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화
안드로말리우스가 사방에 불길을 일으킨 순간.
‘도움이 필요합니다. 크루마 님.’
처용이 백염의 힘에 감각을 집중하며 말했다.
그러자.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처용의 목소리를 들은 크루마가 즉각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는 깊은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얼마 전.
-자비의 대신을 유인해 잡아내고 우리를 끌어내라고 하더라.
카투라에게 처용과 여래, 태양신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 들었었다.
그 말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너무나도 분하군요.
크루마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차올랐다.
동시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금의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판데모니움으로 쳐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시스템이 각 차원 간 벽을 나눈 이상, 판데모니움에 갈 방법이 없었다.
자신과 카투라를 노리는 모든 존재들을 없애 버리고 싶었지만, 당장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비록 크루마가 태초의 마수 중, 과격한 성향이라고는 해도 바보는 아니었다.
벌써 형제들, 태초의 마수들 중 사냥당한 이를 확인한 것만 둘이었다.
이젠 정말로 카투라와 크루마, 둘이 마지막 생존자일 가능성이 컸다.
분노에 몸을 맡겨 판데모니움에 쳐들어간다 해도, 개죽음만 당할 뿐이었다.
자신이 죽으면 악의 종주가 힘을 흡수하여 더 강해질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남은 카투라와 그녀를 지키는 모든 이들이 위험해진다.
결국, 여래와 지상에서 노력 중인 처용을 믿고 분노를 식혀야만 했다.
그렇게 분노를 가라앉히던 와중, 처용에게서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이 들려왔다.
[저 시커먼 도마뱀이 나와 누님을 노리는 놈의 하수인이구나.]
처용에게 계승된 백염을 통해, 작금의 상황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
처용과 대치하고 있는 존재는, 판데모니움의 대악마.
악의 종주를 따르는 하수인 중 하나였다.
[기꺼이 도와주마.]
크루마가 이글거리는 눈빛을 번뜩이며 말하자.
‘감사합니다.’
처용이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전했다.
그리고.
“소환 – 크루마.”
크루마를 소환했다.
그 순간.
-화륵!
주변을 모조리 불태우던 검보랏빛의 화염이 한순간 크게 뒤틀리며 몸집을 키웠다.
[흐음?]
갑작스럽게 화염이 커지자 안드로말리우스가 의문을 자아냈다.
사방을 불태우는 검보랏빛의 화염은 ‘플레임 베놈’이라는 권능이었다.
화염의 성질을 띤 맹독으로 주변 일대를 모조리 불살라 버리는 힘이었다.
그런 자신의 권능이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에 밀려나고 있었다.
안드로말리우스가 의문을 자아낼 때.
-화르륵! 화륵!
사방을 불태우는 검보랏빛 화염의 밑바닥에서 돌연 새하얀 화염이 피어났다.
동시에.
-화르륵! 타닥! 탁!
새하얀 화염이 검보랏빛의 화염을 집어삼키며 덩치를 키우기 시작했다.
보랏빛으로 가득한 세상에 하얀 물감이 떨어져 번지듯, 주변이 점점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심지어 새하얀 화염은 안드로말리우스의 권능 ‘플레임 베놈’만을 태우고 있었다.
그 외 숲과 저택 등 모든 것들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새하얀 화염이 검보랏빛 화염에 주변이 불타는 것을 막고 있었다.
[뭐, 뭐냐? 내 권능이-!]
안드로말리우스가 자신의 권능이 잡아먹히는 것을 보며 경악했다.
밀리지 않기 위해 마기를 더 강하게 내뿜으며 힘을 쏟았지만.
-화르륵! 화륵!
새하얀 화염과의 힘 싸움에서 점점 밀리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불꽃은 뭐냔 말이다!]
-슈우우! 쿠궁!
안드로말리우스가 화염이 크게 번진 숲, 지상 쪽으로 착지해 새하얀 불꽃 앞에 서며 소리쳤다.
-우우웅!
여섯 개의 팔에 들린 무기에 마기가 솟구치며 크게 뿜어져 나왔고.
-사각! 사가각!
안드로말리우스가 칼날을 빠르게 휘둘러 새하얀 불꽃들을 베어 버렸다.
