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화
영지성을 나온 처용이 향한 곳은 아스터 동상이 자리했던 중앙 광장이었다.
그곳에는 아스터 동상 대신 세 개의 둥근 동산 같은 물체가 자리해 있었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처용이 불러낸 ‘벙커 터틀’.
구출한 룬티르 일족의 아이들이 있는 장소였다.
-저벅.
처용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가장 중앙에 있는 벙커 터틀.
-드르륵.
벙커 터틀 내부로 향하는 문이 열리고 처용이 안으로 들어서자.
“안녕하세요. 마신님.”
침상에 상체를 일으켜 세운 새하얀 소녀가 처용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잔잔하고 맑은 카란디아의 목소리에.
“네이션이 나에 대해 말해주었나?”
처용이 카란디아 옆에 서 있는 네이션을 눈짓하며 말했다.
동시에 작은 의문이 들었다.
룬티르 일족을 지키던 연화에게서 ‘방금 카란디아가 깨어났다’라고 들었었으니까.
처용은 그 말을 듣는 즉시 이곳으로 왔다.
그런데, 카란디아가 익숙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처용에게 인사를 전했다.
마치, 처용의 정체와 작금의 상황을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분위기.
방금 깨어나 정신이 없어야 할 소녀가 보일 태도가 아니었다.
게다가 네이션이 이 모든 상황을 카란디아에게 설명하기에는 짧은 시간.
처용이 의문을 드러낼 때.
“네이션 님을 통해 통해서 모두 보고 있었습니다.”
카란디아가 처용의 의문을 알아챘다는 듯,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이션은 룬티르 일족을 수호하기 위해 불사의 계약을 맺은 기사.
그는 마지막 남은 룬테라 왕국의 왕족인 카란디아에게 귀속되어 있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서로의 영혼이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육체가 가사 상태에 빠진 카란디아는 네이션의 시야를 공유하며 지금까지의 상황을 모두 지켜봤었다.
때문에, 자신이 처한 상황과 처용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고맙습니다. 제가 하지 못한 일을 해 주셔서…….”
카란디아가 지금까지 처용이 했었던 일을 언급하며 감사를 전했다.
룬테라 왕국의 멸망으로 인해 대륙 곳곳으로 흩어진 룬티르 일족.
그들을 규합하고 보호해야 하는 이는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하지만, 신의 후광을 등에 업고 탄압을 일삼는 이들은 너무나도 거대한 세력이었다.
홀로 살아남은 왕족인 그녀만으로는 절대로 맞서 싸울 수 없었다.
그저, 네이션에게 보호받으며 몸을 숨기고 도망 다니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레 나타난 마신이 고통받는 룬티르 일족들을 구해 주었다.
그런 큰 은혜를 입었기에.
“저희에게 원하는 게 있나요?”
카란디아는 처용을 향해 진지한 분위기로 물었다.
너무나도 큰 은혜를 입은 상황.
그녀는 마신이 일족에게 내민 구원의 손길을 거부할 생각이 없었다.
그랬기에 마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그에 협조해야만 했다.
“나의 세력이 되어 내게 협력해라.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게 끝이다.”
처용은 카란디아의 물음에 간단명료하게 답했다.
에스퍼들, 룬티르 일족들을 도운 진짜 이유는 회귀 전에 맺어졌던 인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진실만큼은 밝힐 수 없다.
때문에, 가장 현실적이면서 작금의 목적에 부합하는 이유를 댄 것이었다.
아스터 교단과 에스라 성운에게 탄압받는 이들은 규합시켜 새로운 세력으로 만든다.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는 마신을 선두로 이 세계를 파괴하려 하는 아스터 교단을 짓밟는다.
처용이 에스라 대륙에 직접 온 궁극적인 목적 중 하나였다.
“마지막 남은 자연의 무녀가 마신의 백성이 될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카란디아가 처용의 말에 답하듯,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처용은 카란디아의 대답에 작은 미소를 짓고는.
“내게 하고 싶은 부탁이 있나?”
그녀의 의도를 읽은 듯, 진지한 눈빛을 띠며 물었다.
그 말에 카란디아가 입을 다물며 짧게 침묵하고는.
“염치없지만, 도움이…… 도움이 필요합니다.”
원하는 바를 이야기했다.
“제가, 제가 저주받은 저희 왕국의 땅을 정화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카란디아의 부탁은 다름 아닌 룬테라 왕국이 있었던 장소의 정화.
지금은 저주를 받아 폐허가 되어 버린 곳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굳이 버려진 땅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나?”
처용이 의문을 제기하며 물었다.
카란디아가 말하는 룬테라 왕국이 있었던 장소.
그곳이 어디인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이곳 동부의 로스톤 왕국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폐허의 땅.
