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화
엘리스가 바알을 도발하고 처용이 그녀의 의도를 파악한 순간.
-파아아! 쿠구구!
제단에서 강렬한 마기의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그 파동의 영향으로 공동이 무너질 듯 크게 흔들렸다.
동시에.
-화아아!
제단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은 안개가 사방으로 확 퍼져나갔다.
“제길! 방어 스킬을 펼치고 진형을 갖춰! 함부로 접근하지 마!”
커맨더가 타격대의 헌터들을 향해 급히 소리쳤다.
타격대의 헌터들이 일제히 뒤로 조금 물러난 순간.
“월 벙커.”
-쿵! 쿵! 쿠궁!
커맨더가 헌터들의 앞에 두꺼운 벽을 나열하며 방어 장벽을 세웠다.
헌터들을 보호하는 임시 벙커 덕에 파도처럼 덮쳐드는 검은 안개가 저지되었다.
“젠장, 이대로면……!”
커맨더가 전장의 상황을 살피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거칠게 뿜어져 나오는 검은 안개에 의해 더 전진할 수 없는 상황.
이대로면 마인들이 탈출하는 것을 그저 구경만 해야 할 판이었다.
커맨더가 차선책을 생각할 때.
“우선 방어에 집중하십시오.”
-쿠구구!
처용이 신력과 강기를 동시에 내뿜으며 앞으로 나섰다.
동시에 고개를 들고는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엘리스와 바알을 응시했다.
제단 위에서 거친 마기를 내뿜고 있는 거대한 검은 해골.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콰드드득!
바알이 마기를 뭉쳐 거대한 검은 손을 만들어 내고는 엘리스를 향해 내뻗었다.
위협적인 공격이 다가오는데도 엘리스는 평온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거대한 해골의 손아귀가 엘리스를 움켜쥘 듯, 다가가는 순간.
“항마의 화신 – 명환신장.”
-샥!
바알과 엘리스의 사이에 항마의 화신을 사용한 처용이 나타났다.
“명환십육장!”
항마의 화신 주변에 떠오른 열여섯 개의 새하얀 손들이 바알이 내뻗은 손을 향해 일제히 쇄도하자.
-쿠구구! 쿠구!
어두운 마기와 파마의 신력이 서로 충돌하며 굉음을 자아냈다.
바알이 엘리스를 향해 뻗었던 손이 뒤로 밀려나자.
[……한처용.]
바알이 굉장히 못마땅한 듯한 목소리로 처용을 노려보며 읊조렸다.
“뭔진 모르겠지만, 상당히 곤란한 상황인 듯 보이는데?”
처용은 다른 이들은 모두 무시한 채, 바알만을 노려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알레인이 말한 대로 하계종답지 않은 힘이구나.]
-쿠구구!
바알이 제단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의 기운을 더욱 끌어 올리고는.
-쩌저저적!
거대한 팔을 추가로 세 개나 더 만들어 내었다.
짧게 처용과 충돌한 결과, 인간이라 하여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라 판단했다.
무려 마기를 태워 버리는 파마의 신력을 지닌 인간.
천교에게서 신법을 강탈한, 혈선이라 불리는 강력한 성좌의 신관.
역사에 전례가 없는 이단이라 불려 마땅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바알은 눈앞에서 자신을 방해하는 처용을 경계하는 것이 아닌.
[그런 네놈조차도, 저 간악한 것에게 이용당하고 있었단 말인가?]
뒤로 크게 물러나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엘리스를 노려보았다.
그동안 치밀하게 세워 두었던 계획들이 무너진 이유.
서로 분열되고 파국으로 향했어야 할 성운들이 생각처럼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
지금 자신을 방해하는 파마의 신력을 지닌 인간, 한처용까지.
바알은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이 모든 상황이.
[전부! 네년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장난감에 불과했구나!]
그동안 뒤에서 암약했으리라 판단되는 존재.
태초의 그릇을 품은 숙주가 저지른 짓이라 생각했다.
[네년이 가진 모든 것을 삼켜 주마!]
-쿠콰콰!
바알이 분노를 표출하듯 거대한 네 개의 팔을 엘리스에게 뻗었다.
그러나.
“항마의 화신.”
-샥!
