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화
마녀가 태룡전에 들어서고 하루 뒤.
“하…… 젠장.”
처용이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녀가 전달한 정보와 태초의 그릇을 이용한 제약 해제.
그로 인해 회귀 전 전혀 알지 못했던 많은 사실들을 알아냈다.
그중 가장 의미가 컸다고 볼 수 있는 것은.
-계승자는 태초신의 후보임과 동시에…… 선택할 자격도 가지고 있다.
바로 자신의 클래스, 계승자에 대한 정보를 얻은 것이었다.
스스로가 태초신이 될 자격도 있고 지목할 자격도 있는 존재.
계승자에 대한 비밀이 생각보다 컸지만, 당장 큰 변화는 없었다.
비밀을 알았다고 해서 뭘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당장 태초신이 될 방법도, 태초신을 지목할 방법도 알 수 없었다.
그 방법을 알아낼 단서조차도 알아낼 방법이 마땅치 않은 상황.
처용이 당장 할 수 있는 건 크게 없었다.
그저 지금까지 계속해왔던 것처럼, 미래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할 뿐.
지금 역시 그 미래에 대한 준비를 갖추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탁.
처용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태룡전에 있는 안식전 앞이었다.
-안식전 1층 가장 끝방에 두었습니다.
아타의 전음이 들려옴과 동시에 처용이 안으로 들어섰다.
동양식 미닫이문이 쭉 늘어진 안식전의 복도.
복도를 따라 쭉 나아간 처용의 발걸음이 마지막 방, 복도 끝자락에서 멈추었다.
이윽고.
-드르륵.
처용이 문을 옆으로 밀며 안으로 들어섰다.
동양식 호텔의 느낌이 물씬 나는, 나뭇결이 드러나는 외벽과 인테리어.
거기에 비슷한 느낌을 주는 침상, 소파 등의 가구들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가장 중앙에 배치된 테이블.
그 테이블 위에서는.
-쩝. 쩝. 쩝. 쩝.
걸신이 들린 것처럼 무언가를 집어먹는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처용이 문을 열어 소리를 냈음에도, 들리지 않은 듯 집중하는 누군가.
-저벅.
테이블 쪽으로 처용이 점점 다가가며 발소리를 내자.
-휙.
그제야 인기척을 느낀 붉은 머리의 여성이 고개를 돌려 처용을 봤다.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치킨 박스와 콜라 캔.
입안에 넣은 치킨을 씹다 멈춘 채, 처용을 당황한 눈으로 바라보는 레나.
-저벅.
처용이 레나의 반응을 무시하고는 옆을 지나쳐 나아갔다.
레나는 눈동자를 제외한 모든 신체가 정지된 듯, 동공만이 처용을 따라 움직였다.
이윽고 처용이 레나와 마주 보는 테이블 정면에 앉아 팔짱을 꼈다.
처용과 레나가 서로를 노려본 상태로 약 5초 정도 정적이 흐르자.
“쿠, 쿨럭! 컥! 쿨러-헉!?”
갑작스럽게 목이 막힌 듯, 기침을 토했다.
차마, 입에 있는 것들을 뱉을 순 없는지 기침이 크게 나오는 것만큼은 참는 모습.
결국, 앞에 있던 콜라를 집어 들어 들이키고는 잠시 진정하는 시간을 가졌다.
“허, 죽을 뻔했네…….”
위기(?)를 넘긴 레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듯 말하자.
“내 숙적이었던 녀석이 사레가 들려 죽는 것만큼, 웃긴 상황도 없는데?”
레나를 바라본 처용이 아무 감정 없는 듯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
처용의 말에 레나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침묵해 보였다.
그런 레나의 반응에.
“반응을 보니, 학살의 마녀가 나에 대해 말해주었나 보군?”
처용이 확신을 담아 말했다.
레나가 처용의 확신 어린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을 이을 때.
-화아아!
돌연, 레나에게서 반투명한 증기가 흘러나와 바로 옆자리에 뭉쳐 들었다.
그리고.
-스르륵.
레나와 완전히 똑같은 모습을 한 여성이 나타났다.
하지만, 복잡한 표정을 자아내는 레나와는 달리.
“먼저 나를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옆에 나타난 또 다른 레나는 여유가 느껴지는 분위기를 보이고 있었다.
“이해 좀 해 줘, 이 녀석 며칠 동안 뭘 제대로 먹은 적이 없거든.”
연기가 뭉치며 나타난 레나, 아니 학살의 마녀가 옆에 있는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
레나가 옆에 나타난 자기 자신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는 작게 읊조리자.
“너가 아니라 ‘엘리스’.”
학살의 마녀가 레나를 향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이름을……!”
레나가 학살의 마녀에게서 흘러나온 이름을 듣고 인상을 찌푸리며 읊조렸다.
