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홀로 계승자-331화 (331/726)

#331화

라가 의회에 전달된 명령을 입에 담자.

-쿠구구! 쿠구!

처용에게서 신살자의 기운이 섞인 신력이 거칠게 뿜어져 나왔다.

그 영향인지, 주신의 성역 내부에 붉은 전류가 튀며 진동했다.

“……그 명령에 따를 생각은 아니겠지요? 태양신.”

살기가 가득 담긴 처용의 낮은 목소리가 라를 향해 울리자.

[그럴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대화조차 하지 않았겠지.]

라가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고.

[악의 종주가 당신에게 직접 내린 명령입니까?]

여래가 라를 향해 궁금한 듯 물었다.

그 말에.

[정확히 말하자면, 의회에 속한 순혈자 중 하나가 낸 계략입니다.]

라는 어째서 의회에 이런 명령이 내려왔는지에 대한 사정을 설명했다.

의회에 소속한 순혈자 중 하나가 이 계략을 생각해 냈고 크타니드에게 보고한 결과.

-실행해 보아라.

크타니드는 그 계략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실행에 옮기라고 명령했다.

[……해서 은밀히 당신들과 만나,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습니다.]

라가 이야기를 끝내자.

“옥. 황. 상. 제……!”

처용의 입에서 천교 주신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 새끼가 떠올릴 법한 작전 같은데?”

회귀 전 순혈 의장이자, 온갖 악의적인 계략을 내어 저항군을 괴롭혔던 옥황상제.

그렇다면 지금의 그는 순혈 의회에 소속된 순혈자일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보살을 노리는 악의적인 함정까지.

크타니드에게 이번 계략을 고안한 순혈자는 아무리 봐도 옥황상제였다.

“순혈 의회에 속한 순혈자 중 하나가 옥황상제로군요?”

처용의 입에서 순혈 의회에 속한 또 다른 순혈자의 정체가 거론되자.

[…….]

그런 처용의 예측이 맞다는 듯, 라가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라의 반응을 확인한 처용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개새끼의 모가지를 따 버렸어야 했어……!”

진심으로 후회한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성운 재판 당시 처용은, 옥황상제의 함정을 역으로 받아칠 준비를 했었다.

그러나 역으로 받아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옥황상제를 죽일 방법을 찾았어야 했었다.

다소 큰 무리를 해서라도 그 기회에 옥황상제를 죽여야 했다고.

처용은 지금 후회를 하고 있었다.

[너는 그때 최선을 다했다.]

여래가 그런 처용을 이해한다는 듯, 진지하게 말했다.

[이전의 일을 후회해 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느니라.]

“……맞는 말씀입니다.”

처용은 여래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분노가 풀리지 않은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우리가 무엇을 도와주면 됩니까? 태양신.]

처용에게서 시선을 돌린 여래가 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작금의 상황은 모두 파악했다.

어째서 라가 정체를 드러냈는지 왜 도움을 요청했는지도 이해했다.

이제 남은 건, 차후 어떻게 할 것이냐?

이후 벌어질 일들에 대해 어떻게 대비할 것이냐?

이것이 진짜 문제였다.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할지는 아직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라가 답답하다는 듯,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제 정체와 지금의 상황을 알리는 게 먼저라 생각했으니까요.]

[……으음.]

여래가 라의 말에 침음을 흘렸다.

그때.

“당신이…… 우리에게 정체를 드러낸 것만으로도 이미 위험한 상황입니다.”

생각에 들며 침묵하던 처용이 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처용의 말에 오시리스가 의문을 드러내자.

“헬리오폴리스 성운에…… 순혈자가 과연 당신들 둘 뿐일까?”

라와 오시리스를 번갈아 바라본 처용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회귀 전, 태양신 라는 크타니드에게 살해당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저승의 신인 아누비스를 제외한 헬리오폴리스 대신들 모두 살해당했다.

심지어 아누비스도 그 당시 저승에 문제가 생겨 자리를 비운 탓에 화를 면한 것이었다.

처용은 세력이 강한 거대 성운인 헬리오폴리스가 왜 허무하게 몰락했는지.

“헬리오폴리스 주신이 우리를 은밀하게 만났다는 사실을…… 과연 놈들이 모를까?”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당신은 같은 순혈자에게 살해당할 거다.”

처용의 말이 끝나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오시리스가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순혈 의회에 속한 순혈자는 의회에 속하지 않은 다른 순혈자가 누군지 전부 알고 있나?”

처용이 오시리스를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띠며 물었다.

[그건……!]

오시리스는 처용의 말에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의회에 속한 순혈자라 해도, 다른 순혈자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으니까.

오시리스가 더 말을 잇지 못하자.

“바록이라고 했었나?”

처용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바록은 성운 재판 당시, 처용의 낚시에 화를 참지 못하고 스스로를 드러냈었던 순혈자였다.

“그놈은 일주일…… 아니, 삼일 안에 살해당할 거다! 같은 순혈자에게.”

