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화
“이름이 없어서 불편하니, 너를 ‘청’이라고 부르마.”
처용이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전보다 깔끔해진 아이를 바라보며 말하자.
“네.”
꾀죄죄한 모습이 사라지고 말끔한 상태로 변한 푸른 머리카락의 남아.
청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아암. 암.”
손에 들린 도시락, 새하얀 쌀밥 위에 치킨과 소스가 얹어진 덮밥을 두 손으로 마저 집어 먹기 시작했다.
연아가 수저를 주긴 했지만, 아이들은 단 한 번도 수저를 잡아본 적이 없었다.
아니, 제대로 된 음식이라는 것을 입에 넣어본 기억 자체가 없는 이들이었다.
아스터 교에 붙잡히기 전에도 땅에 떨어진 열매나 벌레, 나무껍질을 벗겨 먹었던 이들이었으니까.
애초에 뭘 제대로 먹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아이들.
그런 그들이 먹을 것을 마주하자.
-흐윽.
-흡!
처음 받아보는 호의와 선행에 울먹이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직 많이 있으니까. 좀 천천히 먹어. 체할라.”
-슈르륵.
연아가 아이들 앞에 마실 것들을 놓아두고는 측은한 감정을 담아 말했다.
참고로 연아가 심해의 영역을 응용해 사용하는 아공간은 처용처럼 먹거리를 보관하기에는 좋지 못했다.
말 그대로 대상을 물에 가두어 보관하는 능력이었으니까.
하지만, 밀봉된 물건이나 음료 등은 보관하기가 용이했다.
추가로 아티팩트 역시 물속에서 망가지는 물건이 아니었다.
거기에 아공간에 연화가 숨어들어 기습하는 등의 전투 작전까지 벌일 수 있었다.
처용이 연아를 데려온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아공간 능력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 능력이 아이들에게 마실 것을 제공하는 데 쓰이고 있었지만, 유용한 것은 사실이었다.
“너도 쉬어 둬라, 곧 적진 한복판으로 몰래 잠입할 건데.”
처용이 아이들을 챙기는 연아를 보며 말하자.
“난 별로, 얘들 보니까 밥 생각이 없어지네. 너는?”
연아가 아이들을 보다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답하고는 처용에게 되물었다.
“나도 별로 생각이 없다. 얘들이나 많이 먹여라.”
일행들에게 휴식을 권장했던 처용이 연아의 말에 손을 휘저으며 대답했다.
구출된 아이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다른 일행들 역시 각자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텁. 스르릉.
연화는 입에 육포를 물고는 청색의 수건으로 환도를 닦으며 아티팩트를 점검하고 있었다.
적진 한복판으로 잠입하는 다음 계획을 위해 준비를 갖추는 모습.
그리고.
“명심해, 도망가면 공녀는 죽어. 냠~.”
루나가 바로 앞에 있는 닭강정을 하나 집어 먹으며 말하자.
“아, 알았다고 몇 번을 말해. 아암~.”
처용과 연화, 연아, 그리고 뱀파이어들을 제외한 또 다른 일행.
아니, 인질인 타라샤가 루나의 말에 작은 짜증을 담아 답하고는 닭강정을 하나 집어 먹었다.
타라샤는 목숨이 저당 잡혀 있는 자신의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으음~ 맛있어.”
그저 입에서 퍼져 나가는 감칠맛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처용이 그런 타라샤의 모습을 보며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어리석은 공녀는 온실 속 화초와 같아.
루나가 타라샤를 가리키며 했었던 말.
간단하게 말하자면, 타라샤는 아직 사회의 쓴맛(?)을 모르는 철부지였다.
그녀의 성격 탓인지, 높은 가문 특유의 오만하고 지배적인 성향은 없었지만.
“이렇게 맛있는 게 있었다니, 역시 널 따라오길 잘했어.”
머릿속이 꽃밭인 정도가 아니라, 꽃동산 그 자체인 몽마.
처용이 지금까지 지켜보고 판단한 타라샤의 성향이었다.
아직, 그녀에 대한 의심과 경계를 완전히 거둔 건 아니었지만.
