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대악마들이 거주하는 장소는 판데모니움이라는 어두운 세계였다.
닥터가 방문한, 안개의 대악마 알레인의 성역이 있는 장소 역시 판데모니움이었다.
전 우주에 시스템이 펼쳐지고 완전히 격리된 세계.
그 누구도 판데모니움에 들어갈 수 없었고, 판데모니움에서 거주하는 존재 역시 바깥 세계로 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닥터는 익숙하다는 듯 자신의 성좌가 거주하는 성역에 발을 들였다.
[무언가 용건이 있나 보네?]
알레인이 자신의 신관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묻자.
“꼭 용건이 있어야 합니까?”
닥터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네놈은 항상 용건이 있을 때만 나를 찾아왔었으니까.]
알레인이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말을 이었다.
[전에는 그릇의 숙주를 살리려고 내 멱살까지 잡지 않았더냐?]
“그건 당신이 쓸데없이 저를 시험하려 했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닥터는 알레인의 말에 전혀 위축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일반적인 성좌와 신관의 관계라기에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당신과 저, 그리고…… 조커와의 거래를 잊지 마십시오.”
닥터가 진지한 목소리로 알레인을 바라보며 말하자.
[흥, 건방진 녀석 같으니.]
옥좌에 앉은 알레인이 삐딱한 자세로 턱을 괴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닥터가 자신의 성좌를 대하는 태도는 매우 건방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런 자신의 신관을 바라보는 알레인의 표정에는 분노가 아닌, 흥미와 재미가 떠올라 있었다.
[네놈이 처음 여기로 굴러들어왔을 때는 귀여운 맛이 있었는데.]
“이제는 어리숙하기만 한 꼬마가 아닙니다.”
닥터가 알레인의 말에 하얀 가운의 옷깃을 고쳐 입으며 말했다.
[그래서…… 왜 성역까지 찾아온 것이냐?]
알레인이 닥터를 향해 궁금한 듯 묻자.
“역천군주에 대해 궁금해서요.”
닥터가 안경을 들어 올리며 진지하게 질문했다.
“도대체, 그놈의 정체가 뭡니까?”
여러모로, 정말 진심으로 궁금한 부분이었다.
신의 병사들 중 유일하게 신력을 지닌 인간.
성좌를 상대할 때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이겨 먹으려 드는.
아니, 성좌를 때려눕혀 버린 무지막지한 인간이었다.
솔직히…… 그를 병사라고 지칭하는 것도 이상했다.
헌터는 신의 병사, 말 그대로 소모품에 가까운 존재였다.
하지만 처용을 신의 소모품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인간들은 성좌를 신성시하고 떠받들고 복종한다.
그러나 처용이 신들을 대하는 태도는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달랐다.
자신에게 호의적인 성좌들에게는 ‘존중’을, 적대적인 이들에게는 똑같이 ‘적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신에게 반항할 수 없는 다른 인간들과는 마음가짐 자체가 다른 인물이었다.
“저를 통해서 역천군주를 보지 않았습니까?”
닥터가 처용을 떠올리며 알레인에게 물었다.
“사소한 거라도 좋습니다. 뭐 아는 거 없습니까?”
[으음…….]
닥터의 질문에 알레인이 고개를 기울이며 침음을 흘렸다.
생각에 잠긴 듯, 고민하며 침묵하던 알레인은.
[신력을 가진 인간, 성좌를 때려눕힌 인간, 디아블로를 이겨 먹은 인간…….]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태초의 마수들까지 함께 하고 있단 말이지?]
신관인 닥터를 통해 처용을 관찰한 결과.
알레인은 처용을 보며 아주 익숙하고도 친숙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짐작이 가는 건 있는데…… 확신이 서질 않네.]
알레인이 작게 인상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기울이며 답하자.
“태초의 마수…… 바알이 말한 위대한 분이 찾으라는 존재들이었죠?”
닥터가 무언가를 생각하듯, 턱을 쓸며 말했다.
[맞아, 대악마들에게 가장 우선순위로 찾으라 명했었지.]
“집행자와 디아블로는 그 사실을 알 텐데요?”
알레인의 닥터가 이상하다는 듯 의문을 표했다.
대악마보다도 더 드높은 존재가 내린 명령.
디아블로와 그의 신관인 집행자는 처용과 태초의 마수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군요…… 왜 알리지 않고?”
닥터가 정보를 풀지 않는 디아블로와 집행자를 떠올리며 의문을 담아 읊조렸다.
[무슨 이유인지 디아블로가 태초의 마수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다.]
알레인이 디아블로를 떠올리며 말했다.
사실, 태초의 마수 중 하나, 카투라 크타니드에 대해서는 판데모니움의 대악마들도 알고 있었다.
올림포스에 심어놓았었던 간자, 안드라스가 소식을 전했었으니까.
