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화
세상이 회색빛으로 변하며 멈추고 눈앞에 마녀가 나타나자.
‘이건 뭐냐?’
처용이 눈앞에 나타난 마녀를 향해 전음을 보내며 물었다.
정지된 대상에는 자신 또한 포함되어 있었기에 입을 열어 말할 수 없었다.
그런 처용의 전음에.
“부득이하게 네 심상 세계의 힘을 빌려 썼다.”
마녀가 태연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아무리 심상 세계의 힘을 빌렸다 해도, 공간 정지를 사용했다고?’
처용이 마녀의 대답에 경악하며 물었다.
그러자.
“이건 공간 정지가 아니야. 네 사고를 극한으로 가속시킨 거지.”
마녀가 처용의 말을 정정하며 말했다.
회색빛으로 변하며 정지된 주변 공간.
얼핏 보면 마녀의 권능인 공간 정지처럼 보였다.
그러나 주변을 자세히 관찰하면.
-스르르.
아주 미세하게,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직접 나서겠다 이거냐?’
처용이 마녀에게 묻자.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지만, 이게 고작이더라고.”
마녀가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뭘 원하는 거냐?’
처용이 진지한 목소리로 마녀에게 진의를 물었다.
지금까지 조용히 있다가, 왜 지금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을까?
대충 예상하기로는 4층에서 고전 중인 마녀 때문인 듯 보였다.
그런 처용의 예상이 맞다는 듯.
“네놈한테 부탁하는 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학살의 마녀가 4층에 있는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왜 네 부탁을 들어줘야 하냐!’
처용이 마녀의 말에 거칠게 답하자.
“이 멍청한 수호신 녀석, 저 녀석이 잡히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는 있나?”
마녀가 경고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전 시간대처럼 태초의 그릇에 바알이 낙인을 새기겠지, 그리고 그 힘을 악의 종주에게 양도할 것이고…….”
그녀에 입에서 나온 말은, 회귀 전 자기 자신이 직접 당했던 일들이었다.
“악의 종주가 태초의 그릇을 차지하는 순간, 그는 시스템의 장벽을 넘나들 수 있게 된다.”
마녀의 경고 어린 말에.
‘……뭐라고!?’
처용의 입에서 의문과 경악이 튀어나왔다.
회귀 전, 악의 종주가 지구에 직접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이유는 시스템의 붕괴 때문이었으니까.
‘시스템의 방벽이 있는 이상, 놈은 지구에 발을 들일 수 없다!’
처용이 마녀의 말에 반박하듯 말하자.
“단순히 시스템의 장벽이 무너진 것으로 그 거대한 존재가 지구에 발을 들일 수 있었을까?”
마녀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과거를 다시 잘 생각해 봐라, 시스템이 무너진 순간, 지구로 침공한 건 악마들이었다. 놈이 아니라.”
“…….”
마녀의 말에 처용이 다시 한번 생각을 해 보았다.
확실히 시스템이 무너진 순간, 지구로 침공한 것은 악마의 군세였다.
그리고 지구의 생존자들이 완전히 궁지에 몰린 뒤에 크타니드가 나타났다.
‘크타니드가 바로 나타나지 못한 이유가…….’
처용이 과거를 생각하며 읊조리자.
“태초의 그릇, 나를 차지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지.”
마녀가 처용이 모르던 과거를 이야기하며 말했다.
‘젠장……!’
상황을 파악한 처용이 속으로 침음을 내었다.
마녀의 말이 모두 진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 해도, 지금 마녀가 의회주들에게 잡혀 판데모니움으로 넘어가는 것은 좋지 않았다.
“그러니, 괜한 고집부리지 말고 저 아이를 구해.”
마녀가 처용을 향해 말했다.
“다른 놈들을 모두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태초의 그릇이 저들 손에 넘어가는 것만큼은 막아.”
지금 이 장소에 있는 이들.
마녀는 제시카를 포함한 다른 이들을 포기하고 태초의 그릇에 집중하라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다.
