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화
이단심문소가 쑥대밭으로 변한 후.
“여기보다 작은 규모의 시설을 좀 맡아 주었으면 좋겠어.”
밖으로 나온 처용이 연화와 연아를 향해 말했다.
사제들을 심문하며 직접 얻은 정보에 따르면, 이와 비슷한 시설이 여럿 존재했다.
이곳에서 증거는 충분히 확보했다 하지만, 이를 보강하는 증거를 더 확보해서 나쁠 건 없었다.
이곳 이단 심문소와 좀 떨어진 장소에 비슷한 실험 시설이 두 개 있었다.
연화와 연아가 각각 소수의 뱀파이어들을 이끌고 그 시설에서 증거를 수집하는 것.
이것이 다음 행동이었다.
그리고.
“너는 어쩌게?”
연아가 처용을 바라보며 물었다.
동시에.
“…….”
“……으.”
처용 뒤에 있는 사람들을 응시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이단 심문소를 습격한 처용과 연아, 연화, 뱀파이어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청이를 포함한 룬티르 일족들과 이곳에서 고통을 받던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이 사람들은 다 어쩌려고? 태룡사에서 지원이라도 불러와야 하는 거 아니야?”
연아가 대략 50명은 넘어 보이는 사람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단순히 룬티르 일족의 아이들만이라면 모를까.
수십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처용이 혼자 통제하기에는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이 오라버니가 다 생각이 있으니까. 주어진 일을 마치고 내가 부르는 장소로 오면 돼.”
처용은 그런 연아의 우려에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답했다.
“지금 다가오는 놈들은?”
-철컥.
연화가 이단 심문소 정문의 반대편 길 너머를 응시하며 싸늘한 목소리로 처용에게 물었다.
동시에 환도 칼자루에 오른손을 올렸다.
지금 이단 심문소를 향해 다가오는 기척들이 느껴지고 있었다.
말발굽 소리와 철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이들은 분명한 무장 세력이었다.
“걱정하지 마.”
처용이 연화가 바라보는 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S급 헌터 스무 명도 나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는데, 고작 저것들 정도야.”
“……알았어, 최대한 많은 정보를 모아 볼게.”
연화가 처용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고는.
“가자, 우리 할 일을 하자고.”
연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샥.
-샤샥.
연화와 연아, 그리고 그녀들이 이끄는 뱀파이어들이 곧장 사라졌다.
이제 처용 옆에 남은 이들은 루나와 류마, 둘 뿐이었다.
“제가 처리할까요?”
류마가 점점 다가오는 병사들을 보며 묻자.
“아니, 물러서 있어라.”
처용이 손을 들어 올리며 답하고는 앞으로 나섰다.
“안 그래도 안내해 줄 놈들이 필요했는데, 마침 잘 되었군.”
점점 다가오는 병사들을 바라본 처용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
처용이 테러를 일으킨 도시와 가까이 있는 또 다른 도시.
그 도시로 들어서는 관문 성벽을 향해 다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마치, 피난민처럼 보이는 백여 명의 행렬 속에는 병사로 보이는 갑옷을 입은 이들도 섞여 있었다.
“다, 다 왔습니다. 마신님…….”
어깨에 견장이 붙어 있는 병사가 처용에게 다가와 공포감이 일렁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피난민으로 보이는 행렬에 섞여 있는 사십 명 정도의 병사들.
그들은 이단 심문소에서 전달된 다급한 지원 요청을 받고 근처 도시에서 출동한 병사들이었다.
그들이 초토화된 이단 심문소와 그 앞에 모인 사람들을 보고 창을 겨누며 적대감을 드러낸 결과.
-네놈들이 나를 안내해 줘야겠다.
그 자리에서 처용에게 무력으로 제압당한 후, 강제로 도시 안내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
“벌써 우리를 환영해 주려는 것 같군?”
처용이 다가온 병사의 말을 듣고 성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성벽 위에는.
-놈들이 왔다! 마도포를 작동시켜!
-마법사들은 포격을 준비하라!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공격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철컥!
-철컥!
성벽 위에 설치된 대포가 처용과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을 겨누었다.
“우, 우리도 있는데 마도포를……!”
“이봐! 왜 마도포를 겨누는 건데!?”
사람들 틈에 섞여 있는 병사 중 일부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소리쳤다.
“영주가 우리의 목숨을 고려할 인간은 아니지…….”