아무것도 없이 황야만이 펼쳐진 그 장소가 바로 룬테라 왕국이 있었던 지역이었다.
처용은 카란디아가 왜 굳이 폐허가 되어 버린 장소를 고집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곳에서 고통받는 저희 백성들을 정화해야 합니다.”
카란디아가 폐허밖에 없는 장소에 억류된 영혼들을 정화해야 한다고 말하자.
“흐음?”
처용이 속으로 의문을 삼켰다.
그때.
“빌어먹을 성좌들이 내린 저주는 악독한 것이었소.”
-으드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네이션이 분한 듯 주먹을 쥐며 입을 열었다.
“아무 잘못 없는 우리의 백성들을…… 친우들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놨으니까.”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놨다?”
처용이 네이션의 말에 흥미를 보이며 말하고는.
‘아, 2년이나 빠르게 이곳에 왔으니, 회귀 전과는 다를 수도 있겠군.’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과는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지금 시기는 처용이 기억하는 에스라 대륙보다 2년이나 이른 시기.
게다가 처용이 지구에 닥칠 재앙과 멸망을 막은 영향인지, 에스라 대륙의 정황도 조금 달라져 있었다.
그렇다면, 폐허가 되어 버린 장소 역시 처용이 기억하는 것과는 다를 수 있었다.
아니면…….
‘그곳이 아무것도 없는 폐허가 되어 버린 이유가…… 마검의 탄생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
마검 카란디아의 탄생과 관련된 사건이 발생하여 폐허가 되어 버렸을 가능성 또한 존재했다.
“그곳의 정화를 도와달라는 건가?”
처용이 회귀 전과 작금의 상황을 속으로 비교하며 물었다.
“정화는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저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 말에 카란디아가 침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정화에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카란디아의 부탁은 어렵지 않았다.
멸망한 룬테라 왕국으로 자신을 인도해 줄 것.
정화에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이것이 전부였다.
“좋다. 그 정도쯤이야.”
처용은 카란디아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안 그래도 지구의 세력이 자리 잡을 전초기지가 필요할 때였다.
조만간 로스톤 왕국을 정벌하여 전초기지로 삼을 테지만, 기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나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저주를 정화한다면, 봉인된 저희의 성역도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성역?”
이어지는 카란디아의 말에 처용의 의문을 표하자.
“카란디아! 그건……!”
네이션이 당황스러운 듯 그녀를 불렀다.
외부로 발설해서는 안 될 크나큰 비밀을 발설한 듯한 분위기.
“에스라 성운에게 우리 성역의 정체를 들켜 그들의 자원이 되는 것보다는 낫겠죠.”
카란디아는 네이션의 만류 어린 목소리에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룬테라 왕국의 기밀 같은 건가?”
처용이 카란디아가 말한 성역이 무엇인지 짐작해보며 물었다.
설마, 그것이 신의 성역과 같은 장소일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신들의 성역과 같은 장소입니다.”
처용의 예상을 깨버리듯, 카란디아의 입에서 다소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신의 성역이라고? 너희를 가호하는 신이 있나?”
예상 못 한 카란디아의 말에 처용의 눈이 가늘어지며 묻자.
“저희 일족의 시조께서 위대한 신이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카란디아가 룬티르 일족의 비밀 중 하나를 이야기했다.
“성역을 되찾고 룬테라를 재건한다면, 그곳은 마신님의 성역이 될 것입니다.”
마신, 처용과 맺은 동맹의 대가.
카란디아는 그 대가로 일족이 지켜온 성역을 걸었다.
그녀와 살아남은 룬티르 일족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대가를 건 것.
그러나.
“흐음, 궁금하긴 하다만, 우리의 성역보다 나을지는 모르겠군.”
처용은 카란디아가 건 엄청난 대가가 별것 아니라는 듯,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주면 고맙지만, 크나큰 대가로 여겨지지는 않는 듯한 모습.
“성역을…… 가지고 계셨었군요.”
카란디아가 예상하지 못한 듯,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처용의 정체는 인간에서 신으로 승천한 반신(Demi God).
에스라 성운처럼 자신만의 성역이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우주에 존재하는 그 어떤 성역과 성지보다 아름답다고 자신한다.”
처용은 자부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이 끝나면, 한 번 구경시켜 주지.”
“가, 감사합니다.”
카란디아가 놀란 듯한 목소리로 감사를 전하고는.
‘그래, 마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했었지.’
네이션을 통해 들었던, 처용과 함께 하는 신격들에 대해 떠올렸다.
처용과 함께하는 신격들 중에는 대신급 성좌가 셋이나 존재했다.
심지어 그들 중 두 명은 처용과 같은 인간에서 신으로 승천한 이들.
