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홀로 계승자-400화 (400/726)

#400화

하루가 지나고 처용은 곧장 다음 도시로 움직였다.

“브, 블록 길을 쭉 따라가면 다음 영지가 나옵니다.”

처용을 도시로 안내했던 견장을 찬 병사가 안내를 계속했다.

에스라 대륙의 편리한 점 중 하나는 바로 도시와 도시 사이를 연결하는 길이 잘 정돈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마차든, 상단이든, 혹은 군대든 간에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기가 생각보다 편했다.

그리고.

-……정말 괜찮은 거야?

-거기 있으면 아스터 교단에 붙잡혀 이단 심문소로 간다고!

-거기 남으나, 여길 따라가나…….

처용을 뒤따라 이동하는 이들이 더욱 늘어난 상태였다.

그들 모두 도시에 거주하던 시민들.

시민들 중 일부가 처용의 행보에 뒤따르는 이유는 아스터 교단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기 있으면, 이단자로 몰려 잡혀갈 겁니다!

-마신을 따라야 합니다!

처용이 이단 심문소에서 구해낸 사람들이 도시의 사람들을 선동한 결과였다.

이단 심문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명목으로 그들이 이단자가 되어 잡혀갔는지.

그곳에서……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전부 폭로했다.

그 결과 도시의 사람들이 다양한 반응을 보였고 일부 시민들이 행렬에 합류한 것이었다.

대부분은 영주와 아스터 교단의 사제들이 벌이는 폭정에 불만이 있던 시민들이었다.

행렬에 합류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음에도 처용이 딱히 제지하려 하지 않자.

-처, 천사를 이겼잖아?

-마신을 따라가면 안전하지 않을까?

눈치를 보던 이들까지 하나둘 처용의 행렬에 합류했다.

그로 인해 처음에는 백 명이 채 되지 않던 행렬이 오백 명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단 심문소 근처 서로 가까이 있던 도시들이 전부 정리된 탓에, 이번에 갈 곳은 조금 멀었다.

그럼에도 사람들 중 단 한 명도 불만을 내비치는 이는 없었다.

감히 마신을 향해 불만을 드러내는 간 큰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몇 시간 후, 다음 영지로 가까워져 갈 때쯤.

“……마, 마신님.”

앞장서 나아가던 처용의 앞에 수염이 희끗희끗한 나이 든 남성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그 남자로 인해 처용의 발걸음이 멈추자 행렬 전체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뭐야.

-저 노인네 갑자기 왜 저래?

작금의 상황을 알 수 없었던 사람들이 의문을 표할 때.

“이 앞, 라톤 영지만큼은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탁.

나이 든 남자가 처용 앞에 엎드리며 호소하듯 말했다.

간절함이 일렁이는 노인의 목소리가 울리자.

-뭐, 뭐 하는 거야!

-당장 비켜 노인네! 당장!

행렬의 사람들이 경악한 표정을 지은 채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감히 마신의 앞을 가로막는 노인이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천사를 찢어발기고 도시를 짓밟던 마신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저 노인의 행동으로 인해, 마신의 심기가 틀어진다면?

재앙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유라도 있는가?”

처용은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일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라톤 영지의 영주님은 다른 영주님들과는 다릅니다. 부디…….”

그 말에 처용 앞에 부복한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곧 도착하는 영지의 영주는 다른 강욕적인 영주들과는 다르다는 것.

노인은 그런 영주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 부탁했다.

지금까지 지나쳐 온 도시의 영주들은 처용의 손에 처단되었으니까.

노인은 그것을 바라지 않는 듯 보였다.

처용은 그런 노인을 잠시 바라보고는.

“일어나라.”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영주가 어떤지는 내가 직접 보고 판단할 것이다.”

말을 마친 처용이 멈추었던 발걸음을 내딛고는 노인을 지나쳐 나아갔다

좋지 않은 상황을 예상했던 노인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미묘한 표정을 내비치자.

“무모하셨습니다.”

“큰일 나는 줄 알았다고요……!”

두 명의 남자가 노인에게 다가와 부축하듯 일으켜 세우고는 질겁한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그분을 지키려면 이렇게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노인이 다가온 두 남자를 향해 침울한 목소리로 답하고는.

“이제, 큰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점점 멀어져 가는 처용의 발걸음을 따라가며 읊조렸다.

그리고.

“…….”

노인을 등진 처용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처용은 자신의 앞에 나서서 부탁을 건넸던 노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앞, 영지를 관리하는 영주가 누구인지까지도 이미 아는 상황이었다.

‘자, 과연 어떻게 나올까?’

처용이 곧 만날 이를 상상하며 궁금한 듯 속으로 읊조렸다.

***

동부의 도시들 중, 다른 도시보다도 조금 동떨어져 있는 외진 영지.

동부의 끝을 메우고 있는 대수림 북쪽에 위치한, 조금 허름해 보이는 도시.

