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빌리와 릴이 본격적으로 충돌하고 연화와 연아, 윤아가 대악마의 성물을 찾으러 갈 때쯤.
“몽환의 미로인가?”
다른 장소로 워프된 처용이 주변을 둘러보며 읊조렸다.
아스모데우스의 권능인 몽환의 미로.
이 권능은 주변 일대를 마기로 휘감아 미로를 형성하고 휘말린 모든 이들을 무작위 위치로 워프시키는 권능이었다.
그리고 몇몇 지정된 인물은 원하는 곳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
공격용 권능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권역에 쳐들어온 적들을 방어하는 데 특화된 권능이었다.
‘이걸 준비하고 있었다는 건, 우리가 오는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처용이 미로를 살피며 속으로 읊조렸다.
몽환의 미로는 대악마의 성물에 마기를 집중하여 오랜 시간 준비해야 발동할 수 있는 권능이었다.
릴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처용과 헌터들이 쳐들어오자, 타이밍에 맞춰 권능을 발동했다.
처용은 최대한 빠른 시간에 헌터들을 모아 이곳에 공격을 감행했다.
그런데 상대는 미리 몽환의 미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사전에 정보를 파악한 정도가 아니라, 누군가가 실시간으로 정보를 전해 줬다는 소리였다.
처용의 예상으로는.
‘그때 현장에 있던 놈들 중 스파이가 있다.’
화상으로 마주했었던 헌터들 중, 간자가 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혹은 그들과 가장 가까운 누군가가 스파이일 가능성도 있었다.
스미스와 15년을 같이 일한 엠마가 그랬듯.
“명환부 인도의 빛.”
생각을 끝낸 처용이 명환부 한 장을 소환하여 얇은 빛의 실선을 만들어 내었다.
-휘릭. 휘릭.
얇은 빛의 선이 바람에 흩날리듯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휙!
마치 방향을 가리키듯, 어느 한 방향을 향해 쫙 펴졌다.
방금 처용이 사용한 기술은 가장 거대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방향을 탐지하는 기술이었다.
문제는.
‘아래인가?’
빛의 실선이 가리키는 방향이 아래라는 점.
미로를 뚫고 아래로 향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것이다.
하지만.
-스르릉.
처용은 미로를 헤맬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역천의 절을 집어넣고 차륜 도끼를 꺼내 든 처용은.
“파쇄격, 차륜격.”
-콰아아아아!!
도끼날에 붉은 화염과 새하얀 백염을 섞어 회전시키고 점점 힘을 충전하기 시작했다.
처용은 강렬한 화염의 힘을 모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우웅!
도끼날에 신살자의 힘까지 더했다.
-쿠구구!!
강렬한 에너지가 당장이라도 터질 듯 한곳에 뭉쳤을 때, 처용이 차륜 도끼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천마신공 - 만근격!”
-후우우우!!
자세를 잡은 처용이 바닥을 향해 도끼날을 강하게 내리쳤다.
-쾅! 쩌저저적!
도끼날이 땅에 틀어박히며 바닥을 크게 갈라 버렸고.
-키이이! 쿠콰콰콰콰!!
차륜 도끼에 뭉쳐 있던 에너지가 갈라진 지면을 타고 흐르며 강한 지진을 일으켰다.
-쿠구구! 쿠구구구!!
미로 전체가 붕괴하려는 듯 세차기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쩌적! 쩌적! 쿠콰콰!!
갈라진 바닥의 틈이 점점 크게 벌어지며 아래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몽환의 미로는 아스모데우스가 펼치는 악신의 권능.
처용은 그 권능의 일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신살자의 힘까지 섞어 강력한 일격을 내리쳤다.
그 결과, 몽환의 미로 일부분이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처용이 몽환의 미로를 부순 것 같았지만, 그건 아니었다.
몽환의 미로를 완벽하게 답파하는 방법은 따로 있었다.
바로 미로 속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아스모데우스의 성물을 파괴하는 것.
하지만, 미로 속을 헤집으며 아스모데우스의 성물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처용은 작금의 상황을 지켜보며 마인들이 무언가의 준비를 위해 시간을 끌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느긋하게 미로를 답파할 순 없었다.
해서 선택한 방법이 몽환의 미로 일부를 물리적으로 부수고 자신만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제시카에게 그걸 맡겼으니, 미로는 머지않아 무너지겠지.’
처용은 함께 온 다른 사람들을 믿고 더 중요한 일을 처리하고 마음먹었다.
이곳에 온 가장 큰 이유.
‘어디에 있냐? 뤼장첸!’
옥황상제의 신관이자 천교의 병기.
미래에 폭식마가 되어 지구에 3차 대격변을 일으키는 거대한 재앙의 씨앗.
포식군주 뤼장첸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후두두두! 타닷!
