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처용이 위에서 아래로 내지른 단 한 번의 검격.
하늘과 땅을 잇는 황금빛의 찬란한 선이 그어지자.
-쿠구구-! 쩌저저적!
하늘과 땅이 두 쪽으로 양분되며 크게 갈라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
입을 크게 벌리며 소리 없는 경악을 내지르는 뤼장첸이 있었다.
-쩌적! 쩌저저적!
뤼장첸을 머리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반으로 나눈 황금빛 선에서 균열이 번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균열이 뤼장첸의 전신을 뒤덮었고.
-파사사……!
반으로 나뉘어 부수어지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
눈을 감은 채 기절한 모습인 에블린이 나타났고, 그런 그녀 주변에.
“크아아-!”
살덩어리가 뭉쳐져 만들어진 벌레와 같은, 기괴한 모습의 뤼장첸.
-우우웅!
에블린의 가슴께에서 조금 떨어진 채 발광하고 있는 태초의 조각.
마지막으로.
-끼긱!? 끼기기기-!
괴상한 소리를 내뱉으며 버둥거리는 검은 괴생명체.
나무뿌리인지 넝쿨인지 모를, 기괴한 촉수를 휘두르며 퍼덕이는 해골이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페러사이트 디맨터!’
아스모데우스가 에블린을 감염시키기 위해 만들어 낸 저주이자, 감염 생명체였다.
에블린을 중심으로 서로 뭉쳐졌던 존재들이 모두 분리되어 버렸다.
완전한 형태를 취한 항마의 화신.
그리고 그 상태에서 발휘하는 결전기 태극천체진.
그 모든 힘을 한곳에 집중하여 내리치는 일격.
의념기(意念技) – 태극천체일도(太極天體一刀).
이 기술은 일반적인 스킬이나 권능처럼, 그 효과와 특성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의념기(意念技), 말 그대로 자신의 의지를 구현화시키는 기술.
-스스로의 의지를 수련한 무인이 극의에 닿으면 그 심상(心象)을 구현할 수 있다.
-그 심상(心象)을 갈고 닦아 자신의 한계마저 넘는다면! 스스로의 의지를 현실에 구현할 수 있느니라!
회귀 전, 처용이 심상을 수련할 때, 검성과 천마가 알려주었던 가르침.
스스로의 한계를 넘고 심상 세계에 도달한 무인은 그 의지를 현실에 구현할 수 있다.
한계를 넘어 스스로의 심상을 정립한 무인들이 사용하는 기술이 바로 의념기였다.
그런 처용 스스로가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기술인 태극천체일도.
태극천체일도는 처용이 자신의 의지 자체를 권능으로 승화시켜 물리적으로 구현하는 기술이었다.
처용이 태극천체일도에 담아낸 의지는 다름 아닌.
“거지새끼들처럼, 불쌍한 애한테 붙어 빌어 처먹지 말고-.”
에블린에게 붙어 기생하던 기생충들.
“전부 꺼져라!”
뤼장첸과 태초의 파편, 페러사이트 디맨터를 모두 분리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에블린에게 뭉쳐 재앙의 나무가 되었던 놈들은 처용의 의념(意念)이 담긴 일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아-아 안-돼! 이 녀-년은 내-!”
강제로 분리된 뤼장첸이 거대한 탐욕을 드러내며 에블린에게 뒤틀린 팔을 뻗었다.
-쩌저저적!
아직 흡수한 힘이 남은 것인지, 뤼장첸의 팔에서 검은 나무뿌리가 솟구쳐 나왔다.
다시 에블린을 향해 뤼장첸의 마수가 뻗어 나가려는 순간.
-샥!!
순식간에 항마의 화신과 처용이 다가왔다.
항마의 화신이 재빨리 손아귀를 뻗었고.
-콰쾅! 으드득!
에블린에게 향하는 검은 나뭇가지들을 쳐부숨과 동시에 뤼장첸을 움켜쥐었다.
