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처용의 요청으로 길드장들이 모인 지 하루 뒤.
아니, 정확히는 16시간 후.
-탓.
옛날 느낌이 물씬 나는 낙후된 도시에 처용이 나타났다.
지금 처용이 있는 장소는 중국 신장위구르.
정확히는 신장위구르 북쪽 끝자락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사는 사람도 별로 없고 주민 평균 연령대도 높은 낙후된 시골 지역.
발전은커녕 세월이 완전히 과거에 멈춰선 듯한 장소였다.
-저벅. 저벅.
동화경을 유지한 처용이 주변을 둘러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통찰의 눈으로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봤지만,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름 : 궈타오]
[해당 인물은 각성자가 아닙니다.]
-현재 ‘감시자의 눈’이 적용 중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감시자의 눈’이라는 스킬이 적용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마을 사람들에게 감시 계열 스킬을 씌운 것.
평범한 마을 사람들을 통해 수상한 이들이 접근하는지, 누군가가 감시 중이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누군가가 마을 사람들을 CCTV로 만든 것.
처용에게는 척 봐도 수상함이 가득한 장소였다.
그리고.
‘그래…… 기억이 나는군.’
이 외지고 낙후된 마을이 처용에게는 조금 익숙하게 느껴졌다.
‘최초로 검은 대지가 퍼졌던 장소였지 여기가…….’
중국 신장위구르 북쪽 지역.
이 장소는 회귀 전, 최초로 검은 대지가 퍼졌던 장소 중 하나였다.
무려 국가급까지 성장한 디파일리크가 나타났었던 장소.
처용이 회귀 전 기억을 되살림과 동시에.
-지역 중앙에 마을 회관으로 쓰이던 건물이 있습니다. 아마 당신이라면…… 입구를 찾을 수 있겠죠.
양천의 증언을 다시 떠올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 중심에 있는 마을 회관.
낙후된 건물들 중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건물, 마을 회관으로 처용이 들어서자.
‘저건가.’
곧장 양천이 말했었던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처용이 유심히 관찰하며 다가간 곳에는 1미터 크기의 액자가 걸려 있었다.
세 명의 여인이 바닥에서 이삭을 줍는, 꽤 유명한 그림이 장식된 액자.
그저 흔하게 알려진 그림이 걸린 벽 장식인 것 같았지만.
-우우웅!
처용이 은밀하게 어둠 속성 마나를 흘리자.
-스르르…….
액자의 그림이 점점 희미해지고 붉은 문자가 드러났다.
천교의 길드 본부 지하에서 봤었던 판데모니움의 문자였다.
이전처럼 결계를 해킹할 수도 있었지만.
-탁.
처용은 굳이 결계를 더 건들지 않았다.
그 대신.
-삑.
붉은 문양의 중심, 마치 네모난 무언가를 대는 듯한 문양에 푸른 카드를 대었다.
그러자.
-스르르! 스륵!
카드에서 뻗어 나간 푸른 마나가 문양에 스며들더니.
-드르르륵!
액자가 뒤로 밀려나며 지하로 내려가는 문이 드러났다.
처용이 가지고 있던 푸른 카드는 다름 아닌.
-가져가! 전부! 다 가져가! 천교가 박살 나든 아니든 이제 내 알 바 아니니까!
천교 부길드장, 타친핑이 가지고 있던 라이센스 카드키였다.
천교의 거의 모든 보안 시설에 접근할 수 있는 열쇠와 다름없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타친핑은 현재 뤼장첸에게 살해당했고 천교 성운을 배신하는 짓까지 저지른 상태였다.
그의 모든 권한이 정지되었다고 할 수 있었지만.
-아니, 놈들이 당장 내 모든 권한을 정지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WHU에서 처용이 타친핑에게 의문을 제기했을 때, 타친핑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었다.
-모든 보안 시설은 내가 직접 맡아 관리하고 운영했어. 당장 모든 걸 갈아치울 순 없을 거다!