-밤의 왕족인 내가 꿈의 서약을 쥐고 있는 이상, 저 공녀는 내 말을 거스르지 못해.
루나가 타라샤를 완전히 통제하는 이상, 타라샤는 배신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처용은 추후 있을 아주 중요한 계획을 위해 ‘고위 몽마’인 그녀가 필요했다.
처용이 일행들을 살피며 다음 계획들을 생각할 때.
“저, 저…… 한…… 아니, 용, 그, 그…… 신님.”
푸른 머리카락의 아이, 청이가 처용을 조심스럽게 눈짓하며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뭐라고 입을 열어야 할지 우물쭈물하는 모습.
처용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도 잘 모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깔끔한 차림의 검은 연미복을 입은 이들은 용님이라 부르고.
처용을 향해 살갑게 대하는 두 여성은 이름으로 짐작되는 말로 불렀다.
그리고.
-나는 ‘신’이다. 이 개새끼들아.
처용이 자신들을 구해주면서 사제들을 향해 했었던 말.
처용은 스스로를 ‘신’이라 칭했다.
이중 무엇이 처용을 지칭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우물쭈물하는 청이의 모습에.
“내 이름은 한처용이다.”
처용이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시, 신이 아니신 건가요?”
“반은 맞고 반은 틀려.”
순수한 청이의 질문에 처용이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나는 반신(Demi God)이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이야기했다.
“데미…… 갓?”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 신에 오른 인간이란 뜻이지.”
처용이 반신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했음에도, 청이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인간이 어떻게 신이 될 수 있어요?”
“눈앞에 있잖아? 신이 된 인간.”
청이의 말에 처용이 진지한 목소리로 답하고는.
-화륵. 파지직. 슈르르…….
신력과 강기를 은은하게 내뿜으며 다양한 속성의 힘을 불러내었다.
처용에게서 뿜어져 나온 화염과 번개 등 속성들이 서로 뭉쳐 작은 구슬을 형성하고.
-우우웅. 우웅.
처용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맴돌기 시작했다.
마치, 처용을 중심으로 형성된 우주와 같은 모습이었다.
청이가 그런 처용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때.
“너도 특별한 힘을 지닌 것 같은데.”
처용이 청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한 번 보여 봐.”
“…….”
청이가 처용의 말에 망설이는 듯, 멈칫해 보였다.
“괜찮으니까. 힘을 사용해 봐라.”
처용이 안심하라는 듯,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하자.
“……네.”
청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화아아!
청이의 머리카락이 조명처럼 빛나며 휘날렸고 눈동자 역시 푸르게 빛났다.
동시에.
-파츠즛. 파즛.
청이의 몸 전체가 발광하며 옅은 전류를 피어냈다.
“훌륭하네.”
처용이 청이의 능력을 보며 훌륭하다 평하자.
“혀, 혐오스럽지 않으신 건가요?”
능력을 해제한 청이가 고개를 숙이며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난 너희들을 핍박하던 아스터 교의 쓰레기들과는 다르다.”
처용은 그런 청이의 반응에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희들의 능력은 훌륭하고 대단하다.”
“…….”
청이가 처용의 말에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일 때.
“뭐지?”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는데?”
연화와 연아가 방금 청이가 보인 능력을 보며 의문을 드러냈다.
두 눈으로 청이가 전류를 내뿜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청이에게선 번개라는 속성의 기운만 느껴질 뿐,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마나라는 기운 없이 속성의 힘을 발현한 듯 보였다.
연화와 연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의문을 토로하자.
“설마…… 룬티르 일족?”
청이의 능력을 보며 그 기운을 자세히 관찰한 류마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놀람 섞인 류마의 말에.
“그 멸망한 왕국의 백성들이라고?”
닭강정을 집어 먹으며 지켜보던 루나 역시 놀란 듯한 반응을 보였다.
“룬티르? 에스퍼가 아니고?”
두 뱀파이어의 말에 처용 역시 의문을 드러냈다.
에스퍼들을 지칭하는 듯한, ‘룬티르’라는 말은 처음 들었으니까.
