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처용과 아테나의 말을 들으며 조용히 침묵하고 있던 여래가 입을 열었다.
[올림포스의 전 주신이 집착을 보인 것은 ‘태초의 그릇’입니다.]
“그렇죠.”
처용이 여래의 말에 대답하듯 말했다.
제우스가 처용을 적대한 것은 여래에 대한 영향도 있었지만, 태초의 그릇 때문도 있었다.
애초에.
-태초의 그릇은 어디로 빼돌린 거냐?
제우스는 처용을 향해 집요하게 태초의 그릇에 대해 물었다.
그에게는 여래에 대한 원한보다는 태초의 그릇이 더 중요해 보였다.
[제우스는 사라진 태초의 그릇을 추적하다가 중요한 무언가를 알아낸 게 아닐까요?]
그간의 이야기를 들은 여래가 생각을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태초의 그릇과 관련이 있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스승님, 태초의 그릇은 지금…….”
여래의 말에 처용이 말을 흐렸다.
아테나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태초의 그릇은 지금 마녀의 몸속에 있었다.
즉, 다른 장소도 아니고 지구, 지상에 있는 상황이다.
태초의 그릇을 노렸으면 올림포스 주신 자리에서 마녀를 차지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태초의 그릇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래는 처용의 질문을 짐작하며 말했다.
태초의 그릇이 마녀에게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은 처용이 악몽 속 과거를 겪지 않았다면 알아내지 못했을 사실이었다.
즉, 제우스 또한,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지금도…… 알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네 말대로 제우스는 집착이 강하긴 했지만, 멍청한 짓을 저지르는 자가 아니었다.]
여래가 제우스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는 자신의 행동으로 인한 이해득실(利害得失)을 따질 줄 아는 자였다.]
“야훼처럼요?”
처용이 궁금한 듯 묻자.
[어떤 부분에서는 빛의 신보다도 더 계산적인 모습을 보이는 이가 바로 제우스였다.]
여래가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제우스가요?”
처용이 여래의 말에 흥미로운 듯 물었다.
가장 계산적이고 본인의 이득에 충실한 빛의 신.
여래는 그런 야훼보다 제우스가 더 계산적이라 말하고 있었다.
[그는 도저히 아니다 싶으면 본인의 욕망을 깔끔하게 포기할 줄 아는 신이었으니까.]
처용의 말에 여래가 과거, 신계에 피바람을 일으켰던 당시를 떠올리며 말했다.
제우스는 자비의 대신을 원했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다른 대신들, 특히 천교가 작정하고 판 함정에 손을 보태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여래가 폭주했고 신계에 피바람이 불었다.
처음에는 제우스 역시 다른 신들처럼 여래를 크게 위협적으로 보지 않았었다.
상대는 고작 해봐야 인간 출신의 반신.
오만한 선천적 신격답게 여래를 큰 적수로 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다른 성운들과 힘을 합쳐 여래가 일으킨 피바람을 손쉽게 진압하고 보살을 차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래의 손에 수많은 성운의 성좌들이 핏덩이가 되면서 갈려 나갔다.
거대 성운들의 성역이 모두 초토화되고 올림포스 성역 역시 큰 피해를 받은 상황.
다른 이들이 여래에게 거대한 분노만을 품을 때.
[제우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올림포스 소속의 모든 이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키는 것이었다.]
제우스는 다른 이들처럼 분노만 표출하지는 않았다.
[그 당시 올림포스가 다른 성운들보다 피해가 적었던 이유였지.]
[전 주신이 내렸던 명령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아테나가 여래의 말이 맞다는 듯 말했다.
그 당시 대피하는 이들을 이끌었던 이가 바로 아테나였으니까.
[신중하고도 성운을 생각하는 그런 자가 모든 걸 버리고 판데모니움에 투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이유가 있다고 보시는군요.”
처용이 여래의 말에 궁금한 듯 물었다.
[태초의 그릇은 가장 원시적인 우주의 힘과 더불어 우주의 비밀 또한 담고 있다.]
여래는 미륵에게 들었던 적이 있었다는 말을 덧붙이며 말을 이었다.
[태초의 그릇에 담긴 우주의 비밀…….]
여래가 생각을 정리하듯 말을 흐리자.
“그 비밀이 제우스가 사라진 원인이다?”
처용이 여래의 말을 잇듯 읊조리며 말했다.
그리고.
[태초의 그릇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이야기를 듣던 아테나가 처용을 향해 물었다.
제우스가 사라진 원인이 태초의 그릇 때문이라면, 거기서 단서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
“단서는 잡았지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처용은 아테나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답하고는.
“그것을 위해서라도…….”
제시카를 바라보며 말을 흐렸다.
그러자.
“곧장 알아보겠습니다.”
