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6화
이변을 느낀 처용이 밖으로 나가자.
-쿠구! 쿠구구!
어둑어둑 해가 지고 있는 밤하늘 위로 무지개빛으로 빛나는 환한 아우라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 아우라를 만들어 내는 마나의 영향인지, 라톤 영지 전체의 중력이 거세진 듯, 짓눌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나샤!!”
무지갯빛으로 일렁이는 밤하늘 한가운데에 부유하고 있는 누군가가 크게 소리쳤다.
강렬한 적의와 누군가를 향한 걱정이 뒤섞인 듯한 외침.
그 소리에 벙커 터틀에서 나온 처용이 하늘 위를 바라봤다.
처용의 시야에.
-스르륵! 스륵!
무지갯빛으로 일렁이는 강렬한 마나를 내뿜는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선명한 금색으로 시작해 끝이 백색으로 변하며 일렁이며 휘날리는 긴 머리.
눈을 가리지 않도록 길게 휘날리는 앞머리를 왼쪽으로 넘겨 머리핀으로 고정한 모습.
마법사들이 쓸 법한 넓은 챙모자와 그 아래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길고 뾰족한 귀.
금빛 무늬가 장식된 검은 마법사 로브.
이마에 아티팩트로 보이는 보석이 장식된 써클릿을 착용한 모습.
마치, 마법사 로브를 입은 엘프로 보이는 여성이 금빛 눈동자를 빛내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라톤 영지에 이변을 일으키며 나타난 여성을 처용이 눈으로 확인하자.
‘오랜만이군. 루비아.’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이고는 속으로 반가움을 드러냈다.
루비아 바하무트.
회귀 전, 대마도사, 엘리멘탈 마스터라 불리던 이.
처용에게 속성의 힘을 더욱 정교하게 다룰 수 있도록 노하우를 알려주었던 스승.
서로 등을 맞대고 종말에 맞서 함께 싸워왔던 동료.
처용이 특별하게 생각하는 인연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도 처용이 이곳, 라톤 영지의 영주인 아나샤를 찾은 이유.
그녀가 회귀 전, 저항군의 멤버였던 이유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다름 아닌 눈앞에 나타난 여성.
미래에 대마도사라 불리게 될 루비아 때문이었다.
상황이 복잡하게 꼬이기 전에 그녀를 미리 만나야만 했으니까.
처용이 루비아를 바라보자, 루비아 역시 시선을 느끼고 처용을 마주했다.
그 순간.
“네가 마신이구나!!”
-쿠구구!
루비아에게서 분노 섞인 고함이 터짐과 동시에 무거운 마나가 주변 일대를 짓눌렀다.
지금 금빛으로 일렁이는 루비아의 눈에는.
-쿠구구!
처용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기운이 눈에 보였다.
구체적인 힘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단련된 마나.
그 마나 안에 숨겨진 더 강력한 힘, 신력도 느껴졌다.
에스라 대륙에서는 그 누구도 지니지 못한 기운.
얼마 전에 나타난 마신이 분명했다.
“흐음, 그런데?”
처용이 루비아의 외침에 긍정하며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지금 시기의 루비아가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를 가늠하는 모습.
“아나샤를 어떻게 한 거냐!”
그런 처용의 태도에 루비아가 손을 뻗으며 소리치자.
-우우웅!
하늘 위에 일렁이는 무지갯빛 마나가 그녀의 손아귀에 모여들었다.
다양한 속성의 힘이 일렁이는 마나가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넘실거렸다.
-용님.
-적이야? 격추시킬까?
갑작스레 나타나 적의를 드러내는 루비아에 의해 류마와 연아가 전음을 보내며 전투를 준비했다.
‘일단, 가만히 있어. 내가 해결하지.’
처용은 그런 그들에게 자신이 해결한다 전했다.
루비아가 손아귀에 모인 마나를 처용을 향해 터트리려는 순간.
“루비아!”
-탓! 촤아악!
영주성, 아나샤의 집무실과 연결된 테라스에서 아나샤가 뛰쳐나왔다.
