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화
“흐음, 이게 고작인가?”
역천의 절을 쥐고 어깨에 걸친 처용이 아스터 동상의 위, 하늘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마치, 누군가가 더 나오기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모습이었지만.
-…….
하늘은 고요한 듯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처용이 이곳에 발을 막 들였을 때는 이렇게 고요하지 않았다.
하늘이 요란하게 요동치며 빛의 기둥이 지상에 내리쳤고.
-네 이놈!
-나는 위대하신 빛과 지혜를 섬기는-.
-참회의 여신께 저지른 무례는! 나 회한의 대천사가-!
빛의 기둥에서 나타난 천사들이 격노한 표정으로 자신들이 누군지를 드러내며 처용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자기소개를 좋아하던 그 천사들은 지금.
[크, 크허억! 마, 마신……!]
[으, 으어……!]
-철컥! 철크럭!
날개가 완전히 다 뜯겨 나간 채, 검은 사슬에 묶여 바닥에 구속되어 있었다.
바닥에 처박힌 그들의 모습은 독수리에게 날개가 다 뜯어먹힌 비둘기와 다름없었다.
그런 그들의 날개를 다 뜯어낸 독수리, 처용이 천사들의 몰골을 무심한 눈으로 구경하고는.
“야, 네놈 부하들이 신나게 두들겨 맞고 있는데, 안 내려오냐?”
누군가를 향해 말하듯, 하늘을 바라보며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
“하메라, 로메라, 이 하잖은 순혈자 새끼들아.”
처용의 입에서 에스라 성운의 대신들을 언급하며 신성모독이 흘러나오자.
[……!]
[이…… 이, 어리석은 마신이!]
바닥에 쓰러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천사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경악했다.
그 근처 떨어진 곳에서 작금의 상황을 구경하는 인간들도 소리 없는 경악을 내질렀다.
그때.
[이, 이!]
-쿠르르! 쿠릉!
하늘이 요란하게 흔들리며 격노에 휩싸인 여신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쿠콰콰콰!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기둥이 처용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분노를 참지 못한 하메라가 공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여신의 분노가 담긴 불기둥이 내리치고 있음에도.
“화류태극권.”
-화르륵.
처용은 왼손을 펴고 둥글게 원을 그리며 태극을 그려 내었다.
-콰아! 화르르륵!
두껍고 거대한 불기둥이 처용이 그려 내는 태극에 가로막혔고 점차 빨려 들어가며 사그라졌다.
이윽고.
“반탄장 – 반발.”
-화륵! 쿠콰콰콰!
하메라의 화염을 흡수한 처용이 그 힘을 하늘 위로 돌려보냈다.
-파아아!
먹구름이 모이며 요동치던 하늘에 새빨간 구멍이 뚫렸고 이내 다시 하늘이 맑아졌다.
“이런 멍청하고 어리석은 새끼, 네년은 학습 능력 자체가 없는 거냐?”
처용이 하늘을 바라보며 비웃음과 조롱을 내뱉고는.
-샤가각. 쩌저적!
성지의 역할을 하고 있던 아스터 동상을 반으로 갈라 버렸다.
동시에.
-샤각! 파아아……!
바닥에 구속된 대천사들의 머리를 일제히 날려 버리고 깃털을 수집했다.
작금의 상황이 완전히 마무리되자.
“…….”
“…….”
청이를 비릇한 처용을 따르는 룬티르 일족의 아이들도.
이단 심문소에서 구출된 시민들도.
처용을 따라온 병사들도.
이 도시에 거주하던 시민들까지.
모두가 입 벌린 채 굳은 동상이 된 듯,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못한 채 침묵하고 있었다.
조금 전, 처용을 저지하기 위해 나타난 천사들은 평범한 천사들이 아니었다.
무려 두 쌍 이상의 날개를 지닌 다섯의 천사들.
그중 두 명은 세 쌍의 날개를 지닌 대천사 계급의 천사였다.
에스라 성운의 성좌들을 모시는 최측근 천사라고 할 수 있는 이들.
그들이 지상에 강림하면 제아무리 마왕 같은 존재라 해도,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가진 거 다 내놔라. 이 비둘기 새끼들아!