“팔괘봉마진 - 영옥!”
처용이 뤼장첸을 향해 팔을 뻗으며 말하자.
-스르르륵! 지이잉!
항마의 화신 손아귀에 갇힌 뤼장첸의 주변으로 팔괘의 진법이 떠올랐다.
“아- 안 돼! 이럴 수-!”
뤼장첸이 벗어나려 발버둥을 치기도 전에.
-키이이-!
밝은 빛이 뭉쳐 들며 뤼장첸을 감싸고는 작은 상자로 변하며 사라졌다.
항마의 화신이 뤼장첸을 봉인시킨 순간.
-스르릉!
처용이 역천의 절을 뽑아 들며 항마의 화신 밖으로 나갔다.
처용이 다급하게 쇄도해 나가며 칼날을 앞으로 내질렀다.
그 칼날 끝에 있는 대상은 다름 아닌.
“네놈 뜻대로 될 것 싶으냐!!”
태초의 조각을 향해 스멀스멀 촉수를 뻗고 있는 페러사이트 디맨터였다.
아니 정확히는.
“아스모데우스!”
페러사이트 디맨터를 조종하고 있는 색욕악신, 아스모데우스.
지금 여기에 있는 그 어떤 누구보다도 위험천만한 존재를 향해 처용이 소리쳤다.
지금조차도.
-스멀. 스멀.
페러사이트 디맨터는 에블린과 태초의 조각을 둘 다 차지하기 위해 촉수를 내뻗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처용이 재빨리 행동한 덕분에.
-스가가각! 사각!
페러사이트 디맨터가 뻗던 촉수 다발들이 모두 끊어졌다.
동시에.
-콰지직!
촉수들이 넘실거리는 기괴한 해골 모습인 페러사이트 디맨터의 본체.
그 목뼈를 강하게 틀어쥐었다.
그러자.
[네놈…….]
해골의 입에서 교태 가득한 여성의 농후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 벌레 같은 하계종 따위가 감히 내 계획을-]
그런 아스모데우스의 목소리가 다 끝나기도 전에.
“반갑다. 이 쌍년아.”
-우드득!
처용이 붉게 일렁이는 눈동자를 치켜뜨고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이런 건방진 것!]
페러사이트 디맨터에게서 아스모데우스 분노한 목소리가 울렸고.
-촤라라락!
촉수 다발들이 튀어나와 처용을 옭아맸다.
[혈선의 신관, 네놈을 저 하계종 대신 내 컬렉션에 넣어주마.]
-치이이!
에블린처럼 처용 역시 침식시키려는 듯, 녹색의 안개가 뿜어져 나왔지만.
“그으~래?”
-화아아! 파사사……!
처용과 그 뒤에 있는 항마의 화신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파마의 신력에 의해 모두 증발되었다.
그리고.
“나를 위해서 네년이 무엇을 준비해 줄지, 내 친히 기대해 주마. 크크.”
진심으로 기대한다는 듯 미소를 지은 처용이 아스모데우스를 하대하며 말했다.
아스모데우스는 대악마, 지옥의 악마들 위에 군림하는 악의 군주였다.
언제나 고압적인 태도로 다른 악마들을 내려다보는 악신.
당연하게도 그런 그녀가 가장 하찮고 벌레처럼 여기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인 처용이 아스모데우스를 하대하며 도발한 상황.
당연히.
[이 하등한 벌레 새끼가 감히-!!]
아스모데우스의 입장에서는 격렬한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처용은 그런 아스모데우스의 분노 어린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팔괘봉마진 - 영멸!”
-피이이-! 파사사삭……!
강렬한 파마의 신력을 주입해 페러사이트 디맨터를 터트려 버렸다.
‘많이 빡칠 거다.’
처용이 속으로 아스모데우스를 향해 한 번 더 비웃음을 흘릴 때.
-화아아…….
여래의 강신이 끝났고 항마의 화신이 옅게 흩어지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탓. 털썩.