이번에도 처용이 바알의 앞을 가로막았다.
“반탄신장!”
항마의 화신이 오른손을 내뻗자.
-우우웅! 쿠구!
손 앞에 파마의 신력이 뭉치며 거대한 손바닥이 형성되었다.
이윽고 바알이 내뻗은 네 개의 손과 항마의 화신 앞에 소환된 반탄신장이 충돌했다.
-쿠구! 쿠구구!
칠흑처럼 어두운 마기와 파마의 신력이 격렬하게 충돌하며 폭음을 일으켰다.
[멍청한 것! 당장 꺼져라!]
-쿠우우!
바알이 처용을 향해 분노를 내지르며 마기의 힘을 더욱 끌어올리자.
-쩌저적! 쿠구!
항마의 화신으로 만들어 낸 반탄신장에 금이 가기 시작하며 처용이 뒤로 밀려났다.
“……마기 하나는 무식할 정도로군.”
처용이 혀를 차며 인상을 찌푸렸다.
온전한 화신체도 아닌, 분신에 불과한데도 이 정도 위력.
과연 ‘거대한 어둠’이라 불릴만한 대악마였다.
“부여 - 백염.”
처용이 더 밀려나지 않기 위해 두 손을 합장하고 백염의 힘을 끌어올렸다.
-화르륵. 스스.
처용의 손아귀에서 뻗어 나간 백염의 힘이 항마의 화신을 뒤덮으며 이글거렸다.
그 영향으로 금이 가며 부수어지던 반탄신장이 원래대로 복구되었고.
-쿠구!
바알의 힘에 더 밀리지 않게 되었다.
처용은 여기서 더 그치지 않고.
“항마의 화신 – 백염신장.”
-화르륵! 화륵!
항마의 화신 주변에 하얗게 불타오르는 열여섯 개의 손이 만들어졌다.
-화륵! 쐐에에-!
새하얗게 불타오르는 손들이 바알을 향해 일제히 돌진해 나가자.
[귀찮은 것들이!]
-콰콰쾅!
바알이 내뻗었던 거대한 검은 손 중 두 개를 뒤로 빼내어 크게 휘둘러 쳐 내었다.
거대한 마기와 이에 맞서는 파마의 신력, 백염이 서로 충돌하며 폭음이 울려 퍼졌다.
그 결과 처용과 바알이 동시에 물러났다.
[네놈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 세계를 지켰다 생각하느냐?]
바알이 분노가 일렁이는 목소리로 처용을 향해 읊조렸다.
[이용당할 줄만 아는 멍청한 벌레 놈들!]
이번엔 인간들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며 네 개의 거대한 팔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콰지직! 콰직!
제단에 접근하려던 섀도우 헌터들이 바알의 팔에 가격당해 모조리 나가떨어졌고.
-까가각! 까강!
커맨더가 세운 벙커가 크게 갈라지며 뒤로 밀려났다.
“제길! 아머 벙커!”
-쿵! 쿵! 철컥!
헌터들과 함께 뒤로 한 걸음 더 물러난 커맨더가 급하게 벙커를 보수했다.
동시에.
“용암 방패!”
“프로텍트 실드!”
현아를 포함한 타격대의 헌터들 중 일부가 방어 스킬을 사용해 커맨더를 보조했다.
무려 대악마 서열 1위가 발휘하는 강력한 어둠에도 타격대의 헌터들은 잘 버텨 내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오히려 바알의 심기를 건드린 듯.
[이 질긴 벌레 같은 하계종들이! 전부 어둠 속에 수장될지어다!]
-쿠구구!
바알이 네 개의 팔을 위로 뻗으며 마기를 폭포처럼 분출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매번 악의 신도들을 방해하는 섀도우 헌터라는 놈들도
신계의 성좌들을 따르는 하찮은 인간들도.
인간에 불과했음에도 위협적인 힘을 발휘하는 한처용도.
모든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단 그들이 자신의 계획을 망가뜨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금 자신의 계획을 방해하는 모든 이들은 그저 꼭두각시에 불과했으니까.
뒤에서 암약하는 간악한 존재에 의해 자신들이 조종당하는 줄도 모르는 머저리들.
그 머저리들에 의해…… 자신의 계획이 무너졌다.
