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화
고급 원목으로 제작된 가구들이 배치된 유럽식 분위기의 방 안.
-탁. 탁. 탁.
그 안에서 지팡이로 땅을 찍는 듯한 반복적인 소음이 울렸다.
그리고.
“그러게 고분고분 내 말을 들었으면 좋지 않았나?”
방 한가운데 서 있는 중절모를 쓴 신사.
그는 마인들의 수뇌부인 의회주 중 한 명, S급 마인 잭이었다.
“아니 그런가? 월리엄.”
잭이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고는 비릿한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 잭의 말에.
“제이…… 크! 네 녀석이……!”
누군가가 힘겨운 목소리를 내며 침음을 내었다.
제이크와 마주 보고 있는, 고급스러운 원목 의자에 앉아 있는 이.
흰 머리에 안경을 쓴, 갈색의 양복을 입은 노신사.
“지금…… 네놈이 벌이는 짓거리를……! 다른 가문들이 용납할 것 같나?”
그는 이 저택의 주인이자, 세계 가문 중 가장 세력이 강한 가문인 로스차일드의 가주.
월리엄 로스차일드였다.
막강한 세력의 수장인 그는,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이든 우위와 여유를 보여야 했다.
그러나.
“크윽……!”
월리엄의 얼굴에는 여유가 아닌, 다급함이 드러나며 일그러져 있었다.
로스차일드의 수장인 그가 이리 쉽게 당한다는 것이 비현실적이었지만.
“제이크 로스차일드……! 기어이 선을 넘는구나!”
같은 가문, 심지어 가족이자 사촌이었던 남자를 조금이나마 믿은 것이 실수였다.
단 한 순간의 방심.
그 작은 방심과 안일함이 이런 결과를 불러왔다.
어떻게든 자신이 구속된 이 상황을 벗어나야 했다.
지금도 마나를 끌어 올리며 어떻게든 탈출하려 했지만.
-쿠구! 쿠구구!
잭의 스킬에 의해 몸이 전혀 움직여지질 않았다.
게다가.
-크르륵. 크륵. 꾸륵.
녹색의 해골 같은 기이한 모습의 무언가가 등에 달라붙어 마나를 빨아먹고 있었다.
동시에 정신을 지배당하는 듯한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적’이 잭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거, 노인네 오래도 버티네~ 그냥 죽여 버리면 안 되는 거야?”
월리엄의 뒤에서 교태 어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는 잭과 같은 의회주, S급 마인 릴이었다.
“그건 곤란하다. 이놈이 죽거나 잘못되는 순간, 모든 자료와 기술 기록이 파기될 거다.”
잭이 릴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말하고는.
“순순히 로스의 제어 코드와 로스차일드 기술 기록을 넘겨라.”
월리엄을 향해 차가운 눈빛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
월리엄이 노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네게 죽음이란 선택지는 없다. 월리엄.”
잭이 월리엄을 향해 짙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미 로스의 보안 시스템은 마비되었다. 이대로 로스가 장악당하는 건 시간 문제겠지.”
“도대체 무슨 짓을……!”
월리엄이 잭의 말에 인상이 더 일그러지며 침음을 흘렸다.
로스차일드에서 개발한 마법 인공지능 AI 로스.
로스는 이 저택의 관리만이 아닌, 보안도 담당하고 있었다.
당연히 가주인 자신이 위협을 당하는 이 상황에서 로스가 움직임을 보여야 했다.
하지만, 월리엄이 위기에 처할 때도, 지금처럼 구속당한 순간에도.
로스는 감각이 마비된 것처럼, 반응이 없었다.
게다가.
[알 수 없는 에너지가 로스를 감염시키고 있습니다.]
[현재 바이러스 침식률 : 65%]
가주만이 확인할 수 있는 로스의 상태창.
월리엄이 눈을 감고 로스의 상태를 확인하자,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도대체 무슨 수단을 사용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무언가가 로스를 장악하고 감염시키고 있었다.
