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릴이 성물로 퍼트린 마기의 폭발이 지나가고.
“아오! 머리야…….”
연아가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어디로 간 거야? 한처용.”
일어나자마자 그녀가 찾는 이는 다름 아닌 처용이었다.
하지만 처용뿐만이 아니라, 그녀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다른 이들보다 처용을 먼저 찾은 이유가 있었다.
“다 나와 봐, 안전한 것 같으니까.”
-슈르르르!
연아가 가슴에 손을 얹으며 물보라를 일으키자.
-촤아아!
물보라 속에서 연화와 윤아가 나타났다.
마기가 폭발하며 사방을 휩쓸어버리기 직전, 연아가 두 사람을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보호한 것이었다.
처용의 경우는 늦은 감도 없지 않아 있었고 그 괴물 같은 처용이 고작 마기의 폭발에 죽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 또한 그 마기의 폭발 속에서 무사했으니까.
“처용은? 다들 어디로 간 거지?”
연화가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리듯 말하자.
“모르겠어, 폭발이 걷히니까 나 혼자더라고. 그리고…….”
연아가 연화의 말에 답하며 주변을 둘러보고는 읊조렸다.
“여긴 도대체 어디야?”
조금 전 아무것도 없는 듯 보이는 넓은 공간이 사라지고 사방이 웬 미로 같은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아무래도, 그 마인이 무언가를 한 것 같아.”
주변을 둘러보며 살펴본 윤아가 연아를 향해 말했다.
그때.
“맞아. 내가 모두를 흩어놓았지. 레이디들? 호호호.”
-또각. 또각.
구두 굽 소리가 들려오더니, 의회주 릴이 교태 어린 웃음을 자아내며 다가왔다.
“S급 마인!”
-스릉!
연화가 환도를 치켜들며 릴을 경계했다.
“하나하나 죽이려 했는데, 세 명이 모여 있을 줄이야. 아니지, 차라리 잘 된 건가?”
릴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가득한 살기가 일렁였다.
“우리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나 봐? 아줌마?”
연아가 릴을 향해 도발하듯 말하자.
“이 버릇없는 애새끼가, 난 원래 ‘남자’란다.”
릴이 작게 인상을 쓰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아 그러세요? 아저씨!”
-촤아아! 캬아아!
연아가 릴을 향해 재차 도발하듯 소리치며 물의 악령들을 쏘아 보냈다.
“후후후…….”
릴이 쇄도해오는 악령들을 보며 작게 웃음을 짓더니.
-화아아…….
몸을 검은 안개처럼 흩뜨리며 사라졌다.
“칫, 돌아와!”
-캬아아!
연아가 쏘아 보낸 악령들을 회수하며 주변을 맴돌게 했다.
상대가 사라졌다면 둘 중 하나였다.
도망쳤거나, 혹은 조용히 접근하거나.
상대는 무려 의회주 중 하나, 후자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았다.
무엇보다도 자신들을 향해 명확한 살기를 보였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색욕의 형상.”
-촤아아!
전방의 악령들이 크게 찢어지며 릴의 긴 손톱이 쇄도해왔다.
“들이치는 밀물!”
-쏴아아!
대비를 하고 있던 연화가 환도에 파도를 휘감아 릴에게 내리쳤다.
-차캉! 쏴아!!
손톱을 내세운 릴의 오른손과 연화의 칼날이 서로 충돌했다.
보통은 신성력을 휘감은 날카로운 칼날이 우세해야 정상이지만.
“윽!?”
-쏴아아! 파창!
놀랍게도 신성력이 휘감긴 연화의 칼날이 릴의 맨손에 밀리며 뒤로 밀쳐졌다.
“흐음? 생각보다 강하네?”
검은 안개 속에서 오른손 손톱을 내민 릴이 모습을 드러내자.
“……성별이 바뀌었어요.”
용의 혜안을 발동한 윤아가 릴을 응시하며 말했다.
