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화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야. 카투라.]
대악마 알레인, 아니, 스스로의 정체를 드러낸 태초의 마수.
니알라-크타니드가 카투라를 향해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반가움이 느껴지는 인사말이 울리자.
[니알라…….]
카투라가 많은 감정이 응축된 듯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할 말이 너무나도 많은 듯한 분위기였다.
[죽지 않고 잘 살아 있는데, 기뻐해 줄 수는 없는 건가?]
알레인이 어깨를 으쓱이며 가벼운 목소리로 말하자.
[……왜 판데모니움에 있는 거야?]
카투라가 알레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거대 성운의 힘까지 빌려 그렇게 찾아다녔는데도 찾을 수 없었던 형제들 중 한 명.
도대체 왜 태초의 마수가 판데모니움이라는 가장 낮고 어두운 세계에 거주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지금 판데모니움에는…… 태초의 마수를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포식자가 있었다.
[어디에 있던 내 맘이잖아?]
카투라의 걱정 어린 물음에 알레인이 가볍게 답하자.
[지금 네 처지를 알고 있긴 한 거야?]
답답함을 느낀 카투라가 목소리를 높였다.
[뭐가? 우리를 잡아먹으려는 포식자와 같은 세계에서 동거하는 거?]
알레인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카투라가 알레인의 반응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때.
“당장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이로군요.”
처용이 알레인의 상황을 눈치챈 듯, 진지하게 말했다.
“시스템의 장벽이 펼쳐진 지금, 판데모니움은 빠져나올 수 없는 감옥과도 같습니다.”
판데모니움의 거주하는 악마들은 함부로 다른 차원에 넘나들 수 없었다.
우주의 각 차원이 서로 간섭할 수 없도록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알레인은 판데모니움을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는 상황일 터.
“스승님도, 미륵 님조차도 당장 저분을 빼내기에는 힘들 겁니다.”
처용의 확신 어린 말에.
[호오. 내 상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구나.]
-탁. 탁.
알레인이 박수를 치듯, 두 손을 모아 가볍게 두 번 부딪치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 등잔 밑에 잘 숨어 있으니까? 음…… 이럴 때 쓰는 말이 맞나?]
“……등잔 밑?”
처용이 알레인의 말에 고개를 기울이며 의문을 표했다.
판데모니움의 대악마로 살아온 그녀가 한국의 속담을 아는 것이 좀 이상하게 좀 느껴졌다.
하지만, 당장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당장 들키지는 않았다 해도, 안전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처용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카투라 님에게 들킨 이상, 당신의 위장은 완벽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다행히 악의 종주는 알레인의 진짜 정체를 알아채지 못한 듯 보였다.
하지만, 같은 태초의 마수인 카투라는 알레인을 곧장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악의 종주가 제대로 알레인을 조사하자마자 분명 들통날 것이다.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빠져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단다. 나 역시 다른 형제들처럼 죽고 싶지는 않거든.]
처용의 말에 알레인이 순간적으로 두려움과 슬픔이 일렁이는 눈빛을 드러내며 말했다.
순간 드러낸 슬픔과 두려움을 지운 알레인은.
[나 좀 도와주지 않을레?]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처용과 카투라를 향해 도움을 청했다.
특히, 생판 남인 처용이 자신을 선뜻 도와줄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세상은 태초의 마수에게 호의적인 세상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자신은 대악마의 모습으로 살아온 태초의 마수.
혐오에 혐오가 더해졌다고 볼 수 있었다.
조금 전, 처용이 대악마인 자신을 향해 드러냈던 강렬한 적의가 아직도 떠올랐다.
하지만.
-정말로 태초의 신수입니까?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자 처용은 태초의 마수인 자신을 향해 ‘신수’라 칭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자신의 형제 카투라.
처용은 태초의 마수인 그녀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작금의 상황을 본 알레인은 혹시 하는 심정으로 도움을 청해 본 것이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어떻게 도와드리면 됩니까?”
처용에게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도와주겠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왜?]
알레인이 예상 못 한 처용의 대답에 의문을 담아 읊조리자.
[니알라, 이 아이는 평범한 신관이 아니야.]
카투라가 의문을 표하는 알레인을 이해한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번 우주의 미래를 선택할 자격을 지닌 계승자야.]
[……관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을 듣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
알레인이 카투라의 말에 이해했다는 듯, 말했다.