이대로 로스가 완전히 장악당하면, 곧 로스차일드의 모든 보안이 잭에게 넘어갈 것이다.
그러면 지금껏 연구해 온 로스차일드만의 기술들이 모두 마인들에게 넘어가게 된다.
‘……아직인가?’
월리엄이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려 생각하고 있을 때.
“타이밍이 정말 좋았지, 이번 기회에 그년이 가진 그릇도 회수할 수 있고 말이야.”
잭이 릴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게 함정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을걸?”
릴이 그런 잭의 말을 알아듣고는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답했다.
잭은 지금 로스차일드 저택에 마녀가 잠입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렇게 빨리 ‘개화’될 줄이야. 그분께서 아주 좋아하시겠어.”
마녀의 육체에 잠들어 있는 물건이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로스차일드를 장악하고 핵심 기술을 강탈함과 동시에,
“내가 정녕 모를 것이라 생각했느냐? 레나. 크크크.”
마녀의 육체에 이식된 ‘태초의 그릇’을 대악마에게 바친다.
게다가 계획을 실행할 모든 준비까지 완벽하게 끝내 둔 상태였다.
그때.
-스르륵.
벽에서 군복을 입은 남자가 튀어나오더니.
“젠장! 그 괴물 새끼가 왜 여기에 와 있는 거냐!?”
잭과 릴을 향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다급한 분위기로 나타난 남자는 다름 아닌 의회주 솔저.
그는 마법 인공지능 AI, 로스의 메인 컴퓨터에 은밀히 잠입하여 바이러스를 심고 오는 길이었다.
순조롭게 로스에 바이러스를 심고 돌아오던 도중.
-저, 저, 저놈이 왜!?
메인 컴퓨터실 안에 비치된 감시 카메라, 솔저는 거기에 찍힌 처용을 보고 경악을 토했다.
다급하게 카메라를 조작하며 몇 번이나 확인했다.
순조롭게 진행 중이던 작전에 갑자기 난입한 변수.
아니, 거의 다 이긴 판 자체를 뒤집어엎어 버릴 수 있는 조커(Joker)가 나타나 버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올림포스 종간나 년이 왜 역천군주를 데려왔냔 말이다!?”
솔저가 잭을 향해 질책하듯 소리쳤다.
그는 이번 일을 진행하며 완벽한 작전이라 누누이 말했었으니까.
치밀한 잭의 성격상, 역천군주를 잡는 것도 이번 작전에 포함되었다 볼 수도 있었지만.
처용은 섀도우 헌터들의 수장, 조커보다도 더한 변수이자 괴물이었다.
신과 헌터들을 흡수하고 괴물로 변한 뤼장첸조차도 이기지 못한 괴물.
지금 가진 전력으로 처용을 처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솔저의 외침이 울리자.
“그게 무슨 소리야! 역천군주가 왜 여기에……?”
잭 역시 눈을 크게 뜨며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그놈이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잖아.”
릴 역시 당황한 듯,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그때.
“크, 크흐흐…….”
뒤에서 대화를 듣던 월리엄이 옅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워-얼. 리. 어-엄……!”
그 웃음소리를 들은 잭의 인상이 와락 일그러지고는 이를 갈며 월리엄의 이름을 읊조렸다.
잭의 일그러진 인상을 본 월리엄이 더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작금의 상황을 월리엄이 만들어낸 듯 보였지만.
‘하늘이…… 도왔구나. 제시카.’
지금 상황은 월리엄조차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제시카를 통해 처용이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보고를 듣긴 했었다.
나름대로 처용이라는 인간이 궁금했기에 그 만남을 수락했었다.
그런데 제시카가 이렇게 빨리 행동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다만.
“그…… 여유 넘치던 모습은……… 다 어디로 가셨나? 제이…… 크.”