몽환의 미로에 균열을 내며 빠져나온 처용이 나타난 곳은 릴과 처음 마주했었던 빈 홀이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릴만 있었던 것과는 달리.
“젠장! 역천군주!?”
“하필이면 저놈이! 게다가 이렇게 빨리 빠져나올 줄은-!”
미리 이 장소에 대기하고 있었던 듯 보이는 마인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군, 혹시나 빠져나올 놈들을 대비해 이 자리에서 대기하고 있던 건가?’
처용이 20명쯤 되는 마인들을 노려보며 속으로 읊조렸다.
아마 릴이 몽환의 미로를 준비함과 동시에 예비 인원을 빼 둔 것 같았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예상했던 대로 무언가 시간을 끌려는 목적인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전원! 방어 태세로!”
네 명의 상급 마인 중 하나인 리더가 앞으로 나서며 마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나를 상대로 방어라……? 시간을 끌려는 게 훤히 보이는데?”
처용이 떠보듯 입을 열어 말하자.
“시간을 버는 게 우리 목적임을 잊지 마라!”
리더가 알려져도 상관없다는 듯, 휘하 마인들을 향해 크게 말했다.
“그으~래?”
-스릉!
처용이 리더의 말에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읊조리고는 차륜 도끼를 치켜들었다.
처용이 강기를 내뿜으며 차륜격을 발동하자.
-화르르륵!
도끼날에서 강기를 머금은 화염이 맹렬히 회전하며 위협적인 불길을 뿜어댔다.
“결전기 – 그랜드 라이거.”
-쿠드드득! 쿠와아아아!
리더가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결전기, 바위로 이루어진 거대한 사자를 불러일으켰다.
동시에 다른 마인들 역시 리더의 명령에 따라 각각 스킬을 준비했다.
“배신자 라이언,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콰아아!
처용이 강기를 위협적으로 내뿜으며 말하자.
“이전과 같으리라 생각하지 마라, 역천군주.”
리더, 라이언이 결사를 다진 듯, 굳은 목소리로 답했다.
처음 역천준구를 마주했을 때에는 도끼질 단 한 방에 결전기인 그랜드 라이거가 반으로 쪼개졌었다.
그 당시에는 백호를 상대하느라 지쳤었다는 문제와 자신의 결전기를 너무 믿은 자만심도 있었다.
그리고 처용을 너무 과소평가했었다.
자신의 결전기, 그랜드 라이거는 백호의 뇌호도 뚫지 못한다는 막강한 방어력을 자랑했었으니까.
그런 그랜드 라이거가 단 한 방에 쪼개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렇게 당했던 덕분인지, 이제는 처용을 상대로 방심 따위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단단하게 준비를 갖추고 대비할 수 있었다.
처용은…… 자신의 딸인 에블린을 죽이려는 자이니까.
“이번만큼은…… 다를 것이다!”
리더가 낮고 강하게 읊조리고는.
-피슈욱! 슈우우…….
검보랏빛으로 빛나는 액체가 담긴 주사를 자신의 어깨에 꽂아 넣었다.
-위급할 때만 사용하십시오.
닥터가 만든, 위험할 때만 사용하라고 경고하며 건네주었던 ‘도핑’ 포션.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지만, 상대가 역천군주이니만큼, 지금이 사용할 때였다.
-우득! 우드득!
라이언의 관자놀이와 얼굴, 팔 등 보이는 피부에 힘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크으으으윽!!”
강렬한 고통을 참는 듯, 라이언의 입에서 긴 침음이 흘러나왔다.
라이언이 자신의 몸에 주사를 꽂으며 도핑을 사용한 순간.
“대-차륜격!”
-후웅! 부우우웅!!
처용이 차륜 도끼를 치켜들고 머리 위로 돌리며 도끼날을 크게 한 바퀴 회전시켰다.
회전한 도끼날이 전방을 향하는 순간.
-콰아아아!!
마치 강철을 절단하는 원형 톱니 절단기와 같은 형상의 화염이 뻗어 나갔다.
“그랜드 라이거!”
-쿠워워워!
라이언의 결전기, 그랜드 라이거가 처용이 내뿜은 화염의 톱니를 막아섰다.
“소용 없어.”
처용이 막을 수 없다 판단하고 단언하며 말했지만.
“스틸 패링(Steel Parrying).”
-키이이잉!
그랜드 라이거의 오른손 앞발 부분에 강철이 덧씌워지더니.
-차캉! 차카캉!!
강철이 덧씌워진 앞발을 정확한 타이밍에 휘둘러 화염 톱니를 튕겨냈다.
-화르륵! 콰쾅! 콰콰콰!!
튕겨 나간 화염의 톱니가 마인들의 오른쪽으로 날아가며 강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호오?”
처용이 자신의 공격을 튕겨낸 그랜드 라이거를 보며 작은 감탄을 내었다.
동시에 납득이 되기도 했었다.