단순 세력의 크기만 따져봐도 에스라 성운 못지않은 강력한 세력이었다.
카란디아가 마신의 세력에 완전히 들기 위한 회심의 조건으로 내건 성역.
그 성역의 가치가 떨어진 듯한 느낌을 받은 카란디아가 어두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게 성역을 맡기는 건, 옳은 판단이다.”
그런 카란디아의 분위기와 생각을 알아챈 처용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휘하에 들어온 이상, 그 누구도 너희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이들을 건드린다?
그 상대가 신이든, 거대 성운 전체든, 그 누구라 해도!
처용에게 있어서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아스터 같은 개새끼들이라면 더더욱.”
“…….”
카란디아는 이 대륙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존재를 향해 처용이 내뱉는 모독을 듣고 흠칫 놀랬지만.
“……감사합니다.”
무언가 안도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전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주시겠습니까?”
처용에게 손을 내밀어 줄 것을 요청했다.
카란디아의 요청에 처용이 손을 내밀자.
“제 축복이 유의미할지는 모르겠지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탁.
카란디아가 두 손으로 처용이 내민 손을 잡아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우우웅.
녹색과 백색이 섞인 자연의 기운이 카란디아에게서 뿜어져 나왔고.
-스르륵.
카란디아의 이마에 닿은 손을 통해 처용에게 흘러 들어갔다.
그 순간.
-우우웅!
처용에게서도 옅게 신력이 흘러나오며 반응이 나타났다.
정확히는 처용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선인의 육체가 반응을 보였다.
“흐음?”
처용이 익숙한 듯, 무언가 친근한 카란디아의 기운에 의문을 표했고.
“자, 자연의 기운이……?”
카란디아 역시 처용에게서 느껴지는 선인의 기운에 눈이 점점 커지며 놀람을 표했다.
그리고.
[신수의 격이 발동합니다.]
[룬티르 일족, 카란디아가 무리에 합류하기를 원합니다.]
[다른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가 당신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수락 시, 룬티르 일족 전체가 무리에 합류합니다.]
더 놀라운 현상은, 신수의 격이 발동했다는 것이었다.
“…….”
처용이 신수의 격으로 인해 나타난 시스템을 보며 이게 무슨 상황인지 속으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이 기운은…… 도대체?”
카란디아 역시 당황스러움을 표하며 읊조렸다.
처용에게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
그것은 다름 아닌 최상위 신수이자, 영험한 존재인 드래곤과 비슷했다.
“마신이라는 말은…… 그저 사람들이 그리 부를 뿐이라 생각하긴 했었습니다만.”
카란디아가 밖의 사람들이 처용을 부르는 호칭을 떠올리며 읊조렸다.
마신(魔神).
마(魔)와 혼세(混世), 재앙(災殃)을 불러오는 신.
하지만, 그런 마신이 이런 정순한 자연의 기운과 신력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처용을 의미하는 마신은 그저 사람들이 부르는 호칭에 불과했지, 처용이 진짜 마신은 아니었다.
그 결정적인 증거로.
-한처용.
-용님.
그와 같은 세계에서 온 이들은 이름으로 보이는 듯한 말들을 언급했었다.
처용 본인 역시 자신은 아직 신명을 얻지 못한 반신이라 소개했었다.
카란디아가 냉정하게 판단할 때, 처용은 절대로 마(魔)에 속한 자가 아니었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드래곤?”
처용에게서 전해지는 익숙한 느낌.
세계의 중립과 균형을 위해 존재하는 고귀한 생명체.
드래곤과 비슷한 느낌이 전해졌다.
“……반신이니까. 나 역시 후천적 신수의 일종이라 볼 수 있겠지.”
처용은 그런 카란디아의 의문 어린 말이 이해가 간다는 듯 말했다.
동시에.
‘혹시, 룬티르 일족은 선천적 선인과 관련이 있나?’
처용이 속으로 몇 가지 가정을 떠올렸다.
그중 하나인 룬티르 일족이 ‘선천적 선인’과 관련이 있다는 가정.
이런 생각이 떠오른 이유는 다름 아닌 에블린 때문이었다.
그녀는 같은 인간에게 신수의 격이 반응했던 유일한 케이스였으니까.
“아무래도 태룡사로 너를 한번 데려가는 게-.”
처용이 생각을 정리함과 동시에 에블린에 대해 말하려는 순간.
-쿠구구! 쿠구!
강렬하고 거대한 마나가 이곳, 라톤 영지 전체를 진동시키며 내려앉았다.
동시에.
-아나샤!!
아나샤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생각보다 빠른데?’
그 목소리를 들은 처용이 카란디아에게 전하려던 말을 끊고는.
“손님이 찾아왔군.”
작은 미소를 띠며 벙커 터틀 밖으로 나갔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