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태양신의 성역에서 돌아오고 하루가 더 지났다.
“순조롭군.”
성지 전체를 쭉 둘러본 처용이 눈을 감으며 읊조리듯 말했다.
눈을 감고 집중하는 처용의 머릿속에는 지금, 성지 전체의 모습이 미니맵처럼 그려지고 있었다.
지금 태룡사는 처음 성지를 완성했을 때보다 2배는 더 넓어진 상태.
이젠 진짜 하나의 도시라 해도 무방한 크기였다.
다만 크기는 넓고 컸지만, 사람이 많이 없기 때문인지 조금 허전해 보였다.
이 성지에 머무는 이들은 협회 관련자와 태룡사의 식구들, 이종족들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허전함은 곧 해결될 문제였다.
“이틀 뒤에는 성지의 하단을 개방할 수 있겠네.”
곧 성지의 일부분이 공개되고 외부의 사람들이 유입될 것이다.
그러면 도시로서 가진 기능들이 활성화될 것이고 많은 이익이 창출될 것이다.
처용이 성지에 대해 생각할 때.
“저 역시 기대가 됩니다.”
누군가가 처용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도시가 될 겁니다.”
다가온 이는 올림포스 길드장, 제시카였다.
그리고.
“지금 시간 되지?”
뒤에 있던 메리가 손을 흔들며 바로 본론을 이야기했다.
메리와 제시카가 처용을 찾아온 이유는 다름 아닌.
-로스차일드 가주를 만나고 싶은데?
얼마 전, 처용이 했었던 부탁 때문이었다.
로스차일드 가주를 만나고 싶다는 것.
제시카는 로스차일드 가주 측에 이 일을 보고했고 그 결과.
-만나보겠다고 하십니다.
가문으로부터 허락을 받았다.
“정말로 허락해 주실 줄은 몰랐지만요.”
제시카가 가문으로부터 받은 보고를 떠올리며 말했다.
솔직히 가주가 처용을 만나는 것을 거절할 줄 알았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지구의 권력자로 군림해 온 세계 가문들.
그 중, 가장 세력이 강한 가문 중 하나가 로스차일드였다.
그런 권력자들이 전형적으로 싫어하는 이가 바로 통제되지 않는 이들이었다.
처용은 신조차도 통제할 수 없는 존재.
말 그대로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즉 가문의 입장에서는 처용을 위험인물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런 처용의 만남 요청을, 로스차일드 가주가 승인했다는 사실이 제시카는 조금 신기했다.
“바로 가시겠습니까?”
제시카가 처용에게 묻자.
“가죠.”
처용이 즉답했다.
***
-우우웅.
게이트를 열고 처용과 제시카, 메리가 나타난 곳은 올림포스 성지였다.
정확히는 올림포스 성지 가장 안쪽에 자리한 극비 보안 시설.
태룡사와 연결된 게이트가 자리한 곳이었다.
올림포스 소속 신관들, 즉 S급 헌터라 해도 허가된 자가 아니면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장소였다.
“이쪽입니다.”
제시카가 처용을 안내하며 앞장서자 처용과 메리가 뒤따랐다.
“……여기보다 더 지하가 있는 겁니까?”
처용이 제시카를 따라가며 묻자.
“저와 메리를 포함해서, 정말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장소입니다.”
제시카가 계속 앞장서며 말을 이었다.
동시에.
-탁. 타탁. 탁.
긴 통로와 계단을 앞질러 가면서, 벽을 한 번씩 치거나, 발을 두 번 딛는 등의 행동을 반복했다.
그녀가 하는 행동은 다름 아닌, 암호 입력이었다.
“이 통로 전체에 결계가 씌워져 있군요?”
제시카의 행동을 지켜본 처용이 지금 나아가는 통로를 쓱 둘러보며 말했다.
겉보기에는 그저 시멘트를 발라 만들어진 밋밋한 통로였지만.
-우우웅.
처용의 눈에는 안쪽에 숨겨진 무수한 결계 마법 술식이 보였다.
