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화
처용의 물음에.
“그게…… 그.”
에블린이 대답하지 못하고 말을 길게 흐렸다.
처용이 답답함과 의문을 동시에 가질 때.
“내가 오자마자 그것부터 물어봤었네.”
백호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고는.
“지금, 에블린의 기억이 온전치 않다고 하더군.”
에블린이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야기했다.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인지, 에블린은 과거의 기억 중 일부를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 잃어버린 기억 중에는 가호를 받았을 때 보았었던 자신의 스테이터스도 있었다.
정확히는 시스템이 보여준 스텟 창.
자신에게 가호를 내린 성좌의 이명이 무엇인지 등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 외에도 백호와 샬럿이 기억하는 몇몇 추억들도 누락되어 있었다.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일시적인 기억 상실일 수도 있습니다.”
이종국이 손에 들린 태블릿으로 차트를 들어 보이고는.
“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않았었습니다.”
에블린의 현재 상태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에블린이 멀쩡해 보였지만, 사실 지금 그녀는 그리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무려 세 마리의 기생충이 이 아이에게 들러붙었다 들었네.]
의학의 신이 이종국의 말을 뒷받침하듯 설명을 이었다.
에블린에게 기생하던 존재는 셋.
아스모데우스의 페러사이트 디멘터.
옥황상제의 신관 뤼장첸.
마지막으로 태초의 조각까지.
평범한 사람은 단 하나라도 감당하기 힘든 것들이, 에블린에게는 세 개가 들러붙었었다.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영혼까지 소멸했을 것이야.]
짧지 않은 시간, 독한 것들에게 시달렸던 만큼, 에블린에게 누적된 데미지가 생각보다 컸었다.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이질적인 힘에 오래 노출된 탓인지, 육체가 변형된 탓도 있다네.]
의학의 신이 말을 마치자.
“외부의 힘에 의한 변이라…….”
이야기를 들은 처용이 침음을 흘리고는 에블린을 잠시 살펴보았다.
[이름 : 에블린 헤이디]
[등급 : S급]
[칭호 : 자연체(自然體)]
[클래스 : 트렌트 가드너(Treant Gardener)]
[특징 : 알 수 없는 힘의 자극으로 변형되어 태어난 생명체.]
[여러 종류의 나무를 만들어내고 가꿀 수 있습니다.]
[확인 불가.]
[스킬 : 성장하는 뿌리, 고속 성장…….]
통찰의 눈으로 바라본 에블린은 확실히 특이했다.
‘헌터라기보단…… 몬스터라고 봐야겠군. 연아랑 가깝다고 해야 하나?’
헌터의 스테이터스라기보다는 몬스터를 통찰했을 때 나타나는 시스템 창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반인반수(伴人半獸)가 되어버린 연아와 비슷해 보였지만, 다른 점이 있었다.
연아는 헌터로서, 카투라의 신관으로서 레벨을 지니고 있었다.
반면에 에블린은 마치 몬스터처럼 레벨 대신 등급이 나타났다.
그럼에도 헌터로서의 흔적이 남은 탓인지 클래스를 지니고 있었다.
에블린의 클래스는 트렌트 가드너(Treant Gardener).
트렌트는 자연의 정수가 나무에 모여 탄생한 나무 골렘으로 정말 보기 드문 몬스터였다.
클래스의 뜻을 해석하자면, 나무 골렘 정원사라고 할 수 있었다.
마치, 인간, 신수, 몬스터가 적절히 섞인 듯한 모습.
에블린은 연아와 아타를 반반 섞어 합친 듯한 느낌이었다.
“기억의 손상이 심합니까?”
에블린의 상태를 살핀 처용이 이종국에게 묻자.
“최, 최근의 일들은…… 기억이 나요…….”
어두운 표정을 지은 에블린이 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저지른 짓들도…….”
페러사이트 디멘터에 감염되어 마인이 된 이후 저질렀던 일들.
태초의 조각이 이식되어 실험당한 일들.
뤼장첸에 의해 재앙의 나무가 되어버렸던 일까지.
비교적 최근에 벌어졌던 일들은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게 에블린이 백호와 샬럿에게,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이유였다.
밀려오는 죄책감에 사죄를 입에 담는 것을 제외하고는 할 말이 없는 상황.
“죄, 죄송-.”
다시 한번 에블린의 입에서 죄송하다는 말이 나올 때.
“나한테 사과할 필요는 없다.”
처용이 에블린의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리 이용당했다 해도, 그녀가 그간 마인이 되어 저지른 짓들은 잘못이 맞았다.
하지만, 고작 열 살 넘은 소녀가 색욕악신의 악의적인 마수에서 어찌 벗어난단 말인가?
게다가 대악마뿐 아니라, 머저리 같은 두 성좌, 아마테라스와 옥황상제까지 이번 일에 개입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에블린에게 잘못을 따지거나 탓하고 싶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의 잘못은.
“난 웬만하면 피해자는 건들지 않아. 피해자를 만든 놈들을 응징하는 편이지.”
