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화
처용의 백귀야행이 신관들을 휩쓸고 지나갔을 때.
“으윽…….”
“버텨낸…… 것인가?”
부상을 입은 신관들이 반쯤 주저앉았던 몸을 일으키며 읊조렸다.
거대한 파도처럼 덮쳐오는 악귀의 무리들.
그 악귀들에게 정면으로 맞선 신관들 중 몸이 성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특히, 최전방에서 방어를 맡았던 이들.
“허윽……!”
그중 제시카와 스티븐 등, 가장 앞에 섰었던 신관들의 부상이 생각보다 컸다.
끝까지 정신을 붙들고 방어에 집중한 덕에 치명상은 면했지만, 당장 전투에 임하기에는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아직 쓰러질 수 없다.’
-스스.
아스트라페를 지팡이처럼 지지한 제시카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지금 쓰러질 때가 아니었다.
아직 비장의 수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고작 여기서 쓰러질 정도로 자신의 각오는 가볍지 않았다.
처용과 전투를 펼치는 이 전장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했다.
가장 부상이 심했던 제시카가 몸을 일으키자, 다른 이들도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이 자리에 선 이들은 S급 헌터들 중 최상위에 자리한 이들.
애초에 그들은 제시카와 비슷한 각오를 다지고 성운 결전에 참여한 자들이었다.
처용의 힘이 생각보다 압도적이었지만, 여기서 포기를 선언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잘 버텨 주었습니다.”
-우우웅.
유일하게 방어에 나서지 않았던 단 한 명의 신관.
회복의 대천사, 사하퀴엘의 신관인 클로에가 신성력을 퍼트리며 말했다.
“결전기 – 천상의 활력소.”
클로에가 결전기를 사용하자.
-촤라라. 촤락.
푸른 빛을 빛내는 신성력의 물결이 클로에를 중심으로 은하수처럼 뻗어 나갔다.
여러 줄기로 뻗어 나간 은하수가 부상을 입은 헌터들을 감쌌고.
-스스스.
신관들의 부상을 순식간에 치유해 내었다.
“탈락한 이들은 아무도 없군요. 다행입니다.”
회복을 받고 몸을 일으킨 제시카가 다른 이들을 살피며 입을 열자.
“으윽, 이 정도 스킬을 사용했으니, 역천군주도 조금은 지쳤을 터.”
“근성을 발휘합시다. 아직 승산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몸이 회복된 다른 신관들이, 투지를 다지며 말했다.
무려 대천사조차도 막아내지 못한 강력한 공격을 힘을 합쳐 막아 내었다.
심지어 탈락한 이들은 아무도 없는 상황.
그만큼 신관들의 사기가 조금 오른 듯 보였다.
그러나.
“아니, 그는 조금도 지치지 않았을 겁니다.”
제시카가 굳은 표정으로 정면, 처용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엄청난 위력의 기술을 사용했음에도 처용이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고 판단한 이유.
“역천군주는…… 아직 신력을 쓰지 않았습니다.”
제시카의 입에서 그 명확한 이유가 흘러나왔다.
처용은 마나만 쓸 수 있는 이가 아니었다.
신의 신관이면서도 신성력 또한 쓰지 않았다.
그는 온전한 신의 힘, ‘신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제시카의 말이 울리자.
“마나만을 이용한 스킬이 이 정도 위력인데…….”
“제길…… 인간 맞아? 괴물이 따로 없는데.”
신관들이 다시 경각심을 드러냈다.
무려 스무 명에 달하는 인원이 한 번에 덤비는데도, 도저히 승기가 잡히지 않았다.
오히려 혼자인 처용이 스무 명의 신관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저게 전력이 아니었다니…….”
처용은 아직도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신관들이 중요한 사실을 깨달으며 침음을 흘릴 때.
“지금부터 전력을 좀 발휘해 볼까 해.”
처용이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항마의 화신.”
-콰아아!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에너지를 내뿜었다.
찬란한 황금빛과 그 주변에 일렁이는 붉은 기운.
처용이 내뿜는 기운은 다름 아닌 ‘신력’이었다.
-쩌저적.
그 신력이 점점 처용을 뒤덮으며 무언가 형태를 갖추더니.
-쿠구구!
반투명한 여래의 상반신이 나타났다.
