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처용이 에블린을 살펴보고 성지로 내려오자 성지에 찾아온 제시카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제시카 주변으로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처용이 다가가자.
“제 말, 하니까. 귀신같이 찾아왔네.”
연아가 다가오는 처용을 발견하고는 중얼거리며 말했다.
“귀신은 너고 이놈아.”
처용이 태연하게 연아의 이명을 언급하며 말을 받아치자.
“뭐라고 이놈아!?”
연아가 표정을 확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처용은 연아의 반응을 무시하고.
“어떻게 됐습니까?”
제시카에게 바로 본론을 물었다.
재앙의 나무 토벌 이후 다시 모인 거대 길드의 대표들.
처용은 그 자리에서 다른 거대 길드들을 향해 거래를 제안했었다.
제시카가 지금 성지에 와 있다는 것은, 그에 대한 답이 있다는 것.
“완전히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환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제시카가 그 결과를 이야기해 주었다.
처용이 그 자리에 있던 길드에게 전한 이야기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성지, 태룡사의 하단을 개문(開門)하겠습니다.
성지의 일부를 공개하겠다는 말이었다.
처용의 성지, 거대한 산인 태룡사는 지금까지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이었다.
그런 출입 제한을 풀고 다른 성지처럼 일반인들도 드나들 수 있게 개방하겠다는 것.
물론, 산의 아래쪽 일부분만이었다.
처용이 성지의 일부를 공개하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우선, 성지의 크기가 하나의 도시 규모를 이룰 정도로 거대해졌기 때문이었다.
성지에 세울 수 있는 전각들도 두 개에서 각각 네 개로 늘어났다.
거기에 윤아의 아버지 회사, 대기업인 JS를 통해 성지가 꾸준히 발전하고 있었다.
점점 성지의 모습이 자연과 어우러지는 도시처럼 변해갔으니 이제는 사람들과 헌터들을 유입시켜도 괜찮을 때였다.
다른 성운의 성지들이 활발한 도시 교역을 하며 특산품을 거래하고 자본을 축적한다.
처용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도시를 활성화할 생각이었다.
무엇보다도 처용의 성지에는 헌터들에게 도움이 되는 요소가 아주 많았다.
일례로 성지에 세워진 전각, 수련탑만 해도 헌터들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당연히 이 계획은 처용 혼자서 짠 것은 아니었다.
하나의 도시를 활성화하고 운영하는 것은 처용이라 해도 쉽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러한 분야는 믿을 수 있는 전문가에게 맡기면 되었기에 문제는 없었다.
-제 모든 능력을 총동원하지요.
이 일을 진행할 적임자는 다름 아닌 협회장이었다.
헌터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 도시의 존재는 여러모로 큰 이득이었으니까.
무엇보다도 처용이 성지를 개방한다는 소식에 거대 길드들 역시 관심을 보였다.
그들이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단순히 역천군주의 성지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처용이 제시한 거래 내용 때문이었다.
“저희 길드가 성장한 영향이 큰 것 같았습니다. 당신 덕분이지만…….”
제시카가 다른 성운들의 헌터들이 보인 반응을 떠올리며 말했다.
처용의 거래 제안 이후, 거대 길드의 헌터들은 그들끼리 따로 만남을 가졌었다.
그만큼 처용이 제안한 거래가 엄청난 것이었으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그게…… 정말인가?
-그 엄청난 기술을 공유하겠다고?
선인의 수련법을 일부 공유하는 것이었다.
이에 각 길드의 헌터들이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무슨 의도인가?
-알 수 없군.
어떤 이들은 처용의 의도를 의심했고.
-올림포스가 성장한 것만 봐도…….
-반드시 응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해득실을 계산해 보며 환호하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처용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다.
“앞으로의 싸움에 대비해서…… 헌터들의 전투력을 높일 필요가 있습니다.”
처용이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하며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구의 헌터들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리는 것.
이것이 성지를 개방하고 각 길드에 거래를 제안한 이유 중 하나였지만.
‘자신 있으면 들어와 봐라……!’
처용이 어둠 속에 모습을 숨기고 암약하는 적들을 향해 속으로 읊조렸다.
어둠 속에 모습을 숨긴 적들은 다름 아닌 순혈자들과 마인들.