처용에게 보고를 올렸던, 어깨에 견장을 찬 병사가 침음을 흘리며 읊조렸다.
이 도시의 영주는 아스터 교단의 사제 출신.
그에게 있어 영주민과 병사들이란, 그저 돈벌이 수단이자 재산을 지키기 위한 소모품에 불과했다.
“시, 신님.”
“으……!”
청이를 비롯한 룬티르 일족의 아이들과 구출된 시민들도 두려움을 드러냈다.
그때.
“전원, 내 뒤에 있어라.”
-저벅.
처용이 앞으로 나서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강하게 말했다.
“너희들의 신을 믿어라.”
마도포가 겨누어진 위험한 상황 속에서 울리는 처용의 낮은 목소리.
그 목소리에 두려움이 일렁이던 분위기가 점차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쏴라! 저 이단자들을 모조리 해치워 버려!
도시 성벽 위에서 포격을 알리는 영주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고.
-쿠콰콰!
-콰쾅!
성벽 위에 배치된 마도포에서 푸른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파이어 볼!
-라이트닝 볼!
성벽 위에 자리한 마법사들의 포격까지 시작되었다.
일대를 날려 버릴 수 있는 무차별적인 포격이 날아드는데도.
“흐음, 바람 속성이 인첸트된 마도포라…….”
다가오는 포격을 응시한 처용의 눈빛은 차분했다.
온갖 포격과 마법들이 처용에게 닿기 직전.
“멈춰라.”
-스륵. 우우웅!
처용이 오른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고는 마나를 넓게 퍼트렸다.
그 결과.
-훅! 후훅! 훅!
맹렬하게 쏟아지던 포격들이 처용 앞에 멈추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한 모습.
처용이 한 일은 간단했다.
마나가 인첸트된 대포와 마법사들이 쏘아대는 마법은 모두 마나를 모아 발현한 공격.
처용은 자신의 마나로 적들이 공격에 사용한 마나를 모조리 장악해 지배권을 뺏어버린 것이었다.
그 믿기지 않는 광경에.
“저게…… 뭐야!?”
포격 명령을 내린 영주가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경악을 드러냈다.
성벽 위의 병사들도, 마법사들도.
-그럴 리가…… 없어.
-저, 저건 마탑의 대마법사라 해도 불가능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경악과 공포를 드러내고 있었다.
처용 뒤에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모두가 경악을 드러낼 때.
“마법은 이렇게 쓰는 것이다.”
-후우욱! 위이이잉!
처용이 눈앞에 멈춰 지배되고 있는 마나에 자신의 마나를 더했다.
-화르륵! 파지직! 쩌저적!
마나들이 농구공 크기의 구체들로 변했고 그 구체에 다양한 속성의 힘이 깃들었다.
적이 발현하는 마법의 마나를 지배해 자신의 마법으로 바꿔 버린 것이었다.
“엘리멘탈 미티어 버스트.”
처용이 강탈한 마나로 마법을 완성시킨 순간.
-쐐에에엑!
온갖 속성의 힘이 깃든 구체들이 일제히 성벽을 향해 빛 꼬리를 그리며 날아갔다.
-마, 막아야-.
-무슨 수로! 당장 대피-!
눈앞의 상황을 멍하니 지켜보던 이들이 뒤늦게 대처하려 했지만.
-쿠콰콰! 콰콰쾅! 콰쾅!!
이미 처용이 쏘아 보낸 마법의 폭격이 성벽과 충돌해 맹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화염, 벼락, 냉기 등 온갖 속성의 힘이 서로의 개성을 자랑하며 일으키는 연쇄 폭발.
-쿠구! 쿠구구!
그 힘을 견디지 못한 성벽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하나의 도시를 지키는 거대한 성벽이 무너지는 모습에.
“…….”
“…….”
처용 뒤에 서 있던 모든 이들이 입을 벌린 채, 소리 없는 경악을 드러냈다.
고작 단 한 명.
그 한 명이 보인 압도적인 힘에 도시를 지키는 거대한 성벽이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바, 방금의 마법은…… 최소 7서클 마법…… 아니 그 이상?’
처용에게 제압당해 강제로 명령을 따르던 병사들 중, 어깨에 견장을 찬 병사.
그는 마나에 재능이 있어 마법 훈련을 받은 전투 마법사였다.
때문에, 방금 처용이 보였던 무력에 더더욱 경악하고 있었다.