다급한 목소리로 루비아를 부르는 아나샤의 목소리에.
“아나샤? 무사했구나.”
-스르르.
루비아가 손아귀에 모으던 마나를 흩어 버리며 안도의 목소리를 내었다.
-샥! 탓.
허공 위에서 순식간에 사라진 루비아가 아나샤의 옆에 나타났다.
마치, 그녀를 보호하듯 앞에 서고는.
“네가 마신에게 붙잡혀 이단자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주변을, 특히 처용을 경계하며 아나샤를 향해 의문을 표했다.
-라톤 영지 전체가 마신에게 복속되었다.
-영주 아나샤는 마신에게 굴복한 이단자가 되었다.
루비아는 세간에 떠들썩한 이 소식을 듣자마자, 라톤 영지를 향해 번개처럼 날아온 것이었다.
라톤 영지는 물론, 아나샤까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계속 들었었다.
그러나.
‘뭔가 이상한데?’
루비아가 봤을 때, 아나샤는 멀쩡해 보였다.
라톤 영지 역시 파괴의 흔적은 없었고 멀쩡해 보였다.
아스터 동상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본 적 없는 거대한 거북이 세 마리가 자리한 것이 이상했지만…….
아나샤도 영지민들도 영지도 전체적으로 무사해 보였다.
무엇보다도 마신으로 의심되는 존재가 있다면 모두가 불안에 떨어야 하는 바.
그런 분위기가 없는 것이 이상했다.
“어떻게 된 거야?”
루비아가 아나샤를 향해 의문 가득한 목소리로 묻자.
“그, 그게…….”
루비아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말을 흐렸다.
오늘 일어난 일을 짧게 정리하여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하고 또 복잡했으니까.
그때.
“마나부터 거두지?”
-저벅.
처용이 루비아를 향해 한 걸음 다가오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본 루비아가 긴장하며 잔뜩 끌어올리자.
“영지민들을 마나로 압사시켜 다 죽일 생각이냐?”
-쿠구!
처용이 경고 서린 목소리로 강기를 옅게 내뿜으며 읊조렸다.
그 말에.
“아.”
아나샤가 사방에 내뿜던 마나의 기운을 급하게 거둬들였다.
-으어.
-우으…….
마나에 짓눌리던 영지민들과 룬티르 일족의 아이들이 숨을 토해 내며 안도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아나샤의 안부에 정신이 팔려 미쳐 신경 쓰지 못했던 부분.
루비아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옅게 인상을 쓰며 침음을 흘렸다.
“마탑의 대마법사가 이리도 멍청할 줄이야.”
처용은 그런 루비아를 향해 지적하듯 말을 이었다.
“영지민들을 개, 돼지를 취급하는 아스터의 노예다운 행동이었어.”
에스라 성운의 주신과 아스터 교단을 비난하고 비꼬는 신성모독.
보통 아스터 교단과 관련이 있는 이들이라면 크게 놀라거나 격노를 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닥쳐! 방금은 실수였어!”
루비아는 신성모독에 분노하는 것이 아닌, 처용이 자신의 실수를 지적한 것이 거슬린 듯 보였다.
그리고.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너만이라도 탈출시켜야겠어.”
루비아가 아나샤를 향해 왼손을 뻗자.
-우우웅!
여러 빛깔의 마나로 이루어진 마법진이 아나샤의 발밑에 떠올랐다.
루비아는 작금의 상황 파악보다는 아나샤부터 탈출시킬 생각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제멋대로인 건 여전하군.’
그 모습을 본 처용이 속으로 작은 한숨을 내쉬었고.
“루, 루비아! 내 말부터-!”
아나샤는 자신을 강제로 이동시키려는 루비아를 향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루비아는 그런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공간 이동 마법을 빠르게 완성 시켰다.
-위잉!
공간 이동 마법진이 환하게 빛나며 아나샤를 강제로 이동시키려는 순간.
“압제.”
-쾅! 우우웅!
처용이 지면을 강하게 밟으며 붉은 신력, 압제의 기운을 넓게 퍼트렸다.
그러자.
