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화
헬리오폴리스의 주신, 태양신 라.
[순혈 의회를 시작한다.]
그녀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권능이 발현되는 순간.
“……!”
처용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지고.
[…….]
여래 역시 미간을 꿈틀거렸다.
둘 다 제 귀를 의심하는 듯, 크게 놀란 반응이었다.
이런 와중에.
-스르르륵.
라가 발현한 권능 때문인지, 금빛으로 일렁이는 신법재판소의 기운에 은빛과 푸른빛이 뒤섞였다.
[……이건.]
신법재판소의 금빛 기운에 무언가 다른 이질적인 기운이 섞인 상황.
이변을 감지한 여래가 작게 인상을 찌푸릴 때.
“결전기, 팔괘 - 태극천체진!”
-촤라라라라!
처용이 순식간에 결전기를 발동하고는.
-차라라랑! 차카캉!
원탁에 앉은 ‘적’들을 향해 열다섯 개의 무구를 포위하듯 세웠다.
신살자의 힘이 일렁이는 무구가 위협적인 기세로 사방을 포위하자.
[무슨 짓이냐!]
오시리스가 자리를 박차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 모습을 본 처용은.
“거기서 더 움직이지 마라.”
신살자의 힘이 섞인 강기를 더 크게 끌어올리며 말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처용의 말과 동시에.
-스르릉. 스릉.
열다섯 개의 무구가 날을 세우며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중 대부분의 무구가 날을 세운 대상은.
“으…….”
“무, 무슨!?”
다름 아닌, 라진을 포함한 세 명의 신관들이었다.
신관들이 위협을 받자.
[우리가 두고 볼 것 같으냐!?]
-쿠구구!
아누비스가 신력을 내뿜으며 위협적으로 소리쳤고.
-우우웅.
-우웅!
이시스와 오시리스 역시 굳은 표정으로 신력을 내뿜기 시작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우리는 본신이다.]
[네놈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본신의 우리를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시스와 아누비스가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하자.
“맞아 아직 본신 상태의 성좌는 감당할 수 없어. 하지만-.”
처용이 코웃음을 침과 동시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신관들을 죽이고 도망칠 수는 있지.”
-스르릉. 스릉.
열다섯 개의 무구가 조금 더 가까이 파고들며 포위망을 굳혔다.
“라진은 가까스로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두 신관은 어떨까?”
처용이 말함과 동시에 라진을 살폈다.
정확히는 라진이 은밀하게 신성력을 모으고 있는 오른손.
그가 쥔 성물인 ‘태양의 눈’을 바라봤다.
여차하면 그 안에 담긴 권능을 사용할 생각인 듯 보였지만.
“젠장……!”
성물을 쥔 라진의 표정은 전혀 밝지가 않았다.
태양의 눈에 담긴 권능 중에는 단 한 번의 공격을 절대적으로 방어하는 권능이 담겨 있었다.
문제는 그 권능이 지정하는 대상은 단 한 명이라는 것.
즉.
“으…….”
“……!”
무구들에 포위당한 두 여동생과 자신 중, 지킬 이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니, 태양의 눈을 사용한다 해도 과연 처용의 결전기를 막을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에덴의 대천사 중 다섯 하늘이라 불리는 성좌.
굳건한 방어를 자랑하는 수호의 대천사 라파엘도 처용의 결전기를 막지 못했으니까.
라진이 식은땀을 흘리며 세찬 고민을 이어갈 때.
“태양의 눈을 써도 내 결전기는 막지 못한다. 라진.”
처용의 입에서 희망을 앗아가는 소리가 울렸다.
“도,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이오!?”
라진이 다급하게 처용을 보며 묻자.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태양의 신관.”
그런 라진의 물음에.
“난 네놈과 태양신을 믿었다. 그런데!”
처용은 배신감을 담아 소리쳤다.
“이곳에 우릴 끌어들인 이유가…… 설마 함정이었을 줄이야.”
라진은 처용의 배신감 어린 외침에.
“그…….”
차마 뭐라고 입을 떼지 못했다.
라가 뭐라고 말하면서 권능을 발현했는지.
-순혈 의회를 시작한다.
지금도 똑똑히 귓가에 맴돌고 있었으니까.
그만큼 라진에게도 충격적이었다.
배신자로 알려진 성좌들의 비밀단체, 순혈자.
순혈 의회는 아무리 봐도 그런 순혈자들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결국.
“태양신이시여…….”
라진은 이 상황에 대한 해답을 쥐고 있을 태양신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진 작금의 상황 속.
[……이런.]
곤란한 듯, 조금 일그러진 표정을 짓던 라가 입을 열었다.
[격한 반응을 보이리라고는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적개심이 강하구나.]
“지금 당연한 걸 묻고 있는 건가?”
라의 말에 처용에게서 적대감 가득한 말이 흘러나왔다.