태초의 그릇이 악의 종주에게 넘어가는 순간, 그가 지구에 강림할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그건 최악 중에서도 가장 최악이었다.
하지만 처용은.
‘……시끄럽다.’
순순히 마녀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
“이 어리석은 새끼가-.”
마녀가 협조적이지 않은 처용의 태도에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말할 때.
‘하나만 물어보자. 마녀.’
처용이 진지한 목소리로 마녀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네 목적이 뭐냐?’
처용의 진지한 물음에.
“내…… 목적이라?”
마녀가 인상을 펴고는 처용의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하며 읊조렸다.
“……한 단어로 설명하자면 이게 딱 맞겠네.”
짧게 생각하며 잠시 침묵한 마녀가 입을 열었다.
“깽판.”
마녀의 입에서 한 단어가 흘러나오자.
‘……깽판?’
처용이 의문을 자아냈다.
그런 처용의 의문에 답하듯.
“그래, 내게 강제되었던 운명을 깨부수고 판을 뒤집는 것. 그게 내 목적이다.”
마녀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과거의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만큼은 막는다. 네놈이라면 이게 무슨 말인지 알 테지.”
‘……알다마다.’
처용은 마녀의 말에 긍정했다.
과거에 벌어졌던 비극과 실수가 되풀이되는 것을 막는다.
이건 처용이 새로운 미래를 그려내며 항상 다짐하는 마음가짐이었다.
처용이 긍정하자.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말해주지.”
마녀가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를 도와주면, 바알 그 새끼를 조지는 것만큼은 적극적으로 협력해주마.”
증오와 복수심 가득한 마녀의 목소리.
처용은 악몽 속에서 보여주었던 마녀의 모습을 봤기에 지금의 말이 진실임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좋다. 협력하지.’
고민 끝에 처용은, 마녀를 돕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하지만, 네 방식대로는 하지 않을 거다.’
다른 이들을 모두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시기의 마녀를 구하는 것.
처용은 그 의견에 따를 생각이 없었다.
“네가 아무리 과거 이 시간대에 비해 강하다 해도…… 제시간 안에 목표를 모두 이룰 순 없어.”
마녀가 주변을 다시 둘러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완전하게 현현한 안드로말리우스의 화신체.
고레벨의 상급 마인 다섯과 기갑 마인이 되어버린 오거 그리고 의회주 릴까지.
반면에 이쪽은 제시카와 빌리, 둘 뿐이었다.
처용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눈앞에 이들을 모두 감당하며 마녀를 구하는 건 무리였다.
게다가 마녀와 대치하는 의회주 둘이 구경만 할 리도 없었다.
“항마의 화신을 쓴다 해도, 늦을 거다.”
마녀가 4층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디언을 소환하고 의회주 둘을 상대하며 버티는 과거의 자신.
하지만, 그 짧은 사이에 가디언의 여섯 개의 팔 중 오른쪽 세 개가 솔저의 의해 날아갔다.
잭이 발휘하는 중력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는 상황.
곧 마녀는 잭의 손에 붙잡힐 것이고 대악마에게 바쳐질 것이다.
마녀가 정지된 전장을 둘러볼 때.
‘1분 안에 해결할 테니…… 이걸 풀어라.’
처용이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로 진지하게 말했다.
마녀는 처용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하고는.
“오. 사. 삼.”
작은 미소를 지으며 카운트다운을 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이…… 일.”
마녀의 입에서 숫자 ‘1’이 흘러나온 순간.
-피이이!
회색으로 가득했던 주변의 색이 원래대로 돌아옴과 동시에.
-쿠구구! 콰콰!
정지되었던 시간이 다시 흘러갔다.
-푸화아아아!
안드로말리우스가 내뱉었던 맹독의 브레스도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다시 처용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본래 시간이 멈추기 전, 처용은 그 공격을 태극권으로 막으려 했었다.
하지만.
“결전기, 팔괘 – 태극천체진!”
처용은 태극권이 아닌, 결전기를 사용했다.
-스르릉! 스릉! 스릉!