처음 릴을 마주했을 때 그녀의 모습은, 타이트한 검은 가죽옷을 입은 긴 머리의 여성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크흐흐흐.”
긴 검은 머리가 단발로 짧아지고 얇고 가늘며 볼륨 있던 몸매가 탄탄해지고 근육이 붙으며 조금 각지게 변했다.
마치.
“내가 말했잖아. 난 원래 ‘남자’라고.”
단발머리에 근육이 오밀조밀하게 들어찬, 느끼한 눈매의 ‘남자’로 변했다.
-스으으! 촤아!
릴이 마기를 뿜어 손에 휘감자, 날카로운 손톱에 길게 세워진 악마의 손처럼 변했다.
그리고.
“가학(苛虐)의 형상.”
악마의 손처럼 변한 양손을 교차하며 휘두르자.
-촤아아!
마치 검기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검은 마기의 칼날이 쇄도했다.
“솟구치는 파도!”
-스릉! 쏴아아!
연화가 빠르게 환도를 세워 파도의 장벽을 일으켰지만.
-촤아! 촤아아!
파도의 장벽이 길게 찢어지며 날카로운 마기의 칼날이 뚫고 들어왔다.
“디펜드 팬텀.”
-스르르.
연화가 마기의 칼날에 닿으려는 때, 연아가 재빨리 앞에 서며 공격을 대신 맞았다.
-촤아아!
연아의 몸이 여러 가닥으로 찢어지며 사방에 흩어졌고 곧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무런 피해가 없는 듯 보였지만.
“아악!”
연아가 고통스러운 듯 가슴을 부여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리치로 변한 추기경의 공격도 버텼었던 연아가 피해를 받은 상황.
“재미있는 스킬이네? 그래봤자 소용없어.”
릴이 고통스러워하는 연아를 보며 즐겁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는.
-샤아아아!
재차 악마의 손처럼 변한 손톱에 짙은 마기를 충전했다.
그때.
“예고합니다.”
연화의 뒤에 있던 윤아가 신성력을 내뿜으며 일기예고를 발동했다.
“좁은 통로에 물이 가득 들어찰 예정이니, 숨을 들이쉬고 잠수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쿠화아아!
일기예고가 발동하자, 윤아를 중심으로 물줄기가 폭포수처럼 분출하며 사방에 들이치기 시작했다.
곧 이 일대가 완전히 물에 잠겼다.
물과 관련된 능력을 지닌 세 사람은 깊은 물 속에서도 제약 없이 행동할 수 있었다.
반면에 릴은 환경적인 제약을 받아 마땅했지만.
“이것도 흥미로운 능력이네?”
릴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듯, 물속에서도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연화와 연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려 보였지만.
“예고합니다.”
윤아는 마치 예상했다는 듯 곧장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곧 바다 회오리가 들이칠 예정이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쿠루루! 쏴아아아!!
사방에 가득 들어찬 물이, 세 사람에게서 릴이 있는 방향으로 나선을 그리며 세차게 흐르기 시작했다.
릴의 발이 잠시 묶인 틈에.
“저 마인의 능력이 뭔지 알아냈어요.”
윤아가 용의 혜안으로 릴을 노려보며 말했다.
동시에.
“신룡의 지혜 – 전수(傳受).”
-스르르.
손아귀에 신성력을 뽑아 뭉쳐 만든 물방울 두 개를 각각 연화와 연아에게 날렸다.
-스륵!
윤아가 보낸 물방울이 두 사람에게 닿자.
“그렇군…….”
연화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아니 무슨, 뭐 저딴 변태 같은 스킬이 다 있어!?”
연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욕을 내뱉었다.
두 사람이 전방에서 릴을 상대로 시간을 버는 동안, 윤아는 용의 혜안으로 릴의 능력을 간파했었다.
그녀가 간파한 릴의 능력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가장 먼저, 색욕의 형상.
간단하게 말하자면 스스로의 성별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스킬이었다.
고작 성별을 바꾸는 게 전투에 도움이 될까 싶었지만.
