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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계승자-260화 (260/726)

#260화

드디어 마주하고 싶었던 죄악의 파편이 눈앞에 나타났다.

놈에게 묻고 싶은 말도, 따져야 할 일도 많았지만.

“네놈이 여길 이렇게 만든 거냐?”

처용은 주변을 둘러보며 죄악의 파편에게 물었다.

회귀 전과는 전혀 달라진 심상세계의 모습.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이 눈앞에 있는 죄악의 파편일 가능성이 컸으니까.

[멍청한 놈.]

처용의 말에 파편에게서 중성적인 목소리가 울려왔다.

[스스로의 변화도 깨닫지 못하는 건가?]

죄악의 파편이 한심하다는 듯 말하자.

“……뭐?”

처용의 의문을 표했다.

동시에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이 장소, 심상세계는 온전히 처용의 정신이 구현된 세계였다.

죄악의 파편이 스며들었다 해서 심상세계가 변한다?

처용이라는 존재 자체가 뒤틀리거나 변이되지 않는 한, 그럴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처용의 마음을 비추는 심상세계가 황량하게 변한 원인은.

‘내 마음가짐이 변했기 때문에…….’

처용 스스로의 마음 자체가 변했기 때문이었다.

푸르고 생명이 넘치던 나무가 앙상해지고 이파리가 전부 사라져 있었다.

따듯하고 올곧았던 수호신은 배신과 절망을 겪고 차갑게 변했다.

창공처럼 푸른 하늘은 마치 태양이 떨어져 종말이 다가온 듯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넓고 굳건한 마음을 가지고 동료들을 지키던 전사는 피의 복수를 바라고 있었다.

정의롭던 수호신(守護神)은 스스로를 버리고 복수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혹한 수라(修羅)가 되었다.

완전히 변해 버린 심상세계는 처용의 새로운 다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랬던 건가…….”

처용이 변해버린 심상세계를 쭉 둘러보며 읊조렸다.

그리고.

“기를 쓰고 숨어있던 놈이 무슨 변덕으로 내 앞에 나타나셨나?”

죄악의 파편을 싸늘하게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날 방해라지 마라.]

죄악의 파편이 검붉은 기류를 크게 피워올리며 위협하듯 말했다.

“방해?”

처용이 되묻자.

[날 깨우지 말란 말이다.]

아주 낮은 목소리의 대답이 들려왔다.

-쿠구구!

낮은 목소리였음에도 심상세계 전체에 울림이 퍼졌다.

“허락도 없이 얹혀사는 새끼가 어디서 큰소리야.”

처용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한 모습을 보이며 반박했다.

죄악의 파편인지, 크타니드의 파편인지, 처용은 이런 존재를 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설령, 크타니드의 파편이 강력한 무력을 자랑하는 수단이라 해도, 달갑지 않았다.

온전한 자신의 힘이 아니었으니까.

처용은 온전히 스스로 깨우치고 다스리는 자신만의 힘을 추구하는 무인이었다.

한 번도 외부의 힘에 의존하지 않았다.

처용이 판단할 때, 크타니드의 파편은 제어가 불가능한 외부의 힘이었다.

“너 같은 새끼를 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처용의 단호한 말이 울렸음에도.

[어리석은 놈.]

검붉은 갑주 위로 피워 오르는 기류가 마치 처용을 비웃는 듯 흔들리며 소리가 울렸다.

[스스로의 마음조차도 깨닫지 못하는군.]

비웃음이 담긴 말을 마지막으로.

-슈르르…….

파편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돌아갈 시간이 되었나 보네.”

마녀가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네가 무엇을 바꿀지 지켜보지.”

“그게 뭔-.”

처용이 마녀의 말에 대답하려는 때.

-화아아!

의식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과 동시에 눈앞이 환해졌다.

이윽고 새하얀 섬광이 터진 듯 새하얀 눈앞이 점점 흐려지며 까매졌다.

그리고.

“…….”

심상세계를 빠져나온 처용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악몽을 빠져나온 건지 모르겠군.”

주변을 둘러본 처용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레나에게 태룡전의 열쇠를 대기 직전 보았던 환경은 주변이 검은 우주로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있는 장소는 여러 색의 불빛이 반짝이는 새하얀 공간이었다.

마치 검은 우주와 반대되는 하얀 우주와 같은 모습이었다.

“젠장, 아직 악몽 속인가?”

주변을 둘러보던 처용이 무언가를 확인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바로 뒤에 ‘주요 요인’인 레나가 누운 자세로 하얀 우주를 부유하고 있었으니까.

“으윽…….”

마침 정신이 들었는지 레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일어났냐? 꼬마.”

처용이 레나를 보며 넌지시 말하자.

“난데없이 뭔 개소리냐? 역천군주.”

레나가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처용의 말에 거칠게 대답했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말투와 분위기.

“…….”

처용은 그런 레나를 보며 잠시 생각하고는.

“……그렇군.”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악몽의 ‘참가자’는 나 혼자가 아니었지.”

