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화
처용이 메리의 손을 잡자.
-샥.
마치, 순간이동을 하듯, 새로운 장소가 나타났다.
그곳은 처용이 청룡의 일로 워싱턴에 방문했을 때, 아테나가 처용과 여래를 초대했었던 장소.
아늑한 분위기의 응접실로 보이는 아테나의 개인 성역이었다.
처용과 메리가 나타나자.
[왔구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아테나가 처용을 향해 말했다.
아테나의 왼쪽에는 헤르메스가 오른쪽에는.
[흐음.]
길고 검은 웨이브 머리에 검은 수염을 늘어뜨린 남신이 자리해 있었다.
그리고.
“오랜만입니다. 아테나 님, 그리고…… 미륵 님도 있으셨네요?”
처용이 아테나를 향해 답하고는 헤르메스의 옆에 있는 미륵을 보며 의문을 표했다.
[방금 왔느니라.]
미륵 역시 아테나의 초대를 받고 방금 온 상황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처용이 아테나를 향해 진지하게 물었다.
다른 이도 아닌 관철의 대신, 미륵이 이곳에 왔다면 무언가 곤란한 일이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런 처용의 물음에.
[이렇게 마주하는 건 처음이구나.]
아테나의 오른쪽에 있던 성좌.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는 검은 신이 입을 열었다.
[나는 올림포스 저승의 신, 하데스라 한다.]
그는 전 주신인 제우스의 형이자 올림포스 소속 저승의 신, 하데스였다.
“안녕하세요. 하데스 님. 그렇다는 건…….”
처용은 나름 익숙한 성좌를 향해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는.
“저승에 문제가 생겼군요.”
어째서 아테나가 자신을 불렀는지 눈치챈 듯 말을 이었다.
[눈치가 빠르구나, 바로 본론을 말해도 되겠어.]
하데스가 처용의 말에 긍정하고는.
[정확히는 ‘지옥’에 문제가 생겼다.]
어째서 자신이 급하게 올림포스 성역으로 돌아왔는지를 이야기했다.
본래, 하데스는 자신의 성역, 저승에서 잘 나오지 않는 성좌였다.
지상의 일에도 크게 개입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할 일만 묵묵히 하는 신.
그게 하데스의 성향이었다.
그런 그가 올림포스 성역으로 급히 돌아온 상황.
[지옥에서 형벌을 받고 있어야 할 영혼들 중 일부가 사라졌다.]
생전의 업으로 인해 지옥에서 형벌을 받는 영혼들.
아직 악한 성향이 제거되지 않은 사악한 영혼들이 무단으로 지옥을 탈출해 버린 정황이 드러났다.
하데스는 급하게 사라져 버린 영혼들을 추적했지만.
[어디로 갔는지, 아니 도대체 언제 사라진 것인지 알 수 없더군.]
이미 자취를 감춘 영혼들은 흔적조차도 사라진 상태였다.
하데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간의 일을 이야기하자.
“사라져 버린 영혼들은 이미 검은 별이 되었으니까요.”
처용은 사라진 영혼들을 잘 알고 있다는 듯,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성운 재판에서 천교를 돕던 놈들을 말하는 것이로구나.]
아테나가 성운 재판에서 모습을 드러냈었던, 검은 별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정말…… 그들이 탈주한 영혼들이란 말인가?]
하데스가 아테나의 말에 침음을 흘리며 말했다.
헤르메스의 보고 덕분에 검은 별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보고를 듣는 순간, 그들이 탈주한 영혼들이라는 것을 곧장 알아챌 수 있었다.
다만.
[도대체 무슨 수로…… 지옥의 형벌을 받던 영혼들이 무단으로 탈주했단 말인가?]
하데스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제아무리 저승의 신이라 해도 지옥의 형벌을 받는 영혼들에게 함부로 개입할 수 없었다.
그들의 형벌은 우주의 법칙에 따라 영혼에 쌓인 업을 씻어내는 과정이었으니까.
말 그대로 ‘우주의 법칙’이기에 신이라 해도 지옥의 형벌에 관여할 수 없었다.
그런 우주의 법칙을 무시한 듯, 형벌을 받는 영혼들이 무단으로 탈주한 상황.
게다가 탈주한 영혼들은 검은 별이라 불리는 악신들이 되어 버렸다.
“탈주한 영혼들을 악신들로 만든 건 악의 종주가 한 짓일 겁니다.”
처용이 하데스의 말에 악의 종주를 떠올리며 말했다.
[태초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 이런 짓도 할 수 있었던 건가?]
아테나가 처용의 말에 침음을 흘리며 읊조렸다.
[제아무리 태초신이라 해도, 우주의 법칙에 함부로 개입할 순 없다. 아테나.]