지상에 현현한 마신은 그런 대천사들을 비둘기 취급하며 날개를 모두 잡아 뜯어 보였다.
대천사들과 팽팽하게 맞선 것도 아니었다.
압도적인 힘으로 천사들을 찍어 눌러 버렸다.
무려 대천사가 포함된 다섯의 천사가 덤볐는데도 전원 만신창이 상태가 되어 버렸다.
반면에 처용은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심지어 참회의 여신이 직접 힘을 발휘하여 내리친 참회의 불길을 가볍게 막아 돌려보냈다.
처용은 그런 믿을 수 없는 경악스러운 일을 해냈음에도.
“자, 곧장 다음 도시로 가지.”
마치, 가벼운 작업을 끝낸 것처럼, 태연한 목소리로 다음 목적지로 갈 것을 명령했다.
***
처용은 첫 번째 도시를 제외하고 이후 방문하는 도시들은 완전히 반파시키지는 않았다.
도시를 지키는 성벽과 중앙 광장만 무너뜨렸을 뿐, 대체적으로는 멀쩡했다.
처용 역시 방문하는 도시마다 다 박살 낼 생각은 없었다.
굳이 힘을 더 들여 도시를 부숴야 할 가치도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중요한 크게 두 가지.
첫 번째는 청이의 안내를 받아 붙잡힌 룬티르 일족을 구해내고 다시 결집시키는 것.
겸사겸사 아스터 교단이 세운 동상과 그들의 세력까지 짓밟는다.
그리고 두 번째는 도시를 하나하나 정벌해 나아가면서, 최종적으로는 동부를 지배하는 왕국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세 번째 도시에 세워진 아스터 동상을 무너뜨린 처용이 선언하듯 말했다.
이미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온 상황.
혼자라면 낮이고 밤이고 상관없이 계속 전진했겠지만, 청이를 비롯한 아이들 생각을 해야 했다.
지금까지의 강행군에 따라온 이들 모두가 지친 상태였다.
아이들이 머물 곳이 없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이는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우웅.
처용이 손아귀에 태룡전의 열쇠를 불러내고는.
-탁!
지면을 향해 열쇠를 내리꽂았다.
[태룡전의 열쇠가 ‘에스라’ 차원을 인식합니다.]
[게이트를 생성할 수 있습니다.]
[성좌의 권역, 혹은 신의 가호가 짙은 장소에서는 해당 기능이 제한됩니다.]
-우우웅!
열쇠가 박힌 땅에서 옅은 금빛이 퍼져 나감과 동시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이제 지구에서처럼 태룡전의 열쇠가 가진 기능을 에스라 대륙에서도 사용할 수 있었다.
에스라 대륙에 태룡전의 열쇠를 성공적으로 연결한 처용은.
“나와라.”
-우우웅.
곧장 금색의 게이트를 열며 말했다.
그러자.
-쿵! 쿵! 쿵!
대략 6미터 높이를 자랑하는 세 마리의 거북이가 처용의 부름을 받고 걸어 나왔다.
[벙커 터틀(Bunker Turtle)]
[등급 : B]
[특징 : 스톤 터틀이 독특한 형태로 진화한 모습.]
[껍질 내부에 빈 수용 공간이 있습니다.]
[스킬 : 환경 적응, 위장 껍질, 자가 수복······.]
처용의 휘하에 첫 번째로 들어온 녀석이자, 해전군주인 연화와 파트너 계약을 맺은 크루저 터틀.
게이트 안에서 나타난 거북이들은 그 크루저 터틀, ‘복’이의 새끼들이었다.
양 옆구리에 문처럼 보이는 네모난 돌문이 달린 거북이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신기하게도 성인 열 명이 숙박할 수 있는 크기의 방이 나타난다.
마치, 공간 확장 마법이 적용된 것처럼, 생각보다 넓은 공간이 내재되어 있었다.
물건 보관, 휴식, 취사 등, 거북이들이 지닌 내장 공간은 생각보다 많은 부분에 활용이 가능했다.
한국 헌터 협회의 헌터들도 장기적인 던전 공략이 필요한 경우 한 마리씩 대여해 가기도 하는 녀석들이었다.