“항마의 화신……!”
제시카가 처용의 권능을 알아보며 작게 떨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마(魔)에 있어서 포식자와 다름없는 파마(破魔)의 신력.
대악마와 정면으로 맞서 싸울 수 있는 힘.
그런 파마의 신력을 지닌 처용의 가장 강력한 권능이자 상징.
그것이 항마의 화신이었다.
제시카는 그런 항마의 화신이 보이는 위력을 두 번이나 직접 목격했었다.
괴물로 변한 뤼장첸을 세상과 함께 반으로 갈라 버렸었고.
완전한 형태로 변한 안드로말리우스와 정면으로 맞서 싸웠었다.
‘……이길 수 없다.’
제시카가 차마 튀어나오려는 속마음을 가까스로 삼켰다.
신력을 사용하는 처용을 상대로 도저히 승산이 보이지 않았다.
비단 제시카만이 아닌.
“……!”
“승산이…….”
처용을 마주하는 신관들이 투지를 잃어 가고 있었다.
마나만 사용하는 처용을 상대로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런데 신력에 권능까지 사용한다?
아무리 신관들이 다수라 한들, 절대로 이길 수 없었다.
그러나.
“……다들 무력하게 지고 싶지는 않으실 겁니다.”
-척.
제시카가 아스트라페를 굳게 쥐고 자세를 낮추며 진지하게 말했다.
처용의 신력을 느끼며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듯 보였지만, 날카로운 눈빛 속에는 투지가 깃들어 있었다.
아직 포기하지 않은 모습.
“저를…… 믿어 주시겠습니까?”
제시카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자.
“플랜 J…… 마지막 작전이로군요.”
태양의 신관, 라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성운 결전이 시작되기 전, 신관들끼리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전 작전 회의를 했었다.
지금껏 처용을 상대로 보인 진형과 전투, 그 모든 행동이 사전 계획 중 하나였다.
그리고 방금 제시카가 언급한 자신을 믿어달라는 말.
“어디 한번 해 봅시다.”
“여기까지 와서 무력하게 주저앉을 생각은 없습니다.”
신관들이 그 말을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투지를 끌어올렸다.
“좋군.”
처용은 신력과 항마의 화신을 보였음에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이 마음에 든다는 듯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결전기, 팔괘 – 태극천체진.”
-스르릉. 스릉.
신력에 강기를 더하며 결전기까지 사용했다.
“가진 수단을 다 꺼내는 게 좋을 거다.”
-스릉! 스르릉!
처용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역천의 절을 제외한 열두 개의 무구가 동시에 쇄도했다.
신력과 강기가 일렁이는 열두 개의 무구가 신관들에게 날아들 때.
“썬더 브레이커!”
-파지지지!
토르의 신관, 루이스가 앞으로 돌진해나갔다.
전신에 벼락을 휘감고 결전기로 생성된 무구, 썬더 브레이커를 굳게 쥔 모습.
그런 루이스의 모습이 신호탄이 된 듯.
“흐아압!”
“달려!”
모든 신관들이 일제히 처용을 향해 달려 나갔다.
“천둥 군주의 심판!”
-쿠구구!
강렬한 벼락을 휘감은 루이스의 썬더 브레이커가 앞으로 크게 휘둘러졌다.
그리고 그 궤적에 있던.
-차카캉! 쿠구!
가장 앞서 쇄도하는 처용의 무구와 충돌했다.
-쿠콰! 차캉!
강렬한 뇌전이 터지며 투창과 해머가 튕겨 나갔고, 루이스 역시 뒤로 밀려났다.
“아직이다!”
-촤악! 쿠과콰-!
루이스는 땅을 강하게 밟으며 뒤로 밀려나는 몸을 억지로 저지하고는 다시 발을 굴러 달려 나갔다.
그때.
“항마의 화신 – 암석신장(巖石神掌).”
-……슈우우!
허공 위에서 바위 만들어진 거대한 손바닥이 루이스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썬더 브레이커!”
-후우욱!
루이스는 자신을 향해 쇄도해오는 손바닥을 쳐내기 위해 도끼를 위로 크기 휘둘렀다.
그러나.
-쿵! 파사사……!
도끼날과 손바닥이 충돌한 순간, 루이스의 뇌전이 허무하게 흩어졌고.