“은폐 결계도 새겨져 있을 텐데…… 이걸 알아보네?”
메리가 놀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외부인을 들일 때는 눈과 귀를 가리고 데려와야 하는데…… 너한테는 의미 없겠지.”
“안쪽에 어떤 술식들이 새겨져 있는지 하나하나 그림을 그려서 설명해 볼까?”
처용이 메리의 말에 작은 미소를 띠며 말하자.
“아니, 말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메리가 질린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지금 나아가는 통로는 가문의 실력자들과 메리가 몇 년을 공들여 만들고 상시 보수하는 장소였다.
이곳을 설계한 메리 자신조차도 이 장소에 설치된 모든 결계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런데 주변을 여유롭게 관찰하는 처용을 보니, 정말로 모든 결계를 파악한 듯 보였다.
하지만.
‘수준이 높군. 꽤 많이 공을 들였어.’
처용은 결계들을 쭉 관찰하며 속으로 놀람을 표하고 있었다.
결계를 구성하는 진법들 하나하나가 정교하고 치밀하게 짜여 있었다.
복잡한 프로그램일수록 많은 에러(Error)와 버그(Bug)를 일으킨다.
이는 진법과 결계에도 통용되는 말이었다.
결계를 보다 복잡하게 구성할수록, 세분화된 결계가 많을수록, 오류가 잦아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결계들은 굉장히 복잡하면서도,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치밀하게 제작되었다.
‘지금 시기에 이 정도 결계라…… 가문의 수준이 생각보다 높군.’
과연 지구의 권력을 주름잡는 세계 가문 다운 실력이었다.
암호를 입력해나가는 제시카를 따라 처용과 메리가 어느 정도 걸었을 때.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탁. 탁.
제시카가 손으로 벽을 두 번 치며 말한 순간.
-끼이이이-!
벽이 쇳소리를 내며 좌우로 열렸다.
일행들이 열린 벽 안으로 들어서자.
“……기차라고?”
처용이 눈앞에 보인 광경을 보며 읊조렸다.
기찻길처럼, 어두운 통로를 따라 길게 뻗어 있는 레일(Rail).
그 위에 고정된 채 정박되어 있는 옛날식 디자인의 검은 증기기관차가 보였다.
“로스차일드 가문으로 가는 직할 열차입니다.”
제시카가 기차 앞에 서며 말하고는 기차에 손바닥을 대자.
-삑. 띠리릭.
기차에서 옅은 빛이 뿜어져 나오며 기계음이 울렸다.
동시에.
-환영합니다. 메리, 제시카 로스차일드.
기계음이 섞인 여성의 목소리가 제시카와 메리를 반기듯 울려 퍼졌다.
그리고.
-환영합니다. 역천군주.
기차에서 울리는 기계음이 처용을 알아본 듯, 인사를 건넸다.
“음…… 마법으로 만들어낸 인공 인격인가?”
처용이 기차를 유심히 바라보며 읊조리자.
“이것도 바로 알아볼 줄이야…….”
메리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정확히는 마법과 기계공학을 합쳐 만든 AI입니다.”
제시카가 열차를 쓰다듬듯 어루만지며 말했다.
게이트 사건이 터지기 전, 인류의 문명을 이끌었던 분야는 과학.
그중 기계공학, AI 인공지능은 개발 1순위로 평가받는 분야였다.
비록 마나라는 새로운 에너지와 마법의 등장에 뒤로 밀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연구되고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열차, 정확히는 열차 안에 깃든 인공 인격.
그것은 마법과 AI 인공지능 과학이 합쳐져 만들어진 새로운 결과물이었다.
“로스, 모두 초대된 인물이다. 알고 있겠지?”
제시카가 열차, 정확히는 그 안에 깃든 AI, 로스(Roths)를 향해 말하자.
-초대장은 확인했습니다. 본가로 곧 출발합니다.
AI, 로스가 제시카의 말에 응답했다.
-우우웅.
열차가 활성화된 듯, 옅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타시죠.”
