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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계승자-330화 (330/726)

#330화

험악했던 분위기가 잠시 가라앉고 터질 듯 아슬아슬하던 상황이 일단락된 듯 보였지만.

-스르르릉.

처용은 결전기를 완전히 해제하지는 않았다.

그저 뒤로 잠시 물리기만 했을 뿐이었다.

[뭐 하는 짓이냐? 무기를 거둬라!]

오시리스가 결전기를 해제하지 않는 처용을 보며 소리치듯 말했다.

태양신이 대화를 요청했고 여래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처용은 무장을 완전히 해제하지 않으며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못마땅했던 오시리스가 질책 어린 말을 흘리자.

“나한테 명령하지 마라. 순혈자.”

처용이 경멸 가득한 표정을 짓고는 적대감이 일렁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건방진!]

적대적인 처용의 태도에 오시리스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시스와 아누비스 역시 못마땅한 듯한 반응을 보였다.

“뭔가 착각들을 하고 있는데-.”

처용은 그런 신들의 반응에 코웃음을 치고는.

“지금 상황을 태양신이 똑바로 해명하지 못하면, 이후에 벌어질 참사를 기대하는 게 좋을 거야.”

-우우웅. 치이이-!

아공간에 넣었던 맹독 덩어리를 다시 꺼내 보이며 싸늘하게 말했다.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하지 않았나요?]

이시스가 여래를 보며 처용의 행동을 따지듯 묻자.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과 경계를 푸는 것은 다른 문제겠지요.]

여래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처용의 행동을 말릴 생각이 없다는 듯 보였다.

다시 작금의 분위기가 좋지 않게 흘러가자.

[그만.]

라가 휘하의 신들을 향해 말했다.

[저들의 입장은 타당하다.]

[하지만……!]

아누비스가 라의 말에 반박하려는 듯, 입을 열자.

[내 이야기부터 들어주지 않겠느냐?]

라가 아누비스와 이시스를 향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신으로서 위엄이 일렁이는 목소리가 아닌, 마치 부탁하는 듯한 분위기.

[……알겠습니다.]

그런 라의 부탁에 아누비스와 이시스가 기세를 낮추고 물러났다.

분위기가 일단락되자.

[어디부터 설명하는 것이 좋을까요…….]

라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읊조렸다.

그런 라의 말에.

[순혈 의회가 무엇입니까?]

여래가 라를 향해 질문했다.

[으음…….]

라가 여래의 말에 침음을 흘리고는.

[그 전에, 신법재판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여래에게 신법재판소에 대해 물었다.

여래는 신법의 대신, 신법재판소는 그의 권능이었다.

그런 여래에게 신법재판소가 무엇인지 묻는 건 조금 이상한 질문이었지만.

[우주의 법칙과 규칙을 조율하고 결정하는 권능. 이런 기능적인 부분만 알고 있습니다.]

여래는 라의 말에 순순히 대답했다.

[……그 정도로만 알고 있었군요.]

라가 여래의 말에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애초에 전, 정상적인 방법으로 신법을 짊어진 것이 아니니까요.]

여래가 라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뜨며 답했다.

신법이라는 신명은 본래 천교의 주신이 지니고 있던 신명.

여래는 전대 신법의 대신인 천존을 살해하고 역천의 힘으로 신법재판소의 힘을 빼앗았었다.

비록, 추후 태초신에게서 신법의 이름을 인정받고 신법의 대신이 되었다지만.

엄연히 따지면 여래는 성좌들에게서 신법을 강탈하여 대신의 자리에 오른 자였다.

즉, 정당하게 신법의 이름을 받은 것이 아니었기에, 신법재판소에 대해 전부 아는 것이 아니었다.

여래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순혈 의회가 신법재판소와 연관이 있는 겁니까?]

라가 전하고자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어림잡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 여래의 물음에.

[순혈 의회는 본래…… 신법재판소를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권능이자 조직입니다.]

라가 신법재판소와 순혈 의회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신법재판소는 신들이 의견을 모아 우주의 법칙을 정하는 신성한 권능이었다.

그리고 순혈 의회는 이런 신법재판소가 악용될 경우를 고려해.

[최초의 순혈자들은 태초신에게서 지목을 받은 소수의 신들이었습니다.]

태초신이 만들어낸 권능이자 기관이었다.

하나의 성운이 아닌 각기 다른 성운에서 선택받은 이들이 모여 만들어진 신들의 비밀조직.

그들이 태초신에게서 선택받은 고귀한 자들, 최초의 순혈자들이었다.

