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화
뉴델리 심층부, 마인들의 비밀 시설에 처용이 도달하기 조금 전.
-위이잉.
처용과의 대화를 끝낸 닥터가 병실 문을 열며 나타났다.
“제길…… 무슨 그런 괴물 같은.”
닥터가 곤란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읊조렸다.
겉으로 봐서는 처용을 상대로 상당히 고전한 듯한 모습이었다.
“표정이 좋지 못하군?”
집행자가 닥터를 향해 묻자.
“제 결전기를 힘으로 때려 부숴 버리더군요. 다른 곳으로 보내 버리긴 했는데…… 얼마나 시간을 벌지.”
닥터가 처용과 있었던 일을 대충 지어내며 말했다.
그리고.
“차원 게이트 준비는 얼마나 진행되었습니까?”
다른 의회주들을 향해 가장 중요한 질문을 건넸다.
지구 곳곳에서 활동하는 마인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든 이유.
다른 세계의 마인들과 합류하라는 대악마의 지시 때문이었다.
때문에 의회주들과 상급 마인들이 힘을 모아 다른 세계로 향하는 게이트를 만들고 있었다.
“준비는 거의 다 되었다.”
집행자가 공동의 중앙, 제단처럼 보이는 장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기괴한 문양을 그리며 마기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제단.
그 위에는.
-우우웅!
옅은 진동을 토해 내고 있는 검은 균열이 자리해 있었다.
마치 허공에 금이 간 듯 보이는 균열.
“열리자마자 바로 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닥터가 제단 위의 균열을 바라보며 말할 때.
“그 전에 할 일이 있지.”
-스르륵.
제단 위에 있던 의회주 릴이 아래로 내려오며 말을 이었다.
“우리한테 할 말 없나? 백병원.”
적대감이 일렁이는 고혹적인 릴의 목소리에.
“……당신이 날 싫어하는 건 알지만, 때와 장소 좀 가리시죠.”
닥터가 짜증 어린 목소리를 내며 날카롭게 말했다.
의회주들 중 유독 닥터를 꺼리고 경계하는 이가 바로 릴이었다.
평소의 닥터였으면 그저 너스레 넘겼겠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애처럼 구실 겁니까?”
지금은 다른 차원과 연결되는 게이트를 여는 매우 중요한 일을 진행 중인 상황이었다.
닥터가 핀잔 어린 말로 경고를 담아 말하자.
“이런 중요한 상황이니까.”
릴이 살기를 섞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감찰관님께서 말씀해 주셨다. ‘변화의 대악마’가 사라졌다고.”
판데모니움 서열 65위, 변화의 대악마 안드레알푸스.
닥터가 모시는 대악마로 알려진 존재였다.
릴의 말에 닥터가 알 수 없다는 듯, 의문을 자아내며 고개를 기울여 보였다.
그때.
[미안하다. 내가 혹시 몰라 만들어 놓은 더미가 나베리우스에게 들킨 것 같아.]
닥터의 머릿속에 알레인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그녀의 말을 들은 닥터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질 뻔했지만.
“……제 성좌님께 무슨 문제가 생긴 겁니까?”
겉으로 표하지 않고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모습.
그런 닥터의 태도에.
“잭이 남겨준 자료가 아니었으면 나도 속아 넘어갈 뻔했어.”
릴이 인상을 세차게 구기며 읊조리듯 말했다.
로스차일드 저택에서 제시카에 의해 사망한 잭.
그는 죽기 전.
-닥터가 첩자일 가능성이 있다.
릴에게 ‘태초의 그릇’과 ‘숙주’에 대한 정보를 이야기함과 동시에, 닥터를 의심한다 말했었다.
닥터가 맡은 임무는 총 세 가지.
강한 어둠 속성을 품은 자연 발생 마수를 포획할 것.
구하기 힘든 특별한 에너지들을 수집할 것.
마지막으로, 강력한 어둠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찾을 것.
이렇게 세 가지였다.
이 모두 중요한 실험에 사용될 재료들이었다.
특히, 마지막의 경우에는 아티팩트든, 살아 있는 생명체든 상관이 없었다.