하데스가 아테나의 말을 부정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저승의 신이라 해도, 저승의 법칙에 함부로 관여할 수 없는 것처럼.]
“태초신도 신법 재판의 결과를 무효화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했으니까요.”
처용이 하데스의 말에 동의하듯 말했다.
과거, 여래가 신계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킬 당시, 싸움을 중재하러 나섰던 태초신.
여래는 태초신에게 공정하지 못한 신법 재판으로 살해된 이들을 되살리고 금오도를 되돌려달라 했다.
그런 여래의 협상 조건에 태초신은 불가능하다 말했었다.
신법 재판으로 이루어진 결과는 태초신이라 해도 없앨 수는 없다면서……….
다만.
“하지만…… 우주의 법칙에 조금 간섭하거나 조율하는 건 가능하겠죠.”
처용이 과거 여래가 말해주었던 태초신과의 협상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 당시 여래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던 태초신은.
-신법 재판의 판결을 바꿀 순 있다.
여래를 새로운 신법의 대신으로 임명하여 신법 재판의 판결을 수정했다.
덕분에 천년 간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 금오도의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악한 영혼들이 사악한 성좌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처용이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언급하며 말을 마치자.
[아무리 그자가 태초신에 버금가는 이라 해도, 저승의 신들이 이변을 감지하지 못한 건 이상하다.]
하데스가 처용의 말에 반쯤 수긍하면서도 의문을 표했다.
무려 지옥의 형벌을 받는 영혼이 무단으로 탈주한 상황.
이러한 이변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저승의 최고 관리자들, 저승의 신들이 이를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러나 저승의 신들 중, 이러한 이변을 알아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조차도 직접 나서서 알아본 다음에야 이변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챘으니 말이다…….]
하데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읊조리듯 말했다.
그러자.
[다른 저승의 신들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습니까?]
아테나가 하데스를 향해 궁금한 듯 물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이번에 일어난 이변을 전혀 모르는 듯 보였다.]
하데스가 자신이 직접 확인한 저승의 상황을 다시금 떠올리며 답했다.
그 말에 처용과 아테나의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
마치 서로 같은 생각을 떠올린 것 같은 분위기.
“저승의 신들 중…….”
[배신자가 있는 것 같구나.]
처용이 읊조리는 듯 흘린 말에 아테나가 진지한 목소리로 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저승의 관리자들이 왜?]
하데스가 경악과 의문을 담아 물었다.
저승을 다스리는 신들은 모두 저승의 질서를 위해 존재하는 이들.
그런 그들이 왜 저승의 질서를 망친단 말인가?
하데스의 말이 울리자.
[모든 이들이 백부님처럼 정직한 것은 아닙니다.]
아테나가 작은 한숨을 토하며 말하고는.
[아레스, 아폴론, 아르테미스, 포세이돈.]
올림포스를 배신했던 이들의 이름을 읊조렸다.
[이전의 저는 이들도 정직하다. 신념과 세계를 위하는 이들이다. 이렇게 생각했었습니다.]
대악마와 협력해 올림포스를 혼란에 빠뜨리려 했던 형제들.
제 욕심에 눈이 멀어 스스로가 파멸의 길을 걸은 전 바다의 대신.
아테나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자.
[포세이돈…… 이 머저리 같은 놈이.]
하데스가 자신의 형제, 포세이돈을 떠올리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읊조렸다.
유독 권력욕이 심했던 형제.
동생인 제우스가 주신의 자리에 앉을 때부터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그였다.
하데스는 형제인 포세이돈을 믿었지만, 결국, 믿음을 저버리고 그릇된 선택을 저질러 버렸다.
그리고 욕망의 괴물이 되어 버린 포세이돈을 저지한 이가 바로 처용이었다.
[그 어리석은 놈을 막아 주어서 고맙구나.]
하데스가 처용을 향해 감사를 전했다.
그의 감사는 포세이돈을 저지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제우스의 실종으로 혼란스러웠던 올림포스가 안정될 수 있었던 데에는 처용의 공로도 컸으니까.
“저를 탓하실 줄 알았습니다만?”
처용이 하데스를 향해 떠보듯 말했다.
하데스가 포세이돈을 질책하긴 했어도 그의 형제, 피붙이였으니까.
그러나.
[너는 포세이돈을 저지했을 뿐, 그를 소멸시킨 건 아르테미스다.]
하데스는 처용에게 전혀 유감이 없다는 듯 말했다.
“아르테미스가…… 포세이돈을 죽인 것이었군요.”
처용이 하데스의 말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읊조렸다.
[생각해보니, 더 이상하군. 타르타로스에 도대체 무슨 수로 균열을 내어 빠져나갔단 말인가?]
