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에블린이 처용에게 팔찌를 감아 준 순간.
-화아아!
처용에게 흘러들어온 것은 그녀의 기억과 감정이었다.
그동안, 그녀 주변에 무슨 일들을 일어났는지, 무슨 실험을 겪었는지 등을 알 수 있었다.
에블린이 전해 준 기억을 통해, 여러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후후훗, 이건 내가 공들여서 개조시킨 거라고?
예상과 의심만 했었던 부분도 진실로 확정 지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에블린은 아스모데우스가 작정하고 노려서 감염시킨 실험체였다.
거기에 이어.
-호호, 대의를 위해 이까짓 하계종 한 마리쯤이야.
아스모데우스에게 에블린을 팔아넘긴 성좌에 대한 정보도 얻었다.
단순히 목소리만을 들었기에 누군지는 확정 지을 수 없었지만.
‘순혈자……! 그것도 여신 중 하나.’
에블린의 기억을 토대로 나름 단서를 얻은 순 있었다.
과거, 그녀의 주변에 갑작스럽게 게이트가 열렸던 이유.
아스모데우스의 작품인 페러사이트 디맨터가 지구에 나타난 이유.
그리고 왜 이런 거래가 성사되었는지도.
‘역시…… 그때 판데모니움과 순혈자의 동맹이 맺어진 것이 확실하다!’
처용의 예상대로, 세계 가문 연합과 성좌들의 대규모 실험 당시.
판데모니움의 대악마들과 순혈자들 사이에 동맹이 맺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에블린의 기억 속에는 지금의 사건, 재앙의 나무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이렇게 하면 태초의 조각에 담긴 에너지를 다룰 수 있지.
-그렇군, 협력하지.
아스모데우스와 아마테라스가 서로 협력을 약속한 부분.
아마테라스의 진짜 목적은.
-이제……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이자나기시여.
터무니없게도 소멸한 이자나기의 부활이었다.
이자나기만 되살릴 수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져도 상관이 없는 듯 보였다.
처용은 에블린의 기억을 통해 재앙의 나무와 관련된 사건을 정리할 수 있었다.
페러사이트 디맨터를 실험하기 위해 아스모데우스는 뛰어난 숙주를 찾고 있었다.
그런 대악마의 눈에 띈 것은 에블린.
에블린의 성좌는 아스모데우스와 거래를 했고 에블린을 팔아넘겼다.
아스모데우스의 실험으로 에블린의 감염과 변이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강력한 병기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에블린의 상태가 불안정해졌다.
그런 와중…… 기회가 찾아왔다.
태초의 조각을 이용해 염원을 실현하려는 아마테라스와.
뤼장첸을 완성시키려는 옥황상제.
아스모데우스는 그런 아마테라스와 옥황상제를 역으로 이용해 판을 짰다.
뤼장첸은 태초의 조각에 담긴 힘을 이용해 완전체가 될 수 있다는 말로 회유를 했고.
아마테라스는 완성된 뤼장첸의 힘을 역으로 태초의 조각에 흡수시켜 염원을 이룰 수 있다 말했다.
아스모데우스는 나름 완벽한 계획을 세웠지만, 언제나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회귀 전에는 재앙의 나무가 완전히 폭주하여 일본을 멸망시켰고.
지금은 뤼장첸이 재앙의 나무를 장악했다.
즉, 결론을 내리자면.
재앙의 나무가 나타난 진짜 원인은 멍청한 신격들이 각각의 강욕을 부리다가 벌어진 사고였다.
“개 같은 배신자 새끼들이……!”
-으드득!
처용이 이를 갈며 분노를 곱씹었다.
신격들이 강욕을 부린 결과, 지구와 인간들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입고 있었다.
신들은 인간들이 죽든 말든, 고통을 받든 간에 신경 쓰지 않는다.
인간들은 신을 위해 희생되는 것이 당연한 하찮은 존재들이었으니까.
회귀 전 처용도 자주 겪어보고 당한 일들이었다.
-수호신이면 그 신명답게 전장에 앞장서라!