그런 ‘순혈 의회’에 속한 순혈자들은 다른 순혈자들을 이끄는 대표들이었다.

순혈 의회에 소속된 대표들의 역할은 다름 아닌, 신법재판소의 견제.

그러나 순혈 의회 자체가 신법재판소에서 결정된 판결을 뒤집는 힘은 없었다.

다만.

[신법 재판을 시작하기 전, 순혈자들의 대표들이 의회를 열어 재판에 개입할 수 있었습니다.]

성좌들의 비밀 조직인 순혈 의회.

그 의회에 속한 순혈자들의 대표들이 회의를 열어 의견을 맞추는 것으로 신법 재판에 개입할 수 있었다.

다른 순혈자들은 의회에서 나온 판결을 전달받고 이를 이행한다.

양지에서 신들의 법칙을 조율하는 것이 신법재판소라면.

음지에서 신들의 법칙이 악용되는 것을 막고 뒤에서 조율하는 게 바로 순혈 의회였다.

이것이 순혈 의회의 본래 목적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정체를 감추고 음지에서 활동해야 하는 순혈 의회의 의장.

[전대 순혈 의장이…… 전대 신법재판장과 손을 잡았었습니다.]

그는 전대 신법의 대신, 천존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그와 손을 잡았다.

양지의 기관과 음지의 기관을 대표하는 둘이 손을 잡은 이유.

[원하는 목표를 서로 수월하게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둘은 원하는 목표가 있었기에 서로 손을 잡은 것이었다.

“……설마.”

라의 말에 처용이 무언가를 떠올린 듯, 인상을 찌푸리며 읊조렸고.

[……!]

여래 역시 짐작한 것이 있다는 듯, 인상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런 그들의 짐작대로.

[전대 의장은 금오도의 정화를…… 전대 신법의 대신은 자비의 대신을 원했지요.]

라가 눈을 감으며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욕심 때문에 규칙을 깨고 서로 손을 잡았다?”

처용에게서 경멸감 가득한 거친 목소리가 라를 향해 울리자.

[……그 말에 부정할 수 없구나.]

라가 감았던 눈을 뜨고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

처용이 기가 막힌 듯, 굵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고.

[…….]

여래는 무언가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린 듯, 일그러진 표정으로 침묵했다.

[그 당시에, 그런 일이…….]

[전혀 몰랐습니다.]

아누비스와 이시스 역시, 과거 알지 못했던 사실을 듣고 착잡한 감정을 토로했다.

그리고.

[전대 의장이…… 천존에게 스스로 밝혔었군요.]

스스로를 순혈자라고 밝힌 성좌.

오시리스는 짐작했던 것을 확신하며 읊조렸다.

동시에.

[그렇다면, ‘신법재판소 안에서는 진실을 말할 수 있다.’ 태양신께서 이 사실을 아신 게……?]

무언가를 깨달은 듯, 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오시리스의 말에.

[나는 사전에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태초신께서 내게 말씀해 주신 것이었지만.]

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순혈자, 특히 의회에 속한 자는 스스로의 정체를 타인에게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나 전대 의장은 신법재판소를 이용해 자신의 정체를 천존에게 밝혔다.

신법재판소 안에서는 순혈 의회의 힘이 억눌린다.

그가 어떻게 이 사실을 알아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전대 순혈 의장이 규칙과 사명을 어겼다는 것.

그로 인해 신법재판소와 그것을 견제했어야 할 순혈 의회의 힘이 합쳐졌고.

[우주의 법칙을 조율해야 할 이들이 가진 권한을 악용했습니다. 그리고…….]

자비의 대신과 금오도를 노린 악의적인 함정이 완성되었다.

문제는 그들이 판 함정 때문에.

[……그 사건이 벌어졌죠.]

온전한 조화의 신명을 얻었어야 할 여래가 복수의 화신이 되어 역천의 신이 되어버렸다.

신계에 피바람이 불어닥쳤고 거의 모든 성역이 황폐화되어갔다.

지금까지 라가 했었던 말들은.

[이게, 극소수의 순혈자들만이 알고 있었던 진실입니다.]

과거 수천 년 전 사건 속에 숨겨졌었던 추악한 진실이었다.

라의 말이 끝나자.

“그 전대 순혈 의장이라는 새끼…….”

처용이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누군지 짐작이 됩니다만?”

그런 처용의 말에.

[나도…… 알 것 같구나.]

여래 역시 짐작한 무언가가 있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며 말했다.

그런 여래의 반응을 본 처용은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졌고.

