할 수 있었고 그 힘을 다룰 수 있었다.
당연히 로스톤 왕족인 제1 왕자 역시 아나샤와 같은 힘을 다룰 수 있었다.
-후욱!
골렘으로 변한 왕자가 증기를 내뿜으며 주먹을 쥐었다.
유려한 형태를 보였던 아냐사와는 다른, 어깨가 넓은 럭비 선수와 같은 형태의 골렘.
“뭉개버려라! 에락!”
왕자가 자신의 정령을 부르며 소리치고는 처용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쐐에에!
성문조차 때려 부술 육중한 주먹이 처용의 안면을 향해 쇄도했다.
“하.”
처용은 왕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보고 헛웃음을 내뱉고는.
-스륵.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이윽고.
-콰쾅!!
처용이 앞으로 뻗은 오른손과 왕자의 육중한 주먹이 충돌했다.
본래 체급 차이만 따진다면, 거대한 골렘이 처용을 밀어내야 정상.
그러나.
-끼긱! 끼기긱!
골렘의 육중한 주먹은 처용의 손에 가로막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니.
“이, 이럴…… 이건 말도 안 되는……!”
왕자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읊조렸다.
골렘의 주먹을 가로막은 것은 처용이 앞으로 뻗은 손이 아니었다.
손가락, 검지 하나였다.
육중한 골렘의 주먹은 처용이 앞으로 내뻗은 검지 하나를 밀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실망이군, 이 녀석도 이렇게 약하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처용이 싸늘한 미소를 머금으며 아나샤를 턱짓하고는.
“절권 – 파권(破拳).”
-후우욱! 콰쾅!
왼손 주먹을 쥐어 골렘의 가슴 가운데 부분을 강하게 타격했다.
주먹이 골렘의 철갑에 닿은 순간.
-쩌저적! 파창! 창!
단단한 철갑 위로 강기의 파동이 퍼지며 실금이 번져나갔다.
견고한 철갑들이 무수히 깨지며 흩어졌고.
“크허헉!?”
골렘 안에 있던 왕자가 피를 뿜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파권은 강기를 모은 주먹으로 상대를 타격한 순간, 뭉친 강기를 터트리는 권법.
상대의 견고한 방어를 부수고 깨뜨리는데 특화된 권법이었다.
“끄어억! 끄윽……!”
바닥에 쓰러진 왕자가 고통을 호소하며 신음하자.
-스릉.
처용이 왕자의 목에 역천의 절을 겨누었다.
그리고.
“이놈을 살려줘야 할 이유가 있나?”
아나샤를 바라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짧은 순간 아나샤가 고민하듯 읊조렸다.
로스톤 왕국 제1 왕자의 생살여탈권이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여기에서 ‘아니오’라는 말을 하는 순간, 제1 왕자는 죽는다.
아나샤가 입술을 떨며 말을 잇지 못하자.
“나, 나를 살려! 당장!”
왕자가 거세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명령하듯 소리쳤다.
보통이라면, 아나샤를 향해 용서를 빌며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더러운 창녀의 배에서 태어난 년이! 지금껏 왕국에서 받은 은혜를 저버릴 셈이냐!”
왕자는 그럴 만한 인성이 되지 못했다.
아니,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운 좋게 왕국에 들어온 첩의 배에서 태어난 여자.
아나샤는 로스톤 왕실의 왕족들에게 있어, 쓸만한 도구로 여겨질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왕자의 거친 언성이 울리자.
“……!”
고민하던 아나샤가 두 주먹을 거세게 쥐며 떨림을 토했다.
그 모습을 본 처용은.
“내가 배신을 좀 많이 당해본 입장에서, 조언 하나 해 주마.”
아나샤를 향해 진지한 목소리로 조언하듯 말했다.
“은혜를 모르는 개새끼가 자비를 받으면, 그 개새끼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처용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회귀 전 실제로 있었던 일들.
심지어 아나샤와 연관이 있는 일들이었다.
“그 개새끼는 네가 아닌, 네 주변 사람들을 노릴 것이고.”
처용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과거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항상 모질게 굴어왔던 못난 형제들을 용서한 영웅.
그러나 그런 영웅을 시기한 형제들이 악신들과 손을 잡아 배신을 저질렀다.
은혜를 저버린 배신으로 인해 영웅의 가족과 친우들이 죽음을 맞이했다.
회귀 전, 재앙 속에서 로스톤 왕국과 국민들을 구원했던 ‘영웅’.
아나샤에게 실제로 일어났었던 비극이었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스릉.
처용이 왕자의 목에 칼날을 더 가까이 겨누며 다시 물었다.
뻔한 비극을 제 손으로 만들 것이냐?
아니면 비극의 연속을 끊어 버릴 것이냐?
처용은 아나샤를 향해 양자택일의 선택지를 주었다.
“이 더러운 년이! 당장 나를 구하지 않으면! 내가 유폐시킨 네년의-!”
눈치 없는 왕자가 아나샤를 향해 다시 한번 소리칠 때.
“……칼을 거두어 주십시오.”
아나샤가 흔들리던 눈동자를 다잡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스릉.
처용은 망설임 없이 역천의 절을 집어넣었다.
“하, 하하! 당연히 나를 살려야지! 이제야 네 쓸모를-!”
자신이 살았다고 믿은 왕자가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그러나 처용이 칼을 거두고 비켜선 순간.
“에실록스.”
-쩌저적!
아나샤가 철갑 골렘으로 변하며 랜스를 들어 올렸다.
날카롭게 빛나는 랜스의 끝이 몸을 일으키려는 왕자에게 향한 순간.
-쐐에에엑! 콰쾅!
아나샤의 랜스가 왕자의 심장을 꿰뚫고 쇄도했다.
랜스에 심장을 꿰뚫린 왕자가 성벽에 틀어박혔고.
“커허!? 커! 커어어……!”
경악이 일렁이는 표정을 드러내며 검붉은 피를 토해냈다.
“네놈은…… 네놈은 살아 있을 가치가 없어.”
아나샤가 피와 내장 조각을 게워내는 왕자를 노려보며 읊조렸다.
처용이 칼을 거두고 비켜선 이유.
차분하게 가라앉은 아나샤의 눈빛 속에 일렁이는 의지를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눈앞에 쓰러져 있는, 남보다도 못한 형제이자 원수.
같은 피가 반이나 흐르고 있음에도 그 피에 혐오감부터 솟구치는 버러지.
처용의 진심 어린 조언을 듣고 아나샤가 선택한 것은.
“내 가족들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내가 그것을 그냥 두고 볼 것 같아?”
자신의 손으로 제1 왕자를 끝장내 악연을 끊어내는 것이었다.
“지옥으로 떨어져, 네게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이들에게 사죄해라.”
아나샤의 말을 마지막으로.
“커어…….”
심장이 꿰뚫려 경련하던 왕자가 고개를 떨구며 사망했다.
-쿠궁! 휙!
아나샤는 벽에 박힌 랜스를 뽑아 꿰뚫린 왕자의 시체를 던져 버리고 강철의 힘을 해제했다.
그리고.
“왕궁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마신이시여.”
처용에게 다가와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마주한 배다른 형제, 제1 왕자의 추악한 면모를 보고 마음을 다잡은 듯 보였다.
“앞장서라.”
처용은 회귀 전과는 다른 면모를 보이는 아나샤를 보며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