그저 에너지만 담을 수 있으면 충분했다.
잭이 태초의 그릇을 지닌 숙주가 마녀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닥터에게 임무를 맡긴 이유가 있었다.
바로 사고가 일어날 것을 대비한 대책 마련이었다.
마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즉시 태초의 그릇을 적출해 다른 숙주에게 이식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나.
-닥터가…… 숙주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다.
닥터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한 잭이 작은 의심을 품었다.
마인답지 않게 타인에게 살가운 태도를 보이는 특이한 성격의 의회주.
그런 닥터가 유독 마녀를 챙기는 모습을 종종 보였었다.
물론, 혹시 마녀가 잘못될 것을 대비해 그녀를 잘 챙기라는 지령을 내리긴 했었다.
하지만, 잭이 객관적으로 봤을 때.
닥터의 행동은 단순 지령에 충실하다기엔, 유독 마녀에게 많은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였다.
세 번이나 죽기 직전까지 갔었던 마녀를 살린 것은 분명 훌륭했지만.
-뭔가 부자연스러워.
잭은 그런 닥터의 행동이 무언가 꺼림칙했다.
게다가 마녀가 두 번째 죽을 위기에 처하고 살아남았을 때, 그녀의 클래스가 변한 일도 있었다.
닥터는 그녀를 살리기 위해 영약을 사용한 탓이라 말했지만.
마인이 다른 마인을 살리기 위해 귀한 영약을 사용한다?
단순 의무에 충실하다고 보기에는 무언가 이상했다.
결국, 그 의심 어린 생각을 자신의 성좌, ‘감찰관’에게 이야기했고.
-내가 안드레알푸스를 은밀히 감시해 보겠다.
자신의 성좌에게서 닥터의 성좌를 감시해 보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리고 나베리우스가 안드레알푸스를 은밀히 조사한 결과, 수상한 행적을 찾아내었다.
게다가 더욱 수상쩍게도, 나베리우스가 증거를 발견한 순간, 안드레알푸스가 사라졌다.
나베리우스는 이 사실을 즉시 바알에게 알렸고 지상에도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이미 그의 신관인 잭은 사망한 상태였다.
때문에.
“감찰관님께서 방금 해주신 말씀이 있다.”
나베리우스는 우선 아스모데우스와 그녀의 신관에게 이 일을 전했다.
동시에, 안드레알푸스의 신관, 닥터를 잡을 것을 명했다.
“배신이 들통난 안드레알푸스가 판데모니움에 균열을 뚫고 도망쳤다고.”
릴의 말과 동시에.
-샥.
검은 로브로 얼굴을 가린 세 명의 의회주가 닥터를 포위하며 나타났다.
“……저는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변화의 대악마님은 제 말에 응답하지도 않으시고…….”
닥터가 착잡한 표정을 드러내며 읊조리고는 두 손을 들었다.
“얌전히 협조할 테니, 살기 좀 거두어 주시죠.”
“미안해서, 어쩌나~?”
협조적인 닥터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릴이 살기를 거두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방금 새로 받은 명령이 네 ‘처분’으로 바뀌었어.”
릴의 말이 끝난 순간.
[당장, 안드레알푸스의 신관을 죽여라.]
-스르르.
제단 위로 감찰관이라 불리는 대악마.
판데모니움 서열 24위 나베리우스의 상반신이 나타나며 말했다.
분신을 이용한 대악마의 명령이 떨어지자.
“칫, 다중 에이드 실드.”
-스르륵.
닥터가 자신의 주변에 반투명한 실드를 펼쳤다.
동시에.
-쿠구구! 쿠과과!
강렬한 마기가 실드를 강타했다.
-쩌적. 쩌저적!
나름 견고한 실드를 펼쳤음에도 금이 번지며 내구도가 빠르게 달았다.
“감히, 대악마의 명령을 거스를 생각인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가만히 있는 머저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비꼬는 듯한 릴의 말에 닥터가 억울한 목소리로 즉답했다.
그때.
“어쩔 수 없군, 악감정은 없다.”
-화르르륵!
집행자가 도끼에 검은 화염을 피워올리며 말하고는.