이 사실은 전달받은 바알은 곧장 ‘위대한 존재’에게 그것을 알렸었다.
그리고 그에게 답변받은 지령은 ‘가장 마지막에 처리한다’였다.
정황상,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를 보호하는 존재가 다른 신격도 아닌 처용의 성좌, 혈선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어쩔 수 없이 차후를 기약하며 후순위로 둔 것.
그동안 다른 태초의 마수를 잡으며 때를 기다리는 듯 보였다.
그리고 마냥 기다리지는 않고 천교 측에 따로 지령을 전한 상태였다.
기회가 된다면 카투라 크타니드를 노려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가 더 그쪽에 합류했을 줄이야.]
처용과 함께하는 태초의 마수는 카투라 하나가 아니었다.
디아블로의 흑염에도 밀리지 않은 새하얀 생명의 불꽃.
크루마 크타니드가 처용 쪽에 합류했다.
그리고.
[나도 그 무식한 전투광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디아블로는 또 다른 태초의 마수가 처용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는 디아블로는 악의 제전에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저 바알과 다른 대악마들을 둘러보며 웃기만 할 뿐이었다.
“집행자는 철저하게 디아블로의 명령만을 따르니 그렇다 치지만…….”
알레인의 말에 닥터가 디아블로와 집행자를 떠올리며 말을 흐렸다.
모든 의회주들은 대악마의 명령에 따르는 이들이었다.
이는 스스로가 모시는 성좌 말고도 다른 대악마들 역시 포함되었다.
특히 판데모니움 서열 1위, 삼천마 바알의 명령만큼은 절대적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집행자만큼은 조금 예외였다.
제아무리 바알이 직접 지령을 내린다 해도, 디아블로가 거부하면 집행자는 따르지 않는다.
바알과 같은 삼천마인 디아블로가 그의 성좌인 이유도 있었지만.
-나는 오로지 단 한 분의 명령만을 따른다.
디아블로를 향한 집행자의 충성심이 매우 강했기 때문이었다.
집행자가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음에도 입을 다물고 있는 이유였다.
문제는.
“디아블로의 의도를 모르겠군요.”
집행자의 성좌인 디아블로가 무슨 생각으로 정보를 숨겼는지 모른다는 것.
[처음에는 지금 상황을 조금 이용해 볼까도 했었는데…….]
알레인이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일단은 조금 지켜봐야겠어.]
중요한 정보를 숨긴 디아블로.
알레인은 처음에 바알에게 이 사실을 알릴까도 고민했었다.
그러나 곧장 생각을 접었다.
알린다고 하여 디아블로가 큰 타격을 입을 것 같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괜히 디아블로의 표적이 되어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수가 있었다.
“동의합니다.”
닥터가 알레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당신이 이곳을 빠져나가기 전에 위험한 일이 생기는 건 곤란합니다.”
[그것참, 걱정해 주어서 정말 고맙구나.]
알레인이 닥터의 말에 삐뚤어진 미소를 짓고는.
[조커는?]
닥터에게 조커를 언급하며 물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조커가 역천군주에게 큰 관심을 보이더군요.”
알레인의 질문을 정확히 알아들은 닥터가 입을 열었다.
“역천군주 역시 크타니드의 파편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뭐라고!?]
닥터의 말에 알레인이 놀람을 표했다.
[떨어져 나간 크타니드의 파편이 또 있었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알레인이 부정하듯 말하자.
“조커가 직접 말해주었습니다.”
닥터가 확실하다는 듯 알레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으음…….]
알레인이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며 침음을 흘렸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짧은 침묵이 지나갔고.
[역천군주나, 혈선이라는 성좌와 직접 대화를 해보면 좋으련만.]
알레인이 혀를 차며 답답한 감정을 실어 말했다.
“음…….”
닥터가 알레인의 말에 침음을 흘리며 잠시 고민하더니.
“한 번 기회를 잡아 보죠.”
알레인을 향해 진지하게 말했다.
[괜찮겠어? 자칫 잘못하면 모든 게 엎어질 수가 있어.]
알레인이 작은 걱정을 보이듯 말하자.
“역천군주가 악몽 속에서 과거를 본 이상, 다짜고짜 저희를 적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닥터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조만간 그와 마주할 기회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음?]
알레인이 닥터의 말에 의문을 표하자.
“그가 정말 미래를 본 예언자가 맞다면…….”
닥터가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지금 천교가 하는 짓거리를 절대로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으니까요.”
[대격변 말이지…….]
-탁. 탁.
알레인이 옥좌의 팔걸이를 두들기며 읊조렸다.
[막으려고 한다고 쉽게 막을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그러니까요.”
닥터가 알레인이 하고자 하는 말을 잘 알고 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정말로 그가 대격변에 대해 알고 있다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상상도 가질 않거든요.”
[음…… 우선 상황을 좀 지켜봐야겠네.]
