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화
[승리자 : 김정훈]
전광판에 예선전 결과가 나타나자.
“이럴 수가!?”
“아서가…… 졌다고?”
“예선 탈락? 저 아서가? 진짜냐!?”
경기를 관람하던 헌터들이 자리를 박차 일어나며 경악을 드러냈다.
그 누구도 한국의 헌터, 김정훈이 이기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무려 20여 단계나 차이 나는 레벨.
평균적으로 밀리는 스텟.
불리한 무기의 상성.
심지어 아서는 작년 월드 헌터 토너먼트 10위 안에 들었던, 강자 중의 강자였다.
그런 아서와 맞붙은 정훈의 패배는 확정된 미래라 봐도 무방했다.
그가 승리할 가능성은 거의 기적이라 봐도 될 정도.
그러나 기적이 일어나 버렸다.
비단 헌터들만이 경악과 놀람을 표하는 것은 아니었다.
[……훌륭하군.]
[불리함을 딛고 이겨낸 것인가?]
2층에서 경기를 관람하던 소수의 성좌들도 놀람을 표했다.
불과 조금 전까지 뻔한 결과가 보이는 듯, 무심하게 관람하던 그들이었다.
성좌들의 눈에도 아서가 이기는 것은 당연한 듯한 분위기였다.
아서는 성좌들에게도 나름 이름이 알려진 뛰어난 병사였으니까.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 일어났다.
모두가 놀람을 드러낼 때.
[저 창술…….]
예선전을 관람하던 성좌 중 하나.
창무신이 조금 전 정훈의 움직임을 다시 상기하며 읊조렸다.
그리고.
[……그렇군. 그런 것인가?]
1층의 관중석에 자리한 한 사람.
처용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머금었다.
아서와 맞서며 정훈이 보였던 창술의 기본기들.
일곱 명의 분신을 다루면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군무.
게다가 상대의 방심을 노린 치명적인 일격까지.
정훈이 예선전에서 보인 모든 모습에서 처용의 느낌이 전해졌다.
창무신은 무신의 시험에서 처용을 직접 시험했었기에 더욱 그 느낌을 잘 전달받았다.
특히.
‘검기와 정면으로 충돌할 때, 본체는 뒤로 물러나고 대체한 것인가?’
창무신은 정훈이 마지막에 보인 일격을 떠올리며 속으로 읊조렸다.
일제히 달려 나가는 일곱 명의 정훈과 아서가 날린 검기의 충돌.
분명 충돌 직전까지는 중앙에 있던 정훈은 진짜 정훈이었다.
그러나 충돌 이후 흙먼지가 퍼지며 시야가 잠시 가려진 순간.
-스르륵.
정훈은 자신의 뒤에 분신을 하나 더 만들어 내고는 빠르게 자리를 맞바꾸었다.
그리고.
-스스스.
최대한 기척을 죽인 채, 아직 흙먼지가 가라앉지 않은 외곽을 은밀하게 달려 나갔다.
그동안 분신들이 군용 창술을 구사하며 아서의 검기를 뚫어낸다.
엑스칼리버의 검기를 뚫어낸 정훈의 창이 일제히 아서에게 쇄도할 때.
아서는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자신의 결전기를 펼쳐 정훈의 공격을 막아 내고 반격했다.
다섯의 정훈이 엑스칼리버에 의해 베어지고 아서가 승리를 확신하며 방심한 순간.
-유성 찌르기!
아서의 뒤를 점거한 정훈이 가장 강력하고 치명적인 공격으로 뒤를 급습한다.
맹렬한 기세로 나아간 창이 아서의 왼쪽 등, 정확히 심장이 있는 방향을 찔렀다.
특수 보호구 덕에 심장이 꿰뚫리지는 않았지만, ‘치명상 판정’으로 인해 정훈이 승리했다.
[훌륭하군. 아주 훌륭하다.]