지금 상황이 마인들에게 전혀 좋지 않다는 것만큼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미리 일부 ‘권한’을 전달한 제시카라면.
‘너를 믿을 수밖에 없구나.’
작금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잭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가주인 자신이 위험에 처하면 로스 말고도 반응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물론,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사람’이 온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지금 달려오는 이가 강하다 해도, 눈앞의 마인들을 모두 이길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역천군주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는 누구보다도 마인들과 악마들을 증오하는 인물.
그런 그가 작금의 상황을 파악한다면, 그냥 구경만 할 리가 없었다.
월리엄은 그렇게 희망을 가지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이, 이……!”
잭이 월리엄의 미소를 보고 주먹을 쥐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100% 성공을 하는 완벽한 작전이었다.
아니, 완벽한 작전이었었다.
처용이라는 강력한 변수가 개입하기 전까지는…….
머릿속으로 거센 고민과 전략을 구성하며 잠시 침묵한 잭은.
“중앙 홀에 준비시킨 것들을 모두 활성화시킨다.”
핏발 선 눈을 치켜뜨며 강하게 말했다.
“상대는 역천군주요.”
“이 일 자체가 엎어질 수도 있어. 잭.”
솔저와 릴이 우려를 표하듯 말했다.
그러자.
“이쪽에는 대악마와 그 병기가 있다.”
잭이 화를 가라앉히려는 듯, 차분히 눈을 감으며 말을 이었다.
“기존의 미완성된 소환진이 아니다. ‘완벽한 소환진’이다. 게다가 곧…… 로스도 장악한다.”
로스차일드의 기술과 힘을 차지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인 만큼, 이쪽의 전력도 만만치 않았다.
“준비된 것들을 모두 사용한다. 이번 기회에 역천군주를 잡지 못한다 해도……!”
충분히 처용의 발을 묶어놓을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로스차일드 계집을 죽이고 그릇을 판데모니움에 바친 다음. 도주한다.”
그 틈에 원하는 것들을 모두 챙기고 도주하면 이쪽의 승리였다.
계획을 빠르게 재정립한 잭은.
“역천군주가 알아차리기 전에 모든 준비를 끝내야 한다!”
승리의 의지를 다지며 소리쳤다.
***
“뭐지……?”
제시카를 따라가던 처용이 이상한 느낌에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왜 그러십니까?”
제시카가 의문을 드러내고 메리 역시 의문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자.
“어디서…… 썩은 냄새가 나는데.”
처용이 표정을 조금 찡그리며 말했다.
그 말에.
-킁.
제시카와 메리가 짧게 코를 들이쉬어 보았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런 둘의 모습을 본 처용은.
“그 냄새가 아니라, 감각적인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지금 자신이 전해 받는 느낌을 이야기했다.
부패한 시체를 코앞에 가져다 놓은 듯, 굉장히 불쾌하고 역한 무언가가 코를 찌르는 느낌이었다.
문제는…… 이 느낌이 처용에게 있어 익숙하다는 것.
“보통…… 몇몇 악마가 소환되기 직전에 이런 냄새가 나곤 하는데.”
처용의 읊조리는 듯한 말에 제시카와 메리가 의문을 품을 때.
“제시카!”
-샥-! 타탓!
누군가가 뒤에서 뛰어오더니, 일행들 앞에 나타났다.
길고 날카로운 검은 힐을 신은 연미복 차림의 누군가.
마치, 보디빌더처럼 꽉 차고 단단한 근육이 옷 밖으로 드러난 모습.
처용보다도 키가 큰 ‘여성’이 단발을 쓸어 넘기며 얼굴을 보이자.
“……빌리? 왜 여기에-?”
메리가 갑자기 나타난 빌리를 보며 놀란 듯 말했다.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제시카 역시 왜 그녀가 이곳에 있는지 의문이었다.
이곳은 로스차일드 가주의 저택.
