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화
처용에게서 뿜어져 나온 붉은 신력의 파동이 퍼지자.
-쿠구! 쩌저적!
공동 내부 벽에 금이 가며 흔들렸다.
그 모습에 조커가 재밌다는 듯, 미소를 짓고는.
“오우, 많이 화났나 봐. 브라더? 크크.”
도발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브라더가 그렇게 반응하는 거 보니까. 진심으로 욕심이 좀 나는데?”
조커의 계속되는 도발에 결국.
-감히 내 것을 탐해?
-쿠구구!
처용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붉은 신력이 맹렬한 기세로 조커에게 돌진해 나갔다.
“어이구.”
-우우웅!
그에 대비해 조커에게서도 짙은 어둠이 뿜어져 나왔다.
-쿠구구!
붉은 신력과 짙은 어둠이 마찰을 일으키며 서로 충돌했다.
서로 팽팽한 듯 보였지만.
-이 건방진 놈, 내가 직접 근원 속에 묻어 주마!
강렬한 기세로 휘몰아치는 붉은 신력이 조커의 어둠을 서서히 밀어내고 있었다.
“열 받으면 눈에 뵈는 게 없는 건 여전하군. 브라더?”
조커는 기세에 밀리고 있음에도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
“지랄한다.”
-우드드!
처용이 자신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신력을 잡아채며 말했다.
“내 것을 탐하지 말라고? 어디서 개소리야.”
-우우웅!
처용의 손에 잡힌 붉은 신력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다시 끌려오기 시작했다.
-너!
붉은 신력이 자신을 방해하려는 처용에게도 강렬한 기세를 내뿜었다.
그러자.
“얌전히 자던 잠이나 자라. 내용도 안 보고 저 녀석이 내민 계약서에 확 사인해 버리기 전에.”
처용이 손에 쥔 붉은 신력을 더 거세게 쥐며 읊조렸다.
여기서 파편이 더 날뛰는 것을 예상한 처용이 신력을 끌어 올리며 대비하려 했지만.
-스르르.
강렬한 기세를 내뿜던 붉은 신력이 이내 가라앉고 처용의 손아귀에 되돌아왔다.
처용이 순순히 말을 듣는 파편의 태도에 의문을 표할 때.
-스르르.
조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의 기세 역시 확,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탁.
조커가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덮으며 가면을 잡았다.
동시에.
-콰드드-득.
손에 힘을 주어 가면을 벗어내기 시작했다.
흑백색의 하회탈 가면과 함께, 검고 끈적해 보이는 어둠이 얼굴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러자.
“당신 역시 계약을 위반하려 했습니다.”
-스르륵.
얼굴을 덮던 어둠이 마저 걷어지고 닥터, 하워드의 얼굴이 드러났다.
“조커.”
하워드가 자신이 벗은 가면을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읊조리듯 말하자.
-스르르륵.
흑백색의 하회탈 가면이 하워드의 손을 벗어나 허공에 떠올랐다.
-슈르륵.
동시에 하워드가 입고 있던 연미복이 어둠으로 화하더니 가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허공에 공처럼 뭉쳐진 어둠에 가면이 씌워진 듯한 모습이었다.
가면이 하워드에게서 따로 떨어져 나가자.
-쩌저적.
가면의 입 부분이 길게 찢어지듯 열리더니 금빛으로 번쩍이는 이빨이 드러났다.
“재밌자고 친 장난에 너무 정색하지 말라고 Bro.”
하워드에게서 떨어져 나온 가면, 조커가 미소를 드러내며 말했다.
“지배당하고 있던 게 아니었나? 하워드.”
그 모습을 본 처용이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지배라니, 우리는 계약을 맺은 파트너라고 Bro.”
처용의 말에 대답한 것은 조커였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서로가 조건을 걸고 맺은 계약으로 인해 협력하는 관계라는 것.
‘무조건적으로 한쪽이 지배하는 관계가 아니었다는 건가?’