“엘리스?”
잠시 상황을 살피며 침묵하던 처용이 의문을 드러내며 묻자.
“어머니의 이름이지. 내가 가짜이니 내 이름을 포기하기로 했어.”
학살의 마녀가 별것 아니라는 듯,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시기의 마녀 레나와, 미래의 기억을 가진 데이터인 학살의 마녀.
그 둘은 하나의 몸을 공유하고 있는 상태였다.
“서로에게, 야, 너, 이렇게 부를 순 없는 노릇이니까.”
학살의 마녀, 엘리스의 말이 끝나자.
“보모 노릇이라도 할 생각인가?”
처용이 눈을 돌려 레나를 잠시 응시하며 말했다.
“내가 보모 노릇을 하지 않으면 이 녀석이 죽을 텐데?”
엘리스가 레나를 눈짓하며 말했다.
그 말에 반응하듯, 레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보통 레나의 성격대로라면, 엘리스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며 거부해야 했지만.
“…….”
레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만 찌푸리고 있을 뿐, 뭐라 반박하지 않았다.
날뛰지 않는 레나를 처용이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자.
“질릴 정도로 많은 대화를 한 결과라고나 할까?”
엘리스가 처용의 생각을 알아챈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처용이 엘리스의 말에 속으로 납득하고는.
“이건, 어떻게 가져간 거냐?”
-탁. 탁.
테이블 위를 탁탁 두들기며 물었다.
지금 테이블 위에 굴러다니는 먹거리들.
그것들은 모두 보물전의 정지장 안에 있었던 것들이었다.
처용을 포함한 태룡전의 대신들만이 손댈 수 있는 물건들.
아무리 학살의 마녀라 해도, 정지장 내부에 있던 물건을 스스로 꺼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처용이 의문을 자아내며 묻자.
“자비의 대신에게 부탁하니까. 밖에 있던 개미가 가져다주던데?”
엘리스가 작은 미소를 자아내며 답했다.
태초의 그릇은 시스템의 힘을 일부 이용할 수 있다.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데…….]
엘리스는 시스템 메시지의 기능을 이용해 보살에게 부탁을 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은 먹거리는 그런 부탁의 결과였다.
엘리스가 시스템 메시지를 띄워 보이며 능청스럽게 말하자.
“……그런가.”
처용이 눈을 감으며 납득한 듯 읊조렸다.
보살을 이용한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딱히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엘리스는 직접 태룡전에 찾아와 중요한 정보를 전한 인물.
아마 보살이 엘리스의 부탁을 들어준 이유는, 나름대로 보답을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너 역시 관철의 대신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은 것 같군?”
엘리스가 화제를 전환하며 처용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처용이 직접 이곳에 찾아온 이유.
아마 자신이 전달한 소식과 제약의 해제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 덕분에…… 이전에도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알았지.”
처용이 마녀의 말을 인정하며 말을 이었다.
“당장 풀지 못하는 의문 덩어리를 안겨준 덕분에 머리가 복잡해졌거든.”
“하루 신세를 지기도 했으니, 내가 아는 것들에 한에서는 말해주지.”
엘리스가 처용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파악한 듯, 먼저 본론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잠시 생각하는 듯, 짧게 침묵한 처용은.
“계승자가 태초신이 되는 방법, 태초신을 임명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아는 게 있나?”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태초의 그릇을 지녔던 학살의 마녀라면 혹시 아는 게 있지 않을까 싶었으니까.
그러나.
“뭐, 뭣!?”
엘리스는 처용의 질문에 여유로웠던 표정이 사라지고 놀란 듯한 반응을 보였다.
“계승자가 태초신이 될 수 있다고?”
“……젠장, 너도 몰랐던 건가?”
처용이 엘리스의 반응에 낭패감 어린 표정을 지으며 읊조렸다.
혹시 모를 기대를 가지긴 했지만, 역시나 학살의 마녀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내가 아는 건, 계승자는 다음 우주를 위해 중요한 선택을 하는 자. 이 정도뿐이다.”
그녀가 계승자에 대해 아는 것은 여래가 아는 것과 비슷한 정도에 불과했다.
“제길…… 도대체 그놈의 성장이 뭐길래.”
그나마 단서를 얻을 방향이 사라지자 처용이 답답한 침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때.
“계승자의 성장…….”
처용의 중얼거림을 들은 엘리스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듯 잠시 눈을 감으며 침묵했다.
그리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짐작 가는 단서는 있다.”
감았던 눈을 뜨며 진지하게 말했다.
“뭐냐?”
“흐음…….”
처용의 물음에 생각을 정리하는 듯, 침음을 흘린 엘리스가 입을 열었다.
“반신이 아닌, 온전한 신격에 오르는 것.”