바알은 이 사실이 너무나도 치욕스러웠다.
차라리 자신과 대등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대신급 성좌라면 적으로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황을 보아하니, 그 잘난 대신급 성좌들도 모두 이용당한 듯 보였다.
“크크크. 많이 열 받았나 봐?”
지금 허공 위, 자신을 피해 멀리 떨어져 웃고 있는 인간.
그릇의 숙주에게 앞서 모든 이들이 이용당하고, 조종당하고 있었다.
고작 인간 하나가 벌인 계략에 의해 거대한 어둠이라 불리는 자신이 당했다.
바알은 이 사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쿠구구!
분노에 휩싸인 바알이 분출한 거대하고 불길한 마기가 거꾸로 오르는 폭포처럼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가라앉아라.]
바알의 명령이 울린 순간.
-쏴아아!
허공으로 솟구친 묵직한 중량의 어둠이 지면으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마치, 이 공동에 있는 이들을 어둠에 압사시키려는 듯 보였다.
“이런…….”
처용이 바알의 권능을 보며 침음을 흘렸다.
판데모니움 서열 1위, 삼천마 바알의 권능.
그가 가진 권능은 다른 대악마들이나 성좌들에 비해 단순한 편이었다.
거대한 어둠의 대악마라 불리는 바알.
그의 권능은 그가 가진 이명대로 ‘거대한 어둠’ 그 자체를 다루는 것이었다.
바알이 발휘하는 압도적인 힘, 거대한 어둠.
그 어둠 앞에서는 태양을 구성하는 화염도, 세상을 비추는 빛도, 모조리 짓눌리며 잡아먹힌다.
거대하고 압도적인 어둠을 다루는 악마들의 지배자.
그것이 바알이 발휘하는 권능이자 그를 상징하는 힘이었다.
제단의 힘을 이용해 분신으로 강림했음에도 불구하고.
-쿠구구!
그가 다루는 어둠이 넓은 공동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바알의 권능이 발현되자.
“항마의 화신 – 파마의 빛.”
처용이 두 손을 모으며 파마의 힘을 끌어올렸다.
-우우웅!
항마의 화신이 황금빛을 뿜어대며 어둠 속에 삼켜지는 주변을 밝게 비추기 시작했다.
이윽고 처용이 합장하던 손을 풀자.
“여명(黎明)!”
-파아아!!
극한으로 뭉쳐진 파마의 신력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쿠구구! 쿠구!
세상을 집어삼키려는 어둠과 그 어둠을 몰아내려는 파마의 힘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네-이 놈!]
“하아아압!”
-쿠구! 쿠구-쿠궁!!
칠흑같이 어두운 마기와 파마의 힘이 격돌한 결과, 공동 내부가 거침없이 흔들렸다.
바알과 처용이 팽팽하게 맞설 때.
[……거대한 어둠이시여.]
-샥.
바알의 뒤로 물러났었던 나베리우스가 나타나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제…… 길!]
바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침음을 흘렸다.
그 순간.
“헬-카이트! 디스트로이어!!”
-콰콰쾅!!
제단의 외곽에서 검은 화염이 크게 솟구치며 집행자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쿠구!
제단의 일부가 무너질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는 검은 화염.
그때 폭발한 화염 중 일부가 일렁이더니.
-화륵. 파아아!
검은 화염을 거두며 조커가 나타났다.
집행자가 발휘한 스킬로 인해, 뒤로 물러선 듯 보였다.
“끝까지 방해하려 했건만…….”
조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침음을 흘리고는.
“이번엔 Bro가 이겼군. 축하한다고 해야 하나? 크크.”
자신을 밀어낸 집행자와 그 옆에 있는 아스모데우스의 분신을 보며 작은 조소를 흘렸다.
“이번이 끝이라 생각하지 마라! 조커!”
집행자는 그런 조커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고는.
“남은 놈들 모두! 제단 중앙으로 뛰어들어라!!”
모두가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고함을 내질렀다.
그 외침에 제단 근처에서 섀도우 헌터들을 상대로 시간을 벌던 마인들이 뒤로 돌아 달려 나갔다.
살아남은 거의 모든 마인들이 제단 중앙에 열린 게이트로 향했고.
-스르륵. 스륵.