그들은 처용에게 당한 것이 많은 만큼, 이를 아득바득 갈고 있을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처용의 성지가 개방한다?
놈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당연하게도, 이는 처용이 역으로 그들을 낚기 위한 함정이었다.
그간 성지가 꾸준히 발전하고 성장한 만큼, 새로운 기능들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당장 개방하는 것도 아니고, 선택은 그들 몫입니다.”
처용이 제시카를 향해 말하고는.
-우우웅.
게이트를 열고 태룡전, 정확히는.
[왔느냐.]
미륵이 기다리고 있는 중앙 전각에 도착했다.
[그럼 슬슬 가보자꾸나.]
“네.”
처용이 미륵의 말에 대답하자.
-화아아!
미륵이 잿빛 신력을 오른손에 모아 세로로 선을 그었다.
그러자.
-스르르!
일직선으로 그어진 잿빛 신력이 천천히 퍼져 나가며 문을 형성했다.
돌을 쌓아 만든 고대 방식의 성문처럼 생긴 문.
마치, 광화문을 간결하게 축소해 놓은 듯한 모습의 관문이었다.
[문을 열어 주게나, 운장.]
미륵이 눈앞에 나타난 문에 대고 말하자.
-끼이이-!
문이 소리를 내며 좌우로 열렸다.
-저벅.
미륵이 앞장서 걸어갔고 처용이 그 뒤를 따라 문으로 향했다.
-화아아!
새하얀 섬광이 터진 듯, 눈앞이 확 가려졌다.
이윽고 시야가 점차 돌아오자.
[드디어 왔군.]
[기다렸다고!]
떠들썩한 소음이 울림과 동시에 새로운 환경이 나타났다.
고대 중국식 연무장과 같은, 넓은 평지.
그리고 연무장 외곽에는 평평한 바위를 쌓아 만든 것 같은 계단식 좌석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무신전의 성좌들과 동방불패 길드의 S급 헌터들이 자리해 있었다.
[바로 시작하겠는가?]
처용의 앞, 금빛 용이 휘감긴 언월도를 쥔 채 서 있는 운장이 근엄한 목소리로 말하자.
“네.”
처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무신의 시험을 시작하겠다!]
-쾅!
운장이 언월도를 들어 땅을 강하게 찍으며 외쳤다.
무신의 시험.
말 그대로 무신전에 거주하는 무신(武神)들이 내는 시험이었다.
처용이 무신의 시험장에 들어선 이유는 사전에 맺은 미륵과 운장의 거래 때문이었다.
동방불패 길드 역시 올림포스처럼 선인의 수련을 공유받는 것.
그에 대한 대가로 처용이 받은 것 중 하나가 바로 무신의 시험이었다.
무신의 시험이 치러지는 과정은 투쟁의 증명과 비슷했다.
시험자와 시험관이 서로 대련하여 투쟁을 증명하는 것.
그러나 무신의 시험만큼은 다른 증명이나 시험과는 조금 달랐다.
[첫 번째 시험관을 선별하겠다.]
-우우웅.
운장이 옅은 신력을 내뿜으며 말하자.
-화아아!
처용의 앞에 빛이 모이며 누군가가 나타났다.
[내가 뽑히다니, 행운이로구나.]
-탁.
이목구비가 뚜렷한 인상의 강인한 눈빛을 지닌 남성.
무인들이 입을 법한 도복과 깔끔하게 묶어 올린 머리, 그리고 오른손에 쥔 한 자루의 창.
[첫 번째 시험관은 ‘창무신’이니라.]
운장이 시험관으로 뽑힌 이를 보며 말했다.
처용 앞에 나타난 이는 무신전의 성좌 중 하나.
[내가 그대를 시험하겠다.]
창무신(槍武神)이라 불리는 성좌였다.
‘오랜만입니다. 자룡(子龍).’
처용이 눈앞에 나타난 성좌를 보며 속으로 반가움을 표했다.
창무신은 회귀 전, 처용에게 ‘창술’의 대한 묘리를 알려준 성좌였으니까.
[시험의 규칙은 알고 있느냐?]
“설명해 주십시오.”
운장의 말에 처용이 알고 있음에도 설명을 부탁했다.
[무신의 시험은 오로지 무(武)를 통해 투쟁하고 시험하는 자리이다.]
무신의 시험은 시험자의 무를 증명하는 시험이었다.