“헬 버스트!”
닥터를 향해 검은 화염의 힘을 응축한 도끼를 내질렀다.
-쿠콰콰! 파창창!
강렬한 화염의 힘이 폭발하며 닥터의 실드가 산산조각 났고.
-샥!
닥터의 뒤에 남자로 변한 릴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더는 방어할 수단이 없는 상황.
그러나 닥터는 죽을 위기의 순간임에도.
“일이 꼬였군…… 별수 없나.”
무언가를 결심한 듯,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작게 읊조렸다.
그리고.
-콰지직! 푸화아-!
릴의 오른손이 닥터의 가슴을 꿰뚫었다.
“커허-!”
치명상을 입은 닥터가 피를 토해 내며 바닥에 쓰러졌고.
“꼴 좋구나. 배신자.”
닥터에게 일격을 가한 릴이 오른손을 털어 내며 싸늘한 미소를 자아냈다.
그때.
-지이잉.
조금 떨어진 곳에 공간이 좌우로 열리며 게이트가 나타났다.
-저벅.
그곳에서 누군가가 앞서 걸어 나와 모습을 드러내자.
“여, 역천군주!?”
“젠장! 어떻게 무슨 수로!”
의회주들과 주변에 있던 마인들이 경악을 드러냈다.
게이트에서 모습을 드러낸 처용이 짧은 순간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하고는.
“……뭐야, 내분이냐?”
바닥에 쓰러진 닥터를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보며 읊조리듯 물었다.
대충 눈여겨봐도 치명상, 움직임이 전혀 없는 걸 봐서, 죽은 듯 보였다.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거냐?’
뜬금없이 의회주 중 하나인 닥터가 다른 의회주들에게 공격받아 쓰러진 상황.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의회주로 위장한 섀도우 헌터였지만…….
불과 조금 전까지 마주했었던 닥터가 같은 의회주들에게 공격받아 사망하자, 당황스러운 심정이었다.
‘……정체를 들킨 건가?’
처용의 시선이 제단 위, 아직 사라지지 않은 나베리우스의 분신을 향했다.
바알에게 충성하는 대악마이자 다른 대악마를 감시하는 판데모니움의 감찰관.
아마 그가 닥터의 정체를 파악하고 의회주들에게 명령을 내린 듯 보였다.
처용은 작금의 상황이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생각을 빠르게 정리하고는.
“하여튼, 악마 새끼들 쫄따구 아니랄까 봐, 단합력 없는 거 봐라.”
마인들을 향해 싸늘한 눈빛을 치켜뜨며 읊조렸다.
“하, 아무리 네놈이라도 혼자서 우리 전부와 맞서려 하다니.”
처용의 등장으로 인해 당황스러운 모습을 보였던 릴이 이내 침착함을 되찾으며 말했다.
동시에 신호를 보내듯, 손을 치켜들자.
-스륵. 스르륵.
복층으로 보이는 동공의 외곽 부근에서 다수의 마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이 장소, 비밀 시설에 모인 마인들만 해도 수백 명.
게다가 방금 죽은 닥터를 제외하고 의회주만 여섯이었다.
심지어 지금 있는 비밀 시설은 대악마의 축복이 가득 흐르는 장소.
[…….]
제단 위에 나타난 대악마, 나베리우스의 분신이 구경만 할 리가 없었다.
아무리 처용이 괴물 같이 강하다 해도, 혼자서는 이만한 전력을 감당할 수 없다 판단했다.
그러나.
“내가 혼자라고 생각하나?”
처용이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읊조린 순간.
-우웅. 우우웅!
처용의 뒤로 그를 뒤따라온 다수의 헌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원 150레벨이 넘는 최정예 헌터들.
그들 하나하나가 홀로 상급 마인 다수를 상대할 수 있는 강력한 전사들이었다.
그런 그들 중 유독 눈에 띄는 이들.
“젠장, 커맨더!?”
“이 남조선 호랭이 새끼……!”
릴이 처용 옆에 선 커맨더를 보며 경악했고 솔저가 백호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공격을 퍼부어라!”