안드로말리우스의 마기에 의해 잘려 나간 새하얀 화염들이 사그라졌다.
그러나.
-화르륵!
한순간의 현상일 뿐, 곧 다시 화염이 피어나며 덩치를 키웠다.
[당장 꺼져라!]
안드로말리우스가 마기를 모아 새하얀 화염을 베어 버리고, 터트리고, 독기를 모아 뒤덮어도.
-화륵. 화르르-!
새하얀 화염은 완전히 죽지 않고 무한히 재생했다.
[어떤 놈이냐!? 감히 누가 내 사냥을 방해하는 것이냐!?]
안드로말리우스가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강력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새하얀 화염.
이 기운은 조금 전까지 싸우던 처용의 힘이 아니었다.
분명, 다른 누군가가 개입한 것이었다.
안드로말리우스가 다시 한번 칼날을 휘둘러 새하얀 화염을 꺼트릴 때.
[나다. 애송아.]
-화르륵!
돌연, 주변을 크게 울리는 낮은 목소리와 함께 허공에 새하얀 화염들이 뭉쳐 들었다.
-화륵! 스스스.
화염이 뭉쳐져 나타난 것은, 대충 어림잡아 20미터는 넘는 거대한 파충류의 앞다리.
-후우우! 쿠쿠쿵!
그 앞다리가 안드로말리우스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크아아아-!?]
위에서 내리찍는 강렬한 충격에, 바닥으로 처박힌 안드로말리우스가 괴성을 토했다.
-쿠구구!
위에서 밟아오는 앞다리의 힘이 점점 거세졌고.
-화르륵. 화륵. 스스…….
안드로말리우스를 밟은 앞다리에서부터 새하얀 화염이 타오르며 크기를 키워나갔다.
동시에 화염 속에서 거대한 형체가 만들어졌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300미터는 넘는 압도적인 크기의 초거대 괴수.
끊임없이 흐르며 불꽃을 피워내는, 용암으로 이루어진 외피.
여섯 개의 두툼한 다리와 도룡뇽과 두꺼비가 합쳐진 듯한 외형.
-우우웅!
지상에 현현한 크루마의 분신체가 눈을 뜨자, 여섯 개의 보랏빛 눈동자가 눈빛을 빛냈다.
[네놈은…… 태초의 마수!]
안드로말리우스가 위에서 내리찍는 크루마의 발을 지탱하듯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촤아악! 샥!
크루마의 앞발 일부분을 베어냄과 동시에 땅을 박차 빠져나왔다.
[네놈을 잡아다 그분께 바쳐주마!]
빠져나온 안드로말리우스가 곧장 날개를 펴며 날아오르고는 크루마를 향해 돌진했다.
[건방진 하수인 따위가!]
-화아아!
크루마가 사방에 강렬한 열기를 내뿜고는 안드로말리우스를 향해 입을 크게 벌렸다.
-슈르르륵!
용암처럼 타오르는 새빨간 화염이 크루마의 입안에 일렁였고.
-콰아아아!
뭉쳐진 화염이 폭발하며 안드로말리우스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베놈 티스!]
-스르릉!
안드로말리우스가 여섯 개의 팔을 앞으로 모으며 칼날에 마기를 집중하자.
-위이잉!
칼날에 일렁이는 마기가 합쳐지며 길고 날카로운 보랏빛의 칼날로 변했다.
-쐐에에-엑!
안드로말리우스는 크루마의 브레스를 피해 나선으로 비행하며 빠르게 앞으로 돌진해 나아갔다.
이윽고 안드로말리우스가 크루마의 머리 부근에 도달했고.
[쓸데없이 덩치만 크다고 다 강한 줄 아느냐!]
한곳에 뭉쳐져 거대하게 변한 보랏빛 칼날을 크게 휘두르며 소리쳤다.
-위이잉!
날카로운 절삭음과 동시에 보랏빛의 긴 선이 그어졌고.
-촤아아악!
크루마의 머리가 잘려 나갔다.
[별거 아닌-.]
크루마의 분신체를 단번에 참수한 안드로말리우스가 미소를 지은 순간.
-화르르륵!
머리가 잘린 크루마의 분신체 절단면에 백염이 타올랐다.