주변의 땅이 비옥했던 다른 도시들과는 다르게 이 지역의 땅은 단단하고 척박해 보였다.

그럼에도 동부에 자리한 나라의 한 축을 담당하는 도시이니만큼, 성벽 관문이 입구에 자리해 있었다.

-탁.

관문에서 떨어진 장소에 도달한 처용이 발걸음을 멈추며 앞을 바라봤다.

본래는 성벽 위에 자리한 병사들이 전투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했다.

병사들은 마도포를 발사할 준비를 갖추고 마법사들을 폭격을 퍼부을 준비를 갖춰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

-…….

성벽 위의 병사들은 굳은 표정으로 망부석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마도포도, 활을 소지한 궁병들도, 지팡이를 쥔 마법사들도 모두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미리 명령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 앞, 정확히는 성문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앞선 도시의 영주들과 같은, 귀족을 상징하는 화려한 정무복.

몸에 금장식 같은 치장을 주렁주렁 달고 있던 다른 영주들과는 달리, 장식 하나 없는 깔끔한 복장.

그 복장 겉에는 배 나온 귀족 영주들과는 다른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몸매가 드러났다.

깔끔하게 묶어 내린 옅은 갈색 머리와 각오를 다진 듯한 눈빛을 지어 보이는 연아와 비슷한 나이 때의 여성.

그녀가 바로 이 관문 너머에 있는 도시의 영주였다.

“네가 이 도시의 영주인가.”

처용이 병사들보다 앞에 선 여성을 바라보며 말하자.

“그렇습니다. 마신이시여.”

성벽 앞을 지키고 선 여성이 처용의 말에 긍정하며 입을 열었다.

“이곳을 책임지는 영주, 아나샤라고 합니다.”

성벽 위에 선 병사들보다도 어려 보이는 여성.

스스로를 아나샤라고 소개한 어린 여성이 이 도시를 관리하는 영주였다.

굳어 있었지만, 당당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처용이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오랜만이군. 아나샤.’

눈앞의 여성을 향해 속으로 인사를 전했다.

아나샤 로스톤.

에스라 대륙의 동부를 다스리는 왕국 중 하나인, 로스톤 왕국의 도시 일부를 관리하는 어린 영주.

회귀 전, 대부분의 에스라 대륙 사람들이 지구의 피난민을 환영하지 않을 때.

-기운 내십시오.

유일하게 지구의 피난민들을 내치지 않고 수용해 준 고마운 인물이었다.

추후 에스라 성운이 배신을 저지르고 이 대륙에 대격변이 일어났을 때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합니다!

에스라 대륙에서 살아남은 이들을 이끌고 저항군에 합류해 처용의 동료가 되었던 이였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과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만큼은 신뢰감 가득한 책임감을 보여주는 자.

드높은 귀족임에도 타인에게 우월감 어린 권력을 과시하기보다는 책임과 의무를 먼저 생각하는 군주.

이것이 회귀 전, 처용이 기억하는 아나샤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의 성격이 변하지 않았다는 듯.

“영지민들이 당신에게 적의를 보이는 일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나샤는 병사들보다도 앞에 서서 그들의 목숨을 지켜주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항복하겠다는 건가?”

처용이 진지한 목소리로 아나샤를 바라보며 묻자.

“항복은…… 불가능합니다.”

아나샤가 표정을 살짝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동시에 찰나의 순간, 불안한 눈빛을 빛내는 눈동자를 돌려 성벽을 응시했다.

정확히는.

-우우웅.

성벽 위의 병사나 평범한 사제들과는 다른, 화려한 사제복을 입은 이들.

회개의 사제들 소수가 서로 거리를 벌린 채, 은밀하게 신성력을 내뿜고 있었다.

처용은 아나샤의 분위기와 성벽의 상황을 짧게 살피고는.

“빌어먹을 에스라 성운의 성좌들이 퇴각하지 말라고 명령하던가?”

손가락으로 하늘 위를 가리키며 비웃음을 담아 말했다.

“…….”

처용이 말이 사실이라는 듯, 아나샤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굳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나샤의 표정과 분위기로 상황을 파악한 처용은.

“신이라는 새끼들이 무능하기 짝이 없어, 나를 직접 해결하지도 못하고 영주 하나를 방패로 세우다니. 쯧쯧.”

하늘 위를 응시하며 조롱하듯 말을 이었다.

처용의 신성모독이 계속되자.

-저 이단자가 감히……!

-참아라, 지금은…… 인내할 때다.

성벽 위에 자리한 회개의 사제들이 인상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침음을 토해냈다.

그때.

“저 하나로…… 끝내주십시오.”

아나샤가 각오를 다진 듯한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수를 써서든 마신의 발목을 붙잡아라.

그녀가 속한 국가와 아스터 교단에서 내려온 명령이었다.

제아무리 도시를 다스리는 영주라 해도, 왕국의 명령을 거스를 순 없었다.

게다가 그런 왕국 위에 군림하는 아스터 교단 측에서도 같은 명령이 내려왔다.