처용이 확신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회귀 전, 처용은 여러 단서를 얻고 추적하여 내부에 숨어든 순혈자 중 하나를 잡아낸 적이 있었다.

그를 생포하고 심문하려는 찰나.

-……죽었다고?

붙잡혀 수감된 순혈자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

심지어 그가 구속된 장소는 저항군 기지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감옥.

저항군의 핵심 멤버들만이 드나들 수 있는 감옥이었다.

그런 장소에서 겨우 생포한 순혈자가 살해당한 상황.

심지어 그 당시 생포한 순혈자를 살해한 범인은 결국 찾지 못했었다.

성좌들의 비밀 조직인 순혈자들.

그들은 예상보다 더욱 은밀하고 치밀하고 잔혹한 존재들이었다.

[아스가르드에 숨어있던 순혈자? 그놈이 살해당할 것이라고?]

오시리스가 처용의 말에 날 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처용의 말에 반박하려는 찰나.

[저 아이의 말이 맞다.]

라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오시리스를 포함한 세 명의 대신이 의문을 드러내자.

[바록은 이미…… 처분당했다.]

라의 입에서 바록이라는 순혈자가 이미 살해당했다는 진실이 흘러나왔다.

[그게…… 사실입니까?]

믿기지 않는 듯한 오시리스의 물음에.

[그래.]

라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대답했다.

순혈 의장이 가진 권한 중 하나는 바로 순혈자들의 ‘생사 확인’.

명부(名簿)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순혈 의장만이 확인할 수 있는 순혈부(純血簿).

그 안에는 순혈자를 상징하는 ‘숫자’만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순혈부에 적힌 숫자 중 하나가…… 불과 어제 사라졌다.]

순혈자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 순혈자를 상징하는 숫자가 칼로 그은 듯 그어지며 사라진다.

라는 뜬금없이 숫자 중 하나가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바록이 살해당했음을 알아챈 것이었다.

[아스가르드 감옥에 갇힌 이가 살해당했다니……!]

오시리스가 라의 말이 침음을 흘리며 말했다.

바록은 아스가르드에 소속된 순혈자.

그가 구금된 장소는 아스가르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감옥이었다.

같은 성운에 소속된 성좌들 중에서도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그런 장소에 구금된 순혈자가 살해당한 상황.

‘……설마?’

생각을 잇던 오시리스의 머릿속에 예상 가는 범인이 떠올랐다.

순혈 의회에 속한 순혈자 중 하나가 바로 아스가르드 소속 성좌였으니까.

‘로키!’

오시리스는 차마 그 이름을 말할 수 없었기에 속으로 읊조렸다.

오시리스가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라를 바라보자.

[…….]

라가 오시리스의 생각을 눈치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제 지금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감 좀 잡히십니까?”

신들의 반응을 살핀 처용이 경고하듯, 강하게 말했다.

“당신들과 가까운 이들, 믿었던 이들이 순혈자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니까.”

처용의 진지한 말이 울리자.

[미친 소리!]

[풍요의 신명을 걸고 난 순혈자가 아니다.]

아누비스와 이시스가 격한 반응을 보였다.

처용 역시 그 둘이 순혈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회귀 전, 이시스와 오시리스는 라와 같이 소멸했었고 아누비스 역시 크타니드에게 살해됐으니까.

하지만.

“두 분은 그렇다 칩시다. 그렇다면 이 성운에 속한 모두가 순혈자가 아니라는 보장은?”

헬리오폴리스는 거대 성운인 만큼, 많은 성좌들이 소속된 성운.

분명, 라와 오시리스가 모르는 순혈자가 이 성운에 숨어 있었다.

그런 처용의 확신 어린 의심의 말에.

[…….]

[제길.]

라를 포함한 네 명의 대신 모두 침음을 흘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마음 같아서는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라며 반박하고 싶었다.

그러나.

[바록이 스스로를 드러내기 전까지…… 나는 그가 순혈자임을 모르고 있었다.]

라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순혈 의장인 라도 순혈자가 얼마나 되는지, 각각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순혈자를 선별하거나 그에 소속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문득 궁금증이 들었던 처용이 라에게 물었다.

아무리 비밀 조직이라 해도, 인원 충당은 필수였다.

심지어 아르테미스나 아레스 같은 2세대 성좌들도 순혈자였다.

그렇다면 무언가의 방법을 통해 인원을 충당한다는 뜻.

처용은 혹시 순혈자들의 빈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질문한 것이었다.

[으음…….]

처용의 말에 라가 짧게 침음을 흘리고는.

[순혈자가 되는 첫 번째 방법은…… 일인전승(一人傳承)이라고 해야 하나?]

질문에 대한 답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직접 보여주는 게 낫겠군.]

라가 처용을 향해 손을 뻗고는.

-화르륵.

작은 불길을 쏘아 보냈다.

처용이 불길을 피하지 않고 받아내자.

-스르륵.