처용의 말이 울리자.

“……너! 너, 너!”

레나, 아니 정신을 차린 마녀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당황한 듯 처용을 보며 소리쳤다.

“보아하니 기억이 나나 본데?”

처용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너 이 새끼 무슨 짓을……!?”

마녀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처용의 말에 거칠게 대답했다.

“무슨 짓을 한 건 내가 아니라 악몽이겠지.”

처용은 마녀의 말에 답함과 동시에.

‘그렇다면…… 조커도?’

악몽 속에 있던 다른 ‘참가자’들을 생각했다.

그중 가장 신경 쓰이는 자는 바로 조커였다.

자신이 마주한 악몽 속 과거에 있던 주요 요인 레나가 참가자였던 마녀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다른 참가자들은? 조커는?

어쩌면 다른 참가자들 역시 처용이 겪은 과거 속을 헤매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처용이 머릿속의 정보를 정리하며 생각할 때.

-쩌저적!

하얀 우주로 가득했던 공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곧 악몽이 완전히 종료됩니다.]

[악몽 포인트를 미리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시스템의 알림이 울리며 악몽이 완전히 끝났음을 알렸다.

“마켓.”

처용은 우선 급하게 마켓을 열고 쓸만한 것들을 일부 챙겨 아공간에 넣었다.

그리고.

-쩌저저저적!!

주변의 환경이 완전히 깨져나가며 처용과 마녀가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끊임없이 떨어지는 듯 어둠 속으로 몇 분 추락하더니.

-화아아아!

곧 단단한 땅이 나타나며 두 발이 자연스럽게 그 위로 착지했다.

“……체르노빌 발전소.”

주변을 둘러본 처용은 지금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곧장 파악했다.

악몽에서 빠져나오자 나타난 장소는 방사능 안개가 사라진 체르노빌 발전소 외부였다.

마녀나 조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홀로 이 자리에 있었다.

처용은 주변을 수색할까 생각했지만.

‘우선…… 돌아간다.’

일단은 성지로 돌아가기로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지도 모르고 그동안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몰랐으니까.

-우우웅.

처용이 태룡전의 열쇠로 게이트를 열어 돌아갔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장소, 엉망이 되어버린 체르노빌 발전소 내부.

-샤삭!

악몽의 참가자 중 하나였던 마녀가 나타났다.

“으윽! 제, 젠장.”

마녀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킨 듯 두통이 심하게 밀려왔다.

“일단……은 돌아온 것 같은데…….”

마녀가 원래대로 돌아온 자신의 모습을 보며 읊조렸다.

정신을 차리니 난데없이 어렸을 때의 모습이 되어있지 않나.

옛날의 기억이 악몽 속에서 구현되질 않나.

재현된 과거 속에서 처용이 날뛰는 기억까지.

여러 정보가 한꺼번에 밀려오며 점점 두통이 심해지고 있었다.

“젠장…… 일단 자리를 피해야.”

마녀가 벽을 짚으며 힘겹게 이동했다.

이런 상황에서 역천군주라도 마주하는 순간, 끝이었다.

그렇게 몸을 피하려던 중.

-척.

누군가가 마녀의 앞에 나타났다.

“……오거.”

마녀의 앞에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오거였다.

“……살아남았나 보군.”

적인 줄 알고 긴장했던 마녀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나.

“크르르르르!”

오거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머리와 몸에는 힘줄이 가득했고 눈을 하얗게 뒤집고 있었다.

무언가를 뜯어먹은 듯, 입에는 피와 살점 조각들이 붙어 있었다.

게다가.

-뚝. 뚝. 뚝.

오거의 오른손에…… 사람의 팔이 들려 있었다.

강제로 잡아 뜯어 뽑아낸 듯 절단면이 거친 흔적이 보였다.

문제는…….

“너! 설마?”

마녀가 그 팔이 누구의 팔인지 단번에 알아보며 경악했다.

상급 마인 중 한 명, 그의 오른팔에 있는 문신과 같은 문신이 보였으니까.

그것을 확인한 마녀는 오거가 무슨 짓을 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너, 금기(禁忌)를……!”

마인은 같은 마인을 죽이고 살해하면, 죽인 마인의 마기를 흡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타인의 마기를 함부로 흡수하면 돌이킬 수 없는 부작용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었다.

과거, 강력한 힘을 갈망하던 상급 마인 중 하나가 다른 마인들을 몰래 죽이고 힘을 흡수한 일이 있었다.

그 일이 반복된 끝에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 상급 마인의 몸이 폭발하며 사망했다.

그 이후 의회주들은 다른 마인을 고의적으로 죽이고 힘을 흡수하는 행위를 금지했다.

같은 동료끼리의 분쟁과 스스로의 자멸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거는…… 악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른 생존자들을 죽이고 그 힘을 흡수한 것이었다.

“네년도 먹어치워 주마!”

마기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오거가 살점이 덕지덕지 붙은 이빨을 드러내며 소리쳤다.