아나샤는 입장상, 이들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신의 앞길을 막으면, 이 도시가 불바다로 변해버릴 것은 명백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결국, 아나샤가 한 최선의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희생인가?”

처용이 짐작한 듯 말했다.

책임감이 강한 그녀의 성격상, 영지민을 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국가와 아스터 교의 명령에 거부할 수도 없었다.

이단의 낙인이 찍히는 순간, 영지민들 전부가 잡혀갈 테니까.

마신의 앞길을 막아도 죽는다.

명령을 거부해도 죽는다.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그녀가 한 선택은 자신의 희생이었다.

물론, 마신인 처용이 관대함을 보였을 때만 가능한 것.

“굳이 귀찮게 네 제안을 받을 이유가 없는데.”

처용이 이 부분을 지적하듯 말하자.

“……제가 죽는다 해도, 영지민들은 당신에게 적의를 보이지 않을 겁니다.”

아나샤가 처용 뒤에 있는 시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신이 적대감을 드러내는 이들은 두 부류였다.

자신의 앞길을 막거나.

아스터 교단을 따르는 이들이거나.

그 외에는 먼저 자극하지 않는 한,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아나샤는 이러한 마신의 태도를 보고 이번 작전을 떠올린 것이었다.

“하하.”

처용이 아나샤의 말에 작은 미소를 흘리고는.

“네 뜻을 관철하고 싶다면, 어디 근성을 보여 봐라.”

-우우웅!

강기를 내뿜으며 강하게 말했다.

적대감이 일렁이는 강렬한 마나가 퍼지자, 아나샤의 안색이 싸늘해졌다.

당장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일렁이는데도 발을 돌리지 않았다.

이미 자신의 희생을 각오했으니까.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스틸 포스.”

-스스스!

은청색의 기운을 내뿜으며 읊조렸다.

아나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은청색 기운이 그녀를 감싸더니.

-쩌저적! 쩌적!

청색과 은색이 섞인 강철 갑옷이 만들어지며 그녀 위에 덧씌워졌다.

그러자 여린 여성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휘릭. 철컥!

은색 망토를 휘날리며 랜스와 방패를 치켜든, 4미터 크기의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철의 정령…… 오랜만에 보는군.’

처용이 아나샤의 변한 모습을 보며 속으로 읊조렸다.

지금 시기에 알려진 자연의 정령들은 불, 물, 바람 등 속성을 띤 정령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정령의 종류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자연을 구성하는 요소가 무수히 많은 만큼, 정령의 종류 역시 다양하다.

그중 대지의 정령 아종인 강철의 정령.

이것이 그녀가 발휘하는 특이한 힘의 정체였다.

자연계의 정령 중 하나이자, 희소 개체인 강철의 정령과의 계약자가 바로 아나샤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용이 발을 들인 동부의 왕국 중 하나인 로스톤 왕국.

이 왕국의 왕족들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능력이 강철의 정령과의 계약이었다.

그리고.

“에실록스, 최대 위력으로!”

-쿠구구!

아나샤가 기운을 끌어올리며 소리치는 이름인 강철의 정령, 에실록스.

그 정체는 평범한 강철의 정령이 아니었다.

강철의 정령왕 에실록스.

아나샤를 선택한 정령의 진짜 정체였다.

아직 당사자인 그녀는 모르는 사실이었다.

“하-아압!”

-쿠구구! 쐐에엑!

정령의 기운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아나샤가 랜스를 치켜들며 처용에게 돌진했다.

“토류부 - 대지의 손”

-쿠구! 쩌저적!

처용은 돌진해오는 아나샤를 보며 작은 미소를 짓고는, 대지의 손을 불러일으켰다.

3미터 크기의 바위 손이 처용 앞에 나타났고.

“변형 – 강철의 손.”

-키이잉!

그 위에 강철의 힘이 덧씌워졌다.

-콰쾅!

아나샤가 내지른 랜스와 처용이 불러일으킨 강철의 손이 서로 충돌했다.

-까가각! 까각!

맹렬한 기세로 내지른 랜스가 강철의 손에 가로막히자.

“강철의 힘!? 어떻게!”

아나샤가 앞을 가로막은 강철의 손을 보며 경악을 표했다.

“로스톤 왕족만이 강철의 힘을 다룬다 생각했나?”

처용이 아나샤의 경악 어린 말에 작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고는.

-쿠쿵!

강철의 손에 힘을 주며 아나샤를 거칠게 밀어내었다.

처용이 다루는 속성의 힘 중 하나.

대지 속성의 아류(亞流)라 불리는 강철 속성.

회귀 전, 처용이 강철 속성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도록 도와준 이가 바로 눈앞에 있는 아나샤였다.

처용은 지금 시기의 아나샤가 가진 실력을 확인함과 동시에.

‘네놈들이 무엇을 준비하든, 모두 소용없는 짓이다.’

이 일대 주변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을 느끼며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 홀로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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