공중을 부양하고 있던, 에블린과 처용이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오며 땅에 닿았다.
“이제 이걸-.”
처용이 누워 있는 에블린의 위로 부유 중인 태초의 조각을 보며 읊조릴 때.
“역천군주! 방금 그건-!?”
제시카를 포함한 다른 헌터들이 다가왔다.
“이, 이게 도대체……?”
제시카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40미터가 넘어가는 항마의 화신을 보며 놀란 듯 읊조리고는.
“이것은……!?”
아직도 금빛이 일렁이는, 하늘과 땅을 반으로 갈라버린 전투의 흔적으로 보며 경악을 드러냈다.
비단 제시카만이 아닌.
“…….”
“이런 스킬이- 아니, 이게 스킬일 리가-!?”
주변에 모인 모든 이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일렁였다.
조금 전, 뤼장첸이 모든 골렘들을 흡수한 탓에 헌터들의 전투가 갑작스럽게 끝나 버렸다.
빠르게 전열을 재정비한 헌터들이 처용을 돕기 위해 다가온 순간.
그들이 본 것은 50미터를 넘기며 점점 크기를 키워 가는 거대한 나무 골렘, 뤼장첸과.
-우우웅!
찬란한 황금빛의 칼 한 자루를 쥔 항마의 화신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항마의 화신이 내지른 단 한 번의 검격.
-스르릉! 쩌저저적!
그 한 번의 검격으로 하늘과 땅이 황금빛으로 갈라지며 싸움이 끝났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전율적인 광경에 헌터들이 입을 다물지 못할 때.
“에블린!?”
커맨더가 처용의 앞에 누워 있는 에블린을 보며 소리쳤다.
“죽은-.”
“살아 있습니다. 아직은…….”
커맨더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처용이 에블린을 노려보며 답했다.
아니, 정확히는.
-우우웅!
에블린의 위에 부유하며 흔들리고 있는 태초의 파편을 노려보고 있었다.
“에블린……!”
커맨더가 복잡한 표정으로 에블린을 보며 읊조렸다.
재앙의 나무라는 인류에 위협적인 존재로 거듭난 소녀.
눈앞에 있는 에블린은…… 죽여야 하는 것이 맞았다.
과거 그녀를 처치하는 것을 망설였다가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었다.
또다시 그녀가 재앙의 나무가 되어 버린다면, 더 많은 피가 흐를 것이다.
그러나 커맨더는 이번에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
이 상황을 종식시킨 처용이 무언가를 생각하듯 가만히 있기 때문이었다.
처용은 이곳에 있는 그 어떤 누구보다도 냉정하고 냉혈한 인물이었다.
그런 처용이 눈앞의 에블린은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처용은 움직이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고생했느니라.]
-탓.
미륵이 지상에 착지하며 처용 앞에 나타났다.
[스스로의 의지를 현실에 관철하는 기술이라니…… 훌륭하구나.]
“이번엔…… 평소보다 좀 더 노력했습니다. 하하.”
처용이 미륵의 칭찬에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굳이 평소보다 더 힘을 들여 의념기를 쓴 이유.
뤼장첸과 에블린, 페러사이트 디맨터를 한 번에 없애 버릴 수 있었음에도 굳이 분리시킨 이유.
처용에게는 단순히 적의 섬멸만이 아닌, ‘진짜 목적’이 있었기에 평소보다 공을 들인 건 사실이었다.
“이제 어찌하면 됩니까?”
처용이 에블린과 태초의 조각을 바라보며 미륵에게 묻자.
[이제는 봉인이 가능하겠구나.]
-찰랑. 찰그랑.
미륵이 석장을 앞으로 내밀며 답하고는 잿빛 신력을 분출했다.
그러자.
-콰아아아!
태초의 조각이 미륵의 신력에 반항하듯, 격렬한 기운을 뿜으며 진동했다.