평소에는 반쪽짜리라며 처용의 신격은 취급도 안 하던 선천적 신격들.
그들은 처용의 무력이 아쉬울 때만 ‘수호신’의 의무를 다하라며 희생을 강요했다.
그런 불합리를 개선하고 화합해보려 노력도 해보았지만.
-반쪽짜리 하계종이 감히! 신의 지엄한 뜻을 거스르지 마라!
선천적 신격들은 ‘인간’인 처용의 노력을 무시했다.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온 지금은, 그런 선천적 신격들과 화합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회귀 전처럼, 권위만 내세우며 강욕을 부리는 선천적 신격들은 필요 없다.
미래에 방해가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워 버릴 생각이었다.
회귀 전과 같은 종말이 되풀이될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처용을 유독 분노하게 만드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신수의 격이 요동칩니다.]
다름 아닌, 신수의 격이 에블린의 기억과 감정에 동요하듯 울리고 있었다.
그 이전에도 에블린의 심장을 꿰뚫었을 때, 그녀의 감정이 전해진 이유가 신수의 격 때문이었다.
신수들에게만 반응하는 신수의 격이 왜 에블린에게 반응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
-……!!
처용에게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스트레스가 강렬하게 전해져 오고 있었다.
그간 강욕적인 신격들에 의해 에블린이 실험을 당하며 받아온 고통들이었다.
이런 와중에.
-무엇에 그토록 ‘분노’하는가?
처용의 머리를 어지럽히는 목소리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졌다.
‘그냥…… 전부 마음에 안 든다.’
눈을 감은 채 심상에 빠진 처용이 속으로 대답하자.
-그렇다면, 그 분노의 원인을 ‘징벌’해라.
처용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죄악의 파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치 처용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처용 역시.
“…….”
팔찌에서 전해지는 생생한 기억과 고통을 전달받으며 분노에 휩쓸리는 듯 보였다.
그러나.
‘……네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처용이 눈을 뜨고는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히던 파편의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이 짓거리를 벌인 개새끼들을 응징할 거다.’
요동치는 마음을 다스린 처용이 굳은 목소리로 말하자.
-네놈의 징벌을 기대하지.
작은 미소를 띤 파편이 마지막 말을 전하고는 침묵에 잠겼다.
목소리를 전해오던 파편의 기운이 사라진 것을 느낀 처용은.
“뤼장첸……!”
고개를 들고 정면을 응시하며 읊조렸다.
정확히는 눈앞을 가로막는 나무벽 너머에 있는 뤼장첸을 응시했다.
-우우웅!
에블린이 전해 준 팔찌 덕분인지, 뤼장첸의 위치가 실루엣처럼 눈에 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에블린에게 붙어 기생하고 있는 뤼장첸의 존재가 정확하게 인지되었다.
그리고.
-우우웅!
-우웅!
뤼장첸을 제외하고 에블린에게 붙어 있는 다른 두 기생충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특히 그 두 기생충 중, 유독 검고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존재를 노려봤다.
목표를 정확히 인지한 처용은.
“항마의 화신.”
-콰아아아!
격렬한 신력을 분출하며 항마의 화신을 사용했다.
-콰지직! 콰직! 콰지직-!
처용의 신력에 의해 주변을 메꾸던 검은 나무들이 뜯어지고 부서지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콰지지지지-직!!
주변 일대를 휘감으며 돔을 형성했던 나무들이 모조리 부서져 나갔다.
“이- 이이……!”
처용을 잡아먹기 위해 공을 들여 준비했던 결계가 부수어지자 뤼장첸이 침음을 흘렸다.
“네-년이! 쓸데없는 짓을-!”
뤼장첸은 처용이 결계를 손쉽게 빠져나온 것을 에블린 때문이라 생각하며 말했다.
“닥쳐 이 개새끼야.”
항마의 화신을 두른 채, 허공을 부유하는 처용이 뤼장첸을 내려다보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부터 네놈과 나의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였어.”
“웃-기지 마라!”
-콰드드드득!