어린 소녀를 이용한 악질적인 놈들에게 따지는 것이 맞았다.
“그럼…… 감사합니다.”
처용에 의해 사과의 말이 끊긴 에블린은 다시 입을 열어 감사를 전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블린이 고통받는 와중에도 분명하게 기억하는 게 있었다.
-거지새끼들처럼, 불쌍한 애한테 붙어 빌어 처먹지 말고! 전부 꺼져라!
도저히 떼어낼 수 없는 이들에게 고통받을 때 들려왔던 처용의 외침.
동시에 자신을 덮쳤던 황금빛의 빛줄기.
그 빛줄기를 맞은 순간, 자신을 괴롭히던 모든 이들이 떨어져 나갔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몰랐지만, 처용은 자신을 고통에서 해방해 준 은인이었다.
“……그래, 뭐.”
처용이 에블린의 감사를 대충 받았을 때.
“에블린!”
-촤악!
급하게 뛰어온 듯 보이는 커맨더가 에블린의 이름을 부르며 나타났다.
아마 소식을 듣고 급하게 돌아온 듯 보였다.
“……아저씨.”
에블린이 오랜만에 마주하는 반가운 얼굴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짓자.
“하아, 깨어나서 다행이다.”
커맨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뒤이어 커맨더를 뒤따라온 그의 파티원들, 이진호와 로완 역시 에블린을 보며 안도를 표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이들끼리 짧은 해후를 나눌 때.
“저…… 그런데, 제게 가호를 내린 성좌는 왜 찾는 건가요?”
에블린이 문득 궁금한 듯 처용을 보며 물었다.
궁금증 어린 에블린의 말에.
“네게 가호를 내린 성좌, 그 새끼를 찾아서 죽여 버릴 생각이거든.”
처용이 살기를 담아 읊조리듯 대답했다.
진심이 진하게 우려 나오는 살기 어린 말에.
“시, 신을…… 요?”
에블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러자.
“이 친구가 그동안 무슨 일들을 벌였는지 알면 깜짝 놀랄 거야. 에블린.”
커맨더가 에블린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네 눈앞에 있는 이 친구는 신을 때려눕힌 무지막지한 사람이거든.”
이진호가 커맨더의 말을 잇듯 처용을 가리키며 말했다.
비단 이진호뿐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처용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에블린은 처용에 대해 간략하게 들으면서도.
“…….”
멍한 표정으로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역천군주(逆天君主) 또는 오버로드(Overload)라 불리는 헌터.
지상에 강림한 다수의 성좌를 무력으로 제압한 인간.
성좌들뿐 아니라, 거대 성운조차도 정면으로 맞서길 기피하는 인간.
신들의 세력과 정면으로 맞서 싸워 전쟁을 벌일 수 있는 강자.
처용은 말 그대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존재였다.
‘강하다는 건 알았지만…….’
처용이 상당히 강한 존재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강함이 신에게 맞설 정도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에블린이 알고 있던 최강의 헌터, 커맨더조차도 신에게 거스를 수 없었으니까.
“그래, 웬만한 성좌나 성운은 내가 뒤집어엎어 버릴 수 있으니까.”
처용은 주변에서 떠드는 낯간지러운 소리를 잠재우며 에블린을 향해 말을 이었다.
“네게 가호를 내린 성좌가 누구인지 기억나면 바로 말해.”
에블린이 처용의 진지한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나 역시 마찬가지야.”
커맨더가 에블린에게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를 팔아넘긴 성좌를 찾는다면, 내가 그놈 신전을 가루로 만들어 버려 주마.”
에블린이 당한 비극을 만드는 데 일조한 성좌.
커맨더가 그 성좌를 향해 보복을 다짐하듯 말하자.
“네게 나쁜 짓을 한 놈들을 모두.”
“우리가 박살을 내주마.”
백호와 이진호 등 커맨더의 파티원들이 말을 이었다.
에블린을 악신에게 넘기고 이 비극을 초래한 이들에게 응징하는 것.
그 마음 하나만큼은 모두 진심이었다.
“……감사합니다.”
에블린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답할 때.
-스르르르.
처용의 옆에 연분홍빛의 신력이 모이더니.
[계승자.]
보살이 나타났다.
“오셨습니까.”
처용이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잠시, 이 아이를 데려가도 될까요?]
보살이 이곳에 온 용건을 이야기했다.
그녀가 에블린을 빠르게 회복시킬 방법을 찾았다는 말을 덧붙이자.
“빨리 회복할수록, 이 아이에게도 좋겠죠.”
처용이 에블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와 함께 가겠느냐?]
보살이 에블린에게 다가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손을 내밀며 말하자.
“……네. 네에.”
잠시 멍한 표정으로 보살을 바라본 에블린이 대답했다.
보살인 내민 손을 에블린이 잡았을 때.
[계승자도 같이 가죠.]
-화아아!
연꽃잎이 에블린과 처용을 휘감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윽고 그들이 다시 나타난 곳은.
“세계수……?”
