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처용에 의해 배신자가 검거되자 WHU가 발칵 뒤집어졌다.
WHU 사무국 수감실에서 취조를 받던 천교의 S급 헌터들이 모조리 살해당했다.
살해범은 천교 길드의 길드장, 뤼장첸.
문제는 그런 뤼장첸을 도운 이가 스미스의 비서인 엠마, WHU의 총괄 비서실장으로 밝혀졌다.
무려 WHU 고위 임원이 배신자로 밝혀진 상황.
스미스는 곧장 처용의 부탁대로 모든 성운의 길드장들에게 급하게 연락을 돌렸다.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모든 이들이 참석 의사를 밝혔다.
무려 길드장들의 소집을 부탁한 자가 다름 아닌 처용이었으니까.
처용이 스미스를 통해 모두를 부른 의도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스미스가 고개를 숙여 사과하자.
“…….”
-…….
-…….
회의실에 자리한 모든 이들이 침묵했다.
지금 이 자리는 급하게 모집된 각 길드의 길드장들과 주요 헌터들의 긴급회의였다.
검은 대지의 뒤처리를 진행 중이던 성자와 커맨더는 가까이 있었기에 직접 상하이로 올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모두 각자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는 헌터들.
각 길드장들은 화상 홀로그램으로 이 자리에 참석한 상태였다.
-……스미스 씨의 잘못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제시카의 홀로그램이 스미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설마, 엠마가 WHU에 잠입한 간자였다니…… 당장 저조차도 믿기 힘든 상황입니다.
오랜 시간 스미스와 함께 일해 온 WHU 고위 임원 엠마.
그녀는 제시카도 잘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
“……우선, 그간 정리된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해 드리죠.”
스미스는 짧은 시간 알아낸 정보들을 모두에게 이야기했다.
누가 수감된 천교의 S급 헌터들을 살해했는지부터, 엠마가 그를 도왔다는 사실 등.
“엠마는 순혈신교라는 집단에서 파견된 인물이었다는군요.”
“순혈신교요?”
스미스의 말에 성자가 고개를 기울이며 의문을 표하자.
“순혈자들을 받들어 모시는 광신도 집단.”
팔짱을 끼고 앉아 있던 처용이 성자의 의문에 답해 주었다.
-순혈자?
-광신도 집단이요?
아직 순혈자와 순혈신교에 대해 모르는 각 길드장들도 의문을 표했다.
“역천군주,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스미스가 처용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순혈자는 본인이 고귀하다고 여기는 선천적 신격들이 스스로를 거창하게 칭하는 말입니다.”
처용은 의문을 표하는 이들에게 순혈자가 무엇인지 말해주었다.
그들을 맹목적이고 광적으로 따르는 이들이 순혈신교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제 잘난 것밖에 모르는 머저리들이죠.”
처용이 대놓고 성좌를 겨냥하여 욕을 내뱉자 모두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모두의 반응을 잠시 살펴본 처용은.
“내가 제일 증오하는 이들이기도 하고…….”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며 읊조렸다.
“……순혈자라는 성좌들과 순혈신교라는 집단이 천교를 돕는다는 건가?”
커맨더가 처용이 했었던 말들을 다시 곱씹으며 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천교, 순혈자, 마인 이렇게 동맹이라고 보면 됩니다.”
“하아, 새로운 적이라…… 그 순혈자에 속한 성좌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어?”
처용의 말을 들은 커맨더가 한숨을 내쉬며 읊조리고는 재차 질문했다.
“스승님과 제가 조사한 바로는, 배신이 확정된 성좌들이 순혈자들이었습니다.”
-……설마.
제시카가 처용의 말에 무언가를 떠올리며 읊조렸다.
“그들도 순혈자입니다.”
-이런!
처용의 말에 제시카가 탄식을 내뱉었다.
올림포스의 배신자인 아레스와 아르테미스, 아폴론.
이 세 명의 성좌가 순혈자로 밝혀졌다.
하지만.
“문제는…….”