뤼장첸이 처용의 말에 거칠게 답하며 검은 나무뿌리들을 일으켰다.
-촤자자자!
지면을 뚫고 날카롭고 두꺼운 나무뿌리들이 처용을 향해 솟구쳐 올라오자.
“파마의 빛.”
-화아아!
처용과 항마의 화신이 두 손을 합장하고는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파사사사……!
처용을 향해 솟구쳐 올라오던 검은 나무뿌리들이 바싹 마르며 사그라졌다.
공격을 가볍게 막아낸 처용을 본 뤼장첸은.
“그 강-력한 힘! 그 신력과 힘은 나의 것이다!”
-콰드드득! 촤자자작!!
번들거리는 눈으로 거대한 탐욕을 드러내며 다시 나무뿌리를 쏘아 보냈다.
이번엔, 돔을 형성할 때보다도 더욱 넓고 광범위한 지역에서 뿌리가 솟구치고 있었다.
그 모든 뿌리들이 처용 하나만을 노리고 달려드는 상황.
그러나.
-화아아아-!
처용과 항마의 화신이 파마의 신력을 퍼트리자.
-파사사사-삭!
처용을 향해 쇄도하는 모든 나무뿌리들이 사그라지며 부수어져 내렸다.
뤼장첸이 가진 에너지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통찰의 눈을 발동하고 있는 처용의 눈에도.
-콰아아아-!
에블린과 태초의 조각, 그리고 새까맣고 불길한 무언가에게서 뤼장첸에게 흐르는 거대한 힘이 보였다.
그러나 상대가 가진 마(魔)의 에너지가 아무리 거대하다 한들.
“네놈이 마(魔)의 힘을 쓰는 이상, 백 번, 천 번 죽어 살아난다 해도 날 이길 순 없다.”
처용의 신력은 파마(破魔)의 신력.
항마의 화신은 그런 파마의 신력으로 발휘하는 궁극의 권능이었다.
지금의 뤼장첸은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운 온갖 에너지들을 마의 힘으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너지의 질로만 따지면, 신력은커녕, 처용의 강기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거대한 에너지를 무수히 쏟아낸다 해도.
-파사사…… 파사삭!
마에 있어서 포식자나 다름없는 힘인 파마의 신력을 조금도 뚫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이-러언! 쓸모없-는 것들!”
-콰아아! 파지지-지직!
뤼장첸이 처용을 상대하기 위해 무리를 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에너지들이 스파크를 튀기며 뤼장첸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쿠오오!-!?
-크아!?
뤼장첸이 뱉어낸 에너지들.
헌터들과 전투를 치르고 있는 나무 골렘들이 모두 뤼장첸에게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여덟 마리의 S급 나무 골렘들 역시 뤼장첸에게로 빨려 들어가듯 날아갔다.
뱉어낸 에너지로 형성된 골렘들이 다시 뤼장첸에게로 흡수되자.
-쩌적! 쩌적! 쩌저저-!
부수어졌던 뤼장첸의 몸체가 복구되며 점점 크기가 더 커져 갔다.
그 크기가 40미터가 넘어가고 이젠 50미터에 달하고 있었다.
게다가 몸체를 감싼 나무껍질들이 더 견고해지고 두꺼워졌다.
“네년이 가진 모든 걸 뱉어내라! 이 노예 새끼야!”
뤼장첸이 더 또렷해진 목소리로 크게 외치며 에너지 흡수에 박차를 가하자.
-꺄아아아아!
그런 뤼장첸에 의해 영향을 받았는지, 에블린의 비명이 울렸다.
‘……좋지 않다.’
처용이 통찰의 눈으로 뤼장첸에게 붙잡힌 에블린을 살펴보며 침음을 흘렸다.
여기서 더 뤼장첸이 위험하게 변하는 것은 사양이었다.
아무리 항마의 화신을 사용했다지만, 뤼장첸을 감싸는 거대한 에너지를 한순간에 없애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스승님.’
처용이 여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힘을 보태 주마.]
-화아아!