잘려 나간 머리 역시 백염과 함께 타오르며 공중에 떠올랐다.
잘려 나간 머리가, 도로 붙어 재생하는 듯 보였지만.
-화르륵. 스스스.
머리가 붙어 재생하는 것이 아닌, 잘려 나간 머리와 몸이 따로 재생하고 있었다.
그 결과.
-크아아아!
포효를 내지르는 크루마의 분신체 두 마리가 나타났다.
[이……! 이, 무슨 터무니없는-!]
안드로말리우스가 당황한 순간.
-후우우웅!
크루마의 육중한 꼬리가 채찍처럼 휘둘러지며 안드로말리우스를 덮쳐들었다.
[어딜!]
안드로말리우스가 여섯 개의 팔을 한 지점에 모아 동시에 휘두르며 크루마의 꼬리를 쳐 내었다.
하지만 그 결과.
-촤아아!
크루마의 꼬리가 잘려 나갔다.
[……이런, 제길!]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안드로말리우스가 침음을 내었다.
피하거나 날을 세우지 않고 막았어야 했음을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후회해 봤자 늦은 상황.
-화르르륵!
크루마의 분신체가 하나 더 늘어나 버렸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잠시 후퇴했다가, 전력을 가다듬고 다시 싸움에 임하는 것이 현명했다.
그러나, 안드로말리우스는 지금 소환진으로 현현한 상태.
소환된 구역에서 일정 이상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방법을 찾으려 고민한 안드로말리우스가 하늘로 날아오르고는.
[형체도 없이 전부 녹여주마!]
-쿠구구구!
마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리며 가장 강력한 권능을 발현했다.
[베놈 하이브!]
-슈르르르르-!
안드로말리우스 주변으로 검은 마기와 독기가 휘몰아치더니.
-캬아아!
-샤아아!
수백 마리의 검은 독사들이 사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안드로말리우스가 지닌 독 중, 가장 강력한 독이 응축된 권능.
그 권능으로 만들어진 독사들이 주변에 퍼지자.
-치이이! 치이!
이 일대를 빼곡하게 차지하던 백염이 꺼지며 주변을 녹이기 시작했다.
[집어삼켜라!]
안드로말리우스가 크루마를 가리키며 소리치자.
-샤아아!
-캬아!
검은 독사들이 일제히 머리를 돌려 크루마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모조리 태워주마.]
크루마가 안드로말리우스를 향해 입을 크게 벌렸다.
-우우웅.
이번엔 새빨간 불꽃이 아닌, 하얀 불꽃.
백염의 힘이 크루마의 입안에 모여들며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백회(白灰)!]
-콰아아아!
새하얀 화염이 나선을 그리며 안드로말리우스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콰아아!
-콰아!
다른 두 분신체 역시 입안에 백염을 모아 브레스를 쏘아냈다.
-쿠구구! 쿠구!
무한히 쏟아져 나오는 독사들과 백색의 화염이 서로 충돌해 힘 싸움을 시작했다.
그때.
“나를 잊으면 곤란한데?”
처용이 안드로말리우스의 뒤에 나타나며 싸늘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런 젠-!]
안드로말리우스가 차마 반응하기도 전에.
“극 이기어술 - 천체극섬!”
-스르릉! 스릉!
열여섯 개의 무구가 안드로말리우스를 에워싸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마, 막아라!]
안드로말리우스가 급하게 ‘베놈 하이브’의 일부를 회수했고 주변을 감싸 방어했다.
그러나.
-사각! 사가각!
처용의 무구가 칼날을 빛내며 지나간 순간, 독사들이 뭉텅뭉텅 잘려 나갔다.
결전기로 조종 중인 처용의 무구들에는 모두.
-우우웅!
파마의 신력과 신살자의 힘이 두껍게 둘러져 있었다.
안드로말리우스가 베놈 하이브의 힘을 오로지 처용에게 집중하면 쉽게 막을 수 있었지만.
-쿠화아아아!
전방에는 새하얀 화염이 안드로말리우스를 불태울 기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완전히 앞뒤로 포위된 상황.
심지어.
-촤아악! 촤악!
몇몇 무구들이 독사들을 뚫고 안드로말리우스의 검은 비늘을 베어냈다.