처용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각 성운에 순혈자들이 누구인지, 얼마나 숨어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이어지는 처용의 말에.
-……!
-그게 무슨-!?
각 길드장들에게서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위험한 발언이오. 역천군주.
라진의 홀로그램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처용을 향해 말했다.
“성운에 스파이들이 숨어있다…… 그런 말인가?”
커맨더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무언가를 생각하듯 읊조렸다.
-각 성운에 흩어져 숨어있는 비밀집단이라고 생각하면 되겠군요.
이미 배신자를 검거했었던 올림포스 성운.
제시카는 처용의 말에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주 정확한 정답.”
처용이 제시카를 가리키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의 발언은 성운에서 납득하지 않을 것입니다. 역천군주.
메타트론의 신관, 라리네가 우려를 표하며 처용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몇몇 길드장들 역시 동의한다는 듯한 분위기를 표했다.
“내 말에 성운들이 뭐라 반응하든, 관심 없다.”
처용은 신들의 반응 따위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무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중요한 건 진실이지, 각 성운에 순혈자라는 기생충들이 숨어있고 그들이 대악마들과 손을 잡았다는 것.”
처용의 눈빛에 적대감이 일렁였다.
“신들의 비밀집단이고 나발이고는 상관없어, 놈들이 대악마와 협력한다면…… 내 ‘적’일 뿐이다!”
성좌를 향해 거침없이 적이라 표현하는 처용의 말에 길드장들이 침묵했다.
처용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순혈자들을 돕는 놈들 역시 내 적이다.”
경고를 담아 진지하게 말했다.
“……엠마에게 명령을 내린 순혈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어?”
커맨더가 처용에게 궁금한 듯 물었다.
-혹시? 달의 여신이나-.
제시카가 혹시 올림포스를 배신한 성좌들인가 싶어 말했지만.
“그들의 신력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모르는 다른 신격입니다.”
처용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아마 화가 많이 났을 겁니다.”
-심어 놓은 간자가 들통났기 때문에?
라리네가 처용의 말을 짐작하듯 말하자.
“큭, 그럴 리가요.”
처용이 비웃음을 머금고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놈들은 인간을 벌레만도 못한 쓰레기로 여기는 놈들입니다. 그까짓 간자 하나쯤이야…….”
-그렇다면?
“제가…… 엠마를 지배하던 신격에게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처용이 엠마를 지배하던 성좌를 향해 자신이 했었던 말을 상기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대체 뭐라고 말했는데……?”
커맨더가 궁금한 듯 묻자.
“네가 누구인지 찾을 것이다. 찾아내서!”
잠시 말을 멈춘 처용의 눈빛이 붉게 일렁이며 살기가 넘실거렸다.
마치, 실제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순혈자가 눈앞에 있다는 듯한 분위기를 띄운 처용은.
“네놈을 따르는 모든 신도들을 찢어 죽이고 네놈의 신전을 짓밟아 가루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자신이 했었던 말을 그대로 다시 반복하며 말했다.
“라고 전했으니 아마 많이 빡쳐 있을 겁니다.”
말을 마친 처용이 눈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헌터들의 홀로그램을 쭉 둘러봤다.
순혈자들은 인간을 벌레만도 못한 하등한 존재로 취급하는 이들.
그러나 인간인 처용이…… 감히 고결한 신격을 향해 선전포고를 한 상황이었다.
오만한 선천적 신격의 입장에서는 극도로 분노할 만한 행동이기도 했다.
처용의 살기 어린 선전포고에.
-…….
-…….
각 길드장들과 그 뒤에 자리한 상위 헌터들의 홀로그램이 다양한 표정을 자아냈다.
꽤 여러 번 봤었지만, 아직도 신에게 정면으로 적의를 드러내는 처용에게 익숙하지가 않았다.
하지만.
“하하, 내가 한 손 보태도 될까?”
커맨더는 그런 처용에게 동참하듯, 동의를 구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신전을 부수는 거라면, 저보다 더 제격이겠네요.”