-쩌저적! 파창! 창!
아나샤를 감싸던 공간 이동 마법진이 압제의 파동에 맞아 순식간에 깨져 나갔다.
“미안하지만, 그 녀석은 내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았기에 아직 보내줄 수 없다.”
처용이 루비아를 향해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하자.
“이!”
-스르르!
루비아가 여러 빛깔로 일렁이는 마나를 내뿜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루비아, 멈춰-!”
아나샤가 다시 한번 루비아를 향해 소리치려 할 때.
“아무래도, 네 친구는 너와 대화할 마음이 없어 보이는데.”
처용이 적대 어린 눈빛을 띠고는 강기를 스멀스멀 내뿜으며 아나샤의 말을 잘랐다.
이런 외골수적인 모습을 보이는 루비아와 대화를 하려면 단 한 가지 수단밖에 없었다.
“네 마법으로 내 마법을 이기면, 네 친구를 놓아 주지 어떤가?”
처용이 루비아를 향해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도발하듯 물었다.
마신이라 불리는 존재가 마법 대결을 신청한 상황.
보통의 인간이라면, 무조건 승산이 없다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라. 마신.”
-우우웅!
루비아는 처용의 도발을 자신 있게 받아들이며 마나를 내뿜었다.
그녀는 추후 대마도사라 불릴 정도로 마법에 천재적인 인물.
그런 그녀에게 있어 자신의 마법이란, 절대적인 자신감과 같았다.
그 상대가 마신이라 불리는 강력한 존재라 해도, ‘마법’ 뿐이라면 이길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스르륵. 스륵.
처용은 루비아가 마나를 모아 자신의 위에 마법진을 만들고 있음에도 제지하려 하지 않았다.
그게 어떤 마법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이윽고.
“디멘션 필드.”
루비아가 복잡한 마법진을 완성해 시동어를 읊자.
-삐리리리!
그녀를 중심으로 새하얀 빛의 파동이 옅게 퍼져 나갔다.
마치, 영지 전체가 색을 잃은 듯한 모습.
루비아의 뒤에 있던 아나샤도.
뒤에 있는 영주성도.
주변에 있던 영주민들도.
단 두 명을 제외한 주변의 모든 것들이 새하얀 도화지 위에 연필로 그려진 그림처럼 변했다.
‘……대단하네.’
루비아가 만들어 낸 공간 격리 마법을 관찰한 처용이 속으로 감탄을 표했다.
디멘션 필드는 일정 영역의 공간 위에 허상 공간을 덧씌우는 마법이었다.
간단하게 그 기능만 설명하자면, 수련탑의 대련 결계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었다.
이 격리된 허상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공격은 현실에 타격이 가지 않는다.
반대로 외부의 공격 역시 허상 내부로 침투할 수 없었다.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은 단 하나.
디멘션 필드를 만들어 낸 제작자, 루비아를 무력화시키거나 죽이는 것뿐이었다.
처용이 오랜만에 보는 디멘션 필드를 관찰하며 생각할 때.
“야, 한처용! 괜찮은 거야? 네 모습이 그림처럼 변했는데?”
처용 근처로 다가온, 하얗게 변한 연아가 걱정을 표하며 말했다.
하얗게 변한 것은 연아인데, 처용을 보며 하얗게 변했다 말하는 연아.
“수련탑의 대련 결계라고 생각하면 된다.”
처용은 연아가 왜 저런 말을 했는지 이해한다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연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허상 공간에 격리된 처용과 루비아를 제외한 남은 이들.
그들의 눈에는 덧씌워진 허상 공간에 격리된 처용과 루비아가 하얗게 변한 모습으로 보이고 있었다.
이윽고.
-스르륵.
덧씌워진 허상 공간, 디멘션 필드가 영지 전체를 감싸며 완벽하게 구축되었다.
디멘션 필드가 완벽하게 구축된 순간.
“마나 써클라인.”
루비아가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마나를 모아 등 뒤에 고리를 만들어 내었다.
마나 써클라인(Mana Circle Line).