하데스가 탈주한 죄인들을 떠올리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타르타로스는 지옥의 일부를 분리하여 만든 공간입니다. 그렇다면…….]
[지옥에도 간섭했으니, 타르타로스에도 충분히 간섭이 가능하겠구나.]
아테나의 말에 하데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백부님, 저승의 신들을 은밀하게 감시해 주십시오.]
[주신의 뜻대로.]
하데스가 아테나의 부탁에 작은 미소를 지으며 정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격이 낮은 아테나가 주신에 있음에도 그녀를 존중하는 모습.
하데스는 올림포스를 훌륭하게 이끄는 아테나를 주신으로 인정한 상태였다.
[흐음, 저승의 문제라면 나도 좀 조사해 보지.]
이야기를 듣던 미륵이 도움을 주겠다는 듯, 진지하게 말했다.
[관리자께서 도와주신다면, 더 수월할 겁니다.]
하데스가 미륵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리고.
[이것을 받거라.]
-스르륵. 탁.
손아귀 위에 무언가를 소환하더니 처용에게 내밀었다.
각 모서리가 둥글게 깎인 직사각형 형태의 보패.
보패 중앙에는 알 수 없는 문자가 은은한 금빛을 빛내고 있었다.
[내가 만든 저승 관리자의 인장이다. 이걸로 검은 별들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하데스가 내민 보패는 검은 별들을 추적할 수 있는 아티팩트였다.
다만.
[온전히 추적할 수 있다기보다는, 근처에 놈들의 흔적이 있다면 알려주는 정도이지만…….]
아직 검은 별들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여 흔적만 찾을 수 있다 말했다.
하지만, 하데스가 만든 아티팩트는 단순한 추적 장치가 아니었다.
[검은 별들의 화신체를 제압한다면, 이것으로 봉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하데스가 건네준 보패는 탈주한 영혼들을 체포할 수 있는 수갑의 기능이 있었다.
[검은 별의 화신체를 체포한다면, 놈들의 본체를 추적할 수 있다.]
“감사합니다. 요긴하게 쓰겠습니다.”
처용이 하데스가 내민 보패를 받아 아공간 속에 챙겼다.
[도와주어서 고맙구나.]
“중요한 일이니까요.”
아테나의 감사에 처용이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그리고.
“제가 궁금해서 그러는데…….”
처용이 아테나의 뒤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포세이돈도 사라졌는데, 저분은 해방되지 않는 겁니까?”
처용의 시선이 닿은 곳은 아테나의 뒤에 장식처럼 걸려 있는 방패였다.
녹색의 문양이 새겨진 은색의 방패.
방패에 새겨진 녹색 문양을 자세히 보면, 마치 뱀이 노려보는 듯한 분위기의 문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처용이 가리킨 방패는 아테나의 신물 중 하나.
아이기스(Aegis)였다.
처용이 아이기스를 가리키며 말하자.
[…….]
아테나가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침묵했다.
비단 아테나만이 아닌.
[으음.]
[흠.]
헤르메스와 하데스도 복잡한 심정을 드러내며 침음을 흘렸다.
무언가 사정이 있어 보이는 모습에 미륵이 눈을 가늘게 떠 보였고 제시카와 메리는 의문을 드러내며 침묵했다.
짧은 침묵 끝에.
[저것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
처용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처용이 언급했던 ‘누군가의 해방’.
그 말은 자신의 신물, 아이기스에 대해 알고 있는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었으니까.
그런 아테나의 질문에.
“지구에 흔히 알려진 역사와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많은 의미가 함축된 듯 보이는 말로 대답했다.
“원래 역사란 강자에 의해 왜곡되어 퍼지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처용의 말이 울리자.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이냐?]
아테나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신물, 아이기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작은 슬픔이 담긴 듯한 목소리.
“그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아는 건 아닙니다. 다만.”
처용이 아테나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포세이돈이 개새끼라는 것쯤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읊조린 처용의 말에 아테나가 무언가를 생각하듯 다시 침묵에 잠겼다.
그런 아테나의 반응에.
“그…… 아테나 님 신물에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그녀의 신관, 제시카가 걱정과 궁금함을 담아 물었다.
아테나의 신물, 아이기스는 제시카가 성물로 다루기도 하는 무구였으니까.
제시카의 질문에 아테나가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의 신물, 아이기스를 잠시 바라보고는.
[내가 아끼던 아이가…… 저 신물, 아니, 감옥에 갇혀 있단다.]
슬픔이 일렁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아테나의 말에.
“아이기스에 갇힌 존재…….”
제시카가 무언가를 생각하듯 읊조렸다.
그리고 곧.
“메두사(Medusa)?”
지구에 널리 퍼진 올림포스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말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