제시카가 열차 안으로 들어서며 처용과 제시카를 향해 말했다.
처용과 메리, 제시카가 모두 열차 안으로 들어서고.
-치이이-! 우우웅.
열차가 김을 내뿜으며 선로를 따라 출발했다.
“생각보다 기술이 좋은데?”
처용이 열차 내부를 둘러보며 말했다.
내부는 일반적인 기차의 내부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벽난로가 있는 아늑한 느낌의 유럽식 응접실과 같은 모습이었다.
처용이 빈자리 중 한 곳에 앉고는.
“열차도 생각보다 빠르고.”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외부에서 느껴지는 감각으로 열차가 어느 정도 속력을 내는지 대략 파악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열차가 달리는 속도는 지금의 처용이 전력으로 질주하는 속도와 맞먹었다.
이 정도 속력이라면 아무리 멀리 떨어진 장소라도 보다 빨리 도착할 거라 추정되었다.
-도착까지는 대략 1시간 소요됩니다.
처용의 말을 들었는지 AI, 로스가 대답하듯 말했다.
로스의 말대로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도착했습니다.
열차가 멈추었고 곧 문이 열렸다.
“내리시죠. 계속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제시카가 이전처럼 앞장서 나아가며 말했다.
열차에서 내린 일행들이 통로를 따라 쭉 나아갔고 빛이 보이는 밖으로 향했다.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장소에 도착하자.
“오?”
처용이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저택을 보며 감탄을 표했다.
동화책 속에서나 볼 법한 정원과 분수대가 어우러진 화원.
그 길을 따라 쭉 이어진 대리석 발판.
대리석 도보로 끝에 보이는 유럽식 저택까지.
거대한 재력과 화려함이 돋보이는 장소였다.
하지만.
“이렇게 넓은데…… 사람이 없군?”
이 드넓은 정원 안에서 보이는 사람이라곤 처용과 제시카, 메리뿐이었다.
그 외 인기척이라곤 거의 없었다.
처용의 의문 어린 말에.
“이곳은 로스차일드 저택입니다. 극소수의 허가받은 사람만 드나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시카가 그 이유를 이야기했다.
설명을 잇던 제시카가 잠시 말을 멈추며 어딘가를 바라보자.
-위이이잉.
둥근 원통 형태의 로봇 하나가 정원 바닥에 떨어진 낙엽을 쓸며 지나갔다.
“보시다시피, 이 저택 일의 대부분은 로스가 처리합니다.”
지금 이 장소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가주가 머무는 저택.
즉, 외부인이 함부로 출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 머물며 일하는 사람들도 극소수였다.
대부분의 잡일은 로스차일드가 개발한 AI 인공지능, 로스가 도맡아 처리하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로봇 인공지능이 아니라, 하나의 정신체를 만들어냈군?”
처용이 주변을 배회하는 로봇들을 살펴보며 말했다.
그 로봇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가 저택 내부로 이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개발한, 마법 인공지능 AI 로스(Roths).
그것은 단순한 로봇이 아닌, 여러 AI 로봇들을 지배하는 거대한 슈퍼컴퓨터였다.
굳이 비교하자면, 휘하 개미들을 다루는 여왕개미, 아타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었다.
-저벅.
처용과 제시카, 메리가 저택 앞에 도달하자.
-손님분들을 환영합니다.
-끼이이!
로스의 음성과 동시에 저택 문이 열렸다.
-가주님께선 다른 손님을 만나고 계십니다. 중앙 홀에서 잠시 기다려 달라 하십니다.
“다른 손님? 내게 그런 말씀은 없으셨는데…….”
제시카가 로스의 말에 의문을 표했다.
“잠시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기다리죠. 뭐.”
처용은 제시카의 말에 가볍게 답했다.
이윽고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박물관이 따로 없는데?”
처용이 홀 안에 배치된 유리관들과 전시품들을 훑어보며 읊조렸다.
고대 문명을 상징하는 조각품부터, 각종 동물 뼈, 누군가가 입던 갑옷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모은 유물들입니다. 가주님 취미시죠.”