판데모니움까지 전해졌던, 처용이 지금껏 벌인 모든 일들.
디아블로를 격퇴한 일부터 시작해, 다수의 성좌를 무력으로 때려눕힌 일까지.
이 모든 일들은 절대로 인간이 벌일 수 없는 짓들이었다.
인간은 신과 악마들에 비해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들이었으니까.
이런 불가능한 일을 벌인 처용이 우주의 선택을 받은 계승자였다.
하지만 처용이 아무리 계승자라 해도 인간은 인간이었다.
[아무리 계승자라지만, 이 녀석의 힘은 너무 비상식적인데?]
알레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처용이 평범한 신관이 아니라는 건, 미륵의 존재로 인해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우주의 선택을 받은 계승자라 해도, 불가능은 불가능.
처용이 발휘하는 무력과 행동은 상식을 벗어나는 수준이었다.
[이 아이가 그 정도로 대단한 녀석이거든.]
카투라가 알레인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볼 때, 이 아이의 잠재력은 여래 이상이야.]
[하하, 그렇게 말하니까 천교가 실패하고 판데모니움으로 도망친 것이 이해가 되네.]
알레인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구에서 준비하던 모든 일을 말아먹고 판데모니움으로 도망친 천교.
알레인은 치밀한 성향인 옥황상제가 왜 실패한 것인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런 걸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하던가?]
여래를 언급하는 카투라의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었다.
과거, 신계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었던 반신, 혈선(血仙) 여래.
판데모니움까지 그 악명이 퍼졌었던 여래보다 더한 재능을 보이는 인간이 처용이었다.
‘청출어람…….’
처용이 알레인의 말, 한국에서 주로 쓰이는 사자성어를 듣고 의문을 표했다.
한국의 속담에 이어 사자성어까지.
그녀가 왜 이런 말들을 알고 있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당신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그 또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악의 종주가 알레인의 정체를 알아채기 전에 그녀를 판데모니움에서 탈출시켜야 했다.
“어떻게 당신을 도와주면 됩니까?”
처용이 알레인을 향해 다시 묻자.
[미안, 방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단다. 나름 간절한 마음에 도와달라고 말해 본 거였거든.]
알레인이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처용이 고맙긴 했지만, 정말로 당장 떠오르는 방법조차 없었다.
‘제우스가 신계와 연결되는 문을 뚫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 알레인이 탈출을 위해 준비하는 일이 있었지만, 이를 처용이 도울 방법이 없었다.
알레인이 곤란한 듯, 침음을 흘릴 때.
[니알라, 네 정수의 일부를 이 아이에게 나눠 줘.]
카투라가 알레인을 향해 말을 이었다.
[이 아이는 계승자야. 우리의 권능을 ‘계승’ 받을 수 있어.]
[그러고 보니, 안드로말리우스와 싸울 때, 크루마를 소환했었다고 했지.]
알레인이 카투라의 말에 기억났다는 듯 말했다.
처용이 처음 안드로말리우스와 마주했을 때, 자신의 형제인 크루마를 소환했다 들었다.
그 이전, 청룡을 노리는 올림포스의 대신, 포세이돈과 맞설 때는 카투라를 소환했었다.
아마도 카투라와 크루마에게서 정수를 받고 그 힘을 계승했기에 가능했으리라 생각했다.
[어디…….]
알레인이 처용을 향해 오른손을 들어 올리고는.
-스르륵.
보랏빛 안개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신력을 처용에게 보냈다.
처용이 알레인의 신력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자.
[니알라-크타니드의 능력을 계승합니다.]
[신수의 격이 성장합니다.]
[선인의 육체가 성장합니다.]
[마력 스텟이 20 증가합니다.]
[최대 마나가 400 증가합니다.]
[암(暗) 속성 마나의 힘이 크게 상승합니다.]
-환각, 혼란, 착란 등 정신적인 상태 이상에 강한 저항력이 생깁니다.
-정신적인 상태 이상 공격의 위력이 강해집니다.
카투라와 크루마의 힘을 받아들였을 때처럼, 여러 능력치가 상승했다.
알레인의 특성이 ‘어둠’이었기 때문인지, 암 속성 마나의 힘이 크게 강해졌다.
그리고.
[니알라의 초월기 ‘몽환의 지배자’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소환 : 니알라’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현재 사용 불가.
추가적인 능력 또한 계승 받을 수 있었다.
“꿈의 종주…… 몽환…… 어둠 속성…….”