“알아서 인원을 나눠 쉬어라.”
-우웅. 탁.
처용이 청이와 몇몇 아이들 손에 피자 박스를 들려주며 말하자.
“알겠습니다. 신님.”
청이가 대표로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전하고는 아이들이 벙커 터틀 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저벅.
처용의 발걸음 역시 벙커 터틀 안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아이들이 향한 벙커 터틀이 아닌, 조금 전에 따로 불러낸 벙커 터틀로.
도시 정벌을 막 시작할 때쯤, 미리 소환해 둔 녀석이었다.
-드르륵.
처용이 바위 문을 열며 벙커 터틀 안으로 들어서자.
“…….”
양옆에 나열된 침구류 중 오른쪽 앞에 있는 침대.
그 위에 새하얀 소녀, 카란디아가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처용이 벙커 터틀 하나를 미리 불러내어 뒤를 따라오게 만든 이유가 바로 카란디아 때문이었다.
그녀가 아직 깨어나지 못했으니까.
“흠.”
처용이 누워있는 카란디아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스르르륵.
카란디아에게서 검은 안개가 흘러나오더니, 그녀를 지키는 수호자, 네이션이 나타났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적의는 없었지만.
“정말로…… 그대는 마신이오?”
그 대신 처용을 바라보는 네이션에게서 놀라움과 경악의 감정이 전해졌다.
네이션은 카란디아가 안전하다고 판단하고는 잠시 빠져나와 처용의 행보를 멀리서 지켜봤었다.
그 결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있었음에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들을 마주했다.
그중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무력.
‘천사 둘 정도는 나도 감당할 수 있다. 하지만…… 대천사를 포함한 다섯은…… 불가능하다.’
네이션은 룬테라 왕국을 수호하는 불사의 기사단 중 최강이라 불리던 기사였다.
그런 그조차도 전쟁 당시, 천사 셋을 상대로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대천사라도 강림하거나, 상위 신격이 직접 모습을 드러낸다면, 홀로 감당하기 힘들었다.
룬테라 왕국의 멸망을 막지 못한 이유가 바로…… 지상에 강림하는 신격들 때문이었으니까.
그런 경험 덕분에, 에스라 성운의 천사들과 신격들이 얼마나 잔혹하고 강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눈앞의 인간은 그런 무시무시한 존재들을 가볍게 상대하며 처치해 버렸다.
심지어.
-하메라, 로메라, 이 하잖은 순혈자 새끼들아.
에스라 성운의 대신들을 직접 언급하며 신성모독을 서슴지 않고 저질렀다.
아무리 뼈에 사무치는 원한이 가득한 네이션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일.
처용은 그런 무지막지한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러 보였다.
그럴 만한 능력까지 가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이 대륙을 지배하는 이들과 같은 존재, ‘신’이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았다.
“나에 대해서는 충분히 말해주었을 텐데?”
처용이 얼마 전 자신에 대해 말해주었을 때를 다시 언급하자.
“……그래서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소.”
네이션이 혼란스러운 감정을 내비치며 말했다.
처용의 정체가 끊임없는 수련을 통해 신력을 개화한 반신이라는 것은 들었다.
어떻게 인간이 신에 오르는지, 그것이 정말 가능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두 눈으로 직접 본 이상, 처용의 말은 진실이었다.
믿기 힘들지만, 그가 신에 오른 인간이라는 것도.
아스터 교단에게 강렬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에스라 성운과 왜 적대하는지도 나름 납득할 수 있었다.
-에스라 성운과 아스터 교단은 악신들에게 이 세계를 팔아넘기려 하고 있다.
오랜 세월, 아스터 교단이 왜 이단 심판을 명목으로 잔혹한 실험을 하는지에 대한 이유도 들었으니까.
네이션은 아직도 혼란스러운 감정이 있었지만, 한 가지 사실은 확실했다.
“핍박받는 우리 백성들을 도와주어서…… 정말 고맙소.”
처용은 뿔뿔이 흩어져 사냥당하는 룬테라의 백성들을 도와준 사람이라는 것.