“그 이름은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류마가 처용의 말에 재차 의문을 표했다.
“……천사 놈들하고 대화(?)할 때, 물어보니까 그리 말하던데?”
지상에 강림했던 세 명의 천사.
처용은 그들의 날개를 잡아 뜯을 때, 넌지시 물어봤었다고 답했다.
“룬티르 일족은 본래 룬테라라고 하는 자연을 숭배하는 나라의 백성입니다.”
류마가 룬티르 일족이 본래 어떤 이들인지 이야기했다.
신이 아닌, 자연을 숭배하고 가꾸는 국가인 룬테라.
그런 국가에서 태어난 이들이 바로 자연의 축복을 받은 일족인 룬티르 일족이었다.
그리고 그 축복이 강하게 발현된 이들 중에는 특별한 능력을 타고난 아이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청이.
자연의 축복을 강하게 타고난 아이는, 마나라는 자원 없이 자연의 힘을 다룰 수 있었다.
그러나.
“아스터 교단이 룬테라를 이단으로 낙인찍었습니다.”
그런 자연을 사랑하는 국가, 룬테라가 아스터 교단의 표적이 되었다.
“에스퍼는 룬티르 일족을 이단자로 낙인찍은 아스터 교가 붙인 말입니다.”
초상능력자들을 지칭하는 말인 에스퍼.
이 이름은 아스터 교가 삿된 힘을 다루는 룬티르 일족에게 붙인 일종의 낙인이었다.
그저 룬티르의 이름만 에스퍼로 바꾼 것만이 아닌, 이들의 태생이 ‘악’이라는 소문까지 퍼트렸다.
그리고…… 대대적인 룬테라 정벌이 시작되었다.
아스터 교단이 룬테라를 이단이라 단정 짓고 국가 전체를 말살시켰다.
룬테라는 다짜고짜 학살을 일삼아 오는 아스터 교단에 맞섰지만.
“참회의 여신과 회개의 여신이 룬테라 전체에 저주를 내렸습니다.”
제아무리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이들이라 해도, 신에게 맞설 순 없었다.
결국, 아스터 교단이 강제적으로 룬테라를 정벌하여 그 땅을 죽음의 땅으로 만들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아스터 교의 눈이 닿은 곳에서 ‘룬티르’라는 이름을 꺼내는 것도 이단 행위에 포함됩니다.”
전쟁을 피해 뿔뿔이 흩어진 룬티르 일족을 이단자들이라 칭하며 계속 사냥하고 있었다.
“……그런가?”
처용이 류마의 말에 무언가를 떠올리며 읊조렸다.
-이 사특한 일족 놈들이! 빌어먹을 수호신에게 빌붙었구나!
회귀 전, 처용과 싸우던 뱀파이어들이 옆에 있던 에스퍼들을 보며 했었던 말이었다.
한참 전쟁이 격화되던 시기였기에 처용은 에스퍼들에게 그들이 가진 사정을 묻지 않았었다.
굳이 자신을 위해 싸워주는 이들의 아픔을 꺼낼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 아이들만이 가진 아픈 사연이 있다면 더 좋다.”
처용이 아이들을 복잡한 눈빛으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놈들에게 있어 ‘마신’이 되었으니, 이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게 좋겠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류마가 처용의 말에 조심스럽게 묻자.
“빌어 처먹을 아스터 교에게 고통받는 이들을 모두 규합시킬 생각이다.”
처용이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앞으로 계획을 이야기했다.
룬티르 일족을 포함한 이단자로 낙인찍힌 이들, 이종족들 등 아스터 교에게 고통받는 모든 존재들.
그들을 아스터 교단에 정면으로 맞서는, ‘마신’이라는 존재가 이끄는 새로운 세력으로 규합시킨다.
동시에, 지구의 세력이 이곳, 에스라 대륙에 발을 딛는 발판을 마련한다.
아스터 교단을 견제하고 그들의 힘을 깎아냄과 동시에 차후 일까지 준비한다.
이것이 대략적인 계획이었다.