불꽃이 처용의 왼쪽 손목에 휘감기며 조금씩 회전했다.

그리고.

[순혈 의회의 가입 권유를 받았습니다.]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계승자의 권한이 제약을 완화시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처용의 눈앞에 시스템이 떠올랐다.

“시스템을 통해 초대장이 발송되는 형식인가?”

시스템 창을 바라본 처용이 신기한 듯 읊조리자.

[신력을 가지고 있기에 혹시나 했지만…… 정말로 될 줄이야.]

라가 처용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가…… 자격이 있다고?]

오시리스 역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중얼거렸다.

순혈자라는 조직은 단순히 다른 순혈자에게 권유를 받는다 해서 모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순혈자란, 말 그대로 고결한 이들.

정확한 조건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선천적 신격들 중에서도 선택받은 소수만이 될 수 있었다.

선택받지 못한다면 가입 권유가 되지 않는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초대장 자체가 발송되지 않는다.

그러나 처용은 순혈자 가입 초대장이 발송되었고 이를 직접 확인했다.

즉, 처용은 ‘선택받은 소수’에 포함된다는 뜻이었다.

“……제가 수락하면 어떻게 됩니까?”

시스템의 알림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한 처용이 라를 향해 묻자.

[내가 지닌 순혈부에 네 숫자가 새겨질 것이다.]

라가 놀라운 표정을 잠시 가라앉히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시에 우리가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순혈자의 규칙을 알게 되겠지.]

“규칙이라…….”

처용이 라의 말을 듣고 읊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두 번째 방법은 무엇입니까?”

순혈자가 되는 다른 방법을 물었다.

[두 번째 방법은 태초신에게 지명을 받는 것이다.]

라는 이번에도 순순히 대답했다.

[나 역시 태초신에게 지명을 받고 순혈 의회의 의장이 된 것이었으니까.]

“태초신이 지명이라…… 그렇다면?”

처용은 라의 말을 듣고는 머릿속에 번뜩하며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악의 종주가 순혈자를 임명할 수도 있겠군요.”

조크-크타니드는 태초신과 가장 가까운 절대적인 존재.

그라면 태초신처럼 다른 성좌들을 순혈자로 임명할 가능성도 존재했다.

[그럴-!]

라가 처용의 말에 ‘그럴 리가 없다’라고 하려 했지만.

‘……가능성은 존재한다.’

곧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지며 입을 다물었다.

오시리스 역시 라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표정을 구기고 심각한 분위기를 드러냈다.

“아, 환장하겠네.”

라와 오시리스의 반응에 처용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용 역시 가설을 이야기했을 뿐이었지만.

‘이 가설대로라면, 회귀 전 순혈자들이 확 불어난 이유가 납득이 되는군.’

문제는 그 가설 자체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가능성이구나.]

여래 역시 처용과 같은 판단을 내렸는지, 진지하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태양신.”

답답한 마음을 잠시 떨쳐낸 처용이 라를 향해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원하는 게 도대체 뭡니까?”

지금 처용의 질문은 가장 중요한 질문이기도 했다.

대화를 통해 작금의 상황은 모두 이해했다.

그러나 라가 왜 여래와 자신에게 선 듯 도움을 요청했는지는 아직 의문이었다.

선천적 신격들은 이타적인 존재들이 아니었으니까.

비록, 아테나처럼 예외가 있다고는 하지만, 라 역시 그런 존재라는 확신은 없었다.

[비틀어진 것을 바로잡고 싶을 뿐이다.]

라는 처용의 말에 진지한 목소리로 즉답했다.

[태초신께서 내게 맡기신 임무를 완수하고 싶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구나.]

-내가 직접 나서기에는 너무 늦었구나, 부탁한다…….

과거 태초신이 라에게 순혈 의회를 맡기며 당부했던 말이었다.

라는 그런 태초신에게 받은 사명을 이행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내가, 보현을 배신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구나.]

자비의 대신을 언급하며 말을 이었다.

과거의 라는, 아니 헬리오폴리스 성운 전체가 보살에게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라는 그런 보살의 은혜를 저버릴 생각만큼은 결코 없었다.

“…….”

처용이 라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때.

[알겠습니다. 태양신.]

여래가 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동시에.

[태양신의 말에 거짓은 없다. 그건 내가 장담하마.]

처용을 향해 전음을 보내며 말했다.

여래는 과거 라와 보살의 관계를 아는 만큼, 그녀의 마지막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애초에 라가 배신할 생각이었으면 지금의 대화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겠지.]

라가 정말로 배신할 생각이었으면, 크타니드의 명령을 실행했을 것이다.

작금의 대화를 모두 듣고 판단한 결과, 여래는 라를 믿어 보기로 결정했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처용 역시 여래의 말에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전음으로 답했다.

동시에.

“당신을 믿겠습니다.”

-스르릉. 스릉.

결전기를 해제하고 무구들을 아공간으로 되돌리며 라를 향해 말했다.

[다행이구나.]

라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홀로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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