반쪽짜리 신이 아닌, 온전한 신명을 얻어 완전한 신격에 오를 것.
이것이 엘리스가 짐작한 계승자의 ‘성장’이었다.
“보아하니, 너는 종말의 막바지까지도 온전한 신격에 오르지 못한 듯 보이는데.”
엘리스가 회귀 전 처용을 떠올리고는 나름 상황을 짐작하며 말하자.
“……맞다.”
처용이 엘리스의 말에 긍정했다.
“절대 불가능하다고 여겼었던 400레벨, ‘초월’의 벽을 돌파했음에도 온전한 신격을 얻지 못했지.”
“4, 400레벨…….”
옆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레나가 처용의 말에 흔들리는 눈빛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지금 시기의 헌터들 중 정점이라 불리는 S급 헌터들도 200레벨도 채 안 되었었다.
그런데 뭐? 400레벨?
레나는 그 까마득한 높이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 미친 괴물 놈이, 기어이 그 벽까지 넘어설 줄이야.”
학살의 마녀, 엘리스 역시 질린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처용과 같은 반신에 도달했었던 학살의 마녀는 400레벨의 벽을 넘지 못했었으니까.
그리고 엘리스의 질린 표정이 곧 어둡게 바뀌고는.
“그럼에도 조크-크타니드를 이기지 못했군?”
처용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에.
“……그래.”
처용이 작게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답했다.
400레벨을 넘어선 처용조차도 악의 종주를 이기지 못했다.
패배에 패배를 거듭하며 발버둥 친 끝에 최후까지 살아남은 생존자가 되었을 뿐.
그 이후 악의 종주 앞에서 자폭하는 것으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온전한 신격에 오르는 것…… 이것도 단서가 없긴 매한가지인데.”
처용이 답답한 한숨을 섞어 중얼거리듯 말했다.
계승자에 대한 비밀부터 시작해, 단서를 얻고 얻어 여기까지 왔지만, 결국 의문만이 남았다.
“당분간 너에 대한 사실을 숨기는 게 좋을 거야.”
엘리스가 계승자에 대한 권한을 언급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무려 태초신이 될 자격과 임명권을 지닌 계승자.
이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좋을 게 없었다.
특히, 성좌들에게 알려지는 순간, 아주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컸다.
그러면 적들이 이 상황을 이용할 테니까.
“나도 그럴 생각-.”
처용이 엘리스의 말에 동의하며 말을 잇다가.
“……아니지, 굳이 숨기려 애쓸 필요는 없겠군.”
잠시 말을 끊고 다시 곰곰이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한낱 하계종이 태초신이 될 자격과 임명권을 가지고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난리가 날 테지.”
“그래, 그걸 알면서-.”
엘리스가 처용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다가.
“……무슨 생각이냐?”
하던 말을 끊고 처용에게 의도를 물었다.
처용은 생각 없는 바보가 절대 아니었다.
자신이 관리하기 귀찮다는 이유로 일을 방치하는 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무언가 다른 의도가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 결정적인 증거로.
‘웃어?’
처용의 입가에 드리운 작은 미소.
-징징대지 말고 네가 직접 해결해라.
자신을 레나의 육체에 이식시킬 때 지어 보였던 미소였다.
무언가 좋은 생각을 떠올렸을 때, 처용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런 엘리스의 짐작이 맞다는 듯.
“즉,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는 셈이지.”
처용의 미소가 짙어지며 그 이유를 이야기했다.
계승자인 처용이 스스로가 가진 권한 때문에 성좌들의 눈치를 볼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내가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반대로 놈들이 내 눈치를 봐야겠지.”
처용은 성좌들이 자신의 눈치를 봐야 한다고 말했다.
“괴물 같은 놈…….”
엘리스가 성좌들을 이용할 생각을 하는 처용을 보며 읊조렸다.
그리고.
“많이 변했군. 수호신.”
과거 숙적이었던 처용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정의’ 그 자체였던 처용.
반면에 지금의 처용은 ‘정의’로운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종말을 직접 두 눈으로 겪어 봐라. 사람이 안 변하나.”
처용이 나름 진지한 목소리로 답하자.
“……인정한다.”
엘리스가 처용의 말에 동의했다.
변한 것은 처용만이 아니었다.
역사상 가장 많은 생명체를 학살했던, 악마보다도 더 악마 같았던 인간.
그런 학살의 마녀가 지금은 과거 사람들을 지키는 수호신이었던 처용과 협력하고 있었다.
“가기 전에 좋은 소식을 하나 알려주지. 한처용.”
자신 역시 변했다는 것을 인지한 엘리스가 작은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직 조크-크타니드에게서 살아남은 태초의 마수가 하나 있다.”
처용을 향해 나름 중요한 정보를 이야기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