이전처럼 단순히 손상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검은 핏물이 흘러나올 정도로 얕지 않은 자상이 새겨졌다.
전과는 다르게 파마의 신력과 신살자의 힘을 극한으로 압축시킨 결과였다.
[이놈!]
안드로말리우스가 육체에 새겨진 상처를 보며 경악했다.
그때.
-스르릉!
처용이 역천의 절을 머리 위로 치켜들며 안드로말리우스를 향해 돌진했다.
[건방진 먹잇감 따위가!]
안드로말리우스가 다급하게 몸을 조금 틀고는.
-우우웅!
오른쪽 가장 위의 팔 하나를 뒤로 뻗어 마기를 내뿜었다.
-까강!
처용이 내리친 역천의 절이 안드로말리우스의 갈고리 칼날에 막혔다.
그 순간.
-샤아아!
-캬아!
주변을 배회하던 두 마리의 독사가 처용의 목과 옆구리를 물었다.
[꼴 좋구나!]
안드로말리우스가 그 모습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베놈 하이브는 오랜 시간 축적한 맹독을 외부로 방출하는 권능.
지금껏 보인 독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맹독이었다.
아무리 처용이라 해도,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스르르르.
처용의 몸이 검게 일렁이더니, 마치 비에 맞은 물감처럼 녹아내리며 사그라졌다.
동시에.
-스르릉!
처용이 쥐고 있던 역천의 절이 저절로 움직이며.
-촤아악!
앞으로 뻗고 있던 안드로말리우스의 팔을 베어 냈다.
[이-!]
안드로말리우스가 당황할 때.
-위이이잉!
녹아내린 처용의 분신 뒤로 진짜 처용이 두 손을 앞으로 뻗으며 나타났다.
항마의 화신 역시, 처용을 따라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처용의 손아귀에는 당장이라도 터질 듯, 강렬한 에너지가 모여들며 요동치고 있었다.
이윽고 에너지가 최대치에 달한 순간.
“종말의 백야.”
처용이 카투라에게서 계승 받은 그녀의 초월기를 사용했다.
-!!
굉음이 울림과 동시에 새하얀 섬광이 안드로말리우스를 향해 쏘아졌다.
[크아아아!!]
종말의 백야에 직격당한 안드로말리우스가 비명을 토해냈다.
[나, 나를 감싸-!]
급하게 베놈 하이브를 자신의 주변에 두르며 어떻게든 저항하려 했지만.
-화르르륵!
전방에 쏟아붓던 힘이 빠진 탓에, 이번엔 크루마의 백회가 덮쳐들었다.
앞에서는 크루마의 백염, 뒤에서는 카투라의 종말의 백야.
[크, 크윽! 크아아!]
안드로말리우스는 어떻게든 버텨 보려 했지만.
-파사사. 파사……!
주변에 방어막처럼 두른 베놈 하이브가 점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네놈의 독으로는 이걸 막을 수 없어.”
처용이 발악하는 안드로말리우스를 향해 낮게 읊조리며 말했다.
안드로말리우스는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발현한 맹독의 권능은 태초의 마수가 발현하는 권능을 막지 못하고 점점 밀려났다.
그리고.
“상성상, 네놈이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안드로말리우스.”
상성의 문제도 있었다.
애초에 안드로말리우스의 속성은 독.
반면에 크루마의 속성은 화염이었다.
생명을 잡아먹는 맹독과 무한한 생명력을 불태우는 백염.
크루마가 이 전장에 난입한 순간부터, 안드로말리우스에게 승산은 없었다.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안드로말리우스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처용의 말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판데모니움에서도 그놈의 ‘상성’ 때문에 대악마 말석에 자리했다.
상성만 아니었으면 더 높은 자리로,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주어진 태생을 극복할 순 없었고 대악마 말석의 자리를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인정할 수 없다! 인정할 수-!]
안드로말리우스가 마지막 힘을 모두 쏟아내며 소리친 순간.
-쿠구구!
베놈 하이브가 완전히 무너지며 마기가 흩어졌다.
[안-!]
안드로말리우스가 마지막 단말마를 내뱉고는.
-쏴아아-!
새하얀 섬광과 불꽃에 집어삼켜지며 사그라졌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