처용이 의외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커맨더 역시 자신을 적대하는 신격들을 향해 적의를 보이긴 하지만.
이 시기에는 아직 ‘신’이라는 이름의 무게가 매우 무거웠다.
커맨더는 그런 신이라는 무게를 견디고 처용과 함께 하겠다는 의사를 공식적으로 표한 것이었다.
-커맨더……!
-경솔하군요.
몇몇 헌터들의 커맨더의 말에 우려를 표했다.
성좌와 직접적으로 맞서 싸울 무력과 담력을 지닌 처용은 몰라도, 다른 인간들은 신을 조심해야 하니까.
그러나.
“저는 제 성좌님이 기계 장치의 여신님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이 있습니다.”
커맨더는 다른 신격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듯, 진지하게 말했다.
그의 성좌가 대신인 기계 장치의 여신인 이유도 있었지만.
“한처용 헌터의 성지에 머물면서 참 많은 신격들과 마주했었습니다.”
처용의 성지에서 마주했었던 다양한 신격들을 마주한 영향이 컸다.
“그곳에 머무는 신격 중에 인간을 하등하게 여기거나 업신여기는 분들은 단 한 분도 없었습니다.”
태룡사에 초대되어 그곳에 머무는 신격들은 흔히 알려진 강압적인 신격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 누구도 인간을 소모품 취급하거나 본인의 신격을 내세워 강압적으로 굴지 않는다.
오히려 조언과 도움을 아끼지 않으며 인간들을 도와 세상에 많은 기여를 하는 이들이었다.
강제적으로 충성과 신봉을 받는 이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는 이들이었다.
“아무리 신이라 해도, 순혈자와 같은 이들은 도저히 존중할 수가 없습니다.”
커맨더가 처용과 비슷한 분위기를 띠며 진지하게 말하자, 헌터들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악마들과 손을 잡았다면…….
-그래, 성좌라 해도 적이 맞아.
일부는 커맨더의 말에 수긍하는 듯한 분위기를 보였고.
-신을 함부로 모욕하는 것은…….
-우리는 힘들지…….
일부는 외면했고.
-길드원들과 순혈자들에 대해 상의를…….
-저희는 성운과 직접 대화를…….
일부는 고민하는 등 각기 다른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흠…….”
처용은 커맨더의 말에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 헌터들을 쭉 관찰했다.
아니, 정확히는 조금 전, 순혈자들을 향해 선전포고를 할 때부터 쭉 관찰하고 있었다.
순혈자들을 대놓고 모욕하고 도발하는 말.
분명 순혈자들을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순혈신교라면 미세하게라도 반응을 보일 테니까.
심지어 커맨더까지 순혈자들을 적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순혈신교라면 이를 아득바득 갈아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들 중에서는 없군. 아니, 아니다. 감정을 잘 숨기는 놈일 수도…….’
처용이 홀로그램들을 쭉 둘러본 결과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은 없었다.
실제로 마주한 것이 아닌, 홀로그램이기에 잘 구별이 가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처용이 헌터들을 쭉 살펴볼 때.
“신이라는 이유로 계속 외면할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의 주적은 악신이고. 순혈자들도…… 악신입니다.”
커맨더가 진지한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커맨더.”
스미스가 커맨더의 말에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순혈자라는 성좌들의 집단에 대해서는 이후 열릴 세계 헌터 회의에서 더 다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죠. 당장 중요한 것은 사실 순혈자들이 아니니까요.”
스미스의 말이 끝나자 처용이 입을 열었다.
각 길드의 길드장들과 주요 헌터들을 불러 모은 이유.
첫 번째는 순혈자와 순혈신교에 대해 대대적으로 알리기 위해서다.
숨어서 암약하는 비밀집단을 상대할 때는 이렇게 공론화시키는 편이 낫기 때문이었다.
회귀 전에는 순혈자들의 사상에 공감하여 그들에게 동참하는 성좌들이 꽤 있었다.
