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화
대수림을 빠져나온 처용이 도착한 장소는 세 개의 도시와 조금 떨어져 있는 한적한 장소.
대충 정돈된 숲길 끝에 자리한 신전 같은 건축물 근처였다.
“여기다.”
해당 장소에 도착한 처용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자.
“겉으로 볼 때는 신전 같은데?”
-스르륵.
연아가 처용 옆에 유령처럼 나타나고는 앞에 보이는 건축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동시에.
-스륵.
-스르륵.
연화가 연아 뒤에 모습을 드러냈고 류마를 포함한 다섯 명의 뱀파이어도 모습을 드러냈다.
루나와 나머지 뱀파이어들은 지금 대수림에 생성된 게이트와 아이들을 지키고 있었다.
“분주하게 뭘 옮기는 거야?”
연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정면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새하얀 기둥이 원형으로 나열된 모습의 신전.
신전 입구 중앙에는 아스터를 상징하는 신의 동상이 보였고 양옆에는 최고신 둘의 동상이 있었다.
그리고 신전 입구를 드나드는 엄숙한 분위기를 내는 사제들도 보였다.
그 사제들이 하얀 천을 감싼 마차와 물건들을 신전 내부로 옮기는 모습도 포착되었다.
“마차 내부에 있는 거…… 살아 있는 사람 같은데?”
연화가 신전 내부로 향하는 마차들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읊조렸다.
살짝 드러난 천 사이로 마차 내부가 순간적으로 보였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철창, 그 안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형구에 묶인 사람들이었다.
“여긴 이단 심문소니까. 당연히 이단자들을 잡아가는 거겠지.”
처용이 신전을 바라보며 읊조리듯 말하자.
“그걸 명목으로 좋지 않은 짓을 저지르는 장소이겠고?”
연아가 낮은 목소리로 처용의 말에 답했다.
아직도 아이들이 쏟아 내는 고통 가득한 사연이 마음속에 일렁이고 있었으니까.
“명심해. 일을 그르치지 마라. 깽판은 정보를 얻은 다음에 쳐도 되니까.”
처용이 자신을 따라온 일행들을 둘러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진입한다.”
처용의 선언이 울린 순간.
-스르륵.
다섯 명의 뱀파이어가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며 사라지고는 신전 내부로 진입했다.
목표가 신의 축복이 닿은 신전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들킬 리가 없지.’
처용은 먼저 진입한 뱀파이어들이 들킬 리가 없다고 확신했다.
처용은 스피릿 팀에 소속된 이들만 단련시킨 것이 아니었다.
루나를 따르는 밤의 일족들 역시 처용에게 지도를 받았었다.
그중, 이들이 집중적으로 받은 훈련은 다름 아닌 동화경의 묘리.
어둠을 다루는 그들의 특성과 능력을 더 정교하고 치밀하게 다룰 수 있게 지도했다.
루나와 함께 처용을 따라온 뱀파이어들은 개중 실력이 가장 뛰어난 이들.
각각 개개인이 스피릿 팀의 헌터들에 버금가는 강자들이었다.
고위 귀족 계급이 아닌 뱀파이어임에도 귀족 계급과 맞서 싸울 수 있을 정도.
그리고 류마는 월드 헌터 토너먼트 1, 2위인 진호와 백호, 둘에 버금가는 강자였다.
그런 이들이 어둠을 틈타 은밀하게 신전 내부로 향했지만.
-이번에 이송된 놈들은…….
-야, 옆 도시 난리 났다던데?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나 하라고 하더라.
신전을 배회하는 성기사들과 사제들 중 침입자를 눈치챈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신전에 옅게 깔린 신의 가호 또한 침입한 뱀파이어들에게 반응하지 않았다.
뱀파이어들은 그동안 훈련받은 성과를 톡톡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뱀파이어들을 시작으로.
“언니.”
“그래, 가자.”
연아와 연화 역시 움직였다.
-스르르.
연아의 몸이 투명해지더니 지면에 쏟아진 물처럼 흐물거리며 사라졌다.
-화아아.
연화는 수 속성이 짙게 일렁이는 신성력을 몸에 둘렀다.
“해상의 신기루.”
-스르륵.
연화가 투명 인간이 된 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처용이 잠입할 때 종종 쓰는, 마나로 순수한 유리를 만들어 자신을 감싸는 기술인 클로킹 아머.
연화는 이 기술의 묘리를 수 속성 마나와 신성력으로 재현해 보였다.
그리고 연화는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선인의 수련을 지도받은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선술의 창시자, 여래에게 직접 지도를 받았었다.
그런 연화가 발휘하는 동화경은 뱀파이어들 못지않은 수준이었다.
마지막으로.
-스르륵.
처용 역시 동화경으로 모습을 감추며 신전 내부로 진입했다.
***
에스라 대륙의 국가들 중 가장 거대한 세력을 자랑하는 제국.