“제, 젠장!”

마녀가 돌진해오는 오거를 막기 위해 급하게 악령들을 소환했다.

-촤아아아!

오거는 마녀가 만들어내는 악령들을 맨손으로 찢어발기고는.

-콱! 으드드!

순식간에 마녀의 목을 잡아챘다.

“크, 크윽! 제, 젠장!”

마녀가 점점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으며 발버둥 쳤다.

빠져나가야 했지만, 두통이 원인인지 마기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콰쾅!

오거가 목을 잡아챈 마녀를 그대로 밀고 나가 벽에 내리쳤다.

“커헉!”

충격으로 피를 토해낸 마녀의 몸이 축 늘어졌다.

“팬텀 위치! 유니크 클래스! 네년의 힘은 이젠 나의 힘이다!”

오거가 잔혹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소리쳤다.

그에게 있어서 상급 마인들 중 가장 거슬리고 마음에 들지 않은 존재가 바로 마녀였다.

애초에 오거는 파키스탄의 악질 범죄자 출신.

그는 상급 마인들 중 ‘여성’, 특히 마녀를 단 한 번도 동료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기회만 된다면 거슬리는 마녀를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은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그 기회가…… 이번에 찾아왔다.

“네년을 뜯어먹고 그 힘을 취하면 의회주도 이길 수-!”

오거가 마녀의 심장을 뽑기 위해 왼손을 세워 내지르려는 순간.

-푹.

오거의 뒷목에 두꺼운 바늘이 달린 주사가 꽂혔다.

-찌이이.

주사 안에 담긴 약물이 오거에게 주입되었고.

-푹푹푹푹푹-!

동시에 여러 개의 주사가 오거의 등, 척추 마디마디에 꽂혔다.

그 주사들은 뒷목에 꽂힌 주사와 다르게 빈 주사기였다.

무언가를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쭈우우!

오거에게서 시커먼 액체와 같은 것들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쿠궁!

오거가 온몸에 힘이 빠진 듯 옆으로 자빠졌다.

동시에 붙잡혀 있던 마녀 역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탁!

쓰러진 오거의 뒤로 하얀 가운을 입은 닥터가 나타났다.

“……감히!”

안경을 들어 올리는 닥터의 표정이 평소와는 다르게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때.

“이야, 저놈이 악몽 속에서 살아나올 줄은 몰랐는데?”

닥터의 뒤로 누군가가 나타났다.

존재감이 있는 듯 없는 듯 밋밋한 얼굴의 로브를 쓴 마인.

그는 놀랍게도 악몽 속에서 온갖 사고를 치던 지미라는 B급 마인이었다.

“지미…… 아니.”

닥터가 뒤에서 나타난 마인의 이름을 말하다 고개를 젓고는.

“잭키.”

지미라는 B급 마인으로 위장한 자의 진짜 이름을 불렀다.

“어이 의사 양반, 아무리 저 둘이 의식이 없다고 해도 조심해야지.”

지미가 닥터를 향해 핀잔하듯 말했다.

“……역천군주는?”

닥터는 그런 지미의 반응을 무시하고 처용에 대해 물었다.

“솔직히……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지미, 아니 잭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고는.

“그놈이 제우스한테 욕을 내뱉을 때는 정말…… 정신이 아찔해지더군. 하하.”

악몽 속에서 마주했던 처용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처용이 악몽 속에서 마주했었던 상처투성이의 검은 머리 소년, 잭키.

그는 처용에게 정체를 숨기고 그를 몰래 지켜본 참가자였다.

“미래를 본 예언자라니 참…….”

잭키의 입에서 헛웃음이 섞인 말이 흘러나왔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아.”

닥터가 잭키의 말에 진지하게 대답하고는.

“그자가 좋은 변수가 될지, 나쁜 변수가 될지…… 하아.”

눈을 감고 처용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냥 이 공주님에게 딱 말할 수 있으면 좋은데 말이야.”

잭키가 닥터의 말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우리가 직접 개입하거나 말할 수 없어.”

닥터가 진지한 목소리로 잭키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게 조커와의 ‘계약’이니까.”

“후-.”

닥터의 말에 잭키에게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이 곰탱이는 어떻게 처리하게?”

잭키가 바닥에 쓰러진 오거를 보며 말하자.

“원래는 죽이려고 했는데…….”

닥터 역시 오거를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역천군주 덕분에 오거가 가진 능력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아냈거든.”

닥터가 오거의 등에 꽂혔던 주사들을 회수하며 말했다.

“혼합된 상급 마인의 마기라…… 그거 쓰기 위험할 텐데?”

“쓰기 나름이지.”

잭키의 말에 닥터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그리고.

“혼합된 마기를 전부 뽑아내고…….”

다시 시선을 내려 오거를 향해 말했다.

“죽는 것보다 더하게 만들어 주면 되겠지.”

안경 속에서 빛나는 닥터의 눈동자가 잔혹하게 일렁였다.

나 홀로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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