“이. 자. 나. 기…… 맞지?”

라를 똑바로 응시하며 짐작했던 용의자를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분노가 서린 듯, 으르렁거리는 처용의 목소리에 라가 침묵해 보이자.

“그런 머저리 새끼를 순혈 의장에 앉힌 건가!?”

결국, 참다 참다 화가 터진 처용이 입에 욕을 담으며 소리쳤다.

처용이 욕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태초신 이 멍청한 새끼가!”

순혈 의회라는 조직을 만들어낸 태초신이었다.

처용의 입에서 태초신을 향한 욕설이 흘러나오자.

[네놈이-!]

[해서는 안 될 망발(妄發)이다!]

아누비스와 오시리스가 격한 반응을 보였다.

태초신은 성좌들에게 있어 절대적인 존재.

그러나.

“그 새끼가 만들어 낸 결과를 봐라!”

처용은 태초신을 향한 존경이나 경외감은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처용은 되려 태초신을 경멸하는 이였다.

태초의 마수, 차원의 붕괴, 악의 종주의 탄생, 신계에 불어닥친 피바람 등등.

이 모든 일에 대한 원인은 궁극적으로 태초신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이어 이번 사태까지.

“우주를 창조했다는 놈이! 제대로 하는 게 도대체 뭐냐!?”

우주를 관리해야 할 성좌들은 불량품(?)들이 대부분이고.

심지어 가장 중요한 요직에는 불량품 중에서도 제일 쓰레기 같은 놈들만 앉혀놨다.

처용은 태초신을 본 적도 없었지만.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다 그 멍청한 태초신 때문이다! 내 말이 틀린가?”

도저히 그를 존경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태초신을 향한 처용의 욕설이 계속되고 분위기가 다시 험악해질 때.

[……네 말이 맞다.]

라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일은 태초신께서 잘못하신 게 맞다.]

앞서 말한 모든 일들이 태초신의 잘못임을 라가 인정하자.

[태양신이시여…….]

오시리스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비단 오시리스뿐 아니라 아누비스, 이시스도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며 침묵했다.

솔직히, 처용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순혈 의회를 만든 것도 태초신, 의회를 이끌 의장 자리에 이자나기를 앉힌 것도 태초신이었으니까.

[그분도……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셨었으니까.]

라가 과거 태초신과 단둘이 마주했을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나의 잘못이구나.

태초신이 라를 다음 순혈 의장으로 지목하고는 스스로를 향해 말했었던 자책이었다.

[제아무리 신이라 해도 완전한 존재는 아니다. 태초신도…… ‘그’도…….]

라가 읊조리듯 말하자.

“조크-크타니드.”

처용은 라가 말한 ‘그’가 누구인지 눈치채며 말했다.

그 말이 맞다는 듯, 라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흥분했던 마음을 가라앉히며 침묵한 처용은.

“……순혈 의회에 속한 순혈자들이 누굽니까?”

라를 향해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그-.]

라는 처용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쿠구구! 쿠구!

돌연 주신의 성역이 옅게 진동하며 떨리기 시작함과 동시에.

-파지직! 파직!

라에게서 옅은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역시…… 타인을 언급하는 것만큼은…… 말할 수 없군.]

하던 말을 멈춘 라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니, 강제로 말을 잇지 못한 것이었다.

신법재판소가 순혈 의회를 억누른 작금의 상황.

지금 이 장소에서는 의회에 속한 순혈자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가능했다.

그러나 타인의 정체를 밝히는 것만큼은 불가능한 듯 보였다.

순혈 의회에 속하지 않은 이에게 의회에 속한 다른 순혈자의 정체를 말할 수 없었다.

이 부분만큼은 보다 강한 제약이 있는 듯 보였다.

“아, 젠장…….”

처용은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에 다시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작은 한숨을 내쉬며 솟구치는 짜증을 억누르고는.

“그렇다면,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다른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악의 종주가 순혈 의회에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말할 수 있는 답변이었는지, 라에게서 답이 들려왔다.

“무슨 명령입니까?”

처용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자비의 대신을 유인하고 잡아내라. 그것을 시작으로-.]

라가 착잡한 목소리로 얼마 전에 전달받은 지령을 입에 담았다.

[혈선이 지키고 있는 두 태초의 마수를 끌어내라. 이것이 지령이었다.]

라의 말이 끝난 순간.

“이, 개새끼가! 감히-!!”

겨우 억눌렀던 처용의 짜증과 분노가 다시 터져나갔다.

나 홀로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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