빛과 지혜의 신인 아스터가 지상에 강림해 세웠다 하여 ‘아스터 제국’이라 불리는 나라.
아스터 제국은 아스터 교단의 총본산이자, 성국(聖國)이었다.
명실상부 에스라 대륙 전체를 지배하는 국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각 대륙에 자리 잡은 다른 국가들도 아스터 교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으니까.
그런 아스터 교의 총본산, 제국 내에 있는 신전에서는 항상 장엄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러나.
-쿠구구! 쿠구구구!
항상 위엄이 넘치고 경건한 분위기가 흘러야 할 신전에서 진동이 퍼지며 흔들리고 있었다.
동시에.
-화르륵! 화륵! 화르륵!
신전 곳곳의 자리한 성화, 참회의 성화라 불리는 불꽃이 마구잡이로 크기를 키우며 폭발하고 있었다.
마치, 신이 분노한 듯한 분위기를 내뿜는 신전의 이변에.
-으어어어…….
-노, 노여움을 거두어 주소서!
-참회의 여신이시여!
-회개의 여신이시여!
신전 앞에 선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바짝 엎드리며 목소리를 내었다.
마치, 분노한 신을 달래는 듯한 분위기였다.
비단, 아스터 제국의 신전만이 아닌.
-시, 신이시여!
-공물을 받고 화를 거두어 주소서!
세계 곳곳에 지어진 신전에서 같은 반응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스터 교를 따르는 사제와 성기사들이 목을 놓아 애원했지만.
-화르륵! 쿠구!
신의 분노는 더 커지고 있다는 듯, 화로에서 격렬한 화염이 터져나갔다.
그리고.
-으아아! 차, 참회의 여신이시여!
퍼져 나간 불길이 바닥에 조아리고 있는 사람 하나를 붙잡아 태우기 시작했다.
마치, 신이 받은 분노를 인간에게 화풀이하는 모습이었다.
보통 이런 일이 일어나면, 즉각 신전을 향한 부복을 그만두고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수, 순교하라! 신을 위해 순교하라!”
“네 희생으로! 신의 분노를 잠재우는 것이다!”
성기사와 사제들은 불타 죽어가는 동료 사제를 구하긴커녕, 신을 위한 순교를 강요했다.
신이 분노함으로 인해, 신전에 이변이 생기고 죽어 가는 이들까지 발생하고 있었다.
아스터 교단의 고위 사제들은 곧장 신이 분노한 이유를 찾았다.
문제는 그 이유가.
-마신이라니……!
-정녕 마신이 강림했단 말인가?
지상에 강림한 마신이 신성모독을 저지르고 도시를 반파시켰다.
참회의 여신이 마신을 저지하려 했지만, 마신은 도시를 반파시키고 도망쳐 버렸다.
도시를 엉망으로 만들고 도망친 마신 때문에 참회의 여신이 노했다.
사람들은 진실이 아닌 거짓을 알고 있었다.
사실, 처용은 도망친 것이 아닌, 하메라를 짓밟아 버린 후 유유히 떠났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무조건 함구하라.
반파된 도시에서 겨우 살아남은 주교와 사제, 성기사들에게 함구령이 떨어졌다.
신의 위엄을 훼손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이단으로 취급한다는 강수까지 두었다.
아스터 교단이 진실을 감추고 정보를 왜곡시켜 퍼트린 이유는 간단했다.
신의 위엄과 존엄을 지켜야 했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신의 위엄과 존엄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아스터 교가 명시하는 교리의 가장 중요한 대목이었다.
진실을 왜곡하는 것은 아스터 교단의 영향력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번 일을 일으킨 마신을 어떻게 조치할 것인가였다.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이오!”
아스터 교단의 성지이자, 에스라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신전이 자리한 곳.
아스터 제국의 수도 중앙에 자리한 성궁.
그곳에 평범한 사제들과는 다른, 아주 화려한 복장의 사제들이 모여들었다.
아스터 교단에서 드높은 위치에 자리한 사제들, 교단의 대주교들이었다.
“마신이라니! 정녕 그 말이 사실이란 말인가!?”
-쾅!
나이가 많은 대주교 하나가 단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거칠게 말하자.
“……클립스 주교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소.”
붉은 문양이 나열된 화려한 사제복을 입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마신이 강림한 것은 사실이오. 내가 직접 클립스 주교에게 ‘참회의 기억’까지 사용해 확인했소.”
“참회의 신관께서 직접 확인해 봤다면…… 사실이겠군요.”
나이가 많은 대주교가 붉은 사제복의 남자, 참회의 신관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다부진 체격에 붉은 사제복을 입은 구릿빛 피부의 남자.
그는 참회의 여신 하메라의 신관 베드라였다.
베드라의 말에 다른 대주교들이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침음을 흘릴 때.