신이라면 누구나 스스로가 고결하고 드높다 여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회귀 전과 다른 상황이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순혈자들이 천교와 협력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천교는 다른 성운의 성좌를 살해하고 실험하는 잔악무도한 짓을 저지른 상황.
순혈자들은 그런 천교를 도왔기에 다른 성좌들에게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그들의 사상에 동의하는 성좌들이라 해도, 이런 분위기에서 함부로 순혈자들의 편을 들지 못할 것이다.
이번 천교 일이 마무리되기 전까지 순혈자들은 숨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가 순혈자임을 드러낸다면, 천교와 협력했다는 질책부터 받을 테니까.
‘자…… 방해가 될 순혈자들의 발은 묶어 버렸고.’
처용이 헌터들의 분위기를 살피며 속으로 읊조렸다.
이제 길드장들을 모집한 두 번째 이유를 말할 차례였다.
“양천이 뤼장첸에게 살해당하기 전, 그에게서 얻은 정보가 있습니다.”
처용의 말에 헌터들이 이목을 집중했다.
“천교가 성지가 아닌 다른 장소에 만든 실험실들, 그 대략적인 위치들을 알려 줬습니다.”
“……이런 잔악무도한 실험을 행한 장소가 또 있다고요?”
성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 그것도 세 군데나 더 있더군요.”
처용이 손가락 세 개를 펴며 말하자, 모두의 인상이 거칠게 일그러졌다.
“이 세 군데 중 한 곳에, 뤼장첸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끊은 처용이 목소리를 낮게 깔며 진지한 분위기를 보였다.
“마인들, 아마 의회주가 적어도 한 명 이상씩은 체류해 있을 겁니다.”
처용의 말이 끝나자.
-마인들도 있다니……!
-그게 정말입니까!?
길드장들의 홀로그램 표정이 거칠게 일그러졌다.
“양천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걸 듣자마자 따로 알아보러 다녔었고.”
처용이 양천에게서 단서를 얻고 곧장 행동하지 않은 이유라는 말을 덧붙였다.
사실은 다른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아무리 저라 해도, 혼자서 세 군데를 동시에 칠 순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우리를…….
길드장들이 처용이 왜 자신들을 불렀는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위험한 곳은 제가 갈 테니, 역할을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아! 맞다…….”
말을 잇던 처용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잠시 말을 끊고는.
“빠지실 성운은 빠지셔도 됩니다. 강요 아니니까. 뭐, 바쁘다는 이유도 있을 테고.”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처용의 말은 나름 진심이었다.
다들 지구를 지키기 위해 몬스터와 바쁘게 싸우는 이들이었으니까.
그러나.
-파라오 길드는 이번 작전에 참여하겠소.
-저스티스 길드 역시 참여하겠습니다.
-라이트닝 워리어 역시…….
모든 길드장들이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베이징 수습은 다 끝난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야. 나도 함께하지.”
“교단 역시 이번 일에 참여하겠습니다.”
커맨더와 성자 역시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참…… 고맙군요.”
짧게 침묵한 처용이 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작금의 상황이 회귀 전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 우리는 이번에 던전 일정이…….
-우리도 좀 바쁩니다.
-곤란하군요…….
마인들의 아지트를 발견해도, 위험천만한 던전을 찾아내 알려도.
처용이 지구에 닥칠 위험을 미리미리 파악해 알려도 시큰둥한 반응들을 보이던 회귀 전 길드들.
아니, 성운의 이득에만 따라 움직이던 꼭두각시 병사들.
회귀 전에는 이런 길드들의 적극적이지 못한 태도 때문에 미리 막을 수 있었던 일들도 크게 번졌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지금까지 노력한 것이 헛된 일은 아니었구나.’
지금은 그때와는 많이 다른 분위기였다.
미소를 지어 보인 처용은.
“모두 참석하신 김에 다치는 이가 없도록 안전하게 루트를 짜 보도록 하죠. 먼저…….”
알고 있는 정보를 하나하나 풀며 가장 안전하고 완벽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