열네 개의 무구들이 처용 주변에 나열되었다.
그 중, 차륜 도끼와 대검을 포함한 일곱 개의 무구가 브레스 앞을 막아섰다.
-스릉! 촤아아!
처용의 앞을 막아선 일곱 개의 무구와 안드로말리우스의 브레스가 격돌했다.
동시에.
-스릉! 스르릉!
다른 일곱 개의 무구가 측면으로 빠져나가며 안드로말리우스를 향해 나아갔다.
[이 귀찮은 날파리들이!]
-쐐에엑! 차카캉!
안드로말리우스가 손톱을 세우고 두 팔을 크게 휘두르며 다가오는 무구들을 쳐냈다.
그렇게 처용의 결전기가 안드로말리우스의 시선을 잠시 끌어준 찰나.
-스릉.
처용이 아공간에서 작은 단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동시에.
‘포확, 팔괘축기.’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포확의 힘과 그 힘을 저장하는 팔괘축기.
두 가지의 힘을 동시에 사용하며 단검에 힘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짧고 빠르게 집중하여 힘을 불어넣은 후.
-휙!
단검에 결전기의 힘까지 더해 어디론가 강하게 내던졌다.
***
“젠장! 빨리 방법을 말해!”
의회주 둘을 상대로 버티던 마녀가 거칠게 소리쳤다.
가디언을 소환하며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지만, 이 자리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쿠구구! 쿠구!
잭이 발휘하는, 중력을 가중시키는 스킬로 인해 몸이 점점 더 짓눌리고 있었고.
-사가각! 사각!
그 틈을 노린 솔저가 가디언의 팔을 또 하나 잘라내었다.
동시에 가디언의 몸을 찢고 마녀를 향해 다가오려 시도했다.
“팬텀 디펜시브!”
-캬아아아!
마녀가 악령들을 소환하며 다가오는 솔저를 향해 내보냈다.
“이 종간나 년이 발악을-!”
-촤아악! 촤악!
솔저가 손톱을 휘둘러오는 악령들을 베어냄과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붙어라!”
마녀는 솔저를 밀쳐내자마자, 악령들을 가디언에 융합시켰다.
-스르르륵!
가디언이 악령들을 흡수하자 잘려 나간 팔이 곧장 재생되었다.
그때, 잭이 오른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는.
“기요틴 그라비티.”
마치, 손에 쥔 칼날을 내리치듯, 손을 빠르게 아래로 내리며 스킬을 발동했다.
그러자.
-쐐에에엑! 콰쾅!
허공 위에서 강렬한 충격이 전해졌다.
-캬아아!
가디언이 마녀를 몸으로 감싼 덕에 버티고는 있었지만.
-우드득! 우득!
보이지 않는 거대한 칼날에 짓눌리는 듯, 가디언이 점점 반으로 쪼개지고 있었다.
“이익!”
마녀가 마기를 더 끌어 올리며 어떻게든 버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때.
“잡았다.”
-촤아아!
솔저가 가디언의 옆구리를 베어 뜯어내고는.
-촤라라!
왼손에 붙들고 있던 판테라움 사슬을 끌어당겼다.
“으!”
힘을 모으며 버티던 중에 들어온 충격이라, 마녀가 저항하지 못하고 끌려갔다.
동시에.
“그라비티 블레이드!”
-후욱! 후우욱! 콰쾅!
잭이 중력의 힘을 모아 만들어낸 칼날을 가디언을 향해 내리쳤다.
결국.
-쿵! 쿠쿵! 쾅!
마녀의 가디언이 더 버티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칼날에 조각나며 사그라졌다.
-촤르르륵! 쿠궁!
마녀를 끌어낸 솔저가 사슬을 쥐고 바닥을 내려치자.
“커헉!”
사슬에 끌려 내던져진 마녀가 그대로 바닥에 틀어박혔다.
“그라비티 홀드.”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잭이 중력을 집중시키며 마녀의 몸을 구속시켰다.
“커으…… 윽!”
-우드드득!