“순혈 의회는 순혈자들의 ‘수장’을 상징하는 권능으로 알고 있다!”
-순혈 의회가 네놈을 심판할 것이다!
회귀 전, 순혈자들을 찾아내 잡아 죽일 때마다 종종 들었던 말이었다.
순혈 의회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순혈 의회가 순혈자들의 집단성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내가 순혈 의장이다.
순혈 의회를 주체하는 성좌가 순혈자들의 수장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냈었다.
다만, 회귀 전 순혈자들을 추적하여 그들의 우두머리를 알아낸 결과.
‘순혈자들의 수장은…… 옥황상제가 아니었나?’
회귀 전 순혈자들의 수장은 다름 아닌 옥황상제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라가…… 순혈자들의 수장이었다고?’
옥황상제가 아닌, 라가 순혈자들의 수장으로 밝혀진 상황이었다.
작금의 상황은 처용 역시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만, 상대가 순혈자들의 수장인 이상!
“신법의 대신과 나를 동시에 처리하고 신법재판소를 얻을 생각이었나! 태양신!!”
작금의 상황은 위험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수천 년 전 자비의 대신을 도운 것은, 그저 기만에 불과한 것이었나!”
처용은 라에게서 배신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과거 신들이 보살, 그리고 여래를 노리고 만들었던 함정.
그 결과 금오도라는 세계가 소멸되고 여래가 폭주하여 신계가 멸망 직전까지 도달했었다.
라는 그 상황을 종식시키기 위해 보살을 도운 소수의 대신 중 하나였다.
자신의 성역 역시 핏빛 폭풍으로 인해 피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보살을 도왔다.
수천 년 전 과거도 그랬지만,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첫 번째 세계 헌터 회의에서 처용이 난동을 부렸을 때도, 라는 아테나와 함께 상황 중재에 나섰었다.
그 이후에도, 여래와 처용에게 여러 호의적인 분위기를 보였었다.
처용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태양신만큼은 아군이라 믿었었다.
그러나 순혈자라는 존재들은 모두 제 시커먼 속내를 감춘 이들.
철저하게 믿었던 전우이자 친구였던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하계종을 믿을 리가 없잖아? 하하하!
비웃음을 던지며 동료들의 등에 칼을 꽂은 이들이었다.
눈앞에 있는 라는…… 그런 순혈자들의 우두머리.
결코, 믿을 수 없는 상대였다.
-우우웅. 치이이-!
라를 적이라 판단한 처용은 아공간을 열고 녹색의 구슬을 꺼내 쥐었다.
뤼장첸을 사냥할 때 사용했던 맹독의 집합체, ‘악몽에 벼려진 독옥’이었다.
“스승님, 길을 열겠습니다. 그 틈에 빠져나가시죠.”
처용은 여래에게 말하자마자.
-우우웅. 치이이-!
맹독 구슬에 강기와 신살자의 힘을 섞어 주입하기 시작했다.
청자고둥은 악몽 속에서 서식하는 독특한 몬스터.
청자고둥이 가진 분해독의 가장 무서운 점은, 신력도 갉아먹는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처용이 쥔 독옥은 그런 청자고둥의 독에 다른 위험한 맹독을 섞은 것.
여기에 신살자의 힘까지 응축시켜 터트리는 순간, 사방 일대를 휘감으며 온갖 것들을 녹여 버릴 것이다.
그 틈에 성역에 둘러진 결계를 부수고 게이트를 활성화시켜 이곳을 탈출할 생각이었다.
주신의 성역은 주신의 통제하에 있는 고유의 공간.
이 안에서는 게이트를 열 수 없기 때문이었다.
폭탄을 쥔 처용이 계속 신살자의 힘을 끌어올릴 때.
[잠시…… 기다리거라.]
라를 응시하며 침묵하던 여래가 처용에게 잠시 멈출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물어보겠소. 태양신.]
라를 향해 진지하게 말했다.
[정체를 드러낸 이유가…… 정녕 우리를 잡기 위한 함정입니까?]
순혈자들의 수장이라 정체를 밝힌 라.
여래는 라가 왜 스스로의 정체를 밝혔는지에 대한 의도를 물었다.
그러자.
[태양신의 신명을 걸고 아닙니다.]
라가 스스로의 신명(神名)을 걸고 맹세했다.
신명을 건 이상, 라의 말은 진실이라 할 수 있었지만.
“악신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처용은 그것만으로는 믿지 않았다.
크타니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에게 검은 신력을 받으면 새로운 신명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그런 처용의 의심 어린 말에.
[아니, 태양신은 악신이 되지 않았다.]
여래는 라가 악신은 아니라며 확신을 담아 말했다.
[태양신이 악신이었고 방금 말에 거짓이 있었다면…… 이것이 반응했을 테니까.]
말을 이은 여래가 오른손을 들어 보이자.