상황이 좋지 않다고 판단한 릴이 마인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그 말에.
-우웅웅! 쿠콰콰!
마기를 끌어 올리며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마인들이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마기의 폭격이 처용과 헌터들을 향할 때.
“미스리움 벙커!”
커맨더가 빠르게 게이트를 열며 스킬을 발동했다.
-우웅! 철컥! 철컥!
게이트 속에서 두꺼운 철벽들이 튀어나와 헌터들을 감싸며 둥근 벙커를 형성했다.
이윽고.
-쿠쾅! 콰쾅! 콰콰-!
마기의 폭격이 커맨더가 소환한 벙커를 강타했다.
수백 명의 마인이 한 지점에 쏟아내는 폭격에도.
-쿠구. 쿠구.
벙커의 내부가 흔들릴 뿐,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놈들이 너무 많아, 이대로는 나갈 수 없어.”
커맨더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신성력을 끌어올려 벙커를 강화시키는 것으로 폭격 속에서 버틸 수 있지만, 나갈 수가 없었다.
“흐음.”
처용이 주변을 둘러보며 침음을 내었다.
커맨더가 소환한 벙커는 미스리움이 합금된 단단한 철벽이었다.
밖에서는 그저 둥근 돔처럼 보일 테지만.
-위이잉.
벙커 안쪽에서는 투명해 보이는 벽 너머로 밖이 보였다.
마치, 외부가 썬팅 처리된 유리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항마의 화신을 써서 정면 돌파를 해아 하나? 아니면…….’
처용이 밖의 상황을 보며 속으로 읊조렸다.
마인들은 계속 폭격을 쏟아내며 시간을 벌 생각인 듯 보였다.
이대로 시간을 지체한다면, 제단 위의 균열이 곧 열릴 것이고 놈들이 다른 차원으로 도망칠 것이다.
작금의 상황을 타파하려면, 압도적인 힘으로 포화를 뚫어내야 했다.
-우우웅!
처용이 강기와 신력을 동시에 내뿜으며 폭격을 뚫을 준비를 했다.
그때.
“음?”
새로 감지되는 다수의 기척에 처용이 의문을 표했다.
그리고.
“……지원군이 왔군요.”
다가오는 이들 중, 익숙한 기운을 느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금 이곳에 오는 길드는 없을 텐데?”
커맨더가 처용의 말에 의문을 표했다.
지금 올림포스를 포함한 거대 길드들은 동남아 지역의 다른 곳을 공격하고 있었으니까.
이곳의 상황을 파악하고 지원을 보낼 길드는 없었다.
심지어 지금 있는 이곳은 마인들의 기지 가장 깊은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
길드에서 지원을 온다고 해도 여기까지 빠르게 올 수 없었다.
커맨더를 포함한 다른 헌터들이 의문을 자아낼 때.
-스스스.
의회주들이 있는 주변, 가슴이 뻥 뚫린 채 눈을 뜨고 죽어 있던 닥터가 몸을 일으켰다.
정확히는 누군가가 강제로 일으켜 세운 듯, 다리도 굽히지 않은 채, 부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일어났다.
기척도, 소리도 없이 닥터가 몸을 일으켜 서자.
“무슨!?”
“분명히 죽었다! 어떻게 된 거지?”
죽었던 이가 갑작스럽게 서 있는 모습에 의회주들이 당황을 표했다.
“크크크…….”
몸을 일으킨 닥터의 입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평소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
“……네놈!?”
그 목소리에 집행자가 눈을 크게 뜨며 경악을 토했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너무나도 익숙한 중성적인 웃음소리.
집행자가 경악을 표한 순간.
-푸화아아!
닥터에게서 검은 마기와 하얀 마기가 퍼지며 얼굴을 감쌌다.
이윽고 하얀 마기와 검은 마기가 세로로 나뉘었고.
-스르륵.
입 부분이 드러나는 하회탈 반가면이 만들어졌다.
닥터의 얼굴에 가면이 씌워지고 다물고 있던 입이 열리며 씨익 웃음을 짓자.
“많이 아팠다고. Bro.”
금빛으로 번쩍이는 이빨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