[이곳에서는 오로지 무술만을 써야 하느니라.]
이곳에서는 무술 외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마나는 다룰 수 있었지만, 스킬이나 신력, 권능은 사용할 수 없었다.
[시험자와 시험관은 서로 동등한 조건을 갖춘다.]
그것은 시험관으로 선출된 무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동등한 상태에서 무(武)를 겨루고 투쟁을 증명하는 것.
이것이 무신의 시험이었다.
그러나 서로 조건을 맞췄다고 해서 시험자와 시험관이 마냥 동등한 것은 아니었다.
시험관은 말 그대로 무신(武神)이었으니까.
하오찬을 포함한 동방불패 길드의 모든 S급 헌터들은 무신의 시험을 치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무신에게 인정을 받고 시험을 한 번이라도 통과한 이는 아직 한 명도 없었다.
[무기를 선택해라.]
운장이 처용을 보며 말했다.
무신의 시험은 단 하나의 무기만을 선택할 수 있었다.
-우우웅.
처용이 아공간을 열고 무기를 꺼내자.
[이럴 수가!]
[제정신인 건가?]
지켜보던 성좌들과 헌터들이 경악을 드러냈다.
처용이 창무신을 상대로 꺼낸 무기는.
-탁.
다름 아닌 ‘창’이었다.
[괜찮겠는가?]
창무신이 정말 창으로 자신을 상대할 것인지를 묻자.
“시작하시죠.”
-스가악. 탓!
처용이 두 다리를 벌리고 두 손으로 창을 쥐며 강하게 말했다.
[배짱이 좋구나!]
-스릉!
창무신이 처용의 자신감을 보며 미소를 짓고는 창을 겨누며 말했다.
끝이 날카롭고 중간이 볼록한 형태의 창날과 그 밑에 묶여 흩날리는 붉은 갈기.
그가 다루는 창은, 찌르기에 특화된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창.
이에 맞서는 처용의 창은 창날 옆에 좌우로 뻗은 날이 부착된 창이었다.
-차캉!
예리하게 날이 선, 두 창끝이 서로를 마주한 순간.
[첫 번째 시험을 시작하라!]
-쾅!
운장이 언월도를 들고 땅을 내려찍으며 시험의 시작을 알렸다.
동시에.
[무신의 시험이 시작됩니다.]
[시험관에게 투쟁을 증명하고 인정받으십시오.]
시스템 알림이 울렸고.
-샥!
창무신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쐐에에엑!
처용의 오른쪽 귀에서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눈이 반응하기도 전에 들어오는, 예리하고 신속한 공격.
‘뢰신보.’
-파지직!
처용이 다리에 번개를 휘감고 발을 뒤로 박참과 동시에 고개를 크게 숙인 순간.
-사아악!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머리 위로 들려왔다.
‘조금만 고개를 낮게 숙였거나 뒤로 빼는 게 늦었다면, 당했다.’
가까스로 공격을 피한 처용은.
-사악.
창을 쥐고 있던 두 손 중, 창의 끝부분을 잡던 왼손의 손목만을 돌려 창끝을 움직였다.
처용의 창끝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창무신의 머리가 있는 방향이었다.
창무신은 방금 처용에게 돌진하며 공격을 가한 상황.
[흠!]
갑작스럽게 시야에 창날이 보이자, 창무신이 다리를 가볍게 박차 돌진하는 몸의 방향을 틀었다.
처용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샤아악.
창무신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창끝을 고정해 느린 속도로 창을 내질렀다.
창무신은 천천히 다가오는 창을 응시하다가.
‘내가 더 빠르다.’
다시 한번 처용을 향해 빠르게 창을 내질렀다.
그 순간.
-쐐에에엑!!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던 처용의 창이 순식간에 속력을 높이며 쇄도했다.
느린 속도에 방심한 상대가 공격을 하는 순간을 노린 반격!
이대로라면 처용을 꿰뚫기도 전에 먼저 공격을 당한다.
잠시 당황한 창무신은.
-탁! 차캉!
공격을 내지르던 창의 궤도를 틀어 처용의 창을 쳐냈다.
허공에 짧고 강렬한 쇳소리가 울렸고.
-차아악!
창을 쥔 두 무인이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우연인가? 아니면…….’