앞장서 나아가던 제시카가 처용을 보며 말했다.
그때.
-저벅. 탁.
돌연 처용의 발걸음이 멈추었고.
“이건, 마기가 느껴지는군.”
처용이 고개를 돌려 검은 갑옷이 걸린 진열대를 바라보며 읊조렸다.
그러자.
“아, 그건 빌리가 가주님께 선물한 전리품이야.”
메리가 검은 갑옷을 알아본 듯, 설명해 주었다.
올림포스 길드가 미국 내 마인들을 청소할 당시.
-가주님이 이런 걸 좋아하셨지 아마?
빌리가 고레벨의 A급 마인을 처치하고 얻은 전리품이었다.
무려, 대악마의 축복까지 받은 방어구 아티팩트.
“가문에 여러 지원을 요청한 대가로 선물한 거지.”
빌리는 올림포스를 위해 그 전리품을 로스차일드 가주에게 선물했다.
메리가 설명을 끝내자.
‘이상한 느낌이 난다.’
처용이 갑옷을 유심히 관찰하며 속으로 읊조렸다.
붉은 룬 문자가 새겨진 검은색의 서양식 기사 갑옷.
룬 문자와 갑옷에서 흘러나오는 마기 말고도,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전해졌다.
익숙한 듯, 아닌 듯…… 기시감이 들었다.
“이런 건, 사고가 일어나기 딱 좋은 물건인데?”
갑옷을 관찰하며 침묵하던 처용이 경고하듯 말하자.
“로스가 통제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메리가 처용의 우려에 진지하게 답했다.
“흠…… 그래, 그렇다면 뭐.”
침음을 흘리며 잠시 생각한 처용은 더 뭐라 하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이 장소는 다른 사람도 아닌, 로스차일드 가주가 거주하는 곳이었다.
이곳에 올 때 보았었던 통로도 그렇고, AI 마법 인공지능 로스까지.
그리고 진열대와 유리관에도 나름대로 정교한 결계 마법이 새겨져 있었다.
로스차일드의 기술 수준은 생각보다 높았다.
‘알아서 하겠지.’
세계 가문 중 세력이 강한 이들이니만큼, 처용은 이들이 알아서 하리라 생각했다.
-저벅. 저벅.
아티팩트에서 관심을 끈 처용이 제시카를 따라 안쪽으로 나아갔다.
처용과 제시카, 메리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전시실 내에 침묵이 가라앉았을 때.
-스르르.
돌연, 처용이 관찰하고 그냥 지나친 검은 갑옷에서 옅은 빛이 새어 나왔다.
붉은 룬 문자가 순간 검게 일렁이며 빛을 발하고는.
-스르륵!
갑옷 속에서 검고 반투명한 무언가가 유령처럼 빠져나왔다.
-스륵.
유령의 형상이 점점 또렷해졌고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리고.
-샤락.
로브 사이에서 붉은 머리카락이 흘러나왔다.
“분명, 제이크를 추적해 왔는데…….”
갑옷 속에서 나타난 이가 얼굴을 가린 로브를 벗으며 읊조리듯 말하자, 여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붉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닌 여성.
그녀는 다름 아닌 마녀라 불리는 마인, 레나 르블랑이었다.
“저 괴물 새끼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마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쓰고 있는 로브의 기능과 얼마 전 깨우친 능력 덕분에 처용에게 들키지는 않았지만.
‘큰일 날 뻔했다.’
정말 간담이 서늘했던,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젠장, 볼 일을 마치는 대로 나가야겠어.”
-스륵.
마녀가 품속에서 피로 얼룩진 카드를 꺼내며 말했다.
이곳에 잠입하기 위해, 로스차일드 가문 사람을 살해하고 얻은 물건이었다.
카드를 쥔 마녀가 처용이 사라진 통로 오른쪽의 문으로 향했다.
-삐릭. 지이잉.
문에 카드를 대자 통로가 열렸고.
-스르르.
마녀가 그 안으로 들어서며 유령처럼 사라졌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