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화
엘리스에게 들은 중요한 정보를 끝으로 대화는 더 없었고 처용은 안식전을 나왔다.
아직 살아남은 태초의 마수가 있다.
악의 종주에게 잡아먹힌 태초의 마수들 흔적이 연속으로 발견된 상황.
카투라와 크루마를 제외한 태초의 마수들은 모두 사망했다고 여기고 있었다.
태초의 마수 수색에 진전이 더뎌 더 수색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지는 듯 보였다.
그러나 아직 살아남은 태초의 마수가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다만, 정보를 얻었음에도 문제가 있었다.
-문제는 그 태초의 마수가 판데모니움에 있다는 거지.
정보를 전해 준 엘리스가 덧붙였던 말.
살아남은 태초의 마수는 다름 아닌 판데모니움에 있었다.
-붙잡혀 있는 건가?
처용이 의문을 담아 물었었다.
판데모니움은 악의 종주가 완전히 장악한 세계.
그곳에 태초의 마수가 있다면, 악의 종주가 무언가를 이유로 가둬 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처용의 예상과는 다르게.
-놈은 스스로를 감추고 숨어 있는 상황이다.
엘리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태초의 마수는 아주 오래전부터 판데모니움에 자리 잡아 살아온 존재였다.
-상위 대악마 중 하나, 내가 아는 정보는 여기까지다.
엘리스가 자신이 추정하는 몇몇 대악마를 언급하며 말을 덧붙였다.
정리하자면.
판데모니움의 대악마 중 하나는 정체를 숨긴 태초의 마수였다는 사실.
차원과 차원이 단절된 탓에 그는 지금 판데모니움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상태였다.
당장 판데모니움에 갈 방법도, 길을 열 방법도 없다.
결론은 당장 조치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
그러나.
-혹, 단서를 얻게 되면, 연락하지.
엘리스는 짐작되는 부분이 있다며, 이 일은 자신이 알아본다는 말을 덧붙였다.
처용이 카투라와 크루마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아직 살아남은 형제가 있다니, 정말 다행이야.
아직 악의 종주에게 잡아먹히지 않은 형제가 있다는 말에 안심하는 분위기였다.
소식을 전한 처용이 카투라의 영역을 빠져나오고는.
“하아…….”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삼천마 중 하나일 리는 절대로 없을 테고…….’
처용이 판데모니움에 있는 태초의 마수를 생각하며 태룡전으로 돌아오자.
“……그럼, 무운을 빌겠습니다. 관철의 대신.”
게이트 앞에 선 레나와 그녀를 못마땅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미륵이 보였다.
아니, 지금 미륵과 마주한 레나는 레나가 아닌 엘리스였다.
지금의 레나는 미륵을 똑바로 마주할 수 없을뿐더러, 미숙한 레나와는 다른 여유가 느껴졌으니까.
미륵에게 전한 말을 끝으로 레나가 게이트 안으로 사라졌을 때.
“……갔군요.”
처용이 미륵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리고.
“그냥 보내도 괜찮은 겁니까?”
레나는 다른 것도 아니고 태초의 그릇을 지니고 있었다.
적들, 특히 악의 종주 손에 신병이 넘어가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인물.
그런데 미륵은 순순히 그녀를 보내주었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저것을 봉인시키고 싶었느니라.]
미륵은 처용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솔직히 어떤 방법을 써서든 태초의 그릇을 지닌 숙주를 붙잡아 놓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태초의 그릇을 저것에게서 분리하지도 못했으니, 봉인 또한 불가능하다.]
미륵이 여러 방법을 생각하고 시도해 봤지만, 모두 실패했다.
엘리스는 그런 미륵을 향해.
-당신이 추적을 지워준 덕에 내가 놈들에게 붙잡힐 가능성은 결코 없습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자신감을 보이며 말했다.
그녀는 과거의 기억을 가진 자, 게다가 태초의 그릇까지 소유한 자였다.
지금의 처용과 거의 비슷한 무력을 가진 존재.
태초의 그릇에 새겨진 추적 낙인이 문제였지만, 미륵에 의해 없어졌다.
이제 그녀가 마인들에게 상시 추적당할 일은 결코 없었다.
그리고.
-한처용이 아무리 괴물 같이 강하다 해도, 놈은 혼자입니다.
레나가 미륵을 향해 했었던 말.
