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홀로 계승자-332화 (332/726)

#332화

-우우웅.

게이트가 열리고 주신의 영역을 나온 처용과 여래가 태양의 신전에 도착했다.

라와의 대화는 정보를 얻는 것으로 끝났다.

아니, 거기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아직 라가 이쪽에 협력한다는 사실을 순혈자들이 알지, 모를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

-당분간 행동을 조심해야겠구나.

라의 입장으로서는 행동을 조심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다만.

-제가,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지요.

그녀는 협력을 약속한 이상, 악의 종주 쪽에 협력하는 척하며 시간을 끌어보겠다 말했다.

다소 위험할 수도 있었지만, 나름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자는 바보가 아닙니다. 이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크타니드가 명령을 내렸다 해도, 당장 시행하기 쉽지 않은 명령이었다.

여래에게서 보살만을 따로 빼내어 잡아들이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게다가 보살은 아무리 온화한 신이라 해도 대신급 성좌.

그녀를 잡는 것만 해도 어려울뿐더러, 또 보살이 순순히 잡힐 리가 없었다.

급하게 일을 진행해 옥황상제처럼 말아먹는 것보다는 신중하게 기회를 노리는 것이 올바른 판단.

라가 크타니드를 상대로 시간을 벌겠다 말한 이유였다.

크타니드 역시 이 일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테니, 신중을 기하자는 말에도 납득할 터.

하지만.

‘모든 일이 수월하게만 풀리는 것은 아니다.’

처용은 이번 일을 온전히 라에게만 맡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회귀 전, 라가 대신들 중 가장 먼저 살해당한 이유가 보살을 돕기 위해서였다면?

이번 역시 그녀가 배신했다는 사실을 다른 순혈자들에게 들킬 것이다.

그리고 내부에 숨어든 순혈자들에 의해 빈틈을 공략당하고 살해당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금 시기에 라가 살해당하면 곤란했다.

“먼저 돌아가십시오. 스승님. 전 볼일 좀 끝내고 가겠습니다.”

처용이 여래를 보며 말하자.

[먼저 가마.]

-우우웅.

여래가 게이트를 열고 태룡전으로 돌아갔다.

처용은 여래가 사라진 자리를 잠시 바라보고는 생각을 정리하며 짧은 침묵에 잠겼다.

그리고.

“태양의 신관, 아니, 당신들 모두 지금부터 내 말 잘 듣는 게 좋을 겁니다.”

함께 주신의 성역을 빠져나온 세 명의 신관을 향해 말했다.

“더 볼 일이 남은 겁니까?”

라진이 경계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처용이 주신의 성역에서 보인 무력과 협박으로 인해, 가족들이 목숨의 위협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처용은 라진의 기분을 고려할 생각 따윈 없었다.

“태양신은 걱정하지 말라 했지만…… 장담하는데 분명 사고가 터질 겁니다.”

처용이 낮은 목소리로 강하게 말하자.

“그게 무슨 말입니까?”

라진이 의문을 표했다.

그 역시 주신의 성역에서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태양신은 행동을 조심하며 시간을 끈다고 했었다.

당장 위험한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다.

그런데 처용은 곧 문제가 터질 것을 확신하며 말하고 있었다.

라진의 의문에.

“어영부영 태평하게 있다간, 태양신이 살해당할 수도 있으니까.”

처용이 경고를 전하듯 강하게 말했다.

“태양신께서는 대신입니다. 주신의 성역에 계신 그분을 누가-.”

라진이 처용의 말에 반박했다.

태양신 라는 당분간 주신의 성역에만 머문다 했었다.

누가 감히 거대 성운인 헬리오폴리스로 쳐들어와 주신의 성역에 있는 태양신에게 해를 끼친단 말인가?

그러나.

“아스가르드 성역 가장 깊은 감옥에 수감된 순혈자가 암살되었어!”

처용은 라진의 안일한 태도를 지적하듯,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헬리오폴리스 주신의 성역이라고 과연 100%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있나?”

“그…….”

라진이 처용의 말에 바로 반박하지 못하자.

“후, 지금부터 일어날 법한 최악의 일을 하나 말해줄까?”

처용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 ‘태양’이라는 이름을 짊어진 성좌는 라 하나뿐이다.”