“신관 베드라께서 클립스 주교의 참회를 보셨다면…… 마신의 모습도 직접 본 겁니까?”
베드라와 마주 보는 자리에 앉은 백색의 사제복을 입은 남자에게서 질문이 울렸다.
그 말에.
“……보긴 했습니다. 신관 루메오.”
베드라가 마주 보는 이의 이름과 직책을 언급하며 대답했다.
이 자리에 모인 대주교와 베드라에 비해 한참이나 어려 보이는 사제.
그는 회개의 여신, 로메라의 신관 루메오였다.
“마신의 외형은, 검은 머리의 젊은 동방인 모습이었습니다.”
베드라의 말이 이어지자.
“도시를 초토화시키고 어디로 간 겁니까?”
루메오가 베드라를 향해 궁금한 듯 물었다.
“사라졌습니다.”
베드라는 루메오의 질문에 고개를 숙이고 얼굴에 어둠을 그리며 말을 이었다.
“뒤늦게 근처 도시의 병사들과 교단의 형제들이 도착했지만…….”
처용이 도시를 반파시켜 버린 후, 다급한 지원 요청을 받은 근처 도시에서 지원이 왔었다.
그러나 지원군이 도착하고 본 것은.
-사, 살려 줘!
-재앙…… 재앙이 강림했다!
마치,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이들처럼 절망에 빠진 시민들과 교단의 사제, 성기사들.
-쿠구구! 쩌적!
그리고 완전히 반파되어 아직도 무너지고 있는 도시였다.
지원을 온 이들이 급하게 도시를 수습하고 주변 일대를 수색해 봤지만.
“마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도시에 테러를 벌인 마신의 행방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베드라의 말에 대주교들이 침음을 흘리며 인상을 찌푸릴 때.
“우리와 같은 인간 모습의 마신이라…… 마신이 맞긴 한 겁니까? 반란군이나 이단자일 가능성은-.”
루메오가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위대한 아스터 교단의 행보를 방해하는 반란군들과 이단자들.
그들이 벌인 테러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 놈은 마신이 분명하다!”
베드라는 루메오의 가능성을 완강히 부정하며 강하게 말했다.
“그놈이 저지른 신성모독을…… 크흠!”
재앙 속에서 겨우 살아남은 주교이자 베드라의 부하, 클립스 주교.
베드라는 그에게 참회의 기억이라는, 신관으로서 지닌 능력을 사용해 보았다.
참회의 기억은 같은 아스터 교단의 사제들이 지닌 기억을 볼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 능력을 통해 베드라가 도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해 보았고.
-반갑다. 이-!
마신이 지상에 강림한 참회의 여신에게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도 직접 들었다.
“크흐음!”
용납할 수 없는 기억이 다시금 떠오른 베드라가 불편한 헛기침을 크게 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반란군들이라 해도, 참회의 여신께 그런 망언을 함부로 할 수는 없소. 놈은…… 마신이오!”
베드라는 도시를 반파시킨 정체불명의 존재를 ‘마신’이라 확정 지었다.
마신이라는 무시무시한 존재가 아니라면 이 사태가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았으니까.
“참회의 여신께서는 아직……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계시오.”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인상을 찌푸린 베드라의 말에 나이가 많은 대주교가 한숨을 내쉬었다.
“……성녀께서는 이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루메오가 베드라를 향해 물었다.
아스터 교의 성녀.
에스라 성운의 주신인 아스터의 신관이자, 가장 성스러운 존재.
이 자리에 모인 대주교나 신관들보다도 드높은 권력을 지닌 자.
하지만, 그녀는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성녀께서는 위대하신 빛과 지혜의 부름을 받고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에스라 성운의 주신인 아스터가 내린 명령 때문에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대주교나 신관들도 자리를 비운 성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위대하신 빛과 지혜께서 성녀께 알리셨다면, 곧 돌아오시겠지요.”
베드라가 말을 마친 순간.
-쾅!
“크, 큰일입니다!”
사제 하나가 신전 대회의실의 문을 크게 열어젖히며 소리쳤다.
대주교들과 신관들이 논의하는 대회의실에 함부로 들어선 사제는 징벌받아 마땅했다.
대주교들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회의실에 난입한 사제를 노려볼 때.
“도, 동쪽의 이단 심문소에서 마신이 나타났습니다!”
다급한 표정을 내비친 사제가 전한 소식에 일그러졌던 대주교들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어갔다.
“아무래도…….”
회개의 신관, 루메오가 베드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대대적인 토벌대를 꾸려야겠습니다.”
“……동의합니다. 회개의 신관.”
베드라가 루메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고는.
“당장, 대기 중인 성기사단을 모두 소집하시오.”
대주교들을 향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외신(外神)들께 선택을 받은 신관들에게도 당장 소식을 전해라!”
대회의실에 들어서 소식을 전한 사제를 향해 명령하듯 말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