처용은 혼자이니 모든 것을 도맡아 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협력을 약속한 이상, 돕는다.
이것이 엘리스가 미륵에게 한 약속이었다.
[나쁜 관계보단 협력 관계가 더 좋지 않겠느냐.]
“같은 생각입니다. 미륵 님.”
처용이 미륵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할 때.
-올림포스 길드장이 성지에서 너를 찾는데?
연화의 전음이 전해져 왔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소식을 들은 처용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제시카가 이곳에 다시 찾아올 만한 일은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우선 네 일에 집중하거라, 이 일은 내가 알아볼 터이니.]
사정을 파악한 미륵이 처용을 향해 말했다.
[혹시 몰라 태초의 그릇에 보험을 걸어 놓았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감사합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처용이 미륵을 향해 감사를 전하고는 게이트를 열며 사라졌다.
***
-우우웅.
처용이 게이트를 열고 나타난 장소는 성지 내에 있는 수련탑이었다.
각자 결계를 펼친 채 서로 모의 대련을 하는 헌터들과 금강역사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는.
“오오, 말로만 들었지 이거 정말 훌륭한데?”
“덕분에 많은 99레벨 헌터들이 100레벨에 들어설 수 있었죠.”
수련탑 내부를 둘러보며 감탄을 표하는 빌리와 그에 답하는 제시카가 보였다.
“수습은 벌써 다 끝낸 겁니까?”
처용이 제시카에게 다가가며 말하자.
“오셨군요. 그날 수습을 도와주신 덕분에 로스의 일 처리가 빨랐습니다.”
제시카가 다시 한번 처용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말했다.
전투의 여파로 로스차일드 저택이 난장판으로 변해 버렸다.
하지만, 로스차일드 저택은 요새처럼 설계된 건축물.
저택 자체가 완전히 무너지거나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가장 처리하기 성가셨던 안드로말리우스의 독도 크루마가 모두 정화해 버린 상황.
저택의 수리와 뒤처리는 반나절 만에 끝낼 수 있었다.
“가주님은 같이 오지 않은 겁니까?”
처용이 이 자리에 월리엄이 없는 것을 보고 의문을 표하자.
“아, 가주님은 지금 협회장님을 만나고 계십니다.”
제시카가 월리엄의 행방을 이야기했다.
“준비해 오신 선물 때문이라고 하시더군요.”
처용에게 도움을 받은 로스차일드 가.
이전, 제시카가 가문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보답하겠다고 했지만.
-보답은 가주인 내가 해야겠지.
월리엄은 받은 도움에 보답하는 것만큼은 가주인 본인이 직접 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월리엄은 메리와 함께 태민의 안내를 받아 황제일을 만나러 간 상황이었다.
“로스차일드 가주가 주는 선물이라 기대되는군요.”
본의 아니게 로스차일드 가문 사정에 휘말려 그들을 돕긴 했지만, 처용은 그 싸움에서 얻은 게 많았다.
무려 바질리스크를 두 마리나 사냥해 사체를 얻었다.
지금 시기에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최고급 재료.
비록 다 자라지 않은 아성체라고 해도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거기에 이어 레벨이 높은 다수의 상급 마인을 사살했다.
그들의 수장이자 의회주 중 하나인 잭, 제이크 로스차일드를 사살한 것도 컸다.
추후 성가신 적들이 될 예정이었던 이들을 사전에 정리한 셈이었다.
그리고.
“올림포스 기술자들을 통해서 그것도 회수해 왔습니다만…….”
제시카가 처용을 향해 궁금한 듯 물었다.
-보답…… 이라기엔 뭐 하지만, 저것 좀 양도해 주시죠.
마인들이, 정확히는 제이크 로스차일드가 남기고 간 물건이 하나 있었다.
처용이 도와준 보답으로 제시카와 월리엄에게 잭이 남긴 물건을 요구했었다.
제시카는 처용의 부탁대로 요구한 물건을 회수해 가져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대악마 소환진을 쓸 데가 있습니까?”
안드로말리우스를 소환했었던 소환진이었다.
제시카의 의문 가득한 질문이 울리자.
“흐흐…….”
처용이 낮은 미소를 흘리며 웃어 보였다.
엘리스가 보았었던 꿍꿍이가 가득해 보이는 미소를 지은 처용은.
“며칠 뒤에 연락을 드릴 테니 그때 성역에 오시죠.”