허가받은 이가 아니면 절대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장소였다.
그런 곳에 빌리가 나타난 것도 놀라울뿐더러.
“제시카……!”
그녀는 멀리서부터 급하게 뛰어온 듯한 분위기를 보이고 있었다.
즉, 저택 내부의 모든 보안을 무시하고 즉시 이쪽으로 달려왔다는 것.
그런 제시카의 의문을 해소해 주듯.
“가주님께서…… 위험에 처하신 것 같다!”
-삑. 삑. 삑.
빌리가 손에 든, 빨간 불빛이 점멸하는 장치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TV를 조작하는 리모컨처럼 보이는 작고 검은 기기.
빨간 불빛이 점멸하고 있는 등 아래에는.
[Mayday - S]
‘메이데이 - S’라는 문자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메이데이는 위급 상황 시 지원을 요청하는, SOS와 같은 말이었다.
그리고 뒤에 이어진 S는 던전의 등급과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건 비상시에만 활성화되는 만능 키야, 여기 오기까지 나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어.”
빌리가 지닌 기기는 로스차일드 가주가 빌리에게만 건네준 물건이었다.
가문에 문제가 생겨 비상 버튼이 활성화되면, 그 기기 자체가 모든 보안을 여는 열쇠가 된다.
비상 상황이 발생할 경우, 빌리가 빠르게 수습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였다.
지금 그 장치가 활성화된 상황.
게다가 S 등급이면 아주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다는 소리였다.
빌리가 다급하게 상황을 설명하자.
“아무래도…….”
처용이 고개를 돌려 정면을 응시하고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보다 먼저 손님이 와 있었던 것 같은데?”
-쿠구구!
상황을 파악한 처용이 파마의 신력을 내뿜자.
-스아아! 사아!
파마의 신력에 반응한 듯, 주변에서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듯한 숨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파차창! 차창!
무언가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언가를 감추어 주던 장막이 깨져나가자.
-콰아아!
일행들이 나아가려던 복도 끝에서 격렬한 마기가 흘러나왔다.
“마기!? 이게 무슨 일이야!”
갑작스럽게 전해지는 강렬한 마기에 제시카가 경악을 드러냈다.
이곳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현상이었으니까.
“로스! 저택 내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제시카가 다급한 목소리로 인공지능 AI, 로스를 부르며 소리쳤다.
그러자.
-저택 내부에는 아무 일도 없습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로스의 차분한 대답이 들려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 강력한 마기가 쏟아지고 있는데……!”
제시카가 로스를 향해 다시 소리치듯 말했다.
“로스! 당장 저택 내부 진단을 시작해!”
-긴급 진단 실행 중…… 저택 내부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제시카의 명령에도 로스는 저택 내부에 문제가 없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들려오는 로스의 대답에 제시카가 멍한 표정으로 읊조리자.
“고장이 났거나…… 아니면, 누군가가 고장을 냈거나.”
처용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둘 중 하나겠지, 내 생각에는 후자 같지만.”
“그럴 리가 없습니다! 로스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AI입니다! 이렇게 전조 없이 고장 낼 수 있을 리가!?”
제시카가 처용의 말에 믿기지가 않는다는 듯 경악하며 말했다.
“고작 만들어진 인공지능이 대악마의 힘보다 강할 리가 없잖아.”
처용은 제시카의 부정에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한들, 로스는 인간이 만들어낸 인격이었다.
그런 인격이, 대악마의 권능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작금의 상황이 심상치 않은 비상사태임을 인지한 제시카는.
“말려들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역천군주. 그리고…… 도움이 필요합니다.”
처용에게 사과를 전한 후 진지하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빚으로 생각하지.”
-우드득.
처용이 전투를 준비하듯 손아귀를 풀며 말했다.
“안 그래도 좀 짜증이 났었는데…… 잘 되었네.”
라와 순혈 의회, 보살에 대해 잠깐 생각한 처용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