처용이 조커의 말에 속으로 생각할 때.
“단순히 숙주로 깃들기만 했을 뿐인데도, 브라더가 영향을 받을 정도라…….”
조커가 처용을 바라보며 의문을 담아 읊조렸다.
“브라더는 나만큼이나 개성이 강할 텐데, 참 신기하군.”
“이 녀석이 나한테 영향을 받았다고?”
처용이 조커의 말에 의문을 담아 묻자.
“숙주가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는 그에 더 영향을 받지.”
-스르륵.
조커가 어둠을 일부 분리해 내 팔과 비슷한 형태를 만들어 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이 Bro에게 영향을 받아 ‘진지함’이 생긴 것처럼 말이야. 크크.”
엄지손가락으로 하워드를 가리키며 조커가 말하자.
“이 녀석이 내 영향을 받았다라……?”
처용이 무언가를 생각하듯 읊조리며 말했다.
내면에 깃든 크타니드의 파편.
크타니드의 ‘분노’라는 감정을 상징하는 존재.
처용은 조커의 말과 반대로 자신이 파편에 영향을 받았다 생각하고 있었다.
심상 세계가 이전과는 다르게 확 변한 이유.
스스로의 마음가짐이 이전과는 다르게 변한 이유.
처용은 그 이유가 복수하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파편의 영향도 컸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가 있었다.
처용이 조커의 말을 생각할 때.
-쿠구구!
고분고분 있던 붉은 신력이 다시금 옅은 파동을 흩뿌렸다.
마치, 조커의 말을 인정할 수 없다는 듯한 분위기.
“크크크, 인정하긴 싫어도 영향을 받은 건 사실이잖아? 브라더.”
조커는 자신과 같은 존재가 보이는 모습을 보고 나지막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나 이 녀석과 같은 존재가 더 있나?”
처용은 파편에 대한 생각을 그만두고 조커를 향해 물었다.
조커와 같은 존재가 더 있고 만약 적으로 나타난다면 대비가 필요했으니까.
그런 처용의 질문에.
“아니, 내가 장담하는데, 지금 근원 밖에 있는 이들은 나와 Bro에게 깃든 브라더가 유일할 거야.”
조커가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의문이군, 대체 브라더는 무슨 수로 근원 밖으로 나온 거지?”
“너는 어떻게 나온 거냐?”
처용이 조커의 의문에 역으로 물었다.
자신에게 어떤 경로로 파편이 깃들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최후의 생존자였던 처용이 내지른 자폭.
그 최후의 일격을 온몸으로 막아낸 악의 종주.
처용의 자폭을 막아낸 직후, 크타니드가 보였던 이상 징후.
지금 처용의 내면에 깃든 파편은 그 과정에서 흘러들어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즐거움의 파편, 조커는?
무슨 수로 악의 종주에게서 벗어났고 어떻게 하워드에게 깃들었단 말인가?
“파더가 소멸할 때, 퍼지는 작은 조각을 타고 빠져나왔지. 크크.”
조커가 말한 ‘아버지’는 다름 아닌 태초신이었다.
즉, 조커는 태초신이 소멸하면서 퍼져 나간 태초의 조각, 그중 하나에 깃들어 빠져나간 것이다.
“나는 개성이 강해서 말이지? 절대적인 의지에 의해 내가 통제되는 걸 원하지 않거든.”
“조크-크타니드.”
처용이 조커가 말한 절대적인 의지가 누구인지 짐작하며 말하자.
“정답이야 Bro.”
조커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리고.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 나야 개성이 강하니까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지만…… 브라더는 아니었을 텐데?”
다시금 의문을 가졌다.
“분명, 그때 빠져나온 건 나 하나였는데 말이야…….”
조커, 즐거움의 파편은 태초신이 소멸할 때, 퍼지는 조각 중 하나에 깃들어 빠져나왔다.
그 당시 근원에서 탈출한 태초의 파편은 자신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형제가 다른 숙주에 깃들어 있는 상황.