[이 녀석이…… 얌전히 묶여라!]
-쾅!
미륵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읊조리고는 석장을 들어 땅을 강하게 내려쳤다.
-화아아!
잿빛의 신력이 더 짙어지며 태초의 조각을 감싸기 시작했다.
-콰아! 콰아아!
태초의 조각 역시 그런 미륵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 더 거칠게 몸부림쳤다.
동시에.
-스르르!
누워 있는 에블린을 향해 기운을 뻗기 시작했다.
마치, 다시 그녀를 잠식하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쉽지 않군!]
미륵이 태초의 조각과 힘 싸움을 할 때.
-저벅.
처용이 태초의 조각 앞으로 한 발 나아갔다.
[무엇을 하려는-?]
미륵이 처용의 돌발 행동에 의문을 표하며 말했지만.
-저벅.
처용은 미륵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태초의 조각과 에블린에게 시선을 집중하며 또 한발 걸어갔다.
지금 처용에게는.
-……죽여 주세요.
신수의 격을 통해 에블린의 고통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저를…… 죽여 주세요. 그럼 저게 더 날뛰지 않을-.
에블린이 자신을 죽여달라며 애원하고 있었다.
-스르릉!
처용은 그런 에블린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역천의 절을 강하게 쥐었지만.
-스릉. 우우웅.
곧 손아귀에 힘을 풀고 역천의 절을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제발…… 나를 죽-.
-아파요. 너무 고통스러워-.
-더 아프고 싶지 않-.
지금도 신수의 격을 통해 에블린이 스스로를 죽여 달라 애원하는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널 죽이지 않을 것이다.”
처용은 그런 에블린의 애원을 단호하게 거부하며 말하고는.
“죽여 달라고 하는 녀석이 왜 살고 싶어 하는 것이냐?”
에블린을 향해 모순적인 대답을 하며 말을 이었다.
처용에게는 신수의 격을 통해 에블린의 목소리만 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제발 나를 죽여 주세요.
죽여 달라는 에블린의 목소리에.
-살려 줘!
살고 싶다는 강렬한 마음이 전달되고 있었다.
신수의 격은 신수의 목소리만을 듣는 권능이 아니었다.
마음과 심리도 전달받을 수 있었다.
아직도 어째서 신수의 격이 에블린에게 반응하는지는 미스터리였지만.
-제발…… 이 고통을 끝내-.
-나를 죽여-.
아픔을 표현하는 에블린의 목소리 안에는.
-제발 나를 살려 줘!
-나를…… 도와줘.
살려 달라는, 도와달라는 간절한 진심이 섞여 있었다.
-탁.
에블린의 앞에 도달한 처용이 부유하고 있는 태초의 파편을 내려다봤다.
그러자.
-우우웅!
마치, 방해하지 말라는 듯 태초의 파편이 강렬한 파동을 내뿜었다.
동시에.
-스르르.
그 파동에 영향을 받은 탓인지, 누워 있던 에블린이 점점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본 처용은.
“태초신이고 지랄이고-.”
-화아아!
황금빛 신력을 분출하며 오른손을 뻗었다.
“모기 마냥, 애한테 붙어서 연명하지 마라! 이 빌어 처먹을 새끼야!”
-탁! 우드드-!
처용이 손을 뻗어 태초의 조각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쿠구구!
태초의 조각이 격렬하게 반항하듯 진동했다.
“닥치고 조용히 해라!”
처용이 태초의 조각을 더 강하게 움켜쥐며 명령하듯 소리쳤다.
-쿠구구!
파마의 신력이 태초의 조각을 휘감은 순간.
-우우웅…….
격렬하게 진동하던 태초의 조각이 점점 잠잠해졌다.
이윽고 주변을 진동시키던 기류마저 사라지고.
-털썩.
공중에 조금씩 떠오르던 에블린이 다시 바닥에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미륵은.
[……어떻게, 잡은 것이냐?]
처용을 보며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