천교의 거의 모든 일정을 책임져 운영했었던 타친핑이었기에, 그의 손에 닿지 않은 보안이 없었다.
보안 시설을 전부 고치고 수정하는 것 자체가 상당한 일이라는 것.
그리고 타친핑의 장담대로 지금 처용이 도착한 장소의 보안 역시 수정하기 전인 듯 보였다.
-탁.
처용이 계단 아래로 조심스럽게 내려가며 혹시 다른 함정이 있는지 살펴봤지만.
‘비밀 시설이라 그런가…… 입구에는 함정이 없군.’
애초에 천교의 주요 인물들만이 드나들 수 있는 문이라 그런지, 다른 보안 장치는 없었다.
그래도 방심하지 않고 주변을 면밀하게 살피며 쭉 걸어 내려감과 동시에.
-이곳의 시설은 총 3개로 나누어집니다.
양천이 말해주었던 증언들을 다시 머릿속에서 상기했다.
지금 처용이 몰래 잠입하고 있는 시설은 천교 길드 내부에 있던 비밀 실험실보다 훨씬 광활한 장소였다.
타친핑과 양천의 증언, 그리고 회귀 전 기억을 토대로 떠올려 보면.
지금 아래에 있는 시설은 비밀 실험실보다 적어도 5배는 넓은 장소였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었다.
총 3층으로 구성된 이 비밀 시설은, 천교와 마인들의 공동 운영 시설이었다.
서로 간, 정보와 실험을 공유하는 장소.
심지어 가장 위인 1층은 몬스터들이 즐비한 던전이었다.
-탁.
“이쯤이 좋겠군.”
지하 계단의 끝자락에 도착한 처용이 주변을 둘러보며 읊조리고는.
“모두 나와.”
-우우웅!
게이트를 열며 누군가를 불렀다.
“기다리느라 지루했다고.”
연아가 처용을 향해 중얼거리며 걸어 나왔고 그 뒤를 따라 연화, 윤아가 따라 나왔다.
그리고.
“밤의 일족 전원, 전투 준비를 마쳤습니다. 용님.”
귀족급 뱀파이어인 류마와 세피아, 그들을 포함한 열다섯의 뱀파이어들이 추가로 나타났다.
“왜 뱀파이어들도 부른거야?”
연아가 자신들과 같이 나온 뱀파이어들을 보며 처용에게 물었다.
보통 루나를 제외한 뱀파이어들은 성지에 머물며 협회를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던전 공략이라면 보다 수가 많은 개미들이 있었기에, 처용이 굳이 뱀파이어들을 부른 이유가 궁금했다.
“또 다른 밤의 일족들이 여기를 지키고 있거든.”
처용이 눈앞에 있는, 마치 파티홀의 입구처럼 보이는 검은 문을 바라보며 답했다.
그러자.
“꿈의 일족…… 몽마(夢魔)들이 여기에 있다고?”
-스르르.
처용의 그림자에서 루나가 솟아 나오며 놀란 듯 말했다.
꿈의 일족은 같은 밤의 일족인 뱀파이어들이 몽마들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었다.
“어떻게?”
“그야, 색욕악신의 신관이 여기에 있으니까.”
루나의 말에 처용이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처용이 말한 색욕악신은 다름 아닌, 대악마 서열 32위 아스모데우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영토에서 다스리는 악마족들이 바로 몽마들이었다.
어둠 속에서 상대할 때, 뱀파이어만큼이나 위험하고 치명적인 악마족들.
“몽마라면, 서큐버스와 인큐버스?”
연화가 몽마라는 말에 생각나듯 입을 열자.
“정답, 잘 알고 있네.”
처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아름다운 남성의 모습을 한 악마족인 인큐버스.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을 한 악마족인 서큐버스.
이 두 악마족이 앞으로 맞이할 주적이었다.
“뱀파이어가 어둠의 어쌔신이라면, 몽마는 어둠을 다루는 디버프 계열 마법사라고 생각하면 된다.”
처용이 몽마에 대한 설명을 마치자.