지금 자아가 없는 형제들은 ‘조크-크타니드’라는 절대적인 의지에 묶여 있었다.
도대체 무슨 수로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단 말인가?
그것이 의문이었다.
“……이 녀석이 답해줄 것 같지는 않군.”
처용은 정답을 알고 있음에도 말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그러자 조커 역시 고집이 강한 형제에게서 답을 듣는 건 포기했는지 더 묻지 않았다.
그때.
“레나는…… 어떻게 된 겁니까?”
하워드가 엘리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가 지금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조커를 통해 알고 있었다.
악몽에 의해 만들어진 미래의 레나이자.
지금의 레나를 지배하는 존재였다.
그렇다면, 본래의 레나는?
하워드의 걱정이 일렁이는 물음에.
“걱정하지 마라. 여기, 나와 같이 잘 있으니까.”
엘리스가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얼굴을 바꾼 건가? 하워드.”
처용이 하워드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물었다.
로스차일드 가주가 전해 주었던 정보 속 하워드의 얼굴과 지금 하워드의 얼굴이 많이 달랐으니까.
그런 처용의 물음에.
-딸각.
하워드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보였다.
그러자.
-스르르륵.
옅은 회색빛이었던 그의 머리가 검게 물들기 시작했고 얼굴의 형태가 조금 변하기 시작했다.
서양인의 느낌이 강했던 그의 얼굴이 처용에게 친숙한 동양인의 느낌으로 변했다.
이윽고 나타난 얼굴은 처용이 로스차일드 문서에서 본 하워드의 얼굴과 흡사했다.
정확히는 문서 속 하워드가 성장했을 때의 모습과.
“그 안경…… 신물이었군.”
처용이 하워드가 손에 든 안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통찰의 눈으로도 하워드의 변장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는지.
그의 정보를 곧장 통찰해 내지 못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니알라 님이 주신 건가?”
처용이 하워드의 성좌이자 태초의 마수, 니알라 크타니드를 언급하자.
“……그분을 존중해 주신다는 말은 사실이었군요.”
하워드가 놀람을 드러내며 말했다.
처용은 거대 성운의 성좌들에게조차 함부로 고개를 숙이거나 존중을 표하지 않는 이였으니까.
그때.
-파지직.
엘리스에게서 검은 전류가 튀더니.
“윽.”
작은 침음을 토해냈다.
그리고 일그러진 얼굴을 드러내며 하워드를 노려보더니.
-탁!
곧장 하워드에게 달려 나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너…… 너, 너! 진짜로 살아 있었으면서-!”
엘리스를 억누르고 튀어나온 레나가 거친 목소리를 토해 냈다.
당장 쏟아내고 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은 분위기.
그러나.
-파지직.
레나에게서 다시 검은 전류가 피워 올랐고.
“이런…… 많이 흥분했나 보군.”
레나를 억누른 엘리스가 작은 한숨을 섞어 말했다.
엘리스가 레나에 의해 잡혀 있던 하워드의 멱살을 놔 주자.
“잘 있는 것 같아 다행이군요.”
하워드가 가운을 고쳐 입으며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파지직.
지금도 엘리스에게서 옅은 전류가 계속 튀는 중이었다.
아직도 할 말이 많은 듯한 레나가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차근차근 설명해 줄 테니, 지금은 좀 가만히 있어라.”
엘리스가 흥분하는 자기 자신을 향해 진정하라는 듯 말했다.
그리고.
“군말하지 말고 이 녀석에게 협력하는 게 좋을 거야. 하워드.”
뒤에 있던 처용을 눈짓하며 하워드를 향해 말을 이었다.
“네 계획은 실패할 테니까.”
확신 가득한 엘리스의 말에.
“당신이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워드가 경계심이 일렁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보아하니, 니알라의 분신인 안드레알푸스도 들킨 것 같은데?”
엘리스가 하워드를 향해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중요한 정보를 언급했다.