루비아가 마법을 보다 효율적으로 빠르게 다루기 위해 만들어 낸 그녀만의 마법진이었다.
그녀의 등 뒤에 나타난, 원형으로 이어진 마나의 고리는 총 여섯 개.
6서클 마법사라는 증거였다.
그 원형의 고리 안에 마법진이 그려진 순간.
“볼케이노 레인!”
-화르륵! 쿠구구!
루비아가 처용을 향해 두 손을 뻗으며 이글거리는 화염을 내뿜었다.
6써클 마법 중 하나인 볼케이노 레인.
뻗어 나간 화염은 단순히 불길이 되어 쏘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슈르륵! 슈륵! 파아아-!
솟구치는 화염 줄기들이 슬라임처럼 작은 파편들로 분열하며 분출해 나갔다.
마치, 터진 화산 위에서 퍼져 나가는 용암의 줄기처럼.
-화르륵! 화륵!
검붉은 색으로 일렁이는 수천 개의 화염 줄기와 파편들이 처용에게 쏟아졌다.
뜨겁게 일렁이는 화산의 파편들이 맹렬하게 쏟아지고 있음에도.
“흐음…….”
처용은 팔짱을 낀 채 쏟아져 오는 화산을 관찰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콰콰콰! 콰콰!
목표물에 명중한 화산의 파편들이 강렬한 폭발을 일으키며 주변 일대를 불태웠다.
화산 파편에 정확히 명중한 처용은 불길에 완전히 휩쓸려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당한 듯한 모습이었지만.
“라이트닝 볼택스(Lightning Vortex)!”
루비아는 한 번의 마법을 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추가 마법을 발동했다.
-파지지직! 파직!
그녀의 손아귀에 전류가 모여들며 나선으로 회전하기 시작하며 점점 크기를 부풀렸다.
손위에 모인 전류의 크기가 농구공 크기로 커졌을 때.
-휘릭! 파지직!
루비아가 극한으로 압축시킨 번개의 구체를 내던졌다.
아직도 자잘할 화산 폭발을 일으키는 지면에 번개가 맹렬히 회전하는 공이 쏘아졌다.
이윽고.
-쿠콰콰! 파직! 쿠릉! 쿠르릉!
지면에 도달한 번개의 구체가 강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마치, 번개로 만들어진 허리케인이 일어난 듯, 나선으로 회전하는 전류가 사방을 지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화산 폭발의 영향까지 더해졌는지.
-콰콰! 쾅!
자잘하게 일어나는 폭발이 더욱 거세지며 2차 폭발을 일으켰다.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용암 불꽃에 번개가 더해져 일어난 과부하 현상이었다.
“마법으로 날 이기겠다고? 어디 한번 해 보시지!”
루비아가 화염과 번개에 휩싸여 보이지 않는 처용을 향해 소리침과 동시에.
-우우웅!
무지갯빛으로 일렁이는 마나를 더 크게 내뿜었다.
한 지역을 초토화시켜 버릴 수 있는 고위 마법을 두 번이나 사용했음에도, 지치지 않는 모습.
심지어 다음 공격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루비아의 손아귀에 마나가 모여들며 다음 마법이 완성되려는 때.
“기대 이상인데?”
화염과 번개가 휘몰아치며 맹렬히 폭발하는 화마 속.
그 속에서 처용의 목소리가 울리더니.
-화아! 탁!
폭발이 일부분 걷어짐과 동시에 처용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성조차도 단번에 무너뜨릴 파괴 마법에 두 번이나 직격을 당했는데도, 처용은 멀쩡한 모습이었다.
강력한 마법에 당했음에도 처용은 아무런 피해가 없는 상황.
“…….”
루비아 역시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침묵했다.
그러나.
“……6서클 마법으로는 피해조차 없다는 건가?”
그런 처용의 이질적인 모습에 오히려 자극을 받았다는 듯, 진지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동시에.
-우우웅!
그녀의 등 뒤에 마나가 추가로 모여 뭉쳐 들더니.
-스르륵!
또 하나의 고리가 만들어지며 총 7개의 원이 형성되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