제시카가 처용이 하고자 하는 말을 바로 파악하고는 대답했다.
“이걸 토대로 조사하면 과거 연합이 무엇을 했는지 알아볼 수 있을 거야.”
메리가 처용이 건넨 서류들을 챙기며 말했다.
“아, 그리고.”
처용은 무언가가 기억났다는 듯.
“혹시 제이크 로스차일드가 누굽니까?”
제시카를 향해 물었다.
악몽 속에서 마주했었던 인물 중 하나.
제이크 로스차일드는 연합의 실험에 깊게 관련된 인물 중 하나로 보였다.
“그는…… 보수파 세력의 핵심 인물입니다. 그자의 이름을 어떻게?”
제시카가 처용의 말에 놀란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가문의 핵심 인원들은 외부에 이름이 공개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연합의 실험을 주도하던 핵심 인물, 그리고 다른 가문들을 숙청하는 데 앞장섰던 놈입니다.”
처용은 악몽 속에서 겪었던 제이크에 대해 설명하며 말했다.
“지구에 악마들을 불러들인 이들도 연합이었고 마인들의 시작도 연합이었습니다.”
“그런…….”
처용의 말에 제시카가 침음을 흘렸다.
그녀 역시 로스차일드의 일원이니만큼, 처용이 전한 진실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연합이 저지른 생체 실험과 비인도적인 만행.
그리고 그 실험에 앞장선 이들 중 하나가 바로 가장 힘이 강한 가문, 로스차일드였다.
“그래도…… 덕분에 보수파 세력을 압박할 명분이 생겼군요.”
제시카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이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현재 내분 중인 로스차일드.
처용이 전해 준 증거들을 잘만 이용한다면, 보수파를 밀어버릴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 일은 처용 역시 바라는 부분이었다.
제니퍼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이들이 바로 로스차일드 보수파 세력이었으니까.
“무라키 가를 포함해서 제니퍼, 아니 마인들을 돕는 놈들이 더 있을 겁니다.”
처용이 제시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거 최초의 데미갓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연합.
그들 중 대부분이 마인들을 돕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연합에 소속된 일본의 무라키 가 역시 마인들을 돕고 있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아, 잊어버릴 뻔했군요.”
처용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제시카가 막 떠오른 듯 말을 이었다.
“천교가 수상한 짓을 하고 있습니다.”
“수상한 짓?”
제시카의 말에 처용이 묻자.
“성지에 이상한 건축물을 짓고 있습니다. 천교의 성역에도 같은 건물이…….”
제시카가 처용이 사라지기 전,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설명했다.
천교에서 짓고 있는, 제례를 위한 건축물.
어떤 모습으로 지어지는지 등, 제시카가 그간 조사한 내용을 이야기했다.
“대충 이런 형태야.”
메리가 상황판을 꺼내 테이블 위로 올리고는 그림을 그려 보였다.
그러자.
‘대격변……!’
처용의 머릿속에 번개가 치듯 중요한 정보가 떠올랐다.
‘벌써 그걸 준비한다고?’
처용이 놀란 이유는 천교가 지금 벌이는 짓이 더 미래에 있어야 할 일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더 미래에 일어났어야 할 일이 앞당겨진 상황.
‘설마…… 벌써 검은 별들이?’
처용은 미래에 일어났었던 재앙 중 하나를 떠올리고는.
“……언제부터였습니까?”
제시카에게 언제부터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했는지를 물었다.
“준비는 오래전부터 한 듯하고 시작은 한 달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이런…….”
제시카의 말에 처용이 침음을 흘렸다.
“이것에 대해 아십니까?”
“천교가 개 같은 일을 벌인다는 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죠.”
처용이 제시카의 질문에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는 거칠게 말했다.
“주 건축물과 외곽에 세워진 건축물끼리 선을 그어 보면…….”
손가락에 지(地) 속성 마나를 끌어 올린 처용이 메리가 펼친 상황판에 손을 올렸다.
-우드드.
상황판 위에 그려진 지도를 토대로 천교가 건설 중인 건축물의 미니 모형들이 만들어졌다.
동시에.
-스윽. 스윽.
처용이 어둠 속성 마나로 각 건축 모형들끼리 선을 그었다.
그러자.
“……문자인가요?”
제시카가 처용이 그려낸 선들을 살펴보며 질문하듯 묻자.
“판데모니움의 문자입니다. ‘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죠.”
처용이 속성 마나로 만들어 보인 문자를 설명하며 입을 열었다.
“아마도…… 판데모니움에도 이 건축물이 만들어지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는 건?”
제시카가 처용의 말을 듣고 무언가 짐작하듯 읊조렸다.
“지상과 신계, 판데모니움에 문을 만들어 서로 연결하겠다는 소립니다.”