창무신이 창을 다루는 헌터, 정훈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조차도 예선전은 큰 기대를 품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흡족한 경기를 볼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관중석에 자리한 이들이 여러 반응을 보일 때.
“젠장, 여왕님께 한 소리 듣겠군…….”
-푸스스.
아서가 쓰러진 몸을 일으키고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읊조렸다.
그리고.
“방심했군요. 제가 졌습니다.”
깔끔하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상대보다 스스로가 압도적이라 생각하고 자만하며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
너무나도 뼈아픈 패배 요인이었다.
동시에 교훈 또한 얻을 수 있었다.
상대가 나보다 약하다 하여 방심하면 당한다.
자신이 상대보다 강하다 하여 교만을 떠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가 될 수 있다.
만약, 이번 예선전이 경기가 아닌, 전장에서의 전투였다면?
아서는 자신보다 약한 적에게 방심하여 살해당한 것과 다름없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정훈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표하고는 경기장을 나가려는 때.
“김정훈 헌터.”
아서가 진지한 목소리로 정훈을 향해 말했다.
“결승전에 올라갈 테니, 그때 다시 한번 붙어봅시다.”
예선전은 한 번 탈락한다고 영영 배제되는 것이 아니었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이들이 모여 펼치는 토너먼트이니만큼, 단순한 경기가 아니었으니까.
운이 좋아 약한 상대를 계속 배정받는 것으로 순위를 높이는 꼼수는 있을 수 없었다.
예선전은 여러 번 치러지고 각각 점수 또한 따로 매겨지는 방식이었으니까.
게다가 예선전에 탈락한다 해도, 패자부활전이라는 기회 또한 있었다.
아서가 정훈을 향해 호승심이 일렁이는 목소리로 말하자.
-탁.
정훈은 뒤에서 들려오는 아서의 말에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그때는 운으로 이기지 않을 겁니다.”
진지한 목소리로 아서의 말에 답했다.
정훈이 참여한 예선전이 끝나자.
“……예상 못 한 결과가 일어났네?”
예선을 관람하며 멍한 표정을 짓던 메리가 입을 열었다.
“내가 말했잖아, 레벨과 스텟이 전부가 아니라고.”
처용이 메리의 말에 진지한 목소리로 답하고는.
“앞으로 나올 예선전도 기대하는 게 좋을 거야.”
작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
판데모니움 악의 제전.
모든 대악마들이 모이는 장소.
지금 그곳에서는.
-쿠구구! 쿠구구구구!!
지진이 들이닥친 듯, 악의 제전 전체가 강렬하게 진동하며 떨리고 있었다.
그 영향인지.
“…….”
“…….”
악의 제전에 모인 대악마들이 서로를 눈짓하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동시에 지금 악의 제전을 뒤흔들고 있는 원인.
“크으음……!”
-쿠구구!
살기와 격노가 가득한 어둠을 줄기줄기 내뿜고 있는 바알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대악마들 앞에서, 같은 삼천마들 앞에서조차도 여유와 위엄을 보이는 거대한 어둠의 대악마.
판데모니움 서열 1위인 그가.
-쿠구! 쿠구구!
강렬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대악마들 모두가 처음 보는 바알의 모습에 섣불리 행동하지 못하고 침묵을 유지했다.
같은 삼천마, 메피스토와 디아블로, 그리고 천교의 주신 옥황상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들은 바알의 분노에 눈치를 보며 침묵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시야가 집중된 곳은 악의 제전 중앙.
지금 그곳에는.
-그…… 그건! 네년이 그걸 어떻게!?
-이걸 지구에 숨겨놓은 건 실수였어, 머저리 같은 악마 놈들.
지구의 제단에서 있었던 일들이 재생되고 있었다.
아스모데우스의 권능, 몽환의 기억으로 재현된 영상이었다.
이윽고 처용이 바알의 분신을 부수고.
-징그러우니까. 당장 꺼져!
엘리스가 네크로노미콘을 탁 접으며 소리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비추었다.
“……이런 일이 있었소.”