“이성(異性)을 상대로 모든 능력이 3배 이상 증가한다고!?”
윤아가 알아낸 정보를 읽은 연아가 소리치듯 말했다.
릴이 가진 핵심적인 능력 중 하나.
바로 싸우는 상대가 이성(異性)일 경우 모든 능력치가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상대하는 이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 능력이 더욱 증폭된다.
게다가 릴이 가진 능력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성인 상대가 발휘하는 모든 공격이 반감되는 능력도 있어.”
연화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윤아가 발휘한 일기예고로 인해 물속에 들어왔을 때, 아무런 영향이 없었던 것도.
연화, 연아가 발휘한 모든 공격에 우세를 보인 이유도 이 능력 때문이었다.
세 사람이 릴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고민할 때.
“작전 회의는 다 끝났니?”
-촤아아아!
릴이 손톱을 앞세워 거친 폭포처럼 흐르는 물줄기를 가르며 점점 다가오며 말했다.
그리고.
“피학(被虐)의 형상.”
-화르르륵! 치이이……!
손톱에서 일렁이던 마기가 검붉은 화염으로 변하며 사방에 들어찬 물을 모두 증발시켜 버렸다.
피학의 형상은 공격받은 속성에 반대되는 속성으로 반격하는 릴의 스킬이었다.
‘지금의 우리가 상대하기 힘들 것 같아요. 도망치죠.’
윤아가 스킬을 발동하여 두 사람을 향해 은밀하게 말했다.
동료에게만 들리도록 말을 전하는 ‘물의 속삭임’이라는 스킬이었다.
그리고 이 스킬은 연화와 연아, 두 사람도 가지고 있는 스킬이었다.
윤아의 말에 연화, 연아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 순간.
“몽환의 미로에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해.”
-우우웅!
릴이 강렬한 마기를 피워내는 오른손 손톱을 앞세우며 말했다.
애초에 역천군주와 길드의 헌터들이 이곳에 들이닥치리라는 것은 사전에 알고 있었다.
해서 대비한 것이 바로 아스모데우스의 성물을 이용해 펼친 몽환의 미로.
이 권능을 이용해 역천군주를 뤼장첸이 준비한 함정으로 유도하고 성가신 헌터들을 모두 죽인다.
이것이 마인들과 천교의 잔당 세력이 역으로 준비한 함정이었다.
“질릴 때까지 가지고 놀다가 죽여 주-.”
릴이 잔혹한 미소를 피워 올리며 공격을 준비하려는 순간.
-콰쾅!!
릴이 있는 장소의 오른쪽 벽이 무너지며 누군가가 나타났다.
“헤이 가이?”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탄탄한 근육질의 거한, 빌리였다.
“헤비 블로우(Heavy Blow)!”
-후우욱!
빌리가 강하게 쥔 오른손 주먹을 릴에게 뻗으며 돌진하자.
“칫.”
-화아아.
릴이 마기로 몸을 뒤덮으며 뒤로 물러나고는.
“주변을 다 격리해 놨을 텐데, 어떻게?”
현장에 난입한 빌리를 향해 인상을 쓰며 읊조렸다.
“썩어빠진 미(美)의 악취가 진동을 하는데 못 찾을 리가?”
빌리가 릴을 향해 비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그런 빌리의 왼쪽 팔에는.
-우우웅.
태민이 착용하고 있는 아티팩트와 같은, 명환의 힘이 담긴 아티팩트.
‘악몽을 걷어내는 자’가 밝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번 작전이 시작되기 전, 처용이 올림포스에 미리 만들어 두었던 아티팩트를 전달한 것 중 하나였다.
“헤이, 가이스?”
빌리가 고개를 돌려 세 사람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가이들은 그 팔찌가 인도해 주는 방향으로 가서 대악마의 성물을 박살 내 줬으면 좋겠어.”
-획!
자신이 차고 있는 팔찌와 같은 팔찌를 연화에게 던지며 말했다.
“이건?”
연화가 팔찌를 받자.