상황을 지켜보던 여래가 즉시 처용의 도움을 수락했다.
여래의 화신체를 받아들이고 강신을 사용한 처용이 합장하던 두 손을 떼고는.
“항마의 화신 – 강신(降神)의 상!”
양 손가락의 검지와 소지를 맞댄 모습의 수인을 맺으며 권능을 발동했다.
그러자.
-화아아!
공중을 부유하던 항마의 화신의 밑으로 신력이 모이더니.
-쩌저적! 쩌적!
다리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본래 항마의 화신은 여래의 상반신과 같은 형상을 띠고 있었다.
그런 반쪽뿐이던 항마의 화신이 완전한 모습으로 변했다.
항마의 화신을 사용한 상태에서 강림까지 사용해야만 발현할 수 있는 권능.
여래의 도움으로 항마의 화신이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자.
-파아아!
주변에 퍼지던 파마의 신력이 더욱 짙어졌다.
그로 인해.
-치이이- 치이……!
대지를 뚫고 나와 주변을 잠식하던 검은 나무뿌리들이 모두 말라비틀어지며 부수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캬아아-!”
뤼장첸이 파마의 신력에 저항하며 비명을 지르고는.
“그 강력한 힘! 그 힘을-! 내-놓아라!!”
-위이이이이-!
양손을 앞으로 뻗으며 거대한 에너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쿵!
40미터 정도 크기의 거대하고 완전해진 모습으로 변한 항마의 화신이 지면으로 내려왔다.
동시에, 항마의 화신 가슴께에 있던 처용이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마치, 무언가를 양손으로 쥐는 듯한 자세를 취하자.
-쿠구구!
항마의 화신이 처용을 따라 손을 앞으로 뻗으며 무언가를 쥐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팔괘 – 태극천체진.”
자세를 유지한 채 처용이 결전기를 발동하자.
-스르릉! 스릉! 스릉!
처용의 주변에 열두 개의 무구들이 나타났다.
동시에.
-스르륵! 철컥! 철컥!
황금빛의 신력들이 무구들을 갑옷처럼 감싸며, 그 무구와 같은 거대한 형상을 취했다.
마치, 처용을 감싼 항마의 화신과 비슷한 모습.
신력이 덧씌워져 거대해진 무구들이 처용의 앞으로 모였다.
그리고.
-화아아아!!
항마의 화신이 뻗은 손아귀에 뭉쳐 들더니.
-스르릉!
빛이 뭉쳐져 만들어진 듯한, 한 자루의 도(刀)로 변했다.
“의념기(意念技) – 태극천체일도(太極天體一刀).”
처용이 검도를 하듯, 열두 개의 무구가 모여 만들어진 도를 앞으로 세우자.
-쿠구구!
항마의 화신 역시 처용의 자세를 따라했다.
“그으-깟! 칼 한 자루로 뭘 하겠다는 거냐!!”
뤼장첸이 처용을 향해 비웃음을 담아 소리치고는.
“모조리! 사라져라!”
-콰아아아!
손아귀에 모으던 강렬한 에너지 덩어리를 처용을 향해 뻗으며 쏘아 보냈다.
거대한 흑색의 에너지 광선이 처용에게 향하자.
“태극천체일도-.”
-스르릉!
처용이 침착하게 칼날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는.
“천지단절(天地斷切).”
-사아아-!
부드럽게 칼날을 아래로 내리그었다.
처용과 항마의 화신이 칼날을 내리긋는 순간.
-스-가가각!
뤼장첸이 쏘아 보낸 검은 에너지의 광선이 반으로 뚝 갈라졌다.
“크어- 억!?”
단말마를 내지른 뤼장첸 역시 정수리부터 아래로 쭉 이어지는 황금빛의 선이 그어졌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콰아아!
뤼장첸의 뒤로 하늘과 땅을 잇는 찬란한 황금빛 선이 그어졌다.
그러고 약 1초 뒤.
-!!
강렬한 굉음이 울림과 동시에 황금빛 선을 중심으로 하늘과 땅이 반으로 갈라졌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