창무신이 방금 전, 처용이 내지른 창을 생각하며 속으로 읊조렸다.
느릿느릿 움직이며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고 기회를 포착한 순간!
치명적인 일격을 노리는 독사처럼 재빠르게 정확한 공격을 내지른다.
보통, 헌터들은 스킬이라는 시스템의 힘에 대부분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스킬에 의존하는 이들은 그만큼 기본기가 출중하지 못하다.
그러나 방금 처용이 보인 공격은 절대로 시스템과 스킬에 익숙해진 인간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무를 연마한 이들만이 보일 수 있는 아주 노련한 공격이었다.
‘우연이 아니다.’
창무신이 속으로 처용을 재평가하듯 중얼거리고는 눈빛을 다잡았다.
그리고.
-차캉!
창을 쥔 자세를 바꾸었다.
다리의 간격이 어깨보다 조금 넓게 벌어졌고 자세가 더 낮아졌다.
또한, 처용을 겨누던 창날이 창무신의 오른쪽 다리 방향으로 내려갔다.
왼손으로 잡은 창끝 또한 강하게 움켜쥔 모습에서 가볍게 잡은 듯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창의 기본자세인 찌르는 자세가 아닌, 마치 휘둘러 베려는 듯한 자세.
“……!”
창무신의 바뀐 자세를 본 처용의 눈빛에 긴장감이 일렁였다.
그때.
-스가-악!
창무신이 처용을 향해 다가오며 창을 크게 휘둘렀다.
베려는 듯한 자세가 맞다는 듯, 크고 넓은 간격의 횡 베기였다.
처용은 창끝을 쥔 왼손에 힘을 더하며 창날을 조금 낮추었다.
-차카캉!
처용이 창무신의 횡 베기를 가볍게 막아낸 순간,
-차카카- 차캉!
창무신의 창이 원을 그리듯 둥글게 회전하며 다가왔다.
상대의 창을 휘감아 궤도를 비틀어 쳐내고 공격하는 창술이었다.
-탓!
처용은 창무신이 창으로 그려내는 원에 휘말리지 않고 그대로 뒤로 빠졌다.
그러자.
-샥! 차캉!
마치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창무신이 발을 박차며 처용에게 돌진했다.
원을 그리던 창의 회전력을 그대로 유지한 채 내지르는 일격.
지금 처용의 눈에는 그런 창무신의 공격이, 여러 개의 창이 동시에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환륜창(幻輪槍)!’
창날을 둥글게 회전시키며 빠른 속도로 공격하는 창술.
상대의 창을 가로막는다면 그대로 회전력에 말리며 무기가 튕겨 나간다.
그렇다고 쉽게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회전을 그리며 다가오는 창무신의 창은.
처용의 머리와 심장, 양쪽 어깨를 동시에 노리며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마치, 하나의 창이 네 개로 분리된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창날의 수가 점점 늘어난다.
-탓!
뒤로 물러나던 처용이 발걸음을 멈추고.
-우우웅!
강기를 끌어올리며 창을 내질렀다.
처용이 내지른 창날은 정확히 창무신이 그리는 원의 위쪽이었다.
-차카캉!
회전하던 창무신의 창날과 처용의 창이 충돌했다.
회전하며 환영을 만들어내던 창무신의 진짜 창을 잡아낸 듯 보였지만.
-쐐엑! 쐐에엑!
창무신이 만들어 낸 환영이 가짜가 아니라는 듯, 처용의 머리와 심장을 목표로 창날이 쇄도했다.
그 순간.
‘천마신창 – 영격(影格).’
-스르르륵!
처용이 내지른 창날의 아래쪽에 검은 기운이 일렁이더니, 좌·우로 분리되었다.
창날 옆에 나타난 것은 처용의 창날과 똑같은 모습의 검은 창날이었다.
새로 나타난 검은 창날이, 방금 처용이 내지른 창격을 그대로 재현하듯 앞으로 내질러졌다.
‘그림자 찌르기.’
-차캉! 차카카캉!
검은 창날이 창무신이 만들어 낸 환영의 창날을 튕겨내고는 가루처럼 흩어지며 사라졌다.
동시에.
-탓! 타닷!
처용과 창무신이 서로 물러났다.
그리고.
[허, 허허…… 이것 참.]
창무신의 입에서 황당한 듯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