중간중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을 하던 나베리우스가 말을 마치자.
-인간이…… 네크로노미콘을 다룬다고?
-불가능하다!
-혈선의 신관…… 저 정도였을 줄이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황을 파악한 대악마들이 경악과 의문을 표했다.
지구의 인간들이 보이는 수준.
배신자 안드레알푸스와 그 신관의 정체.
삼천마 서열 1위, 바알의 분신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인간.
짧은 영상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은 대악마들조차 놀람을 표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중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가장 경악스러운 것은 따로 있었다.
“네크로노미콘을 인간이 저 정도로 다루는 게…… 가능한가?”
메피스토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알을 향해 물었다.
네크로노미콘은 삼천마인 자신조차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신물이었다.
판데모니움의 보물, 네크로노미콘을 다룰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거대한 어둠의 대악마, 가장 강력한 어둠을 지닌 바알만이 온전히 다룰 수 있었다.
그런 판데모니움의 보물을 인간이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악의 제전에 있는 대악마들이 경악과 의문을 표하는 이유였다.
“나 역시 궁금하군. 바알. 저게 정녕 가능한 일인가?”
디아블로 역시 의문을 드러내며 바알을 향해 물었다.
그는 자신의 신관, 집행자를 통해 직접 현장을 본 대악마였다.
직접 보았음에도, 믿어지지가 않았기에 물은 것이었다.
그런 두 삼천마의 물음에.
“……불가능하다.”
분노 서린 침묵을 유지하던 바알이 입을 열어 차가운 목소리를 내었다.
“불가능하단 말이다.”
바알에게서 분노가 일렁이는 목소리가 울리자.
“그 불가능한 상황이 실제로 일어났단 말이지?”
디아블로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악마들이 경악과 황당함을 표할 때.
“저것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러는 것인가?”
천교의 주신, 옥황상제가 의문을 표했다.
그 질문에.
“천교의 주신만이 다룰 수 있는 신물, 천류관이나 옥쇄를 일개 인간이 다룬다 생각해 보시오.”
나베리우스가 적절한 예시를 들며 간략하게 요약해 설명했다.
그 말에.
“……그런가? 무슨 상황인지 알겠군. 하지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옥황상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상황을 이해함과 동시에 인상을 찌푸리며 의문을 토했다.
일개 인간이 주신만이 다룰 수 있는 신물을 다룬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상황이었다.
모두가 의문을 표할 때.
“그저…… 모두 이용당할 뿐인 머저리에 불과했다.”
침묵을 유지하던 바알이 시리도록 차가운 목소리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대신 놈들! 천교! 그 신관들과 병사들! 저 파마의 신력을 지닌 하계종까지! 모두!”
-쾅!
분노를 내지른 바알이 옥좌의 팔걸이를 내리치며 일어서자.
-쿠구! 파사사…….
강렬한 어둠이 폭발해 하늘로 솟구치며 팔걸이가 가루처럼 부수어졌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고작 저것 하나에게 기만을 당했다!”
자리를 박차 일어난 바알이 악의 제전 중앙을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지금 그곳에는 아스모데우스의 권능, 몽환의 기억이 펼쳐져 있었다.
몽환의 기억이 보여주는 영상은 네크로노미콘을 든 엘리스를 마지막으로 비추고 있었다.
바알이 노려보는 대상은 다름 아닌 엘리스였다.
“태초의 그릇을 품은 숙주가…… 예언의 능력을 깨우쳤소.”
나베리우스가 바알의 눈치를 보고는 그간 알아낸 사실들을 이야기했다.
어째서 바알이 이리 격노하는 모습을 보이는지, 그 이유를 언급했다.
“천교의 패퇴, 혈선의 신관, 성운들의 단합, 우리를 방해한 모든 것들이 그릇의 숙주가 벌인 짓이오.”
“허…… 저것이 원인이었다고?”
옥황상제가 나베리우스의 말에 한쪽 눈썹을 크게 올리며 말했다.
조커와 한처용.