태룡사의 정상, 태룡담이 있는 장소.
정확히는 세계수의 또 다른 육체인 거대한 나무가 자리 잡은 곳이었다.
처용과 에블린, 보살이 나타나자.
[왔구나.]
-쩌저저적!
땅에서 나무뿌리가 자라나며 세계수의 분신이 나타났다.
[안녕, 꼬마 아가씨?]
-쩌저저적!
세계수의 분신이 에블린을 향해 나무뿌리를 뻗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에블린이 세계수를 보며 마주 인사하고는, 홀린 것처럼 저도 모르게 팔을 뻗었다.
-쩌저적!
세계수처럼 에블린의 팔에서도 나무뿌리가 자라나며 앞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이윽고 세계수의 뿌리와 에블린의 팔에서 뻗어 나간 뿌리가 서로 닿은 순간.
-화아.
에블린에게서 짧게 빛이 뿜어져 나왔다.
서로 닿았던 나무뿌리가 다시 떨어지고.
“아……?”
에블린이 갑자기 힘이 빠진 듯, 비틀거렸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에블린이 쓰러지려는 찰나.
-탁.
보살이 에블린의 어깨와 등을 지지하며 잡아주었다. 그리고.
[어떤가요? 엘그드라실.]
세계수를 향해 물었다.
[이미 예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효과가 좋겠는데?]
세계수가 보살의 말에 놀람이 섞인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력을 전해 준 겁니까?”
에블린을 살펴본 처용이 세계수를 향해 물었다.
[아주 조금만 흘려보낸 거야. 확인이 필요했거든.]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처용이 상황 설명을 부탁하자.
[음…… 혹시 신수들이 맺는 계약에 대해 알고 있니?]
세계수가 처용에게 신수의 계약에 대해 물었다.
“정령 계약과 비슷한 개념으로 알고 있습니다.”
파장이 맞는 정령과 계약하여 자연의 속성을 다루는 정령사들.
신수 또한 정령과 비슷한 방법으로 다른 이와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회귀 전, 처용은 드래곤과 계약을 맺은 적이 있기에 알고 있었다.
“서로 파장이 맞는 신수와 계약자가 서로의 힘을 공유하는 것이죠.”
처용이 알고 있는 지식을 이야기하자.
[대략적인 개념을 알고 있네, 이야기가 빠르겠어.]
미소를 지은 세계수가 말을 이었다.
[아주 오래전, 보현과 내가 신수의 계약을 맺었었거든.]
그녀가 말하는 ‘아주 오래전’은 무려 보살이 반신이었을 시기를 뜻했다.
‘이건 또 처음 안 사실이네.’
처용은 새로운 사실에 흥미로운 듯 속으로 읊조리고는 작금의 상황을 파악했다.
세계수는 에블린을 계약자로 삼을 생각인 듯 보였다.
서로 파장이 맞는지 확인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지만, 처용이 볼 때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렇군요. 이 아이는 선천적 선인이니, 파장이 맞겠군요.”
에블린은 보살과 같은 선천적 선인.
같은 선천적 선인인 보살이 세계수와 신수의 계약을 맺었다면, 에블린 역시 가능성이 컸다.
아니, 가능성이 큰 정도가 아니라 확실하게 가능했다.
방금 세계수와 에블린이 서로 접촉한 것은 이를 알아보기 위함이었으니까.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이대로 계약을 맺기엔 문제가 하나 있었다.
“신수의 계약은 단 하나만 유지할 수 있는 것으로 압니다.”
바로 신수의 계약은 중복이 불가능하다는 것.
세계수와 보살이 신수의 계약으로 이어져 있다면, 에블린과 새로 맺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건 문제없어. 보현이 대신에 오르면서 기존의 계약은 끝났거든.]
세계수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듯 말했다.
보살과 세계수가 정확히 어떤 관계였는지.
왜 서로 계약을 맺었었는지는 몰랐지만, 지금은 계약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문제는 없네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상황을 이해한 처용이 세계수를 향해 감사를 전하자.
[나 역시, 저 아이에게 도움받을 일이 많을 것 같거든. 후후.]
세계수가 작은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신수의 계약은 계약자만 이득을 보는 계약이 아니었다.
계약자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일수록 신수 또한 이득이 있었다.
일방적인 희생이나 후원이 아닌,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계약이었다.
“……그렇다는데, 어떻게 할래?”
처용이 에블린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할게요.”
아까부터 쭉 대화를 듣고 있던 에블린이 처용의 말에 바로 즉답했다.
그녀가 바로 대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작금의 상황을 파악한 것도 있었지만.
“이게…… 제가 도움이 되는 방법이겠죠?”
자신을 도와준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
이런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기특하네.”
처용이 에블린의 마음을 알아보고는 작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에블린이 결정을 마치자.
[잘 부탁해, 꼬마 아가씨.]
세계수가 에블린에게 다가오며 손을 뻗었다.
-쩌저저적!
세계수에게서 뻗어 나온 뿌리가 에블린에게 닿았고.
-화아아.
에블린에게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