상급 마인들, 의회주, 마지막으로 집행자가 게이트로 뛰어들었다.
살아남았던 모든 마인들이 사라지고 아스모데우스와 나베리우스 또한 분신을 해제하며 사라졌다.
모두가 사라지고 바알 혼자 남자.
[네놈들 모두 이 자리에 묻어주마.]
-쿠구구!
바알이 손아귀를 움켜쥐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주변의 어둠을 끌어모았다.
그러자.
-우웅! 쿠구구!
한 지점으로 뭉쳐진 어둠이 격렬한 파동을 뿜어대며 주변을 진동시켰다.
마치,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모습.
“이 무식한 놈이-!”
처용은 바알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즉각 알아채고는 대비를 준비했다.
어둠을 손아귀에 극한으로 압축시켜 폭발시키려는 것.
그러면 공동이 무너지는 것은 물론, 이 주변 일대가 어둠에 잠겨 버릴 것이다.
-스르르!
처용이 파마의 신력을 끌어올리며, 대비책을 준비하려는 순간.
“내가 구경만 할 줄 알았나? 바알.”
-촤라라라!
엘리스가 네크로노미콘의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며 말했다.
동시에.
“란수즈. 투리샤즈. 판데모니움-.”
판데모니움의 언어를 외기 시작했다.
악몽 속, 어린 레나가 바알을 소환하기 위해 했었던 말과 거의 비슷한 주문.
“오틸라르. 바알.”
엘리스의 마지막 말이 끝난 순간.
-스르륵. 스륵.
그녀의 주변에 떠 있던 검보라색 문자들이 빛을 발했다.
그러자.
-쩌저저적!
바알의 분신이 조금씩 갈라지며 모래처럼 흩날렸고.
-스르륵.
제단 중앙에 있던 검은 게이트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네크로노미콘을 이용해 대악마의 분신을 역소환시킨 것.
[나 거대한 어둠이 네년 뜻대로 움직일 것 같으냐!]
-쿠구구!
바알이 역소환을 거부하듯, 분신에 어둠을 끌어모아 버티기 시작했다.
“칫.”
엘리스가 혀를 차고는 네크로노미콘에 힘을 더했다.
바알을 역소환시키려는 엘리스와 이를 거부하는 바알이 서로 힘 싸움을 하던 도중.
“날 잊으면 곤란하지.”
-샥!
처용이 바알의 눈앞에 나타났다.
“항마의 화신 – 명환신장.”
-우웅! 우우웅! 우웅!
항마의 화신 주변에 새하얀 빛을 뿜어대는 삼십이 개의 손이 만들어졌고.
“명환삼십이장!”
-쐐에엑!
일제히 바알을 향해 쏟아졌다.
안 그래도 역소환에 저항하며 버티고 있던 와중에 쏟아진 공격.
그 결과.
-쾅! 콰-쾅! 쾅! 쿠구!
처용이 만들어 낸 명환신장들이 바알의 분신을 맹렬하게 타격했고.
-우드득! 콰직!
여기저기 뼈가 부러지고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며 바알의 분신이 무너졌다.
분신을 구성하던 마기들이 검은 모래처럼 흩날리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슈르르르!
제단 위에 열린 게이트가 부서진 바알의 분신들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듯, 흡수했다.
마지막으로.
“절권 - 강격!”
-우드득!
처용이 주먹을 쥐며 손을 들어 올리자, 항마의 화신이 처용을 따라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콰쾅!
시커먼 두개골, 바알의 안면을 거세게 가격했다.
-쩌저적!
유리가 깨지듯, 실금이 빠르게 번지며 해골의 머리가 깨져 나갔고.
[……이 일은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
바알이 분노가 가득 응축된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며 게이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분신이 역소환되는 와중에도.
[반드시 네년을 잡을 것이다.]
바알은 자신의 분신을 부순 처용을 노려보는 것이 아닌, 엘리스를 끝까지 노려봤다.
거대한 어둠의 대악마가 보이는 흉흉한 집착에.
“징그러우니까. 당장 꺼져!”
-탁!
엘리스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네크로노미콘을 탁 접으며 소리쳤다.
결국.
-슈르르륵! 파아아…….
바알은 더 저항하지 못하고 게이트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