처용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결코, 좋은 목적일 리가 없죠.”
“젠장! 어떻게 해야…….”
제시카가 인상을 찌푸리며 읊조렸다.
만약 처용의 말이 사실이라면, 당장 천교를 막아야 했다.
문제는…… 건물이 지어지고 있는 장소가 신의 성지라는 것.
무언가 큰 명분이 없다면, 함부로 건들 수가 없었다.
[방법을 찾아보겠다.]
아테나가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하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때.
[천교 쪽은 무신전과 협력해서 조치를 취하는 중이니, 다른 것부터 처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여래가 상황판 속 건축물들을 싸늘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동시에 처용을 눈짓하며 조용히 전음을 보냈다.
처용이 여래가 은밀하게 보낸 전음을 듣고는.
“그렇군요.”
작은 미소를 지어보며 말을 이었다.
“우선, 할 수 있는 일들부터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지.]
“연합에 대해서는 최대한 정보를 모아보겠습니다.”
처용의 말에 아테나와 제시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신계, 천교의 성역이 눈에 보이는 멀리 떨어진 장소.
“도대체 무엇을 만들고 있단 말인가?”
멀리서 천교의 성역을 바라보는 천문이 부채를 접었다 폈다 하며 읊조리자.
“저 건물에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는군.”
천문의 옆에 있던, 등 뒤에 거대한 대검을 차고 있는 큰 덩치의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패웅(覇熊)무신께서도 그리 말씀하시는구려.”
천문이 옆에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성좌, 패웅을 향해 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강완도 나랑 같은 말을 했나 보오?”
패웅이 천문을 향해 묻자.
“그렇소. 저것들, 특히 저 중앙에 있는 건물을 보며 불길하다고 말했지요.”
천문이 이전에 같이 왔었던 강완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대의 능력이라면 무언가 알아낼 수 있지 않소?”
패웅이 천문의 능력을 언급하며 물었다.
그러자.
“제가 아무리 통찰과 관련된 권능을 지니고 있다지만, 모든 것을 곧장 파악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천문이 패웅의 말에 답함과 동시에.
-탁! 휘릭.
부채를 피며 앞으로 크게 휘저었다.
-스르르.
천문이 부채를 휘저은 부분이 검푸르게 일렁이더니 작은 별들이 반짝거렸다.
마치, 별이 반짝이는 작은 우주가 담긴 두루마리처럼 보였다.
“날이 가면 갈수록 좋지 않은 징조가 떠오르니…….”
천문이 두루마기 속에서 검붉은 색으로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그의 권능은 별자리 예언.
별자리를 읽고 앞으로의 일을 점칠 수 있는 권능이었다.
다만,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확하게 읽는 ‘예지’가 아니었다.
예지라기보다는 ‘예측’에 가까운 권능이었다.
다만.
“오늘은 조금 더 명확하게 보이는군요.”
이 권능의 사용자는 다름 아닌 천문.
지구 역사에 기록된 인물 중 손에 꼽히는 책략가가 바로 천문이었다.
천문의 존재는 무신전이 거대 성운들 틈에서 경쟁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그가 별자리를 정확하게 읽으면, 그것은 예측이 아닌 예지가 되니까.
별자리를 제대로 읽는 순간, 그 일은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 되곤 했다.
그리고 별자리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오랫동안, 꾸준히, 가까이서 관찰해야 했다.
지금 패웅무신과 함께 천교를 관찰하는 것이 벌써 열 번째였다.
더 가까이 다가가면 좋겠지만, 천교에게 들켜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지금은 거리를 유지하며 은밀하게 행동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검은 별들이 사슬을 끊고 뛰쳐 나와 세상을 어지럽히니…….”
천문이 눈앞에 나타난 별자리를 읽으며 중얼거렸다.
“검은 별들이 내리친 칼날에 푸른 별들의 빛이 꺼질 것이다?”
무언가 불길함을 감지한 듯 천문이 인상을 크게 찌푸렸다.
잠시 별자리가 보여준 예언을 해석하며 생각한 천문은.
“당장 여길 빠져나가야-!”
패웅을 향해 진지하게 말했다.
그 순간.
“어딜 그렇게 염탐하시나?”
-샤샤샤샥!
불길한 검은 오오라를 내뿜는 열 명의 인원들이 천문과 패웅을 둘러싸며 나타났다.
“검은 별!”
천문이 주변을 둘러싼 이들을 보고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동시에.
“……승상?”
패웅이 주변을 포위한 불청객 중 가장 앞에 있는 검은 갑주의 남자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누군가 했더니 네놈이었구나.”
가장 앞장서 있는, 가장 불길하고 칙칙한 신력을 내뿜는 자.
“하후돈!”
조제군이 패웅을 향해 비틀린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소리쳤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