-쿠콰콰!
아래로 떨어지는 손바닥에 의해 루이스가 땅에 처박혔다.
뇌(雷) 속성은 지(地) 속성에 약하다.
게다가 바위 손바닥은 처용의 강기와 신력이 깃든 공격.
루이스가 발휘하는 뇌전의 신성력만으로는 이겨낼 수 없었다.
“커…… 아직, 인-.”
바위 손바닥에 깔린 루이스가 힘겨운 침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루이스가 쓰러졌을 때.
“라이진 썬 – 태양의 거신병!”
-화르르륵!
태양의 신관, 라진이 자신의 결전기, 작은 태양의 힘을 퍼트리며 화염의 거인으로 변신했다.
전신이 태양처럼 타오르는 10M 크기의 불타는 거인.
“으어어어!”
화염의 거인으로 변한 라진이 팔을 크게 휘두르자.
-화르륵! 차카캉!
처용의 결전기로 움직이는 세 개의 무구가 튕겨 나갔다.
길을 뚫으려는 듯, 앞으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갈 때.
“항마의 화신 – 빙백신장.”
-쩌저적! 쐐에에-!
정면에서 얼음으로 만들어진 네 개의 손바닥이 라진을 향해 쇄도해왔다.
화염 거인으로 변한 라진이 손바닥에 타격당하자.
-콰쾅! 쾅! 화르르…….
불타오르는 상체 일부와 두 팔이 터져 나갔다.
그대로 전투 불능이 되려던 찰나.
“하아압!”
-화르륵!
라진이 기합을 내지르며 태양의 힘을 끌어올리자, 사그라진 팔과 상체 일부가 다시 재생되었다.
처용의 공격을 버텨낸 라진이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는 순간.
-차라락. 차락.
라진을 타격한 얼음 손바닥이 가루처럼 분해되더니, 반짝이는 모래바람처럼 흩날렸다.
그리고.
“만년빙정(萬年氷精).”
-탁.
처용이 손가락을 튕기며 라진 주변에 흩날리던 빙 속성 마나를 터트리자.
-쩌저저적!
화염 거인으로 변한 라진이 그대로 얼어붙으며 빠르게 굳어갔다.
“이……!”
-화륵! 화르륵!
라진은 태양의 힘을 끌어 올리며 어떻게든 저항해 봤지만.
-쩌적. 쩌저적.
이미 손쓸 새도 없이 얼음이 목 언저리까지 차올랐다.
애초에 처용이 신력을 담아 발휘하는 자연부의 고위 진법은 대악마에게도 타격을 줄 수 있을 정도.
태양의 힘을 다루는 라진이라 해도, 한 번 걸린 이상 벗어날 수 없었다.
“안 돼!”
“막아야-!”
라진의 위기에 이리스와 아일라가 뒤에서 뛰어들었다.
그러나.
-화르륵!
“꺄아-!”
불타오르는 손바닥에 이리스가 맞아 뒤로 크게 나가떨어졌고.
-파아아!
밝은 광휘를 내뿜는 손바닥에 의해 아일라가 쏘아낸 죽음의 신성력이 모조리 사그라졌다.
결국.
-쩌저저적!
거대한 화염 거인, 라진이 새파랗게 얼어붙은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루이스, 라진 등, 가장 강한 이들이 하나둘 당함과 동시에.
“으-!”
“크악!”
처용의 결전기와 항마의 화신이 만들어 내는 신장(神掌)에 몇몇 신관들이 공격당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대부분 한두 번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고 있었다.
그렇게 하나둘 쓰러져 가는 와중에도.
“달려!”
“어떻게든 돌파해라!”
신관들을 처용을 향한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가장 중앙에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제시카.
“극 이기어술 – 천체극섬.”
-스르릉! 스릉!
처용이 튕겨 나간 열 개의 무구들을 모아 제시카를 향해 쏘아 보냈다.
그러자.
“몰아쳐라!”
-차카캉!
제시카의 오른쪽에서 야스라가 나타나며 무구들을 쳐냈고.
“결전기 – 스타라이트 블레이드!”
-피이이-! 차카캉!
티르의 신관, 티엘로가 한 줄기의 섬광으로 변하며 제시카 주변에 날아드는 무구들을 쳐냈다.