“그래, 상대가 악마족인건 그렇다 치지만, 우리만으로 여기를 정리할 수 있겠어?”
연화가 처용을 보며 추가로 의문을 제기했다.
이 지하 시설 자체가 굉장히 광활하다고 들었다.
심지어 가장 위의 층 하나만 따져도 소형 도시급 던전의 규모.
간단하게 말하자면 던전 3개가 서로 이어진 3층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아무리 네가 있다지만, 이렇게 넓은 시설을 우리끼리 빠르게 해결할 수 있을까?”
고작 20명도 되지 않은 인원으로 신속하게 이 지역을 정리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그러나.
“지원군은 이미 와서 한바탕 싸우고 있을 거야.”
처용은 전혀 걱정이 없다는 듯 말했다.
“……입구에는 우리뿐인데?”
연화가 궁금한 듯 묻자.
“여기는 정문이 아니라 뒷문이지, VIP 전용 입구라고 해야 하나?”
처용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지금 있는 장소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이 시설은 크기가 매우 넓은 만큼, 입구가 하나가 아니었다.
지금 처용이 잠입한 장소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관계자 전용 출입구, 즉 뒷문이었다.
반면에 정문은.
“올림포스와 동방불패 길드가 이미 도착해서 공략 중이지.”
하루 전 세웠던 작전대로 공략이 진행 중이었다.
이곳을 제외한 나머지 두 시설은 다른 거대 길드들이 연합하여 총 공격을 펼치고 있는 상황.
그리고 지금 이 장소는 처용과 올림포스, 동방불패 길드가 해결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정문에서 소란을 피우고 이목이 집중되는 동안 우리가 몰래 뒤로 잠입한다?”
상황을 파악한 연화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정답, 잘 파악했네.”
고개를 끄덕여 보인 처용이 긍정하듯 말했다.
“우리 목표는 다음 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신속하게 찾는 거야.”
-콰쾅!
처용이 굳게 닫혀 있는 문을 발로 걷어차 강제로 부수고는.
“작전 개시.”
-탓.
작전의 시작을 알리며 앞장서 나아갔다.
함께 있는 이들 역시 처용을 뒤따라 나아가며 어두운 통로를 헤쳐 나갔다.
일행들이 쭉 달려 나가던 와중.
“매복이 있습니다. 용님.”
그림자를 타고 은밀하게 쫓아오던 류마가 처용을 향해 경고하듯 말했다.
“알고 있다.”
처용이 전방을 향해 눈을 가늘게 좁히며 말했다.
계속 달려 나가던 일행들이 이윽고 복도 끝을 맞이했고 넓은 원형 형태의 공동이 나타났다.
-화륵. 화륵. 화륵.
원형 공동 외벽에 푸른 횃불이 피어난 순간.
-치이이!
바닥에서 검푸른색의 안개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드르륵! 콰콰콰쾅!!
일행들이 들어왔었던 복도 입구가 무너지며 가로막혔다.
도주로는 막혔고 검푸른 안개에 노출된 상황.
“뭐지? 정신이 살짝 맹해지는데?”
“하품이 나올 거 같아요.”
연아와 윤아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때.
“몽환 가루를 마셨다!”
“지금이다! 전부 죽여!”
-샥!
벽, 횃불이 자리한 어둠 속 그림자에서 열 명의 인원이 튀어나왔다.
관자놀이 위로 솟아난 작은 뿔과 등 뒤의 날개.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타이트한 복장의 여성과 가슴 부분이 드러난 스타일의 연미복을 입은 남성들.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들이었다.
-우우웅!
손아귀에 마기를 응축한 몽마들이 일행들에게 달려드는 순간.
“파도의 검 – 세 번째 장.”
-슈루루루!
연화가 환도를 뽑아 바닥에 내리치며 신성력을 내뿜었다.
“솟구치는 파도!”
-콰아아아!
연화에게서 뻗어 나간 신성력의 파도가 일행들을 둥글게 감싸며 위로 솟구치는 파도를 만들어냈다.