알레인이 닥터의 말에 작게 인상을 쓰며 답한 순간.
[기척이 느껴지길래 와 봤더니, 네가 웬일로 성역을 다 방문했군?]
-샥.
닥터의 뒤로 누더기에 가까운 로브를 걸친 누군가가 나타나며 말했다.
로브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겉으로 봤을 때는 상당한 덩치의 남자로 보였다.
[지상에 무슨 일이 생겼나?]
누더기 로브를 걸친 남자의 입에서 위엄 섞인 굵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아마도 곧이요?”
닥터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하던 일에 진척은 있는 거야?]
알레인이 방금 나타난 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시스템의 장벽을 뚫는 게 쉬운 일인 줄 아나?]
누더기를 쓴 남자가 작은 한숨을 쉬며 말을 잇고는.
[그것도 내 신력을 억누르면서, 다른 대악마 몰래 말이야.]
머리에 쓴 누더기 로브를 벗으며 말했다.
그러자 샛노란 수염과 굵직한 얼굴선을 가진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쉽지 않다고. 알레인.]
남자가 알레인을 향해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하자.
[제우스…….]
알레인이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 인상을 쓰며 남자의 이름을 언급했다.
누더기 로브를 쓰고 있던 남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올림포스의 전 주신이었다.
[너무 차가운 거 아닌가? 이래 봬도 난 그대를 위해서 이러고 있는 건데 말이야.]
제우스가 알레인을 향해 말할 때.
“차라리 장벽이 뚫리면 당신이 먼저 돌아가는 게 어떻습니까?”
닥터가 제우스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이곳의 사정을 아는 그가 판데모니움을 빠져나가 신계로 돌아갈 수 있다면, 더 나은 계획을 짤 수도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아직 알레인에게 대답을 듣지 못했다.]
제우스가 닥터의 말에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리고.
[이곳을 빠져나가면 나와 함께 갈 텐가?]
알레인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었다.
[미친놈.]
제우스의 말을 들은 알레인의 얼굴에 작은 경멸이 떠올랐고.
“하아.”
-탁.
닥터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치고는 얼굴을 쓸며 한숨을 흘렸다.
“벌써 당신을 본 지 7년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하, 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닥터의 말에 제우스가 당당한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그때.
[그냥 다 나가.]
알레인이 축객령을 내리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화아아.
바닥에서 검은 안개가 피어오르더니, 제우스와 닥터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럼 돌아가 보겠습니다.”
닥터가 알레인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하고는.
-후우욱!
안개에 완전히 감싸이며 먼저 사라졌다.
뒤이어서.
[다음에는 그대의 대답을 듣길 기원하지.]
제우스 역시 알레인을 향해 마지막 말을 전하고는 안개에 감싸이며 사라졌다.
[하아.]
축객령을 내린 알레인이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뭘 하려면, 더 서둘러 줘야 한다. 꼬마야.]
닥터와의 방금 대화를 떠올리며 혼잣말을 흘렸다.
[네가 더 늦으면 나도 잡아먹히는 수가 있거든.]
마지막 말을 흘린 알레인의 보랏빛 눈동자에서 순간, 두려움과 슬픔이 일렁였다.
***
패웅무신의 치료가 모두 끝나고 이틀 뒤.
천교의 성지 안에서는 제례 준비가 거의 막바지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봐! 그쪽 작업은 어떻게 되어 가냐?
-여기가 더 급하다고!
-야! 그거 조심히 다뤄!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아주 분주한 분위기 속.
-스르르.
수많은 인파 사이로 누군가가 기척을 죽인 채 움직이고 있었다.
인파를 뚫고 움직인 누군가가 도달한 장소는 성지의 중앙.
제례를 위한 가장 거대한 건축물이 지어지고 있는 장소였다.
-스윽.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그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검은 석탑과 같은 건축물이 눈에 들어왔다.
로브 속에서 드러난 눈동자에서 순간 붉은빛이 일렁였다.
-저벅.
잠시 검은 석탑을 바라본 이가 다시 석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본래라면 관계자 외 출입이 금지된 장소라 경비들이 그를 막아야 했지만.
-……지금은 준비가.
-아 빨리 끝났으면 좋겠네.
경비들은 아무도 그를 인지하지 못한 듯, 자기들끼리 떠들고만 있었다.
이윽고 검은 석탑 앞에 도달한 그가 뒤집어쓴 로브를 벗었다.
그 순간.
“누구냐!?”
“뭐야?”
갑자기 드러난 기척에 주변에 경비를 서던 헌터들이 그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러자.
“안녕 Bro들?”
모습을 드러낸, 흑백의 하회탈 반가면을 쓴 조커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조커?”
“네놈이 어떻게 여기에?”
조커를 알아본 헌터들이 경계를 보일 때.
“당장, 이 빌어먹을 제사를 멈추라고 전해줬으면 좋겠어. Bro.”
조커가 헌터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