판데모니움 서열 65위, 변화의 대악마 안드레알푸스.
의회주 중 하나인 닥터의 성좌로 알려진 존재.
그런 대악마의 진짜 정체는 다름 아닌 니알라 크타니드의 분신이었다.
다른 이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주 정교하게 만든, 또 하나의 자신이라 할 수 있는 분신.
그 분신의 역할은 바로 ‘더미’였다.
판데모니움을 탈출하려는 니알라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만들어 놓은 안전장치였다.
문제는 그 안전장치가 나베리우스에 의해 들켜 버렸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하워드도 배신자로 낙인찍혀 즉결 처분까지 받았다.
그 덕에 조커까지 모습을 드러냈고 이젠 완전히 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더 이상 마인들 틈에 섞여 정보를 얻기가 힘들어진 상황.
“이런 상황에서 네 성좌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대처할 수 없다.”
엘리스가 중요한 문제를 언급하자, 하워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침묵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으니까.
하워드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아무리 한처용과 내가 연막을 치고 바알의 시선을 돌린다 해도, 까딱 잘못하면 네 성좌는 죽는다.”
엘리스가 쐐기를 박듯 확신 가득한 목소리로 단언하며 말했다.
“으음……!”
하워드가 고민하는 듯, 침음을 흘리고는 조커를 눈짓했다.
그런 하워드의 모습을 잠시 바라본 엘리스는.
“선택해라. 조커. 정해진 운명대로 크타니드의 일부가 될지, 아니면…….”
이번엔 조커를 바라보며 물었다.
“새로운 즐거움을 개척할지를…….”
조커가 엘리스의 말에 잠시 침묵해 보이고는.
“……이거, 이거 선택권이 없는 거나 다름없잖아. Bro.”
씨익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선택할 수밖에 없는 선택지라! 너무나 재미있군! 하하하!”
조커의 입에서 큰 웃음이 터졌다.
엘리스의 제안을 수락한다는 뜻이었다.
“한처용, 당분간 대악마의 시선을 끌어주마. 대신.”
조커의 대답을 들은 엘리스가 이번엔 처용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에스라 대륙을 지배하는 빌어먹을 새끼들을 모조리 짓밟아 버려.”
엘리스의 목소리에는 원한이 가득 응어리진 듯, 거친 느낌이 가득했다.
그녀가 말하는 ‘에스라 대륙을 지배하는 존재’들은 다름 아닌 그곳을 지배하는 성운이었다.
처용은 엘리스가 왜 에스라 대륙에 자리한 성운에게 분노를 표출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그놈들 전부 쓸어 버릴 생각이었다. 학살의 마녀.”
처용은 그 제안이 너무나도 마음에 든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에스라 대륙을 지배하는 성운은 순혈자들이었다.
악의 종주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이들.
처용은 에스라 대륙의 상황을 정찰하자마자.
엘리스의 말대로 그 성운 전체를 모조리 짓밟아 버릴 생각이었다.
회귀 전, 그들이 저지른 배신으로 인해 벌어진 재앙들.
그로 인해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과 동료들.
그들이 처용에게서 수많은 것들을 앗아간 만큼!
이번엔 처용이 그들이 가진 모든 것들을 빼앗고 부숴 버릴 생각이었다.
“앞으로 어떤 개판이 일어날지, 벌써 즐거워지는군! 하하하!”
조커가 처용과 엘리스를 바라보며 기대감 어린 미소를 지었다.
하워드 역시 조커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지금 이 순간, 서로 뜻이 맞는 이들의 동맹이 맺어졌다.
이는 절대 단순한 동맹이 아니었다.
엘리스와 처용 단둘에 불과했지만.
이 둘이 가진 전력을 비교해 보면 천군만마(千軍萬馬)나 다름없었다.
‘우리의 파멸을…… 비극을 피할 수 있다!’
하워드가 끓어오르는 고양감에 주먹을 쥐어 보이고는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읊조렸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