심지어, 처용은 평범한 방법으로 자신의 마나를 모아 마법을 발현한 게 아니었다.
성벽에서 쏘아낸 마도 포격과 마법사들의 마나를 강탈하여 사용했다.
‘정녕…… 정녕 마신이란 말인가?’
처용이 보인 무력은 도저히 인간이 발휘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힘이었다.
말 그대로 ‘신’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쿠구구! 쿠구……!
사람들이 아직도 무너지고 있는 성벽을 바라보며 경악을 거두지 못할 때.
“청아, 안내해라.”
처용은 별일 없었다는 듯, 태연한 목소리로 청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네!? 아 네, 알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부름에 청이가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고는 처용에게 다가갔다.
처용이 무너진 성벽을 향해 걸어 나갔고 망부석처럼 서 있던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랐다.
성벽에 가까워지자.
-으……!
-사, 사제는 힐링 마법을-!
처참한 광경이 점점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피 칠갑을 한 채 널브러진 사람들.
부상을 입고 침음을 흘리며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이들.
그리고.
“크, 크아아! 다, 당장 나에게 힐을 사용해라!”
병사들과 사제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화려한 옷의 남자.
“다 죽어 가는 벌레들 살릴 생각 하지 말고! 나를 치료해라. 당장!”
영주는 방금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듯, 정신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때.
-저벅.
처용이 무너진 성벽 잔해를 밟으며 나타나자.
-마, 마신……!
-으……!
분주하게 움직이던 모든 이들이 즉각 행동을 멈춘 채, 두려움을 드러냈다.
처용은 주변의 반응을 무시한 채.
“보아하니, 네놈이 영주 같군.”
곧장 영주 앞으로 다가갔다.
“……다, 당장 이 이단자를 처치하는 자에게 일만 골드를-!”
영주가 다급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소리칠 때.
“시끄럽다.”
-휘릭! 촤아아!
처용이 바람 속성 마나로 얇은 칼날을 쏘아 보내며 영주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하찮은 놈들의 말 따위, 일일이 하나하나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처용은 간단하게 영주를 처리해 버린 후.
“네 친구들이 있는 장소로 안내해라. 청아.”
뒤따라 온 청이를 향해 말했다.
청이는 도시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존재였던 영주의 허무한 죽음을 잠시 바라보고는.
“이쪽입니다.”
같은 동족이 느껴지는 장소로 처용을 안내했다.
그 뒤를 처용과 청이를 따라온 사람들이 뒤따랐다.
주변에 널브러진 병사들과 사제들이 그 모습을 바라봤지만, 제지하거나 공격하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굳은 석상처럼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때.
“저 존재에게 반감을 드러내지 마십시오. 부탁입니다.”
처용을 뒤따랐던 견장을 찬 병사가 이 성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이에게 다가가 말했다.
공포와 간절함이 섞여 있는 목소리.
그 말을 들은 이 성의 지휘관이 조심스러운 눈길로 처용을 응시했다.
처용은 적진 한복판에 들어와 있음에도 평온한 발걸음으로 계속 나아가고 있었다.
굳이 먼저 적의를 드러내지 않으면, 공격하지 않는 것 같았다.
“부, 부상자들을 수습하고! 내 지시가 있기 전까지 함부로 행동하지 마라!”
이 도시의 병사들을 지휘하는 지휘관은 나름, 전투 경험이 많은 노련한 자였다.
그는 두려움 섞인 목소리로 조언하는 젊은 병사의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방금, 처용이 발휘하는 압도적인 무력을 직접 두 눈으로 본 바.
나아가는 처용의 앞길을 막을 자신이 없었다.
그로 인해 벌어질 참사 또한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결국,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그저 처용의 행동을 방해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방해하는 이 없이 계속 나아가던 처용의 발걸음이 도시의 중앙 광장에 도달했다.
그 앞에는 처음의 도시에서 봤었던 거대한 아스터의 동상과.
-으…….
-으윽…….
그 앞에 놓인 사형대 위에서 십자 형구에 묶인 아이들이 보였다.
역시나 아이들 몸에는 불에 태워진 듯한 화상 자국들이 가득했다.
“류마, 루나, 아이들부터 구해.”
처용은 류마와 루나에게 아이들을 구할 것을 지시하고는.
“나는 비둘기 깃털을 수거하느라 바쁠 예정이거든.”
동상 위, 하늘에서 내리치는 빛의 기둥을 바라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