“무, 무슨!?”
“어떻게 움직인 거냐?”
몽마들이 솟구쳐 오는 신성력의 파도를 피해 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몽환 가루는 몽마들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독과 같은 물질이었다.
다만 상대의 육체를 물질적으로 파괴하는 일반적인 독이 아니었다.
상대의 정신을 흐리게 하고 마음을 무너뜨리는 독.
정신적인 데미지를 주게 만드는 독이었다.
물질적인 독에 내성이 있는 이들조차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몽마들의 독.
그런 독에 당했음에도.
“위험하다며? 이게 끝이야?”
눈을 비비던 연아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비단 그녀만이 아닌 다른 일행들 모두가 멀쩡해 보였다.
‘선인의 수련을 받은 이들에게 고작 하급 몽마가 다루는 몽환 가루쯤이야.’
처용이 멀쩡한 일행들을 보며 속으로 읊조렸다.
수련자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성장시키는 선인의 수련.
연화와 연아, 윤아는 지속적으로 선인의 수련을 받는 이들이기에, 몽환 가루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게다가 세 명 모두 강력한 신격을 섬기는 신관.
고작 하급 몽마의 몽환 가루가 그녀들의 신성력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젠장!”
“모두 피해라!”
몽마들이 경악하며 뒤로 물러난 순간.
-스르르!
그들의 뒤로 각각 한 명씩의 뱀파이어가 그림자 속에서 나타났다.
“네놈들은!?”
“피의 일족!?”
뒤를 돌아본 몽마들이 재차 놀랄 때.
“밤의 칼날.”
“어둠의 사슬.”
-푸화아아! 촤르르!
뱀파이어들이 재빠르게 어둠 속성 마나를 내뿜어 몽마들을 기습했다.
-촤아아! 스르르…….
열 명 중 다섯의 몽마가 가루가 되며 사그라졌고.
“젠장!”
가까스로 나머지 다섯의 몽마가 자리를 피할 때.
“블러드 체인.”
-촤라라라!
루나가 도주하려는 다섯의 몽마들을 향해 피의 사슬을 내뿜어 묶어 버렸다.
-촤아아!
“이런 젠장!”
루나 앞에 끌려온 다섯의 몽마가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했지만.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야.”
루나가 붉은 눈동자를 일렁이며 위압감을 담아 말했다.
루나는 이래 봬도 뱀파이어 왕족.
같은 밤의 일족으로 분류된 종족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높은 격을 지닌 인물이었다.
“피, 피의 일족이 어, 어째서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오!”
붙잡힌 몽마 하나가 뱀파이어들을 향해 소리쳤다.
피의 일족은 같은 밤의 일족으로 분류된 몽마들이 뱀파이어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어째서 피의 일족이 인간들을 돕는 것인가!?”
뱀파이어들이 인간들을 돕는 이 상황에 몽마들이 혼란스러움을 표할 때.
“네놈들은 질문할 처지가 아니야.”
-스릉!
처용이 앞으로 나오며 몽마 중 하나에게 역천의 절을 겨누었다.
“아스모데우스의 신관이 여기에 있나?”
처용의 낮은 목소리가 울리자.
“감히 하등한 인간 놈이! 위대한 분의 이름을-!”
역천의 절이 겨누어진 몽마가 처용을 향해 소리쳤다.
아스모데우스는 몽마들에게 있어 가장 위대한 신이었다.
고작 인간에 불과한 처용이 그런 존재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 상황.
몽마들에게 있어서 신성모독과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샤아악!
고함을 내지른 몽마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목이 날아갔다.
-파사사…….
목이 베인 몽마가 가루가 되며 흩어질 때.
“답하기 싫으면 말하지 마.”
몽마의 머리를 가차 없이 날린 처용이 낮은 목소리로 남은 몽마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아직 넷이나 남았으니…… 크크.”
잔혹한 미소를 보인 처용이.
-스릉.
재차 몽마들을 향해 역천의 절을 겨누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