제시카를 향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처용이 준비가 끝나면 그때 알려준다는 말을 덧붙이자.
“일단, 알겠습니다.”
제시카가 일단 의문을 접으며 답했다.
처용이 대악마 소환진으로 무엇을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그는 마인과 대악마를 증오하는 인물, 사악한 물건을 악용할 만한 이가 아니었다.
제시카가 생각할 때.
“……근데, 그 옷은 안 입고 있네요?”
연아가 빌리를 보며 궁금한 듯 물었다.
처음 빌리를 마주했을 때, 엄청난 시각적 임팩트를 주었던 복장.
지금 빌리는 남자의 몸에 운동선수와 같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이걸 말하는 건가?”
빌리가 연아의 말에 대답하고는.
“체인지.”
-화아아!
남자의 몸에 노출도가 높은 꽉 끼는 타이트한 복장으로 바꾸었다.
“악! 내 눈 씨-!”
바로 눈앞에서 다시 빌리의 전투복을 마주한 연아가 반사적으로 눈을 감으며 소리쳤다.
“……이유라도 있으신 건가요?”
연화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음과 동시에 궁금한 듯 물었다.
시각적으로 놀라기는 했지만, 빌리의 옷이 변한 순간, 기세가 확 강해진 것이 느껴졌다.
“내추럴 바디(Natural Body)라는 독특한 스킬 때문이지.”
연화의 질문에 빌리가 자신의 스킬에 대해 말해 주었다.
빌리가 가진 패시브 스킬인 내추럴 바디.
그 능력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체력 스텟이 높을수록 모든 능력치가 올라가는 것.
그리고 육체의 노출도가 높을수록 받는 모든 공격의 위력을 차감시키는 것.
강력하고 유용한 스킬이었지만, 나름 패널티가 있었다.
바로 무기를 쓰지 못하는 점이었다.
무기를 드는 순간, 내추럴 바디의 모든 효과가 사라진다.
하지만.
“난 무기가 필요 없어.”
빌리는 패널티가 전혀 문제없다는 듯 두 손을 들고 주먹을 쥐며 말했다.
그녀는 전직 UFC 세계 챔피언 출신.
제시카의 전투 코치이기도 했던 그녀는 맨손 격투술의 달인이었다.
헌터가 되기 이전부터 사람을 상대로 싸워 이겨온 그녀였기에 대인전이 익숙했다.
거기에 빌리의 또 다른 스킬.
성별을 바꿀 수 있는 ‘미의 형상’과 같은 성별을 상대로 모든 능력치가 증가하는 ‘동성 포식자’.
여러 독특한 특성을 가진 스킬들이 만나 강력한 시너지를 발휘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빌리가 유독 대인전에서 강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였다.
“동성을 상대로 강해진다라…….”
연화가 빌리의 말에 무언가를 생각하며 읊조리자.
“의회주인 릴의 스킬, 이성 포식자의 정확히 반대되는 스킬이지.”
처용이 연화의 생각을 알아챈 듯,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놈? 그 빌어먹을 가이도 그때 잡았어야 했는데.”
빌리가 처용의 말에 생각이 난 듯, 인상을 찌푸리며 읊조렸다.
그리고.
“어때? 이곳을 체험해볼 겸, 대련 한 판 부탁하지. 해전군주.”
-스스스.
육체를 여성으로 바꾼 빌리가 연화의 이명을 언급하며 대련을 신청했다.
“좋습니다.”
빌리의 말에 연화가 눈빛을 날카롭게 바꾸며 대련을 수락했다.
‘많은 도움이 되겠지.’
처용이 수련탑 중앙으로 향하는 둘을 보며 속으로 읊조렸다.
연화가 빌리의 대련 요청을 바로 수락한 이유.
그 이유는 의회주인 릴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무려 세 명이서 맞섰음에도 이기지 못한 S급 마인.
빌리는 그런 릴과 흡사한 능력을 가진 헌터였다.
처용은 연화가 빌리와의 대련을 통해 추후 다시 마주할 릴을 대비할 생각임을 알아차렸다.
빌리와 연화의 대련을 처용이 지켜보려 할 때.
“……가주님께서 나오셨다고 하는군요.”
제시카가 라이센스를 확인하며 처용에게 말했다.
처용이 서로를 마주 보며 대치하는 빌리와 연화를 잠시 바라보고는.
“……가죠.”
제시카의 말에 답하며 수련탑을 빠져나갔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