올림포스의 태양신, 아폴론은 배신하여 판데모니움에 합류했다.

이자나기 성운의 전 주신 아마테라스는 신격이 추락할 대로 추락했다.

이제 마지막 남은 태양신은 라 하나뿐.

“마지막 태양의 성좌인 라가 소멸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알고 있나? 태양의 신관!”

“…….”

처용의 말에 라진이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뒤에 서 있던 아일라와 이리스 역시 대답하지 못했다.

태양을 짊어진 성좌가 모두 사라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으니까.

“짧으면 한 달, 길면 세 달 동안…….”

침묵을 깨고 처용의 입에서 경고 어린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태양이 꺼진다.”

태양을 짊어진 성좌들이 모두 소멸하거나 악신이 되어버린 순간.

우주를 밝게 비추는 모든 태양들이 한순간에 검게 변해 버린다.

찬란하게 내뿜던 빛이 모두 사라지고 뜨겁게 타오르는 열기가 모조리 식는다.

모든 우주에 빛이 사라지고 암흑이 도래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영원히 그리되는 것이 아닌, 한 달에서 두세 달 지속되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단 며칠, 태양이 꺼진 것만으로도.

“태양이 한순간에 사라지면, 무슨 일이 발생할지…… 상상은 되나?”

전 우주에 발생한 피해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그…… 무슨…… 터무니없는-.”

처용의 말에 라진이 목소리를 떨며 읊조렸다.

가끔 종말론으로 거론되는 주제 중 하나인 태양의 소멸.

이런 가설을 놓고 이미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었다.

빙하시대의 도래, 어둠만이 가득한 세상 등 많은 가설과 이론들이 나왔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하면서도 확실한 사실은.

-태양이 사라지면, 모든 생명체가 멸종한다.

태양이 사라지면 모든 생명이 사그라진다는 것.

이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절대로 거스를 수 없고 벗어날 수도 없는 죽음의 종말이었다.

라진이 끔찍한 상상이 떠오른 듯, 안색이 하얗게 질리자.

“제발, 악신들을 상대로 태평하게 생각하지 마라. 이건 경고다.”

그 모습을 본 처용이 진심 어린 경고를 전했다.

그리고.

“나는 태양신이 위험에 처하면 그녀를 구할 수 없어, 하지만…… 너는 할 수 있다. 라진.”

라진을 향해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하며 말을 이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처용의 말에 라진이 의문을 표했다.

헌터들 중 가장 강력한 존재인 처용도 태양신을 위기에서 구할 수 없다.

그런데…… 자신은 할 수 있다니?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런 라진의 의문에.

“적어도 일 년…… 아니, 반년 안에 200레벨을 돌파할 것.”

처용은 라진만이, 태양의 신관만이 준비할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했다.

“이게…… 그나마 준비할 수 있는 ‘보험’이다.”

처용이 흥분된 감정을 조금씩 차분하게 가라앉히고는.

“아일라, 이리스 당신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 명의 신관을 향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처용이 말한 일 년, 아니 반년은 최소한의 유효기간이었다.

다름 아닌, 라가 살해당하기까지 남은 시간을 예상한 것이었다.

처용의 말이 끝나자.

“2…… 200레벨을 달성하면 뭐가 있는 건가요?”

죽음의 신관, 아일라가 처용을 향해 의문을 담아 물었다.

200레벨을 달성하는 것, 이것이 성좌를 구할 방법이라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200레벨을 달성하면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될 겁니다.”

처용은 더 이상은 말해주지 않았다.

“당신들이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

-우우웅.

마지막 말을 전한 처용이 게이트를 열고 돌아갔다.

그리고 처용이 사라지자.

“200레벨…… 역천군주의 말이 사실일까요? 오라버니.”

아일라가 라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다.”

라진이 아일라의 말에 솔직하게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잘 모를 수밖에 없었다.

200레벨을 달성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문제도 있었다.

“반년 안에 200레벨을 올리는 것…… 이것 역시 불가능에 가깝다.”

현재 라진의 레벨은 182.

나름, 열심히 활동했음에도 일 년의 시간 동안, 겨우 5레벨을 올렸다.

그런데 여기서 반년 안에 17레벨을 더 올려야 한다?