처용의 말이 끝나자.
“그…….”
청이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을 들썩였다.
그러나 곧 입이 다물어지고 고개를 푹 숙였다.
“할 말이 있느냐?”
처용이 청이를 보며 나지막하게 묻자.
“왜…… 왜 저희를 도와주신 건가요?”
청이가 잠시 고민하듯 침묵하더니, 처용에게 질문했다.
이전부터 계속 품어오던 의문이었다.
왜 처용은 이단자로 붙잡혀 고통받는 자신들을 구해주었는가?
그 이유가 궁금했다.
“내가 신으로서 사람의 관상을 좀 볼 줄 안다.”
처용이 청이의 의문 어린 말에 작은 웃음을 짓고는.
“네가 전생에 착한 일을 많이 했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을 농담처럼 말했다.
“그래서 너희들을 도운 거다. 앞으로도 도울 것이고.”
처용의 진심 섞인 말이 울리자.
“와, 방금 진짜 ‘신’ 같았어. 사이비 신…….”
연아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마치, 어린 애들을 그런 말로 속이는 것이냐고 묻는 듯했다.
하지만 말로는 처용을 탓하는 듯 보여도, 사실 대수롭지 않다는 뜻이었다.
처용 역시 잘 알고 있기에 딱히 뭐라 말하지는 않았다.
연화를 포함한 다른 이들 역시, 처용의 말에 작은 웃음만 지을 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아스터 교단이 저희를…… 저희를 가만두지 않을…….”
질문을 한 당사자인 청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어린아이에게 가해지는 온갖 학대와 가학적인 행위들.
청이는 그동안 아스터 교단에게 받은 고통과 공포가 마음 깊이 자리 잡은 듯 보였다.
그런 청이의 반응에.
“그 대단하신 아스터 교의 최고신, 참회의 여신이 내 손에 어떻게 되었지?”
처용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 말에 청이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연화와 연아, 뱀파이어들은 아이들을 구출하고 조금 떨어져 상황을 지켜봤었다.
청이 역시 고개를 들어 처용을 바라봤었다.
그때 눈에 보였던 광경은.
-가서 빌어 처먹을 아스터, 그 개새끼한테 전해라.
아스터 교단의 성좌들, 에스라 성운을 전체에 전쟁을 선포하는 처용의 모습이었다.
동시에 해머를 내리쳐 참회의 여신을 끝장내 버렸다.
두 눈으로 보았음에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다시금 처용이 발휘한 무력을 떠올리자, 온몸에 전율이 일렁였다.
“저희를…… 저희를 도와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신님.”
청이는 처용을 ‘신’으로 인정하며 감사하다는 말을 다시금 전했다.
“그래, 그럼 신의 명령이다.”
처용은 청이의 감사에 작은 미소를 짓고는.
“참지 말고 솔직하게 부탁하고 싶은 말을 해봐.”
청이가 처음에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말을 짐작하며 물었다.
그 말에 청이가 입술을 깨물어 보이고는.
“……도와주세요.”
일그러진 눈가에 눈물이 흐르며 처용에게 부탁하기 시작했다.
“이단 심문소 안에…… 저희 가족들이 잡혀들어갔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그간 꾹꾹 억눌러 참았던 서러움과 고통이 댐을 뚫고 터진 물줄기처럼 쏟아졌다.
청이가 드러내는 시린 감정이 시발점이 되었는지.
-흐윽.
-흡.
뒤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다른 아이들도 마음의 아픔을 쏟아냈다.
“걱정하지 마라.”
-탁.
처용은 고개를 숙인 청이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나를, 신을 믿어라.”
청이의 부탁을 들어준 처용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쿠구구!
마음속에서는 활화산 같은 분노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동시에, 이들에게 고통을 선사한 악마들에게 증오가 피어났다.
“얘들 부탁을 들어 주러 가자고.”
처용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말에 연화와 연아가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들이 겪은 고통에 감화된 탓인지, 그녀들 역시 잔잔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이제, 청이를 포함한 아이들을 고통받게 만든 모든 이들에게 ‘징벌’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