-우우웅.
그의 손에 작은 황금색 망치, 신법의 존엄이 들려 있었다.
여래는 라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때부터, 신법의 존엄을 소환해 들고 있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처용처럼 순혈 의회라는 권능에 대비하기 위해.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어째서 우리 앞에 정체를 드러낸 겁니까? 아니-.]
짧게 침묵하며 생각을 잇던 여래가 하던 말을 잠시 멈추고는.
[왜 제게 신법재판소 사용을 부탁한 겁니까?]
두 번째 의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물었다.
[신법재판소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여래의 물음에 라가 답하자.
[무슨 의미입니까?]
라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여래가 다시 물었다.
그러자.
[신법재판소가 순혈 의회를 억누르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니까요.]
라가 왜 신법재판소가 필요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이야기했다.
그 말에.
‘순혈 의회라는 권능이 신법재판소를 억누르는 게 아니라……?’
의문을 가진 처용이 눈을 돌려 주변을 잠시 살폈다.
-우우웅.
신법재판소의 영향으로 주변에 깔린 금빛의 신력들.
그리고.
-스르르.
금빛 사이사이에 일렁이는 은빛과 푸른빛의 신력.
처용이 주변에 일렁이는 기운들을 관찰하며 아주 자세히 살펴봤다.
그러자.
‘……신법재판소의 기운이 우위를 점하고 있군.’
작금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신법재판소의 기운에 다른 기운이 섞여 오염된 듯 보였다.
그러나 그 기운들을 자세히 살핀 결과, 보이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은빛으로 일렁이는 순혈 의회보다 신법재판소의 금빛 기운이 우위에 있었다.
라의 말대로 신법재판소가 순혈 의회라는 권능을 짓누르는 듯 보였다.
[그대에게 신법재판소 사용을 부탁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라가 계속 설명을 이었다.
[첫 번째는 순혈 의회가 가진 힘을 억누르기 위해.]
순혈자들 중 단 한 명인 대표자, ‘의장’만이 가진 권능인 순혈 의회.
라는 이 권능을 억눌러야 자신이 진실을 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래와 처용을 이곳에 부른 진짜 이유를 이야기했다.
그런 라의 말에.
[정말로…… 태양신께서 순혈자들의 우두머리입니까?]
저승의 신, 아누비스가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우리조차도 모르고 있었다니…….]
풍요의 신, 이시스 역시 라의 정체를 전혀 몰랐다는 듯, 읊조렸다.
하지만.
[…….]
생사의 신, 오시리스만은 앞서 두 신과는 다르게 조금 침착한 모습이었다.
마치, 라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듯한 분위기.
[오시리스 당신…… 혹시?]
그런 오시리스의 분위기를 알아차린 이시스가 설마? 하는 느낌에 물었다.
오시리스가 이시스의 물음에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하자.
[오시리스, 알고 있었던 건가? 아니…… 자네 설마?]
아누비스가 다시 한번 충격을 받은 듯, 경악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두 대신이자 가족들의 반응에.
[맞다. 나는 순혈 의회에 소속된 순혈자 중 하나다.]
오시리스가 순순히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그리고.
[정말로, 신법재판소가 의회를 억누르니…… 말할 수 있군요.]
라를 바라보며 놀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스스로의 정체를 밝힌 작금의 상황이 본인에게도 놀라운 듯한 분위기였다.
라와 오시리스가 정체를 밝히고 아누비스와 이시스가 충격적인 표정을 지을 때.
‘도대체 무슨 상황이야?’
처용 역시 작금의 상황이 혼란스러운 듯, 인상을 찌푸렸다.
[미안하구나,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느니라.]
라가 아누비스와 이시스에게 미안한 듯, 작은 한숨을 섞어 말했다.
그리고.
[이야기라도 들어보지 않겠습니까?]
여래와 처용을 향해 말을 이었다.
“…….”
처용은 무언가를 생각하듯, 침묵에 잠겼다.
동시에.
‘……라가 크타니드에게 가장 먼저 살해당한 이유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처용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태양신, 라는 순혈자, 그것도 순혈 의회를 이끄는 우두머리로 밝혀졌다.
순혈자는 무조건 처용과 여래를 적대하는 이들.
그러나, 라는 다른 순혈자들과는 다르게 대화를 요청하고 있었다.
그리고 라는 여래와 처용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회귀 전에 일어났었던 태양신의 소멸.
드러난 태양신의 진짜 정체.
도움을 요청하는 작금의 상황까지.
그냥 넘겨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생각을 마친 처용이 눈을 돌려 여래를 잠시 바라보자.
[…….]
여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스르르릉.
사방을 포위하던 열다섯 개의 무구들이 처용에게로 되돌아왔다.
처용이 무구들을 되돌리자.
[이야기를 들어보죠.]
여래가 진지한 목소리로 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