그녀의 결전기는 한 줄기의 빛으로 변해 극한의 속도를 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촤아!
“커흐!”
야스라가 뒤에서 날아드는 대낫의 공격에 의해 쓰러지고.
-쾅!
“커-!”
빛줄기로 변한 티엘로는 측면을 기습해오는 창에 옆구리를 맞아 나가떨어졌다.
가까스로 레이피어를 들어 방어하긴 했지만.
-차창! 파사사!
얇은 레이피어로는 처용의 창격을 막을 수 없었다.
검까지 부러지고 부상까지 당한 이상, 바로 일어서기란 불가능했다.
마지막으로.
“결전기 – 그랜드 디펜더!”
-쩌저저적!
대지의 수호자로 변한 스티븐이 제시카의 위로 뛰어오르고는.
“자력의 방패!”
-우우웅!
제시카 주변으로 날아드는 모든 무구를 자신에게 끌어들였다.
스티븐의 스킬로 인해 다섯 개의 무구가 궤도를 틀어 스티븐에게 향했고.
-파파팍! 쿠구! 파사사……!
바위 골렘이 된 스티븐이 무구에 베어지고 부수어졌다.
“아…… 직이다!”
-우드드!
스티븐이 부서진 몸체를 빠르게 재생하며 버티려 했지만.
“풍백신장(風伯神掌).”
-휘이이-! -파사사!
강렬한 바람이 휘감겨 만들어진 거대한 손바닥이 스티븐을 강하게 타격하며 밀어냈다.
가까스로 재생한 바위들이 가루처럼 흩어졌고.
“크-!”
결전기가 풀린 스티븐이 피를 토해내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런 그들의 무모한 희생 덕분에.
-쿵!
제시카가 처용의 앞에 당도했다.
그녀의 발걸음이 처용의 앞에 닿은 순간.
-파지직! 화아아!
강렬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며 주변을 진동시켰다.
그리고.
“결전기-.”
지금껏 숨겨둔 비장의 수를 사용했다.
본래 그녀는 결전기가 없었다.
결전기를 익히기 위해 수많은 노력도 해 봤었다.
다른 결전기를 익힌 이들에게 조언도 구해 보고 도움도 받아 봤지만, 도저히 스킬이 생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수련에 집중하면서 스스로의 마음가짐에 대해 계속 생각하십시오.
처용이 전해 준 새로운 수련법과 계속 강조하듯이 전했었던 말들.
그 말 덕분에 아주 작은 갈피를 잡을 수 있었다.
제시카는 그 작은 갈피를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그 작은 단서에 매달리고 집착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정진하고 생각한 결과.
드디어 결전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아니, 그녀의 결전기는 다른 최상위 헌터들의 결전기와는 다른, 아주 특별한 결전기였다.
“미네르바(Minerva)!”
제시카의 결전기가 발동하자.
-스르륵! 스륵!
단발이었던 그녀의 머리가 찬란한 금빛으로 빛나며 길게 자라나 주변에 흩날렸다.
동시에.
-쩌저적! 쩌적!
녹색과 금빛이 섞인 갑옷을 입은 여신의 형상이 그녀의 위에 덧씌워졌다.
그 형상은 다름 아닌 아테나의 모습.
게다가 제시카의 전신에서 피어나는 강렬한 기운은 신성력이 아니었다.
온전한 신의 기운, 신력이었다.
-스스로 무엇을 염원하고 무엇을 위해서 강해지려는지 끊임없이 생각해 보십시오.
처용이 수련법을 알려주며 했었던 조언.
제시카가 추구한 염원은 다름 아닌 동경과 존경이었다.
그 대상은 그녀의 성좌인 아테나였다.
정의와 지혜, 전장의 여신이자 거대 성운인 올림포스의 주신.
아테나는 제시카가 추구하는 완벽한 여군주의 이상향이었다.
제시카가 보인 결전기, ‘미네르바’는 그녀가 아테나에게 보이는 염원과 심상이 구현된 결과였다.
-쿠구구!
여신의 형상, 미네르바로 변한 제시카에게서 금빛이 일렁이는 녹색의 신력이 거칠게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쐐에에!
신력이 휘감긴 아스트라페의 창날이 처용을 향해 쇄도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