-피이.
팔찌에서 솟구친 빛이 마치 어떤 방향을 가리키듯 긴 실선을 만들어 내었다.
“저 마인은 강합니다. 같이 싸우는 편이-!”
연화가 빌리를 향해 말하려는 때.
“색욕의 형상.”
릴이 빠르게 자신의 몸을 ‘여자’로 바꾸고는.
“버러지 같은 놈이, 너부터 죽여 주마!”
빌리를 향해 길게 솟아난 손톱을 휘두르며 돌진했다.
빌리가 침착하게 주먹을 쥐며 가슴 높이로 들어 올리고 왼쪽 발을 반보 뒤로 뺐다.
마치 경기가 시작할 때의 UFC 선수와 같은 자세를 잡고는.
“미(美)의 형상.”
자신만이 가진 스킬을 발동했다.
-스스스.
보디빌더처럼 단단하고 우직하던 근육들이 점점 작아지고 2미터가 넘던 키가 조금 줄어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각지던 몸이 점점 유려하게 변했고 스포츠 선수처럼 짧던 머리가 조금 길어졌다.
굵었던 얼굴선과 눈썹, 눈매도 점점 가늘어졌다.
“……뭐?”
손톱을 내세우던 릴이 순식간에 모습이 변한 빌리를 보며 당황했다.
우락부락한 남자의 모습이었던 빌 리가 ‘여자’로 변했었으니까.
“나한테 놈(Man)이라니?”
-우드드득!
인상을 찌푸린 빌리가 오른손 주먹을 강하게 쥐고는.
-샤아악! 휙!
고개를 숙이고 자세를 낮게 낮추며 릴의 손톱을 피했다.
그리고.
“카운터 블로우(Counter Blow)!”
-빠아아악!
강하게 쥔 오른손 주먹을 앞으로 뻗으며 릴의 복부를 후려쳤다.
-후욱! 콰쾅! 쾅!
빌리의 카운터에 맞은 릴이 뒤로 날아가며 벽에 처박히자.
“난 원래 ‘여자(Lady)’라고.”
빌리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는 릴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놈은 나한테 맡기고 빨리 가이들은 대악마의 성물을 처리해 줘.”
-탁!
두 주먹을 맞부딪치며 빌리가 강하게 말하자.
“……가요. 우리가 있어 봤자, 크게 도움이 안 될 거예요.”
윤아가 용의 혜안으로 빌리의 스킬과 특성을 파악하고는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연화가 팔찌의 빛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려가자, 두 사람이 따라갔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방해를-!”
릴이 다시 스스로를 ‘남자’로 바꾸며 빌리에게 달려들자.
“가이는 학습 능력이 없나 봐?”
-스스스.
빌리가 그에 맞춰 스스로의 육체를 ‘남자’로 바꾸었다.
-콰쾅!
릴의 손톱과 빌리의 주먹이 충돌했고.
“설마 나랑 같은 스킬을 가진 놈이 있을 줄은…….”
뒤로 밀려난 릴이 인상을 찌푸리며 읊조렸다.
릴의 능력은 상대가 이성(異性)일 경우 매우 강해지는 것이었다.
그녀는 눈앞의 빌리가 자신과 비슷한 능력을 지녔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확히는 가이의 반대지.”
빌리가 마치 덤비라는 듯 손가락을 까닥이며 말했다.
올림포스의 성좌 중 하나인 사랑의 신, 에로스의 신관.
올림포스 소속 길드 중 하나인 트레이너(Trainer) 길드의 길드장.
그리고…… 올림포스에서도 소수의 인물만이 알고 있는 대인전의 스페셜리스트.
그런 그녀의 능력은 상대가 동성(同性)일 경우 모든 능력치가 크게 상승하는 것이었다.
방금 빌리가 말한 대로 정확히 릴과 비슷하면서 반대되는 능력이었다.
“재밌게 놀아보자고 가이?”
“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대가 계획을 가로막자 릴의 인상이 크게 찌푸려졌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