천교의 입장에서는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하계종들이었다.
특히, 혈선의 신관 한처용.
당장 죽여 없애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없애는 것이 불가능한 존재였다.
놈이 지닌 무력이 인간의 상식을 넘어서는 수준이거니와 그 뒤를 받쳐주는 신격들도 문제였다.
헌데 그 모든 방해꾼들이…… 단 한 인간에 의해 조직되고 만들어졌다?
“정녕 저것이 사실이라면…… 위험하군.”
옥황상제가 사태의 위험성을 깨달으며 읊조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예언 능력이라…… 태초의 그릇이 지닌 힘이 이 정도였을 줄이야.”
뒤에서 상황을 조작하고 암약한 이는 다름 아닌 태초의 그릇을 품은 숙주.
태초의 그릇이 지닌 힘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옥황상제가 인상을 찌푸리며 읊조릴 때.
“안드레알푸스는?”
바알이 눈을 돌려 나베리우스를 응시하고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아니…… 이미 판데모니움을 탈출한 듯 보입니다.”
나베리우스가 굳은 목소리로 바알의 질문에 답했다.
변화의 대악마, 안드레알푸스의 배신.
그의 신관이자 악의 병사들을 이끌던 의회주 닥터는 정체를 숨긴 조커로 드러난 상황이었다.
나베리우스는 분신을 해제하고 판데모니움으로 돌아오자마자, 안드레알푸스를 수색했다.
그러나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나마 겨우 발견한 단서는.
“판데모니움 내부에서 신계와 연결되는 통로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안드레알푸스가 빠져나간 듯 보이는 통로의 흔적을 발견한 것, 이게 전부였다.
나베리우스의 말이 끝나자.
“판데모니움 내부에서 신계와 연결되는 통로를 뚫었다고?”
대악마 서열 8위, 안개의 대악마 알레인이 의문 어린 목소리로 나베리우스에게 물었다.
“하위 서열의 대악마가? 그게 정말 가능한 것인가?”
“…….”
나베리우스는 알레인의 질문에 뭐라 답하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려 보였다.
조금 전, 자신이 발견한 단서를 이야기하면서도 믿어지지 않았으니까.
안드레알푸스는 자신의 배신이 들킨 것을 알아채고 판데모니움을 탈출했다.
심지어 신계와 연결되는 통로를 뚫어 빠져나갔다.
찾은 단서와 증거들이 이런 믿을 수 없는 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베리우스가 알레인의 질문에 답하지 못할 때.
“그게 가능했으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뻘짓을 하고 있진 않았겠지.”
-탁. 탁.
디아블로가 옥좌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들이며 읊조렸다.
“아니 그런가? 바알. 내 생각에는 말이야…….”
뒷말을 흐린 디아블로가 눈을 돌려 악의 제전 중앙을 응시했다.
몽환의 기억이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 디아블로의 눈이 엘리스를 비추었다.
그러자.
“태초의 그릇을 이용해 우리가 알 수 없는 방법을 사용했다.”
바알이 낮게 일렁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역시 디아블로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위 서열의 대악마가 스스로의 힘으로 판데모니움의 균열을 뚫고 빠져나간다?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판데모니움에 쳐진 장벽은 바알도, 다른 두 삼천마도 뚫을 수 없었다.
아니, ‘그분’조차도 시스템의 장벽을 당장 없애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자신이 모르는 태초의 힘.
태초의 그릇이 지닌 힘이라면?
“안드레알푸스는 태초의 그릇을 품은 숙주와 협력하고 있었던 건가!”
-쿠구구!
바알에게서 다시금 강렬한 분노가 서린 어둠이 뿜어져 나왔다.
“도대체 언제부터!?”
바알이 다시 분노를 드러내자, 대악마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침묵했다.
그리고.
‘다행히…… 계획대로 잘 되어가는 듯 보이는구나.’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침음을 삼키며 읊조린 대악마.
알레인이 악의 제전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관찰하며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