그들을 핍박하는 아스터 교단의 잔혹성을 비판하고 응징했다는 것.
네이션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자신들을 도와준 처용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전했다.
“서로 추구하는 목적이 같으니까.”
처용은 회귀 전 적이었던 네이션의 감사에 작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고는.
“아직, 깨어나지 않는 것인가?”
침대 위에 누워있는 소녀, 카란디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빌어먹을 아스터 교단의 신관들이 쓴 저주의 영향이…… 아직, 남아있소.”
네이션이 두 주먹을 세게 쥐고는 분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를 추적하던 아스터 교의 신관, 그중 참회의 신관이 사용한 ‘참회의 낙인’에 네이션이 당했었다.
네이션은 저주의 힘을 뿌리치는 데 성공했지만, 그와 연결되어있는 카란디아가 저주에 영향을 받아 버렸다.
참회의 낙인은 대상에게 가장 후회스럽게 느껴지는 기억을 극대화시켜 정신적 고통을 주는 저주였다.
룬테라 멸망에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던 카란디아는 그 저주에 저항하지 못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 결과 카란디아의 위치까지 들통나 아스터 교단에게 사로잡히는 일이 발생했다.
아스터 교단은 무언가 이유가 있어 카란디아를 붙잡아 살려 두고 있었다.
네이션은 은밀하게 카란디아 곁으로 돌아와 그녀를 탈출시킬 준비를 하던 상황이었다.
‘그 무언가라는 게, 이 아이를 희생시켜 마검을 만드는 것이었나?’
네이션과 카란디아가 가진 사정을 떠올린 처용이 속으로 읊조렸다.
동시에, 회귀 전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대략적으로 사건을 정리했다.
회귀 전, 마검으로 마주했었던 카란디아는 사실 에스퍼, 룬티르 일족의 마지막 남은 왕족이었다.
마검 카란디아가 나타났을 때는 처용이 네이션을 소멸시키고 에스라 성운에 배신당했을 때였다.
즉, 에스라 성운은 귀찮게 굴던 네이션이 소멸되자, 곧장 카란디아를 잡아 마검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은밀하게 준비하던 대격변을 발동시켜 악마의 군세를 이 세계에 불러왔다.
그 외 중간중간 자잘한 일들이 있었지만, 대략적인 흐름은 이러했다.
“내일의 일정이 마무리되면, 이 아이를 보살님께 데려가 진찰을 받게 하지.”
처용이 카란디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잠들어 있는 카란디아의 상태를 잠시 살펴본 결과,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아마도 저주의 충격에서 손상을 입은 정신이 아직 회복되지 않은 영향인 것 같았다.
당장 카란디아가 죽을 일은 없는 셈이니, 우선할 일부터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대신급 성좌…….”
네이션이 처용의 말에 침음을 흘리며 읊조렸다.
처용을 처음 만났을 때.
-인간에서 신에 오론 존재는, 나 말고도 두 분이나 더 계신다.
그가 자신에 대해, 자신과 함께 하는 세력에 대해 말할 때 했었던 말이었다.
무려 수천 년 전, 인간에서 신에 올라 대신급 성좌가 된 존재가 둘이나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그들이 눈앞에 있는 반신, 처용이 따르는 드높은 존재들이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신격들이 처용과 함께한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처용은 단순히 혼자 움직이는 것이 아닌, 그를 받쳐 주는 거대한 세력이 함께하고 있었다.
“……룬테라의 백성은 이 호의를 잊지 않을 것이오.”
-툭.
네이션이 처용의 말에 오른쪽 주먹으로 왼쪽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감사를 전했다.
이 시대의 기사들이 상대에게 감사를 전할 때 보이는 인사법이었다.
“미약하지만, 그대의 계획에 힘을 보태겠소.”
“도와준다면 나야 좋지.”
처용이 네이션의 감사에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동시에 작금의 상황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이 상황을 보다 유리하게 잘 이끌기만 한다면.
‘전초기지를 얻는 것에 이어서 카란디아의 힘을 내가 쥘 수도 있다.’
회귀 전, 크타니드가 다루었던 그 막강한 힘의 일부를 자신이 거머쥘 수 있었으니까.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