불가능에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했다.

그러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 해도.

“그래도 해야지.”

라진은 어떻게든 200레벨을 달성해 볼 생각이었다.

처용의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처용이 거짓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200레벨을 달성하면 무슨 일이 생길지.

처용은 이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역천군주의 성지가 개방되면, 즉시 찾아가 봐야겠다.”

라진은 자신의 신을 위해서라면 죽을 각오로 목표 달성에 노력할 생각이었다.

***

-우우웅.

게이트를 열고 태룡전으로 돌아온 처용은.

“하…… 젠장할.”

답답한 상황에 한숨부터 흘러나왔다.

라진에게 나름 방법을 일러주긴 했지만.

‘내가 작정하고 지도하지 않는 이상, 어림도 없겠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일부러 그에게 반년이라고 말한 이유는 압박감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적어도 자신이 생각하는 기간, 일 년 안에 200레벨을 달성할 가능성이 커질 테니까.

돌아온 처용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오자.

[이야기는 들었다.]

태룡전 안에서 여래에게 사정을 들은 미륵과 보살이 다가왔다.

[순혈자들의 조직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의장이 태양신이었을 줄이야.]

“미륵님도 모르고 계셨습니까?”

처용의 질문에.

[그래, 그것만큼은 전혀 모르고 있었느니라.]

미륵이 정말로 몰랐다는 듯, 살짝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미륵은 오랜 시간 태초신을 보좌해왔던 신.

그런 그조차도 태양신 라가 순혈 의장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처용이 답답한 마음에 의견을 묻자.

[당장 떠오르는 방법이 없으니…… 참 답답할 노릇이구나.]

미륵 역시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때.

[제가 가끔 헬리오폴리스 성역을 방문해 얼굴을 비추도록 하죠.]

무언가를 생각하며 침묵하던 보살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위험합니다. 보살님.”

처용이 그 말에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스스로가 미끼가 되겠다는 것처럼 들렸으니까.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여래 역시 우려를 표했지만.

[제가 라와 교류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방심시킬 수 있을 겁니다.]

보살은 침착하게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했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녀가 생각한 방법은 ‘방심 유도’.

헬리오폴리스 성역에 보살이 얼굴을 비추는 것만 해도.

[제가 단순히 태양신과 만나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더 벌 수 있을 겁니다.]

크타니드와 다른 순혈자들은 라가 지령을 잘 이행하고 있다고 믿을 것이다.

처용과 여래를 은밀히 만났다는 사실을 순혈자들이 이미 알아차렸다 해도 상관이 없었다.

그 모든 행동이 보살을 끌어내기 위한 행동이었다.

순혈자들에게 이렇게 인식이 되면 문제가 없었으니까.

보살의 의견은 작금의 상황에서 아주 훌륭한 판단이었다.

앞으로의 일을 대비할 시간을 벌 수도 있었고 적들을 방심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처용은 불길한 생각에 보살의 행동을 말리고 싶었다.

목표가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을 놈들이 그냥 구경만 할 리가 없었으니까.

보살에게 위험 부담이 있는 작전은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 처용의 우려에.

[걱정하지 마세요. 계승자.]

보살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저는 대신입니다. 그들에게 쉽게 당할 만큼, 나약하지 않습니다.]

처용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보살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또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처용이 가진 트라우마를 봤었으니까.

그 트라우마의 원인인 자신이 나서는 이 상황이 처용에게 있어 달갑지 않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저는 계승자가 마주한 종말이 반복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보살은 처용이 지닌 트라우마를 봤기 때문에 더더욱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같은 미래가 반복되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보살 역시 미래의 지식이 있는 만큼, 나름대로 자신감과 생각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보살의 완고한 의지에 처용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녀를 막을 명분도, 강제할 권리도 없었다.

그저 지금 상황에서는.

“대비를 더 철저히 해야겠군요.”

미래에 닥칠 일들을 예측하고 더 철저하게 준비를 갖추는 것.

이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한 달 동안 해야 할 일이 생각보다 많겠군.’

에스라 대륙과 이어지는 게이트 활성화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한 달.

처용은 그 기간 동안, 최대한 많은 준비를 할 생각이었다.

나 홀로 계승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