‘커맨더의 전 파티원이라 그건가?’
상대는 커맨더의 전 파티원이었던 만큼, 나름 실력이 출중한 전 헌터였다.
그리고.
‘……패링(Parrying)이라?’
방금 강렬한 강기를 머금은 차륜 도끼를 막아낸 스킬.
패링은 정확한 타이밍에 가드를 올려 상대의 공격을 피해 없이 쳐내는 기술이었다.
그 이름에 걸맞게 라이언은 처용의 공격을 정확한 타이밍에 가드를 올려 튕겨낸 것이었다.
이전에 무력하게 당하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
심지어 무슨 포션인지 모르겠지만, 도핑까지 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몽환의 미로가 펼쳐지기 전, 언급했었던 에블린 때문인지, 남다른 각오가 느껴졌다.
“흠.”
처용이 여유로운 표정을 지우고 진지한 분위기를 피워올림과 동시에.
“차륜격, 파쇄격.”
-콰아아아!!
이전보다 더 강하고 날카롭게 강기를 벼리며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푸화아아!
도끼날에 화염이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고.
‘천마신공 - 만근격!’
-후우웅!
차륜 도끼를 한 바퀴 크게 휘두른 처용이 회전력을 그대로 담아 돌진해 나갔다.
“레어 메탈 스킨!”
라이언이 스킬을 발동하자.
-키이이이!
그랜드 라이거의 몸 위로 두꺼운 강철 갑옷이 덧씌워졌다.
변화한 그랜드 라이거와 처용의 도끼날이 충돌하기 직전.
“퍼펙트 페링(Perfect Parrying)!”
-크아아아!
그랜드 라이거가 포효하며 앞으로 짧게 돌진했다.
머리로 처용의 도끼날을 받아치려는 무모한 행위처럼 보였지만.
-까가강!! 푸화아아!
그랜드 라이거의 머리는 쪼개지지 않고 도끼날과 서로 충돌하며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쩌적! 쩌저적!
라이언이 완벽한 타이밍에 패링을 했음에도 처용의 공격을 온전히 튕겨 내지는 못했다.
곧 그랜드 라이거의 몸 위로 덧씌워진 강철 갑옷에 금이 가며 무너져 내렸다.
“으억! 으어……!”
-주르르…….
방금 공격으로 영향을 받았는지 라이언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처용이.
“만근-!”
재차 도끼날에 회전력을 더하며 공격하려 한 순간.
“다크니스 니들 스피어!”
“다크 블레이드!”
-쏴아아! 촤아!
뒤에서 공격을 준비하던 상급 마인들과 다른 마인들의 맹렬한 공격이 쏟아졌다.
“칫.”
처용이 짧게 혀를 차고는.
“차륜격!”
온전하게 실리지 못한 강기와 화염을 급하게 회전시켜 쇄도해오는 공격을 맞받아쳤다.
-쿠구! 쿠콰콰!
허공에 충돌한 차륜격과 마인들의 공격으로 인해 폭발이 일어났고 처용이 재차 물러났다.
“레어…… 메탈 스킨!”
라이언이 손을 들어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닦아 털어내고는 재차 그랜드 라이거에게 강철 갑옷을 덧씌웠다.
“못…… 지나간다!”
강한 의지가 일렁이는 눈빛을 띠며 라이언이 말하자.
“어쩔 수 없군.”
-콰아아!!
처용이 강기에 신력을 섞으며 낮게 읊조렸다.
뤼장첸과 마주하기 전, 앞으로 누굴 상대할지 몰랐기에 전력을 아끼며 나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앞을 가로막는 라이언은 어중간한 공격으로는 치울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놈들의 의도대로 시간을 버는 셈.
“지금부터 전력으로 막는 게 좋을 거야.”
-우우웅!
처용이 아공간에서 역천의 절을 포함한 열 한 개의 무구를 꺼내며 살기를 담아 말하고는.
“결전기, 팔괘 - 태극천체진.”
이제 열두 개의 무구를 다룰 수 있게 된, 자신의 결전기를 발동했다.
-스르르릉!
총 열두 개의 무구들이 처용 앞으로 나열되며 강기와 신력이 일렁였다.
-탁. 푸슈슛! 주우욱!
굳은 표정으로 처용의 결전기를 본 라이언이 하나의 주사기를 더 꺼내며 한 번 더 도핑했다.
“흡……!”
라이언이 이를 악물며 고통을 견디고는.
“다크니스 메탈 가드 아머!”
-쩌저저저적!
그랜드 라이거의 갑옷 위에 검은 강철 갑옷을 추가로 덧씌우며 대비했다.
‘시간이 되기 전까지……! 무조건 버틴다!’
밑에서 ‘치료’가 진행되고 있을 에블린을 위해.
자신의 딸을 죽이려는 역천군주를 저지하기 위해.
라이언은 모든 것을 걸고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