강렬하게 내려찍는 중력의 힘에 의해 마녀의 입에서 고통 섞인 침음이 흘러나왔다.
“빨리…… 방법을!”
마녀가 다시 한번 시스템을 향해 방법을 물었지만.
[이 상황을 자력으로 탈출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절망적인 답변이 들려올 뿐이었다.
“이런, 씨발!”
“크흐흐.”
마녀의 욕설에 잭의 입에서 미소가 흘러나왔다.
“쓰레기 같은 년, 내 가문을 위해 사용되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
마녀를 잡는 데 성공했다.
역천군주는 대악마에 의해 발목이 붙잡힌 상황이었다.
목표를 확보했으니, 이제 미리 확보해 둔 로스차일드의 기술들을 챙겨 퇴각하면 되었다.
“로스의 기술을 확보하지 못한 게 아쉽지만…… 네년을 잡았으니 상관없겠지. 크흐흐.”
-쿠구구!
잭이 마녀에게 가하는 중력을 높이며 미소를 흘릴 때.
-쐐에에에엑!
빠른 속도로 쏘아지는 단검 하나가 잭의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이런!”
-쿠구구!
잭이 마녀에게 가하던 중력의 힘을 일부 회수하여 자신 주변에 펼쳤다.
-까가가강!
그 영향을 받은 탓인지, 단검의 궤도가 틀어지며 빗나갔다.
“역천군주! 이제 와 방해해 봤자 늦었다!”
단검을 피한 잭이 처용을 향해 비웃음을 던지며 소리쳤다.
“과연 그럴까?”
처용이 그런 잭의 비웃음에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 순간.
-샤아아악!
빗나간 단검이 나선을 그리며 회전하고는.
-쐐에에엑!!
잭을 향해 쏘아질 때보다, 더 빠르게 어디론가 쇄도했다.
이윽고.
-푸욱!
칼날에 살점이 박히는 소리와 함께 단검이 목표에 명중했다.
그 목표는 다름 아닌.
“커허?”
바닥에 짓눌린 채 정신을 잃어가는 마녀였다.
“이런!”
잭이 눈을 크게 뜨며 마녀를 바라봤다.
지금 마녀가 죽는 것은 곤란했다.
그녀가 살아 있어야 그 안에 있는 태초의 그릇을 온전히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까.
잭이 마녀를 확인하고는.
“……크흐흐. 마지막 기회를 날렸구나.”
처용을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단검이 마녀의 심장을 노리고 나아갔지만, 그녀 주변에 펼쳐진 중력 탓에 빗나간 듯 보였다.
“하하하! 네놈이 졌다. 역천군주!”
잭이 환호를 내지른 순간.
“재수 없게 쳐 웃고 지랄이야. 이 개새끼가.”
기절한 줄 알았던 마녀의 입에서 낮고 시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후두둑.
잭의 스킬에 영향을 받지 않은 듯, 아무렇지 않게 몸을 털며 일어났다.
“뭐?”
“어떻게 된-?”
잭과 솔저의 입에서 의문이 흘러나온 순간.
“오메가 그라비티 마운트.”
-콰콰콰콰쾅!!
마녀가 중력을 조작하는 잭의 스킬을 그대로 흉내 내 사용했다.
아니, 지금의 잭이 발휘하는 스킬보다 상위 단계의 스킬이었다.
“커어어어-!?”
강렬한 중력의 힘에 짓눌린 잭이 바닥에 틀어박히며 경악을 토해냈고.
“이…… 어떻게…… 이런?”
솔저 역시 두 팔과 다리로 바닥을 댄 채 엎어져 읊조렸다.
두 의회주가 순식간에 역으로 제압당한 상황.
“후-.”
마녀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짧고 굵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백수처럼 놀지 말고.”
안드로말리우스를 상대하던 처용이 마녀를 향해 말했다.
“나가서 직접 일해라!”
처용의 외침이 울리자.
“강제 취직이라…… 흐흐.”
마녀의 입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고맙다 이 망할 놈아.”
처용의 말에 대답하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