처용은 카투라의 힘을 계승 받고 떠오른 시스템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을 흐렸다.
마치,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
이윽고.
‘꿈…… 악몽!?’
처용의 머릿속에 번쩍이며 무언가가 떠올랐다.
생각을 마친 처용은.
“……당신이 섀도우 헌터들의 성좌, ‘악몽 지배자’였군요.”
알레인을 바라보며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확인하려는 듯,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자.
[어, 어…… 아닌데-에?]
알레인이 처용의 말에 엇박자 난 목소리로 부정을 표했다.
처용의 시선을 피하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는 모습.
알레인은 입으로 내뱉은 부정과는 별개로 눈에 띄게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뭐…… 알겠습니다.”
처용은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
무언가 복잡한 사정이 있는 듯 보였으니까.
그리고 당장 중요한 것은, 그녀의 안전.
조크 크타니드가 알레인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녀를 잡아먹기 전에 탈출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카투라 님은 제게 힘을 계승한 이후부터 저와 소통이 가능해졌습니다.”
처용이 화제를 돌리고는 알레인을 향해 말했다.
이전 카투라의 부탁을 받고 니모를 잡으러 갔을 때.
-······나도 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하하.
카투라가 반쯤 놀람 섞인 목소리로 했었던 말이었다.
마치, 신이 신관을 통해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처용에게서 카투라의 신력이 뿜어져 나왔었다.
그렇게 카투라가 처용을 이용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니모를 잡을 수 있었다.
계승자는 신과 신관의 관계가 아님에도, 다른 성좌와 소통하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가능합니까?”
처용이 알레인을 향해 카투라처럼 자신과 소통이 가능한지를 물었다.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으면, 앞으로의 일이 수월해지니까.
[으음…… 그건 힘들어 보이네.]
무언가 집중하듯, 눈을 감으며 침음을 흘리던 알레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쉽게 풀리는 일이 없군요.”
처용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읊조렸다.
아무래도 판데모니움이라는 격리된 세계에 그녀의 본신이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흐음…….”
처용이 눈을 감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태초의 마수를 우연히 찾아냈지만, 당장 조치할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작금의 상황을 이용할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인가?
처용이 생각에 생각을 이어갈 때.
“니알라 님.”
생각을 끝낸 처용이 진지한 목소리로 알레인을 불렸다.
동시에.
“연기 좀 하십니까?”
알레인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었다.
***
[이 빌어먹을 것들이-!]
-푸화아아!
안드로말리우스가 사방에 마기를 방출하며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헌터들을 뒤로 밀어냈다.
이번에야말로 자신을 강제로 소환한 인간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호기롭게 외치긴 했지만, 역시나 이전처럼 인간들을 이기기엔 불가능했다.
[제길……!]
안드로말리우스의 입에서 답답한 침음이 흘러나왔다.
그때.
-쏴아아!
돌연 수련장 안에서 붉은 신력이 휘몰아치듯 모이더니.
-파아아!
조금 전 사라졌었던 처용과 알레인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안드로말리우스는 사라졌던 알레인의 기척이 느껴지자,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대악마 서열 8위.
아무리 개조된 대악마 소환 마법진이라 해도, 쉽게 당할 그녀가 아니라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무, 무슨!?]
안드로말리우스가 알레인을 보며 당황을 표했다.
정확히는.
-촤아악!
처용이 알레인의 화신체를 크게 베어내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미안…… 아무래도 내가 당장 여기서 더 할 수 있는 건 없는 것 같다.]
알레인이 안드로말리우스를 바라보며 미안한 듯, 마지막 말을 전하고는.
-화아아……!
안개처럼 흩어지며 사라졌다.
안드로말리우스가 그 모습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본 순간.
“총공격을 퍼부어! 놈을 처치해!”
커맨더가 게이트를 열고 이전에 사용했던 플라즈마 캐논을 꺼내 들며 소리쳤다.
-우웅!
-우우웅!
-쿠콰콰!
다시 사방에서 온갖 공격이 안드로말리우스를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내 언젠가 반드시! 네놈들을 처단할 것이다!]
-파아아!
안드로말리우스 역시 더 버티지 못하고 화산체가 무너지며 사라졌다.
특수 수련장 위에 소환되었던 대악마들의 화신체가 사라지는 것을 본 처용은.
‘계획대로 잘 되었으면 좋겠군.’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며 속으로 읊조렸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